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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와 국방/안보 불감증

조선 수군 1차 출동7

 

조선 수군 1차 출동7

 

 

 

합포해전

 

오후 4시경(申時)에 멀지 않은 바다에 왜적의 큰 배 5척이 지나가고 있다고 척후장이 보고하므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쫓아가서 웅천 땅 합포(合浦 : 마산) 앞바다에 이르니 왜적들이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사도 첨사 김완이 왜의 큰 배 1척을 쳐부수고, 방답 첨사 순신이 왜의 큰 배 1척을 쳐부수고, 광양 현감 어영담이 큰 배 1척을 쳐부수고, 그 부통(部統) 소속으로 방답에서 귀양살이하던 전 첨사 이응화(李應華)는 왜의 작은 배 1척을 쳐부수고, 신의 군관 봉사 변존서, 송희립(宋希立), 김효성(金孝誠), 이설(李渫) 등이 힘을 합쳐 활을 쏘아 왜적의 큰 배 1척을 쳐부숨으로써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깨뜨려 불태운 후 밤을 타서 노를 재촉하여 창원 땅 남포(藍浦 : 구면산 남포리) 앞바다에 이르러 진을 치고 밤을 보냈습니다.

<옥포파왜병장> (92. 5. 10)

 

이순신의 해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넓은 경계망과 탐색망을 하루 24시간 가동했다는 점이다. 이순신은 이렇게 입수한 정보들을 분석해서 다양한 해전 프로그램을 짜 나갔다.

 

적의 동향이 파악되는 즉시 각 단위 함대에는 세부 작전지시가 하달되었고, 탐색망에 걸려든 왜선단은 반드시 요격되었다. 이 날도 물샐 틈 없는 정찰활동이 사방에서 이루어졌으며 가덕도 쪽으로 나간 탐색선 하나가 이동 중인 5척의 왜선단을 발견하고는 쏜살같이 달려와서 알렸다.이들 탐색대는 옥포해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수척의 협선에 나누어 타고 해상을 경계하고 있었다. 해전 전에는 또 다른 적 함대의 움직임을 감시했고, 해전 후에는 본대(本隊)가 영등포에서 무사히 밤을 지낼 수 있도록 적의 기습에 대비하고 있던 중이었다.

 

척후장의 보고에 따라 본대는 즉각 추격에 나섰다. 왜선들은 이미 가덕도와 합포 사이 어디쯤을 항진하고 있었는데 시간적으로는 석양이 깃들 무렵이었다.

 

왜군들은 그간의 승리 분위기 속에 마냥 즐겁기만 했다. 춤추고 노래 부르며 무인지경의 형편인 경상도 해안을 분탕질해 가면서 서쪽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날 옥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어디선가 시출(神出)하듯 나타난 대선단이 자신들의 뒤편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까지만 해도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왜군 함대의 출현쯤으로 생각한 왜군들은 더욱 흥을 돋우어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빠른 속도로 접근해 오는 것이 마치 자신들을 뒤쫓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자세히 살펴보니 모든 배들이 누런색의 쌍돛(왜선들은 외돛이 원칙)을 달고 있었다.

 

! 조선 병선이다!

누군가가 내지른 소리에 갑판 위는 졸지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기겁을 한 왜군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넘어지고 부딪히며 달아날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5척의 왜선(180×5 = 900)으로는 상대할 엄두도 내지 못했거니와 적 함대가 숲 속의 범처럼 숨어서 자신들을 노리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겁할 만한 사건이었다.

 

조선 함대는 적을 놓칠세라 군악을 울리며 맹렬한 기세로 따라붙었다. 쫓기는 왜군들은 먼 바다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합포만으로 배를 몰았다. 그리고는 해안에 닿자마자 배를 버리고 허둥지둥 산으로 기어 올라갔고, 산 속 깊이 몸을 숨기고는 조선 함대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다행히도 조선 함대의 선봉 선단은 배만 깨뜨리고 돌아갔다. 왜군들은 그제야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깊은 숨을 몰아쉬던 왜군들은 박살이 나서 불타고 있는 배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배도 없이 지지까지 걸어서 돌아갈 일도 걱정이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적 함대의 출현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모두 얼떨떨하기만 했다.

 

해전이 끝난 때는 밤 9시경, 처음 치른 야간 해전이었다.

 

 

신출귀몰의 함대

 

조선 함대는 곧바로 합포만을 되돌아 나왔다. 역시 상륙한 왜군들을 뒤쫓지 않고 치고 빠지는 전술이었다. 그리고는 힘들여 야간 항해로 남포항까지 나왔다.

 

그러나 그 곳에도 인근에 또 다른 왜군부대나 왜선단이 있을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바다에서 진을 치고 숙영했다.

 

장계에서 바다에서 진을 쳤다는 것은 적의 기습에 대비한 진형을 갖추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하면 이튿날 새벽 일찍 출항하기에도 좋다.이순신은 언제든 적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는, 어느 때건 신속히 기동할 수 있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자 힘썼고 수병들은 거기에 맞춰 끊임없이 조련시켜 나갔다.

 

이 날도 해상에서만 머물렀는데, 육지에서 쉰다면 머물렀던 흔적이 남게 되고 탈영병까지 생길 우려도 있다. 이 역시 다방면을 고려한 이순신 식의 군영 經, 營의 모습이다.

 

합포만으로 쫓겨 올라간 왜군들은 이튿날 아침이 되자 조선 함대의 소재를 파악하느라 분주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조선 함대는 보이지 않았다. 귀몰(鬼沒) 현상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순신의 신출귀몰의 항해술에 대해 조선 함대가 특별히 속력이 빨랐다든지 거북선이 입으로 유황 연기를 내뿜었기 때문에 전체가 보이지 않아 신출귀몰했다는 식의 해석이 많았다.

 

그러나 이순신, 싸울 때는 전 함대의 함형(艦形)을 드러내서 왜군들을 두려워 떨게 했다. 그리고는 바람과 우레같이 몰아쳐서 격파한 다음 곧바로 사라져버렸다. 때문에 이순신 함대가 기동함대로 나서기만 하면 왜군 측에서는 시종일관 그 소재를 파악하지 못했고, 마냥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적진포 해전

 

 
적진포 지형도
 

 

8일 이른 아침에, 진해 땅 고리량(古里梁)에 왜선이 정박해 있다는 기별을 듣고 곧 출발하여 안팎의 섬들을 협공하고 수색하면서 저도(猪島 : 돌산면)를 지나 고성 땅 적진포(赤珍浦 : 통영군 광도면 적덕동)에 이르니 모두 13척의 왜의 큰 배와 중간 배들이 바다 어귀에 정박해 있었습니다.

 

왜인들은 포구 안의 민가들을 분탕질한 뒤에 우리 군사들의 위세를 바라보고는 겁을 내어 산으로 올라가므로, 낙안 군수(申浩)는 그 부통(部統) 소속인 순천 대장 유섭(兪懾)과 힘을 합쳐서 왜의 큰 배 1척을, 같은 부통장(部統將)으로 그 고을에 사는 급제 박영남(朴英男)과 보인 김봉수(金鳳壽) 등이 힘을 합쳐 왜의 큰 배 1척을, 보성 군수(金得光)가 왜의 큰 배 1척을, 방답 첨사가 왜의 큰 배 1척을, 사도 첨사가 왜의 큰 배 1척을, 녹도 만호가 왜의 큰 배 1척을, 그의 부통장으로 귀양살이 중이었던 전 봉사 주몽룡(朱夢龍)이 왜의 중간 배 1척을, 신의 대솔 군관인 전 봉사 이설, 송희립 등이 힘을 합쳐 왜의 큰 배 2척을, 군관 정로위(定虜衛), 이봉수(李鳳壽)가 왜의 큰 배 1척을, 군관 별시위(別侍衛) 송한련(宋漢連)이 왜의 중간 배 1척 등을 총과 대포를 쏘아 맞추어 깨뜨려 불태웠습니다. 그런 후에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아침밥을 먹고 쉬게 하였습니다.

<옥포파왜병장> (92. 5. 10)

 

5 8. 바다에서 진을 치고 하룻밤을 보낸 조선 함대는 이날도 새벽 일찍 이동했다.

장계에 기록된 진해 땅은 오늘의 진해가 아니라 마산에서 통영시로 가는 진동리(鎭東里) 쪽이다. 그 일대를 탐색선(협선과 포작선)들을 앞세워 수색케 했는데, 탐색선들이 적진포에 이르렀을 때 하늘에는 시커먼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왜군들이 아침부터 분탕질에 나섰던 것이다.

 

현장을 목격한 탐색선 하나가 급히 본대로 달려오면서 신기전을 쏘아 알렸다. 이때 이순신은 또 이겼다고 해서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고 산같이 무겁게 하라!는 깃발을 내걸었을 것이다.

 

왜군들이 이렇게 거리낌 없이 분탕질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나름대로 펼쳐둔 경계망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조선 함대는 합포에서 왜선들을 격파한 후 즉시 야간 항해로 남포(藍浦)에 왔고, 이튿날에는 새벽 일찍 움직였으므로 왜군들의 경계망에 포착되지 않았다. 아무튼 100여 척에 달하는 대 함대가 이렇게 신출귀몰하듯 다니고 있었다.

 

그때 적진포 근처에 사는 향화인(向化人 : 적의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나온 사람) 이신동(李信同)이란 자가 우리 수군을 보고는 산꼭대기에서 어린 아이를 등에 업고 울부짖으면서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작은 배로 실어 와서 신이 직접 왜적의 소행(所行)을 물어보니, 왜적들이 어제 이 포구로 와서 민가에서 재물을 빼앗아 소와 말에 싣고 가서 자기들 배에 나누어 실었습니다. 그리고 초저녁에 배를 바다에 띄워 놓고는 소를 잡아 술을 마시고 노래하며 피리도 불면서 날이 새도록 그치지 않았는데, 가만히 그 노래 가락을 들어보니 모두 우리나라의 노래 가락이었습니다. 오늘 이른 아침에 그 반은 남아서 배를 지키고 반은 뭍으로 올라가 고성으로 향해 갔는데, 소인의 늙은 어미와 처자들은 적을 보고 숨을 때 그만 놓쳐버려서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라고 슬피 울면서 호소하였는데, 신은 그 모습이 불쌍하고 또 다시 포로가 될까봐 염려되어 데려 가려고 했으나, 그는 가지 어미와 처자를 찾아보겠다고 하면서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같이 있던 장수와 군사들이 이 말을 듣고는 더욱 통분해 하면서 서로 돌아보고 기운을 돋우어 한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곧 천성, 가덕, 부산 등지로 향하여 왜적의 배들을 섬멸해버릴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왜적의 배들이 대어 있는 곳은 그 지형이 좁고 바다물이 얕아서 판옥선 같은 큰 배로는 싸우기가 매우 어렵고, 본도 우수사 이억기가 아직 오지 않아서 좌수영의 군사들만으로 적진 속으로 쳐들어가기에는 형세가 매우 외롭고 위태로우므로 원균과 마주 앉아 좋은 계책을 내어 국가의 치욕을 씻고자 하였습니다.

<옥포파왜병장> (92. 5. 10)

 

 

새로운 국면(局面) 선조의 피난 소식

 

그때 마침 본 도의 도사(都事) 최철견(崔鐵堅)의 통첩이 뜻밖에 도착하여 비로소 임금의 행차가 관서(關西)로 피난가신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놀랍고 분통함이 그지없어서 온 간장이 다 찢어질 정도로 하루 종일 서로 붙잡고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그래서 부득이 각각 돌아가기로 하여 9정오 때 모든 배들을 거느리고 무사히 본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에게, 배들을 더 한층 잘 잡도리하여 바다 어귀에서 사변에 대비하라고 엄히 지시한 후 진을 파하였습니다.

<옥포파왜병장> (92. 5. 10)

 

5 8. 적진포해전을 끝내고 늦은 아침을 먹고 있는데 전라도사 최철견이 보낸 공문이 이순신의 군영에 도착했다(감사 이광은 육군을 거느리고 공주까지 북상했고, 이에 최철견이 공문을 보냈다).신립이 지키던 충주 방어선마저 무너졌기로 전하께서는 북쪽으로 파천(播遷)하셨다는 내용이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순간이었다. 전장에 나와 있는 자들에게는 자결을 한다고 해도 씻을 수 없는 불충의 순간이기도 했다. 모두가 통곡을 했다.

 

임금은 하늘이며 어버이였다. 그 어버이가 2백년을 지켜온 수도를 버리고 피난을 갔다는 것은 부모를 잃은 슬픔과도 같았다.승리의 여세를 몰아 왜적의 무리들을 남김없이 섬멸하여 북상하는 적의 발길을 돌려놓고자 다짐했건만 이제 계획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 상태로는 정상적인 전투 수행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전라감사를 비롯한 도내 책임자들과도 향후의 계획을 시급히 논의해야 했다.한성이 떨어졌고 임금이 피난을 떠났다는 사실은 전쟁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이제 왜적의 세력은 전국에 창궐할 것이며, 그 세력은 쉽게 꺾이지 않을 것이라는 게 이순신의 생각이었다.

 

곧 귀항(歸航)이 결정되었다.

 


 

 

 

                    12. 진격의 깃발 [01:25]

                            /작곡 : 원일

                            /편곡 : 김진근

                            /음악감독 : 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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