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포에서 적을 쳐부순 장계
<옥포파왜병장(玉浦破倭兵狀)>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
전날 경상우수사(元均)와 협력하여 적의 배를 쳐부수라는 분부를 받고, 지난 5월 4일 새벽 2시경(丑時)에 출발하면서 전라우도 수사 이억기(李億祺)에게는 수군을 거느리고 신의 뒤를 따라오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는데, 이에 대하여는 이미 보고를 드렸습니다.그리고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수군 여러 장수들이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을 거느리고 떠나
5일 새벽에 출발하여 전날 두 도의 수군들이 서로 모이기로 약속한 곳인 당포(唐浦) 앞바다에 이르니, 경상우수사 원균이 약속한 곳에 없으므로 신이 거느린 가볍고 빠른 배를 보내어 당포로 빨리 오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습니다.
6일 아침 8시경(辰時)에 원균이
그때 경상우도의 장수들인 남해 현령
(옥포 해전)
7일 새벽 다 같이 출발하여 적선들이 정박해 있는 천성(天城)과 가덕(加德)을 향해 갔는데
큰 배는 사방으로 온갖 무늬를 그린 비단휘장을 둘러쳤고, 그 위장 주변으로는 대나무 막대기를 꽂아 놓았으며, 붉은색과 흰색의 작은 깃발들을 어지럽게 매달아 놓았는데, 깃발 모양은 마치 펄럭이는 천이나 매달린 등(燈) 모양이었는데 모두 무늬 있는 비단으로 만들었으며, 바람 따라 펄럭거려서 바라보니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왜적의 무리들이 그 포구로 들어가서 분탕질을 쳐서 연기가 온 산에 가득 찼는데, 우리 수군의 배를 돌아보더니 엎치락뒤치락 하며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뿔뿔이 흩어져 뛰어가서 배에 타고는 아우성을 치며 노를 재촉하여 바다 가운데로는 나오지 못하는 기슭을 타고 배를 저어 가는데, 6척이 선봉에 서서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거느린 여러 장수들이 한마음으로 분발하여 모두 죽을 힘을 다하니 또 배 안에 있던 관리와 군사들 또한 그 뜻을 본받아 서로 격려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공을 세우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양쪽으로 에워싸고 대들면서 대포를 놓고 화살을 쏘아대기를 마치 바람처럼 천둥처럼 하자, 적들도 조총과 화살을 쏘아대다가 기운이 다 떨어지자 배에 싣고 있던 물건들은 바다에 내던지기에 정신이 없었는데, 화살에 맞은 놈은 부지기수였고,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헤엄쳐서 달아나는 놈도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적들은 일거에 무너져 흩어져서 바위 언덕으로 기어 올라갔는데, 뒤떨어질까 겁내는 것 같았습니다.
좌부장(左部將)인 낙안 군수 신호(申浩)는 왜적의 큰 배 1척을 쳐부수고 머리 하나를 베었는데 배 안에 있던 칼, 갑옷, 의관 등은 모두 왜장의 물건인 듯했습니다. 우부장인 보성 군수 김득과(金得光)은 왜적의 큰 배 1척을 쳐부수고 우리나라 포로 1명을 도로 빼앗아 왔으며, 전부장(前部將)인 흥양 현감 배흥립(裵興立)은 왜의 큰 배 2척을 쳐부수었고, 중부장인 광양 현감 어영담(魚泳潭)은 왜적의 중간 배 2척과 작은 배 2척을 쳐부수었고, 중위장(中衛將)인 방답 첨사
모두 합하여 왜적의 배 26척을 총통으로 쏘아 맞혀 깨뜨리고 불태웠는데, 온 바다에서 불꽃과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습니다.
(합포해전)
산으로 올라간 적도들은 숲 속으로 기어들어가 기가 꺾이지 않은 놈이 없었으므로, 신은 여러 배에서 용맹한 사부(射夫)들을 뽑아서 산에 올라간 왜적들을 쫓아가 잡도록 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거제도는 섬 전체가 산세가 험하고 수목이 울창하여 발붙이기가 어려울 뿐더러, 당시 우리는 적의 소굴 안에 있는데다 배에 사부조차 없으면 혹시 뒤로 포위당할 염려도 있습니다. 그래서 날도 이미 저물어 가므로 뜻대로 하지 못하고 영등포 앞바다로 물러나와 머물면서, 군사들을 시켜서 나무도 하고 물도 길어오게 하여 밥을 지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후 4시경(申時)에 멀지 않은 바다에 왜적의 큰 배 5척이 지나가고 있다는 척후장의 보고가 있었으므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쫓아가서 웅천 땅 합포(合浦 : 마산) 앞바다에 이르니, 왜적들은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사도 첨사 김완이 왜적의 큰 배 1척을 깨뜨리고, 방답 첨사
(적진포 해전)
8일 이른 아침에, 진해 땅 고리량(古里梁)에 왜적의 배가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고 곧 출발하여 안팎의 섬들을 협공하고 수색하면서 저도(猪島)를 지나 고성 땅 적진포(赤珍浦 : 통영군 광도면 적덕동)에 이르니 모두 13척의 왜적의 큰 배와 중간 배들이 바다 어귀에 정박해 있었습니다.
왜적들은 포구 안의 민가들을 분탕질한 뒤에 우리 군사들의 위세를 바라보고는 겁을 내어 산으로 올라가므로, 낙안 군수(申浩)는 그 부통(部統) 소속인 순천 대장 유섭(兪懾)과 힘을 합쳐 왜적의 큰 배 1척을, 같은 부통장(部統將)으로 그 고을에 사는 급제
그때 적진포 근처에 사는 향화인(向化人 : 왜적에게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사람) 이신동(李信同)이란 자가 우리 수군을 보고는 산꼭대기에서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울부짖으면서 내려왔습니다. 그러서 작은 배로 실어 와서 신이 직접 왜적의 소행(所行)을 물어보니, “왜적들이 어제 이 포구로 와서 민가에서 재물을 빼앗아 소와 말에 싣고 가서 자기들 배에 나누어 실었습니다. 그리고 초저녁에 배를 바다에 띄워 놓고는 소를 잡아 술을 마시고 노래하며 피리도 불면서 날이 새도록 그치지 않았는데, 가만히 그 노랫가락을 들어보니 모두 우리나라의 노랫가락이었습니다. 오늘 이른 아침에 그 반은 남아서 배를 지키고 반은 뭍으로 올라가 고성으로 향해 갔는데, 소인의 늙은 어미와 처자들은 적을 보고 숨을 때 그만 놓쳐버려서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라고 하며 슬피 울면서 호소하였는데, 신은 그 모습이 불쌍하고 또 다시 포로가 될까봐 염려되어 데려 가려고 했으나, 그는 자기 어미와 처자를 찾아 보겠다고 하면서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같이 있던 장수와 군사들이 이 말을 듣고는 더욱 통분해 하면서 서로 돌아보고 기운을 내어 한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곧 천성, 가덕, 부산 등지로 향하여 왜적의 배들을 섬멸해버릴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왜적의 배들이 대어 있는 곳은 그 지형이 좁고 바다물이 얕아서 판옥선 같은 큰 배로는 싸우기가 매우 어렵고, 본도 우수사 이억기가 아직 오지 않아서
(전해져온 임금의 파천소식)
그때 마침 본 도 도사(都事) 최철견(崔鐵堅)의 통첩이 뜻밖에 도착하여 비로소 임금의 어가(御駕)가 관서(關西)로 피난가신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놀랍고 분통함이 그지없어서 온 간장이 다 �어질 정도로 하루 종일 붙잡고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그래서 부득이 각각 돌아가기로 하여 9일
(생환포로(向化人) 윤백련의 진술)
순천 대장(代將) 유섭(兪懾)이 도로 빼앗아 온 우리나라 계집아이는 겨우 나이 4, 5세이니 그 부모나 살던 곳 등을 전혀 알 길이 없었고, 보성군수 김득광이 도로 빼앗아온 계집아이 1명은 나이가 좀 들었는데 머리를 깍아서 왜인처럼 되었습니다. 임진년 5월 7일에 신문해 보았더니, 동래 응암리(鷹巖里 : 동래읍 오장리) 근방에 사는 백성 윤백련(尹百連)으로 나이는 14살인데, 모월 모일 모처에서 왜적을 만나 모모 사람들과 함께 사로잡혔다가 그날(5월 7일) 접전할 때(옥포해전 때) 도로 붙잡혀 나오게 된 연유와 왜적들의 하던 온갖 짓이며 자기의 근본과 신분 등을 모두 말했습니다.그 신문한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아비는 다대포 수군인 윤곤절(尹昆節)인데 왜란 통에 지금은 그 생사를 알 수 없고, 어미는 평민으로 이름은 모론(毛論)인데 지금은 죽었습니다. 친조부모와 외조부모는 다 모릅니다. 기장(機張 : 동래군 기장면)에 사는 신선(新選 : 초급 군관의 직명)
날짜는 기억이 안 나는데 지난 4월 왜적들이 부산포에 이르러 정박하자 주인
늙은 아비와 친척들이 마침 이곳으로 피난 왔다가 우연히 길에서 만나 그 고을 경계에 있는 운봉산(雲峯山 : 동래군 철마면) 속에 숨어서 8, 9일 동안 지냈는데, 왜적들이 무수히 쳐들어와서 소인과 오라비 복룡(卜龍)등이 먼저 사로잡혔습니다. 해가 질 무렵 부산성 안에 이르러 밤을 지내고 나니, 오라비 복룡은 간 곳을 알 수 없었고, 소인은 배 밑창에 넣어두고는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게 했습니다.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는데, 하루는 적선 30여 척이 김해부(金海府)로 향해 가더니 절반 넘게 상륙하여 도적으로 변하여 그곳에서 도적질을 5, 6일 한 뒤 (5월) 6일 상오 10시경(巳時)에 일제히 출발하여 율포(栗浦 : 거제도 장목면 대금리)에 와서 밤을 지내고, 7일 새벽에 그곳에서 옥포 앞바다로 와서 정박했는데, 그날 접전할 때 왜적의 배 안으로 우리나라의 철환과 장편전이 비 오듯 쏟아져서 맞는 놈은 엎어져 피를 질질 흘렸으며, 왜인들은 아우성치고 거꾸러지면서 어찌할 줄 몰라서 혹은 물로 뛰어들고 혹은 산으로 올랐는데, 소인은 못난 사람이어서 배 밑창에만 오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일들은 알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윤백련과 다른 계집아이는 순천, 보성 등의 관리들에게 각별히 보호해주라고 다시 내주었습니다. 흉악한 놈들의 해독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러 벌써 많은 살육과 약탈 행위가 자행되어 이 지역 백성들로서 온전한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신이 이번에 해안을 따라서 두루 돌아보니 지나는 산골마다 피난민이 없는 데가 없었습니다.
신의 배를 바라보고는 아이든 늙은이든 메고 지고 서로 이끌면서 슬피 울부짖는 것이 다시 살길이나 얻은 것처럼 했고, 적의 종적을 가르쳐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보기에 참담하여 모두 다 배에 실어 오고 싶었으나,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싸우러 가는 배에 사람들과 물건들을 가득 싣고서는 운행하기 어려운 폐단이 있을까 염려되어 “돌아갈 때에 데리고 갈 테니 각자 잘 숨어서 적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여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라.”고 타이른 뒤에 적을 쫓아서 멀리떠났습니다.
그랬는데 갑자기 전하께서 서쪽으로 행차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서 노를 재촉하여 돌아왔으나, 불쌍하고 가련한 마음은 여전히 잊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피난 떠난 지 오래되어 이미 가진 양식도 틀림없이 다 떨어져서 꼭 굶어 죽을 것만 같았으므로, 그 도의 겸관찰사(兼觀察使 : 관찰사 겸 감사)에게 마땅히 그들을 찾아내서 구호해 주어야 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공문을 띄웠습니다.
대개 신이 거느리고 있는 여러 장수와 관원들과 군사들은 분격하여 앞을 다투어 적에게 달려들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함께 크게 이길 것을 기약하면서 전후로 40여 척의 왜선을 불태웠으나, 왜적의 머리를 벤 것은 단지 이 둘뿐이어서 신이 적을 섬멸하고 싶은 마음을 다 풀지 못하여 통분한 마음 더욱 심하지만, 접전할 당시 헤아려 보면 또한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적선은 빠르기가 날아가는 듯한데, 우리 수군을 보고 미처 도망치지 못할 것 같으면 매번 바다 기슭으로 붙어서는 고기 두름 역은 듯이 배를 저어 가다가 형세가 궁해지면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가버립니다. 그래서 이번 길에 모조리 다 잡지 못했는데, 간담이 찢어질 것 같아서 칼을 어루만지며 탄식하였습니다.
(왜선에서 노획한 왜인의 물건들)
왜적의 배에 실렸던 왜적의 물건들은 모조리 찾아내어 5칸 곳간에 채우고도 남았습니다. 나머지 사소한 물건들은 전부 다 적지 못하고 그 중에서 전쟁에 쓰일 만한 것들만 골라서 따로 그 종류별로 모아 놓았으며, 김해부 소속 관리로 하여금 장부를 만들어 부대별로 노획한 각종 활과 화살 등을 모두 차례대로 기록하여 책자로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왜선에 실렸던 우리가 먹을 만한 쌀 3백여 섬은 여러 전선의 배고픈 격군들과 사부들의 양식으로 나누어주고, 의복과 무명 등의 물건들도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어서 적을 쳐부순 후 전리품을 바라는 마음을 자극하였습니다.그리고 왜인의 붉고 검은 철갑과 여러 가지 쇠로 만든 투구와 철광대(鐵廣大), 금관, 금 깃(金羽), 소라 고동 등과 같이 기이한 모양과 사치를 다해 꾸민 것들은 마치 귀신 같고 짐승 같아서 보는 사람들로서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큰 쇠못(鐵釘)과 사색(沙索) 등과 같은 성을 깨뜨리는 기계와 같은 물건들도 역시 몹시 괴상하였습니다.
군사용으로 사용되는 물건들 가운데 가장 요긴한 것 한 가지씩을 뽑아서 봉해 올립니다. 그 중에는 철갑, 총통 등의 물건도 들어 있으며, 낙안 군수 신호(申浩)가 벤 왜의 머리 하나는 왼쪽 귀를 도려내어 궤에 넣고 봉해서 접전할 때 공로를 세운 신의 군관 송한련과 진무
(원균과 그 부하들의 행태)
접전할 때 순천 대장선(代將船)의 사부(射夫)이자 순천부의 정병(正兵)인 이선지(李先枝)가 왼쪽 팔 한군데에 화살을 맞아 조금 상한 것 밖에는 부상당한 군사가 없었습니다.
우수사 원균은 단지 3척의 수군만을 거느렸는데, 신의 여러 장수들이 잡은 왜적의 배를 심지어 활을 쏘아대면서까지 빼앗으려 하였는데 통에 두 사람이 화살을 맞아 부상을 당했습니다. 주장(主將)으로서 부하 단속을 하지 못함이 이보다 더 심한 경우는 없다고 할 것입니다.그리고 또 같은 도 소속 거제 현령
그리고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그간 적을 막는 계책에 있어서 수군이 대 함대를 이루어 나아가고 물러나는 게 아니라 오로지 뭍에서의 싸움만으로 성을 지키기에 힘썼기 때문에 나라의 수 백 년 내려온 기업(基業)이 하루아침에 적의 소굴로 변할 줄 압니다.생각이 이에 미치니 목이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적이 만일 배를 타고 본도로 침범해 온다면 나가서 수전으로써 죽기를 작정하고 막아내겠지만, 만약 육로로 침범해 온다면 본도의 장수들과 군사들은 전마(戰馬) 하나 없으니 막아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순천, 돌산도, 백야 곶, 흥양, 도양(道陽)의 목장에는 전쟁에 쓸 만한 말들이 많으니 넉넉히 뽑아내어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고 살찌게 먹이고 길들여서 전쟁터에서 쓴다면 이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은 신이 멋대로 건의 할 일이 아니지만 사태가 위급하므로 겸관찰사 이광(李珖)에게 감목관(監牧官)을 정하여 보내고 말 몰아내는 군사는 각 진과 포구의 분부군(奔赴軍)으로 충당하되 하루나 이틀의 기한을 정하여 잡아내어 훈련시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는 내용으로 공문을 띄웠습니다.
<옥포파왜병장(玉浦波倭兵狀)> (
제1차 출동은 5월 4일 새벽 2시경에
이 전투에서
<옥포파왜병장>에서의 설명에 따라 이때의 이순신의 출동 과정을 지도상에 나타낸 것이 다음의 지도(제1차 출동경로)이며, 그 다음으로 적진포 해전장의 상세도를 제시하였다.
이순신의 이 장계가 의주로 피난 가 있던 조정에 처음으로 보고된 날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선조실록>에는 6월 21일자에 그 내용이 요약되어 있다.일부 소설들과 연속극에서는,
…… 또 영등포에서 싸워 배를 통째로 붙잡고 적을 섬멸하였다. 이로부터 군사의 위력이 크게 떨쳤다.
싸움에서 이긴 보고가 올라가니
그러나 <선조수정실록>[1]의 이 기사는 임진왜란이 종결된 후에, 즉
왜냐하면,
뿐만 아니라, 여태까지 하루에 몇 차례씩이나 시각을 지체하지 않고 신속하게 장계를 올려 왔던
뿐만 아니라, 승첩 장계를 올리는 일은 곧 전투에 참여한 휘하 모든 장수들과 사병들에게 전공에 합당한 표창을 하기 위한 첫 단계 절차이기도 하다.당시 전투에서 승리한 공로가 전적으로 지난 1년 동안 고된 훈련과 전쟁 준비에 온 힘을 다해온 전라좌수영 군사들에게 있음이 너무나도 명백한 상황에서, 원균과 연명 장계를 하게 되면 영남우수영 소속 장수들과 전라좌수영 소속 장수들이 동일한 전공을 올린 것처럼 허위 보고를 해야 될 것이다.그리하여 동일한 표창을 받게 된다면,
원균으로서야 연명 장계를 올림으로써
그래서 아마도 자신의 그런 의중을 넌지시 비치자
다음으로, 첫 번째 해전에서 승리한 소식을 구도로 전해들은 조정에서의 반응을 <선조실록>에서 보자.
승첩한
전라좌수사
<선조실록> (
(임금의 이 지시에 따라) 조정에서는
<선조수정실록> (1592. 5)
이때 동래는 벌써 함락되도 적은 곧장 밀고 쳐들어 왔는데, 가는 곳 마다 앞을 막는 자가 없었다. 임금의 행차는 이미 서도로 들어갔는데 황해도 이남에서 동래에 이르기가지는 들리는 것이라고는 패했다는 보고뿐이고 다른 소식은 전혀 없었다.경상우수사 원균은 전라좌수사
이튿날 다시 큰 싸움을 벌이기로 약속하였으나 임금의 행차가 서도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여러 장수들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서로 모여 통곡하고 9일에 각기 본영으로 돌아갔다.
<선조실록> (
왜란이 터진 이후 최초로 보고된 통쾌한 승첩의 장계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고 난 후의 임금 선조와 신하들의 반응을 전혀 기록해 놓지 않고 있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선조실록>은 이 장계를 한 달 후에 있은 <당포파왜병장>과 두 달 후에 있었던 <견내량파왜병장 : 한산도 대첩>까지 하나로 묶어서 마치 세 개의 장계가 하나의 장계인 것처럼 같은 날짜, 같은 곳에 연달아 기록해 놓는 실수까지 범하고 있다.
5월 8일 회군을 결정한 후 여수 본영에 도착한 것은 5월 9일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의 최초의 완벽한 승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서쪽으로 피난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전라좌수영 군사들은 기뻐할 겨를 도 없이 잠깐의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전쟁준비에 전념했을 것이다.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5월 9일 이후부터 다음의 당포해전을 위해 출항한 5월 28일까지의 <난중일기>는 빠져있다.
왜적이 쳐들어오자 원균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전선과 무기들을 바다에 가라앉히고 1만여 수군들을 해산시킨 것이었다.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운룡이 반대하여 말하기를, “장군에게 나라의 중대한 책임을 맡긴 이상 호남으로 통하는 목구멍과도 같아서 이곳을 잃으면 호서와 호남이 위험하게 될 것이오. 지금 우리 군사들이 흩어졌지만 그래도 모을 수 있을 것이고, 호남의 수군도 와서 구원하도록 청할 수 있을 것이오.”라고 하니, 원균이 그 계책을 따라 율포(栗浦) 만호
당시
광양(光陽) 현감 어영담(魚泳潭)이 자원하여 바다 물길 안내자가 되어 앞장섰다. 그리하여 거제 앞바다에서 원균과 만났다. 원균이 이운룡과 우치적을 선봉으로 삼아 가지고 옥포에 이르러 왜적의 배 30척과 맞붙어 들이쳐서 크게 격파하니, 살아남은 적들은 육지로 올라 달아났다. 적들의 배를 모조리 불사르고 돌아온 다음 다시 노량진에서 사원 적의 배 13척을 불사르니, 적들은 다 물에 빠져 죽었다.이 싸움에서
<선조수정실록> (1592. 5)
위의 <원균이 이운룡과 우치적을 선봉으로 삼아 가지고 옥포에 이르러 왜적의 배 30척과 맞붙어 들이쳐서 크게 격파하니 살아남은 적들은 육지로 올라 달아났다.>는 부분은 마치 이번 전투의 주역이 원균인 것처럼 기록하고 있는 바, 사실과 전혀 다르다.
임진왜란 초 원균의 행적 – 징비록
다음은
왜적이 바다를 건너 육지로 올라왔을 대 원균은 왜적의 형세가 대단한 것을 보고 감히 나아가 치지 못하고 자기 휘하의 전선 백여 척과 화포, 군기(軍器)를 바닷물 속에 침몰시켜 버린 다음, 홀로 수하의 비장(裨將)인
원균은 다시
징비록의 이 부분 기록 중에서 “각각 분담한 경계가 있으니 조정의 명령이 없으면 어찌 함부로 경계를 넘어갈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하면서 거절하였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즉, <실록>의 전체 기록에 의하더라도
그러나 비록 <징비록>에서처럼 관할 구역을 함부로 벗어나서 병력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법에 의해 규정되어 있었다는 이유로
[1] 활자본. 42권 8책. <선조실록>의 수정문제가 논의된 것은 인조반정으로 북인세력이 물러가고 서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서인으로 지목된
1643년 수정실록청을 설치하고 수정작업을 시작하였으나, 이식 등이 다른 일로 파면되고 사망하는 바람에 중단되었다가 1657년(효종 8) 김육(金堉) ·채유후(蔡裕後) 등이 재차 수정실록청을 설치하고 동년 9월에 완성하였다. 총 42권 중 선조 즉위년부터 1629년까지 30권은 이식이 편찬하였고, 1630년부터 1641년까지의 12권은 김육 등이 편찬하였다. 당쟁 이후의 실록은 당론의 영향을 받는 일이 가끔 있어 이처럼 수정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전의 실록을 파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권을 잡은 서인이 다시 편찬한 실록인 만큼
[2] <왜의 사변(倭變)에 대비하는 장계 (一), (二), (三)> (因倭警待變狀 一, 二, 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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