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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와 국방/안보 불감증

아! 탄금대...

 

 

아! 충주 탄금대 전투

 

일본군은 침공 10여 일만에 경상도지역을 석권하고 이제 그 칼끝을 충청도로 돌려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그들의 앞에는 소백산맥이라는 험준한 천험의 장벽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당시 소백산맥에는 3곳의 관문이 있었다. 하나는 소백산과 도솔산 사이의 죽령으로 경상도 영주와 충청도 단양을 잇고 있고, 다른 한 곳은 주흘산과 백화산 사이의 조령으로 경상도 문경과 충청도 괴산-충주를, 마지막 한 곳은 또 하나의 백화산과 황학산 사이의 추풍령으로 경상도 금산과 충청도 옥천을 잇고 있었다.

소백산맥은 침공하는 일본군으로서는 큰 장벽이었지만 수비하는 조선군에게는 하늘이 준 천연의 지형이었으므로 당연히 조선군은 이 관문을 지켜야 했었다.

4월 26일 조선의 3도 도순변사에 임명된 신립은 부장 김여물과 80여 명의 군관을 이끌고 충주에 도착하였다.충주목사 이종장이 충청도 군현의 군사 8,000 여 명을 모아 놓고 신립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전쟁이 터진 이후 가장 규모가 큰 조선의 정규병들이었다.


신립은 충주의 단월역에 군사를 주둔시킨 후 충주 목사 이종장과 부장 몇 사람을 거느리고 조령(鳥嶺)으로 지형을 정찰하러 나갔다. 이때 종사관 김여물등이 「적군은 대병력이고 우리는 병력이 적으니 정면으로 싸우면 전세상 불리할 것 같으니 마땅히 부근의 험하고 중요한 지형을 지키고 복병을 배치하였다가 적이 협곡 안으로 들어오면 좌우에서 일제히 공격하여 격멸하고 만일 적의 공격을 당할 수가 없으면 차라리 물러가 한성으로 들어가서 지키는 것이 좋다」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충주목사 이종장 역시 「적은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우리가 넓은 평지에 있는 것은 옳지 못하고 험한 곳을 지키는 것이 제일 좋은 방책이다. 그러므로 넓은 들에서 싸우는 것은 불리하니 조령의 험한 곳?의지하여 깃발을 많이 세우고 연기와 불로 적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적을 기습하여 승리하는 방책으로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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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 장군의 비장한 죽음 간직한 현장

탄금대는 신립(1546년~1592년) 장군의 아픔이 배여 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부왜군이 한양을 향해 쳐올라 오자, 선조는 보검과 8000여 명의 군사를 신립 장군에게 내주며 왜적을 막으라는 어명을 내렸습니다.

신립 장군은 왜적을 충주에서 막지 못한다면 곧바로 서울을 빼앗길 터이고, 임금이 피난을 가야 할 지경에 이른다는 생각에 바삐 충주로 내려왔습니다. 너른 벌과 남한강이 흐르는 탄금대 주변에 진을 쳤습니다. 기마병을 위주로 왜적을 막으려는 것이 신립 장군의 작전이었어요.

그런데, 진지 뒤쪽에는 남한강이 흐르고 있어서 죽기 살기로 싸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많은 숫자의 왜군을 막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신립 장군은 전투에서 크게 패해 많은 병사를 잃었고,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에 따라 결국 충주는 왜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선조는 한양을 떠나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탄금대에 오르면, 지금도 가야금 소리와 칼 소리가 함께 들리는 듯합니다. 이런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간직한 탄금대는 오늘도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 물줄기를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김남석(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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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신립은 「적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넓은 들에 맞아 들여 용맹한 기병으로 물리치는 것이 이기게 될 것이요, 또한 적은 이미 영 밑에 와 있다고 하니 우리가 영(嶺)위에까지 나가서 진지를 확보하기에 앞서 적과 서로 부딪치게 된다면 사세가 위태롭지 않겠소. 뿐만 아니라 우리 군사들은 모두 훈련이 미숙한 새로 뽑은 군사인데 더구나 그들은 평소에 의사가 소통되지 못하였으며 상하가 단합도 충분하지 못한 즉 이제 사지(死地)에 넣지 않으면 그 투지를 드높일 수 없을 것이요」라며 조령 방어를 포기하였다. 김여물은 신립이 새재를 포기한다는 생각이 굳어지자 「그렇다면 새재의 여러 곳에 깃발을 꼽고 허수아비를 배치하자. 그러면 일본군의 진격을 지연시킬 수 있을 것」 이라고 조언했지만 신립은 이것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그 때 상주에서 패한 이일이 충주 단월역 신립의 진영으로 찾아왔다.
이일은 신립에게 「적은 경오(庚午), 을묘(乙卯)때의 왜적과 다르고 북쪽 오랑캐 같이 치기 쉬운 적이 아니니 물러가서 지키는 것만 못하다」라고 건의하자, 신립은 크게 화를 내며 이일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또 다시 우리 군사까지 망쳐 놓으려는 것인가」하고 크게 책망을 하였으나, 곧 이일과 변기 두 장수를 선봉으로 삼아 지난날의 죄를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도록 하였다. 신립은 군사를 이끌고 충주성으로 들어갔다.

4월 26일 일본군 선봉이 상주를 출발하여 함창을 거쳐 문경에 도착하였다.
27일에 문경을 출발하여 조령을 넘었고, 28일 아침에는 안보역을 지나 정오경에는 충추 남쪽 단월역에 다달아 척후로 하여금 조선군의 상황을 정찰케 하였다.

신립도 27일 정찰병들로부터 일본군이 새재를 넘었다는 정보를 들었으나, 직접 말을 타고 새재를 정찰한 결과 일본군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자, 정찰병을 허위보고죄로 참형에 처하였다.

그날 밤 충주성 안에서 작전을 계획하였는데 한신(韓信)의 고사에 따라 탄금대 부근에서 배수진을 치기로 결정하였다. 신립은 바다를 건너와 북상하는 적의 피로한 틈을 타서 이들을 평지로 끌어내어 갑자기 몰아치는 전법을 쓰기로 한 것이다. 28일 아침 일찍히 신립은 군사 8,000 여 명을 거느리고 충주성을 떠나 탄금대로 출발하여, 남한강과 달천이 합치는 중간지대의 저습지에 진을 치고 적이 남쪽 산간에서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탄금대 동남쪽 들판은 습지였다. 더욱이 며칠 전에 비가 와서 발이 푹푹 빠졌다. 이때 군관 이운룡이 배수진을 보고 "사지(死地)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고 울면서 만류하였지만, 신립은 크게 화를 내며 그에게 곤장 30대를 때렸다. 조선군의 진용은 총지휘관인 도순변사 신립 장군, 순변사 이일, 조방장 변기, 종사관 김여물, 충주목사 이종장 등이 대오를 정비하고 있었다.


한편 적은 정오부터 공격준비를 시작하였다. 좌익대장 마쓰우라의 3,000병력, 우익대장 종의지의 5,000병력, 중앙에는 대장 고니시(小西行長)의 직할부대 7,000 병력이 합하여 1만 5천명이 공격에 직접 참가하였고, 아리마, 오오무라,고지마등이 거느리는 3천 7백명은 예비대로 충주성에 위치하고 있었다.

적은 좌익부터 달천 우안의 본도를 따라 전진하고 나머지 부대는 충주 본 가도를 따라 탄금대에 접근하여 삼면에서 포위 공격하려 하였다. 신립이 명령하여 진을 치던 지역의 서쪽과 북쪽은 달천과 남한강이 막고 있으며, 동쪽과 남쪽에는 지금은 달천강의 제방을 하고 관개가 되어서 옥토가 되어 있으나 당시는 늪으로 되어 있고 갈대가 우거진 갯벌이어서 군사활동이 적당치 않았으며 더욱이 기마병이 말을 타고 달리며 싸우기는 불편한 지역이었다.

신립 장군은 종사관 김여물에게 장계를 초하게 하였는데, 김여물은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전투가 준비된 복장으로 붓을 잡고 장계를 썼다고 하니 당시 상황이 급박함을 짐작하게 한다. 전세가 더욱 급하게 되자 신립은 1차로 기병을 돌격시켰다. 일천기의 군사가 일제히 칼과 창을 들고 함성을 지르며 적진에 뛰어들어 적을 공격하였다. 적은 보병이라 조선군이 조금 우세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전세를 파악한 신립은 다시 2차로 1천명을 혼전하는 싸움터에 진격시켰으나, 피아의 사상자만 내고 일진일퇴하였다. 신립은 3차로 2천명의 기병을 모두 돌진시키니 말의 돌진소리, 조총소리, 인마의 고함소리가 탄금대 벌판을 뒤덮었다. 하지만 말을 타고 달려오는 기마병은 일본 조총부대의 말 그대로 밥'이었다.

일본군의 대기마전술은 기마대책용 목책을 세워 기병의 접근을 막은 후에 조총 사수들을 일렬로 사선(射線)에 늘어세운 후 멀리서 달려오는 적들에게 일제사격을 퍼붓어 화망을 구성하여 한꺼번에 적을 물리치는 부대 단위 전투였다.
전세를 지켜보던 신립은 김여물을 남겨 놓고 직접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마지막 돌격을 감행하였으나, 벌떼 같이 덤벼드는 적병을 어찌할 수 없어 되돌아오니 종사관 김여물이 말을 타고 최후의 총돌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립이 웃으며 하는 말이 「그대를 이 위기에서 살려 볼까하오」하니, 김여물은 빙긋이 웃으면서 「이 사람이 어찌하여 죽음을 피하는 사람이 되오리까」하고 같이 말을 달려 총돌격의 선두에 서서 깊이 적중으로 들어가니 적진이 크게 흔들렸으나 이미 전세를 돌리기에는 늦었다. 신립과 병사들은 밀리고 밀려 상당수가 남한강 물에 빠져 익사하였다. 나머지 군사들은 충주목사 이종장과 조방장 변기의 지휘 아래 굳게 뭉쳐서 배수진을 끝까지 지키다며 필사의 힘을 다하여 적과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조선군의 두번째이자 사실상 가장 큰 규모의 정규군이 궤멸하였고, 사실상 한양까지의 문이 열려져 버렸다고 할 수 있다. 순변사 이일은 신립의 뒤에 따라 가면서 조총을 피하다가 사잇길을 쫓아 산중에 들어 간 다음 적병 수 명을 만나서 활로 쏘아 죽이고 한강을 넘어 북으로 달아났다. 이일은 사람을 시켜 장계를 급히 조정에 올리게 하니 조정에서는 비로소 충주전투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패전의 소식을 접한 조정은 한양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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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申砬,1546-1592) 장군은 무장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별칭자는 입지(立之),시호는 충장(忠壯). 선조원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도총부도사-진주판관을 거쳐, 1583년 온성부사로 보직되어 오랑케 이탕개를 격퇴시고 두만강을 건너 야인소굴을 소탕하는 등의 무공으로 함격북도병마정도사로 승진하게 된다. 그는 기병운용에 특출한 전술을 구사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게 된다.1587년 흥양에 왜구침입으로 우병마사로 출병하였으나 왜구가 이미 철수한 뒤라 철수시 양가집 처녀를 첩으로 대려온 사실로 삼사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얼마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다시 등용되어 직책을 수행중 병사를 참살했다는 문제로 중추부동지사라는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1590년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다시 보직되어 한성판윤에 승진되어 있을시 임진년 왜란을 맞게 되자 1592년 삼도도순변사에 임명되어 왜군에 맞서 싸우다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전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충장공의 시호를 받게 된다.

 

후세 사람들은 신립장군의 탄금대 전투에서 배수진을 치고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전멸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 많은 문제점과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신립장군이 8천명의 조선군으로 1만8천명의 일본군을 막아내는대 방어에 절대 유리한 문경 새재를 포기하고 탄금대에서 적과 평야전투를 벌였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군은 급조된 군대로 오합지졸이었으며 신립은 전투중 전선이탈이 뻔한 이들 병력을 효과적으로 전투에 임하여 한번의 결전으로 일본군을 제압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했을 것이다. 또 조령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기에 시간적으로 너무 촉박하였으며 자신이 대리고 온 4000명의 기병대를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없다는 판단도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최후의 결전을 시도하여 일본군의 예봉을 꺽을 수 있는 방법은 배수진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미 신립장군은 전쟁에 임할 당시의 심정은 일본군을 무시하고 조총의 위력에 대하여 실감을 못하였으며 북방 여진족을 기마대로 물리치던 지난 시절 승리의 환상에 젖어 있었다. 그는 해전보다 육전을 중요시 했으며 당시 조선에서는 자신만큼 유능한 장수는 없다고 자만심에 빠져 있었다. 신립은 준비되지 않은 임시전력이나 강원,경기 일대의 역마를 총 동원하여 기마대를 편성하였으며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일본군을 막아내기에는 자신만이 가능하리라고 판단을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국의 장수로써 국가 전체를 보는 전략적 안목이 있어야 하거늘 제대로 된 군사가 없던 조선의 입장에서는 정예 4000명의 기마부대와 일반병 4000명 도합 8000명의 정규군을 일시에 잃는다는 것은 조선의 입장에서는 치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주력부대가 일시에 소멸되었다는 점은 결국 한성방어는 물론 조정이 파천을 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을 야기한 점이다. 신립은 이점을 몰랐을 까? 아마 알고 있으면서 스스로 죽음의 전술을 택한 이유는 무었일까? 우리는 여기서 의문을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전술적으로도 당시 탄금대의 지형상황이 비가 온 뒤라 기마부대 온용에 부적합한 상태인 늪지대였다는 점, 일본군의 대기병 방책 전술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점, 기병대가 조총앞에 먹이감 밖에 되지 않는 다는 점, 당시 조선의 우수한 각종 화포를 제대로 운용할 수 있는 지형이 아니였으며 실제 운용도 못하였다는점 등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당시 문경 새재 방어전을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지역 장수들이 문경 새재의 중요성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문경 새재에 주방어병력을 배치하고 장애물을 설치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어야 했다. 상주전투에서 패한 이일이 적정도 모른채 허허벌판 강가에서 군대를 훈련중에 적에게 참패를 당할 바에는 문경 새재에서 벙어책을 강구했더라면 다소의 시간을 벌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8000명의 신립군이 증원되어 새재 관문에서 조직적인 전투를 벌일 수만 있었다면 적의 예봉은 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축차적인 철수로 일본군의 공격속도를 지연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왜 당시 조선군은 지형을 이용한 방어전술을 펼치지 못했으며 그러한 생각을 도무지 못 한 이유는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 아쉬운 미수록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