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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와 국방/안보 불감증

군사행동을 봄놀이 하듯 하면, 어찌 패하지 않겠는가!

 

 

군사 행동을 봄놀이 하듯 하면,

어찌 패하지 않겠는가!

 

용인전투와 허수아비 군대

 

임진왜란 초기인 1592 4월 하순, 경상도는 일본군의 조총에 완전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일본군은 날카로운 기세로 병사들의 발이 부르틀 정도의 강행군을 펼치며 서울의 목덜미까지 치고 올라갔다. 일본군의 기본 전략은 부산-서울-평양으로 이어지는 선 굵은 북상이었으므로 전라도는 조총의 사격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때 전라도 지역을 맡은 순찰사는 이광(李珖)이었다. 순찰사는 도()의 군비를 맡는 직책으로 지방의 병권을 장악하던 종2품의 관찰사가 겸직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상급 지휘관이기도 한 광은 이순신의 평생 은인으로 인연이 깊었다.

 

1587년 나이 43세의 이순신이 육군으로 함경도에 근무할 때 여진족 침입 사건이 일어났다. 그 여파로 이순신은 백의종군을 하다가 1588 1월 두만강을 넘어 여진족을 급습한 전투에서 공을 세워 1588 4월 백의종군을 면했다. 그러고는 충남 아산의 옛집으로 돌아가 무직으로 지냈는데 전라순찰사 이광이 그를 불러 군관으로 삼았다. 이순신은 이를 기반으로 정읍 현감에 올랐고 최종적으로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었다.

 

 

전라순찰사 이광은 군사 8,000명을 긴급 소집하여 서울로 출동했다. 그의 군대가 충청도 공주에 도달했을 때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광은 아무 소득 없이 그만 회군하고 말았다. 왕이 서울을 떠나 피난까지 갔는데, 대군을 거느리고 출병해 싸우지도 않고 돌아왔다는 비난이 이광에게 쏟아졌다. 부하가 칼을 빼들고 이광에게 대드는 일도 생겼다. 결국 이광은 다시 총동원령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1592 5 20 이광은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 탈환전에 나섰다. 이때는 이순신이 제1차 출동을 성공리에 마치고 여수로 귀환한 뒤였다. 이광의 군대가 서울로 북상하는 도중 충청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이 충청도 군사와 합류하고 경상순찰사 김수가 경상도 군사와 함께 합류했다. 이렇게 하여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의 3도가 처음으로 뭉쳐 합동군, 3도군을 편성했다. <선조수정실록> 1592 5월이다.

 

이광이 ()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 곽영(郭嶸) 2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 경상순찰사 김수는 수하 군사 수백을 거느리고, 충청순찰사 윤국형은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모였다. 이에 세 장수가 날을 정하여 진격할 것을 약속했는데, 10만 군사로 호칭하여 군대의 위용이 대단히 성대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92. 5)

 

당시 조선군 총 병력은 몇 명이었을까? 10만의 군사로 호칭했다고 하니 10만 명으로 보면 될 듯하다. 그 정도라면 일본군과의 일대 격돌도 해 볼 만했다. 이 때 경상도의 군사가 수백 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경상도가 적의 수중에 떨어진 상태여서 군사를 모으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선조실록> 1592년 6월 21 기록에 의하면 이광 등이 보고한 조선군의 병력은 6만여 명이라고 한다.

 

신들이 기병, 보병과 6만여 명을 거느리고 이달 3일에 수원에 진을 쳤는데, 양천 북포를 경유하여 군사를 건너려고 합니다.

<선조실록> (1592. 6. 21)

 

전투에 직접 참가한 장수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 6만여 명이라고 밝혔으므로, 이때의 병력은 6만여 명으로 추산하는 게 정확할 것 같다. 그런데 6만 대군의 실상은 오합지졸 그 자체였다. 세 명의 순찰사는 군 작전에 문외한인 문인 출신이었다. 3도 합동 작전이므로 지휘계통상의 혼란도 야기될 수 있었다. 군대를 급조하다 보니 군사 훈련이 없었고 생업에 종사하던 자들로 머릿수를 채워 전투에서 필요한 정예병과는 거리가 멀었다. <징비록>을 보자.

 

이때 세 순찰사는 다 문인이라 군사에 관하여는 익숙하지 못하고, 군사의 수효는 비록 많았으나 훈련도 통일이 안 되었고, 또한 험한 요지에 군사적 설비를 하지도 않았으니, 참으로 옛사람의 말대로, 군사 행동을 봄놀이하듯 생각하면 어찌 패하지 않겠는가하는 말과 같았다.

<징비록>

 

6 4, 온양을 출발한 군대가 용인에 이르렀는데 북서쪽의 북두문사에 작은 진지를 치고 있던 적군이 보였다. 이광이 그곳에 진을 친 소규모의 적을 공격하려 하자 부하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서울이 멀지 않고 대적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적은 수의 적과 싸워 병력을 소모하지 말고 바로 한강을 건너자는 의견이었다.부하들의 건의는 이광의 고집 앞에 허사로 끝났다. 이광은 백광언(白光彦)의 선봉대에게 공격을 명하여 나무하러 나온 적병 10여 명을 베었다. 그 날 밤 선봉대는 야습을 감행하여 적의 머리 10개를 베고 진을 둘러싼 방책을 불태웠다. 이광은 두 차례에 걸친 소규모 공격이 성공리에 끝나자 그 초라한 전공에도 불구하고 교만에 빠졌다.

 

이광이 공격한 적군은 적장이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병사였다. 와키자카는 용인과 서울 사이의 보급로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이 소규모 전투가 벌어지기 전, 600명의 병사를 용인과 서울 사이에 요소마다 작은 진지로 나누어 분산 배치했다. 이광이 습격한 적의 작은 진지는 아키자카가 분산 배치한 진지였다. 그러면서 와키자카 자신은 본대 1,000여 명의 병력과 함께 서울에 머무르고 있었다. 와키자카는 전공이 해전이었으나 조선 수군의 움직임이 미약하여 육군과 합류한 상태였다.

 

 

6 5, 이광은 용인성의 북쪽 문소산에도 적의 작은 진지가 있는 것을 보고 선봉대에게 공격을 지시했다. 10여 명 단위의 소 부대만 상대하던 조선군은 위세만 믿고 무작정 공격해 들어갔다. 하지만 이때는 적장 와키자카가 1,000여 명이 되는 서울 주둔병과 600여 명의 진지 주둔병을 이끌고 대기하던 상태였다. <선조수정실록> 1592 5월의 기록이다.

 

군사가 처음 진격할 때에 서울에서 왜적 수십 명이 계속해서 성을 빠져나갔는데 어디로 향하는지 몰랐다. 아군이 그 소식을 듣고는 우리 군사를 피하여 가는 줄로만 의심하였는데, 뒤에 들으니 왜장이 광주(廣州)의 산꼴짜기에 군사를 잠복시키고 아군이 강가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뒤를 따라 습격하여 모두 섬멸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선조수정실록> (1592. 5)

 

이날의 전투에서 조선의 선봉대는 숲 속에 잠복한 적이 일시에 조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공격하자 선봉장을 위시한 태반이 전사했고 패잔병은 이광이 지휘하는 본대에 합류했다. 이광은 선봉대가 타격을 받자 수원과 용인의 경계에 있는 광교산으로 군사를 돌려 진을 쳤다.

 

 

6 6, 전날의 승전에 고무된 와키자카군의 일본군 1,600여 명이 기습을 감행했다. <선조수정실록> 1592 6월에는 군중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올라갈 때 적병이 산골짜기를 따라 돌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군을 맞은 이광의 6만여 조선군은 전투다운 전투도 없이 무너졌다. 일본인의 조총과 칼에 죽은 조선군보다 도망가다 서로 밟혀 죽은 조선군이 더 많았다고 한다.

 

 

용인전투의 패배는 충격적이었다. 6만 명 이상의 조선 대군이 1,600여명에 불과한 일본군에게 형편없이 패배한 전투였다. 전투의 전개 과정에서 결론까지 너무도 믿기 어려워 미스터리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전투이기도 하다. 유성룡 <징비록>이다.

 

3도의 군사들이 크게 무너졌는데, 그 소리가 마치 큰 산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다. 이때 군수물자와 무기를 헤아릴 수 없이 버려두고 도망하여 길이 막혀서 사람들이 다닐 수가 없었는데, 적들은 이것을 다 가져다가 불을 질러버렸다.

<징비록>

 

용인전투의 패배라는 미스터리의 단서는 <선조실록>에서 흐릿하게나마 찾을 수 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이광은 멀리 떨어진 조정에 적을 대적하는 계책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것은 적을 눈앞에 둔 일선 장군이 취할 행동은 결코 아니었다. <선조실록> 1592년 6월 21 기록이다.

 

경상도 관찰사 김수, 전라도 관찰사 이광,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윤국형) 등이 신들이 기병, 보병고 6만여 명을 거느리고 이달 3일 수원에 진을 쳤는데 양천 북포를 경유하여 군사를 건너려고 합니다. 앞뒤 양쪽에서 들이치는 계책을 조정에서 급속히 지휘해주소서라고 보고하였다.

<선조실록> (1592. 6. 21)

 

아쉽게도 이 보고서를 받은 조선의 조정이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는 더 이상의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을 눈앞에 둔 일선 장군이 후선에 있던 피난길의 조정에 계책을 알려달라고 한 것은 이광의 부대에 걸었던 조정의 기대감을 낭패감으로 바꿀 수 밖에 없었다. 같은 날 <선조실록>에 실린 사관의 평이다.

 

()수 등이 올 적에 행군함에 규율이 없어 앞뒤가 서로 호응하지 못하였다. 선봉 백광언, 이지시(李之詩) 등은 나무하고 물 긷는 왜적 10여 급을 참하고서 더욱 왜적을 경시하고 교만한 기색이 있었다. ()수는 이미 누차 패전하여 수하에 군사도 없어 형세가 고단하고 기운이 꺾이었으며, ()광은 본시 용렬하고 겁이 많아 계책을 세워 대응할 줄을 몰랐기 때문에 조정에 명령을 청하여 진퇴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용인전투에 참가한 장군 중에서 유난히 주목되는 이름이 있다. 그는 우리에게 행주대첩으로 유명한 권율(權慄)이다. 용인전투는 그의 첫 전투였다. 당시 광주 목사이던 권율도 이광의 휘하에서 전투에 참가했다. 용인전투에서 선봉장이던 백광언, 이지시 등 여러 장수들이 전사했지만 중위장을 맡고 있던 그는 휘하 부하의 손실 없이 후퇴하여 광주로 내려갔다. 하지만 권율은 용인전투 패전의 멍에를 평생 짊어지고 살지 않았다. 그는 전라도 방어의 사활이 걸린 이치전투[1]에서 화려하게 재기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북상하여 임진왜란의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행주대첩을 장식했다. 어쩌면 용인전투의 뼈아픈 경험이 그를 채찍질했는지도 모른다.

 

 
용인전투도

 

 

용인전투 패배의 후유증은 컸다. 전라, 충청, 경상 3도 합동 대군으로 펼친 서울 수복 작전이 무위로 돌아갔고 조선 육군의 실상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또 용인전투는 일본군이 후방의 위험 없이 안심하고 북상할 수 있는 토대가 된 전투였다. 일본군은 비록 서울은 점령했지만 전라도 지방을 위시한 미점령지가 남아 있어 등 뒤의 압박에 은근히 불안했다. 그 잠재적인 불안요소에서 자유로워진 일본군은 본격적인 북진 태세를 갖추었다.

이광의 군대에 기대를 걸었던 조정은 다시 급해졌다. 조선군이 용인전투에서 승리했다면 그 여세를 몰아 서울 탈환까지 시도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일본군은 전력의 상당 부분을 서울 방어에 투입할 수 밖에 없어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기세는 일단 꺾일 수 있었다. 게다가 이순신이 해전에서 연승을 이어간다면 일본군을 앞뒤에서 압박하는 국면으로 전환될 수도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수세에 몰리던 조선이 임진왜란의 큰 판을 일시에 뒤엎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용인전투 패배로 조선은 그러한 구상은 꿈도 꿀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미 서울을 포기하고 평양에 온 선조였다. 선조가 또다시 위험에 처한 평양을 떠나는 데에는 어려운 결심이 필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조의 결심은 그 수위가 예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2정부라고 할 수 있는 분조(分朝)의 설치가 그것이었다. 이미 세자로 임명된 광해군(光海君)이 분조를 이끌도록 한다는 것이 선조의 구상이었다.

 

 

광해군의 세자 책봉에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임진왜란 이전에 정철(鄭澈)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선조에게 건의했다가, 인빈 김씨가 낳은 신성군(信城君)을 마음에 두고 있던 선조에게 삭탈관직을 당한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에게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었다. 선조는 서울을 버리기 이틀 전인 1592년 4월 28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첫째 왕자인 임해군(臨海君)은 성격이 포악하여 왕으로서의 자질에 문제가 있어서 세자 자리는 둘째 왕자인 광해군의 몫이 되었다.

 

 

분조의 설치는 당시와 같은 전시 상황, 그것도 앞날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충분히 실현 가능한 구상이었다. 왕에게 문제가 발생한다면 국가 존망의 위기에 빠지므로 이를 미리 방지한다는 비장한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하지만 분조의 설치는 그때까지 발상의 단계였다. 분조의 정식 발족은 조정이 평양을 떠나 영변까지 피신해서야 이루어졌다. 이때 선조는 광해군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고 자신은 살아남기 위해 치욕적이게도 명으로 망명할 것을 밝혀 파문이 일어났다.



[1] 전라도 사수를 위한 웅치, 이치 전투는 뒤에 차례가 되면 자세히 언급하겠다. 이 웅치, 이치 전투로 인해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의 보호막이 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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