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수군 1차 출동9
<옥포파왜병장(玉浦波倭兵狀)>에 담긴 그 밖의 기록들 순천 대장(代將) 유섭(兪?)이 도로 빼앗아 온 우리나라 계집아이는 나이 겨우 4, 5세이니 그 부모나 살던 곳 등을 전혀 알 길이 없었고, 보성 군수 김득광이 도로 빼앗아온 계집아이 1명은 나이가 좀 들었는데 머리를 깎아서 왜인처럼 되었습니다. 임진년 5월 7일 문초해 보았더니, 동래 응암리(鷹巖里 : 동래읍 오장리) 근방에 사는 백성 윤백련(尹百連)으로 나이는 14살인데, 모월 모일 모처에서 왜적을 만나 모모(某某) 사람들과 함께 사로잡혔다가 그날(5월 7일) 접전할 때(옥포해전 때) 도로 붙잡혀 나오게 된 연유와 왜적들의 하던 온갖 짓이며 자기의 근본과 신분 등을 모두 진술했습니다. 그 진술한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아비는 다대포 수군인 윤곤절(尹昆節)인데 왜란 통에 지금 그 생사를 알 수 없고, 어미는 평민의 딸로서 이름은 모론(毛論)인데 지금은 죽었습니다. 친조부모와 외조부모는 다 모르고, 기장(機張 : 동래군 기장면)에 사는 신선(新選 : 초급 군관의 직명)
날짜는 기억이 안 나는데, 지난 4월 왜적들이 부산포에 이르러 정박하자 주인 늙은 아비와 친척들이 마침 이곳으로 피난 왔다가 우연히 길에서 만나 그 고을 경계에 있는 운봉산(雲峯山 : 동래군 철마면) 속에 숨어서 8, 9일 동안 지냈는데, 왜적들이 무수히 쳐들어와서 소인과 오라비 복룡(卜龍) 등이 먼저 사로잡혔습니다. 해가 질 무렵 부산성에 이르러 밤을 지내고 나니, 오라비 복룡은 간 곳을 알 수 없었고, 소인은 배 밑창에 넣어두고는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는데, 하루는 적선 30여 척이 김해부(金海府)로 향해 가더니 절반 넘게 상륙하여 도적으로 변하여 남아서 도적질을 5, 6일 한 뒤인 (5월) 6일 오전 10시경(巳時) 일제히 출발하여 율포(栗浦 : 거제도 장목면 대금리)에 와서 밤을 지내고, 7일 새벽에 그곳으로부터 옥포 앞바다로 와서 정박했는데, 그날 접전할 때 왜적의 배 안으로 우리나라의 철환과 장편전이 비 오듯 쏟아져서 맞는 놈은 엎어져 피를 질질 흘렸으며, 왜인들은 아우성치고 거꾸러지면서 어찌할 줄을 몰라서 혹은 물로 뛰어들고 혹은 산으로 올랐는데, 소인은 못난 사람이어서 배 밑창에만 오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일들은 알 수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옥포파왜병장> ( 14세 소녀의 증언을 기록한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에는 전쟁을 당한 한 소녀, 한 가정, 한 지역의 상황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윤백련은 신선(新選) ‘옥포파왜병장’은 오늘날 옥포해전에 관해서 전해지고 있는 한, 일 양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자료이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윤백련과 다른 계집아이는 순천, 보성 등의 관리들에게 다시 내주어 각별히 보호해주라고 하였습?. 흉악한 놈들의 해독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러 벌써 많은 살육과 약탈 행위가 자행되어 이 지역 백성들로서 온전한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신이 이번에 해안을 따라서 두루 돌아보니 지나는 산골마다 피난민이 없는 데가 없었습니다. 신의 배를 바라보고는 아이든 늙은이든 메고 지고 서로 이끌면서 슬피 울부짖는 것이 다시 살 길이나 얻은 것처럼 했고, 왜적의 종적을 가르쳐 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보기에 참담하여 모두 다 배에 실어 가고 싶었으나,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을 뿐 아니라, 싸우러 가는 배에 사람들과 물건들을 가득 싣고서는 운행하기 어려운 폐단이 있을까 염려되어 “돌아갈 때에 데리고 갈 테니 각자 잘 숨어서 적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고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라”고 타이른 뒤에 적을 쫓아서 멀리 떠났습니다. 그랬는데 갑자기 전하께서 서쪽으로 행차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서 노를 재촉하여 돌아왔으나, 불쌍하고 가련한 마음은 여전히 잊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피난 떠난지 오래되어 이미 가진 양식도 다 떨어져 꼭 굶어 죽을 것 같았으므로, 그 도의 겸관찰사(兼觀察使 : 관찰사 겸 감사)에게 마땅히 그들을 찾아내어 구호해 주어야 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공문을 띄웠습니다. <옥포파왜병장> (
윤 소녀가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그러나 왜선들은 속력이 빨랐다 그런데 신이 거느리고 있는 여러 장수와 권원들과 군사들로서 분하여 앞을 다투어 적에게 달려들지 않는 자가 없었으므로 함께 크게 이길 것을 기약하면서 전후로 40여 척의 왜선을 붙태웠으나, 왜적의 머리를 벤 것은 단지 이 둘뿐입니다. 신이 적을 섬멸하고 싶은 마음을 다 풀지 못하여 통분한 마음 더 한 층 심하지만, 접전할 당시를 헤아려 보면 또한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적선은 빨르기가 날아가는 듯한데, 우리 수군을 보고 미쳐 도망치지 못할 것 같으면 매번 받 기슭으로 붙어서는 고기 두름 역은 듯이 배를 저어 가다가 형세가 궁해지면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가버립니다. 그래서 이번 길에 모조리 다 잡지 못했는데, 간담이 찢어질 것 같아서 칼을 어루만지며 탄식하였습니다.
왜적의 배에 실렸던 왜적의 물건들은 모조리 찾아내어 다섯 칸 곳간에 채우고도 남았습니다. 나머지 사소한 물건들은 전부 다 적지 못하고 그 중에서 전쟁에 쓰일 만한 것들만 골라서 따로 그 종류별로 모아 놓았으며, 김해부 소속 관리로 하여금 장부를 만들어 부대별로 노획한 각종 활과 화살 등을 모두 차례대로 기록하여 책자를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왜선에 실렸던 우리가 먹을 만한 쌀 3백여 섬은 여러 전선의 배곯는 격군들과 사부들의 양식으로 나누어주고, 의복과 무명 등의 물건들도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적을 쳐부순 후 전리품을 바라는 마음을 자극하였습니다.
그리고 왜인의 붉고 검은 철갑과 여러 가지 쇠로 만든 투구와 철광대(鐵廣大), 금관, 금 깃(金羽), 금 삽, 깃옷(羽衣), 깃 빗자루, 소라 고동 등과 같이 기이한 모양과 사치를 다해 꾸민 것들은 마치 귀신같고 짐승 같아서 보는 사람들로서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큰 쇠못과 사색 등과 같은 성을 공격하는 기계와 같은 물건들도 역시 몹시 괴상하였습니다.군사용으로 쓰이는 물건들 중에 가장 요긴한 것 한 가지씩을 뽑아서 봉해 올립니다. 그 중에는 철갑, 총통 등의 물건도 들어 있으며 낙안 군수 신호(申浩)가 벤 왜놈의 머리 하나는 왼쪽 귀를 도려서 궤에 넣고 봉한 것으로서 접전할 때 공로를 세운 신의 군관 송한련(宋漢連)과 진무 <옥포파왜병장> ( ‘적선은 빠르기가 날아가는 듯하다’고 강조했는데, 왜선은 판자가 얇아서 날렵했다. 하지만 충돌전에는 약했다. 반면에 조선의 병선은 두꺼운 판자에 굵은 기둥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둔중했다. 그래서 망망대해에서는 왜선을 잡기가 어려웠고, 효과적인 해전을 위해서는 몰래 포구에 정박해 있는 왜선단에 접근, 학익진으로 탈출을 봉쇄한 후 공격해야 했음을 알 수 있다.
‘귀신같고 짐승같이 꾸몄다’는 것은 백병전 때 자신의 눈동자의 움직임을 감추어 칼싸움에 유리하게 하고 얼굴을 보호하는 가면이나 장식물들을 설명한 것이다.
낙안군수 신호는 머리 하나를 베었고 큰 배 1척을 깨뜨렸으며, 왜장의 칼, 갑옷, 의관 등을 노획했다. 아군 병사에게 활을 쏜 원균의 부하 접전할 때 순천 대장선(代將船)의 사부이자 순천부의 정병(正兵)인 이선지(李先枝)가 왼쪽 팔 한군데 화살을 맞아 조금 상한 것밖에는 부상당한 군사가 없었습니다.우수사 원균은 단지 3척의 전선만을 거느렸는데, 신의 여러 장수들이 잡은 왜적의 배를 심지어 활을 쏘아대면서까지 빼앗으려 하는 통에 두 사람이 화살에 맞아 부상을 당했습니다. 주장(主將)으로서 부하 단속을 하지 못함이 이 보다 더 심한 경우는 없다고 할 것입니다.그리고 또 같은 도 소속 거제 현령 <옥포파왜병장> ( ‘단지 3척의 전선만을 거느렸는데’라고 했는데 5월 5일 ? 6일에 양쪽 함대가 만날 때는 판옥선 4척이었다. 그 후에 병사와 격군을 갖추다 보니 3척만 참전한 것이 아닐까?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인 마당에 원균 휘하의 장수들은 아군 병사들에게 활까지 쏘아가면서 적의 수급(首級)을 빼앗으려 했다니 참으로 놀랍다. 정작 적과의 싸움에서는 1명 밖에 부상당하지 않았는데 이런 과정에서 2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선조실록>을 보면, 거제현령 관아 經, 營과 군영 經, 營이 따로 놀았기 때문에 원균의 가배량 본영조차도 행정적 지원을 받지 못했다. 반면에 이순신의 수전맹(水戰盲), 육전맹(陸戰盲)의 조정 문신들 그리고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그간 적을 막는 계책에 있어서 수군이 대함대를 이루어 나아가고 물러나는게 아니라 오로지 뭍에서의 싸움으로 성을 지키기에만 힘썼기 때문에 나라의 수백 년 내려온 기업(基業)이 하루아침에 적의 소굴로 변한 줄 압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목이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적이 만약 배를 타고 본도로 침범해 온다면 신이 나가서 해전으로써 죽기를 작정하고 막아내겠지만,…… <옥포파왜병장> (
세종대왕 때는 수군을 육성해서 대마도를 정벌했고, 거제도 등 남해안에는 세종 때 쌓은 성들의 유적이 오늘에까지 전해져 온다. 하지만 선조 무렵에는 조정이 ‘수전 맹(盲)’, ‘해운 맹(盲)’에 빠져 있었고, 때문에 부산포 앞바다, 한강, 임진강, 대동강에서 막을 수 있었던 전쟁의 기회를 놓지고 말았다. 만약 육로로 침범해 온다면 본 도의 장수들과 군사들은 전마(戰馬) 하나 없으니 막아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순천, 돌산도, 백야 곶, 흥양, 도양(道陽)의 목장에는 전쟁에 쓸 만한 말들이 많으니 넉넉히 뽑아내서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어 살찌게 먹이고 길들여서 전쟁터에서 쓴다면 이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이 일은 신이 멋대로 건의할 일이 아니지만 사태가 위급하므로 겸관찰사 이광(李珖)에게 감목관(監牧官)을 정하여 보내고 말 몰아내는 군사는 각 진과 포구의 분부군(奔赴軍)으로 충당하되 하루나 이틀의 기한을 정하여 잡아내어 훈련시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는 내용으로 공문을 띄웠습니다. <옥포파왜병장> ( 조선왕조 시대에는 조정에서 각 섬에 목장을 두어 말을 키우게 했다. 그런데 전쟁이 터졌는데도 말들은 목장에 방치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말들이 방치되고 있을 때 신립은 탄금대로 내려가면서 경기, 충청도의 역마(驛馬)들을 모조리 끌어갔고, 이에 경상, 전라, 충청, 경기도의 파발조직이 무너졌으며 이로 인한 조정과 지방의 당황과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이 역시 군마 관리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 육전맹(盲)의 조정 문신들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충무공 항해술의 특징
첫째, 왜군들의 눈에 띄지 않게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둘째, 송미포에서 하루를 쉰다면 격군들의 피로는 쉽게 풀릴 것이므로 이튿날 남풍을 업고 순풍을 받으면서 옥포와 가덕도(加德島) 쪽으로 접근하고자 했었던 것 같다. 셋째, 견내량(見乃梁)을 통과해서 가덕도 쪽으로 나아가려면 견내량이 문제였다. 소수의 왜선단이라도 잠복해 있었다면 조선 함대는 통과하기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조선 함대의 기습전이 사전에 노출될 수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견내량 해협을 이용하지 않았다. 대신 여수로 귀항할 때에는 견내량을 통해서 왔다. 거리도 가깝고
중간 기착지격인 당포항을 지나서 이번에는 직진 코스로 미조항(彌助項)을 지나왔다. 역시 이순신의 신출귀몰한 항해술이다.
12. 진격의 깃발 [01:25] /작곡 : 원일 /편곡 : 김진근 /음악감독 : 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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