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수군 1차 출동10
평양으로 올라가는 <옥포파왜병장(玉浦波倭兵狀)>
이순신의 입장에서는 경기도의 바닷길이 왜군에게 차단되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도 했을 것이다. 아무튼, 장계를 올려 보낼 때 경기도의 해로를 이용했다고 보고 필자들이 이 부분을 다큐멘터리로 엮어보았다.
“대첩 소식이오!”하는 소리와 함께 전라좌수영의 깃발을 올린 산탄포로 무장한 협선 2척이 강화도 해안에 접어들자 포구에 몰려든 사람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모두 만세를 불렀다. 강화도 연안에는 한강과 임진강 등지에서 피난 온 어선, 상선, 화물서 수백 척이 몰려들 만큼 많은 피난민들이 있었다.
이들은 감격에 겨워 일행을 극진히 대접했고 밤이 새도록 모닥불을 피워놓고 군사들의 전쟁담에 귀를 기울였다.
백성들은 그 동안 어느 때고 들이닥쳐 살육과 납치를 자행할 왜군들을 생각하며 가슴을 조여 왔는데, 해전에서의 승첩 소식을 듣고는 ‘우리도 의병으로 나서서 내 고장을 지키자!’며 결의를 다졌다.
중국까지 오가던 중형의 어선, 상선.
방패를 세우고 경량급 대포(현자포, 황자포)를 탑재시켰다면
수백 척의 중형(협선) 전투선단을 마련할 수 있었다.
강화도를 떠나 황해도에 접어든 송한련 일행은 연안성 근해에서 조선군을 만나 피난 조정이 평양에 있음을 전해 들었고, 육로와 수로 어느 한 쪽을 선택해서 평양성에 도착했다.평양에 도착하기까지 송한련 일행이 직접 전쟁담을 나눈 사람들은 수천에서 수만 명에 달했고, 그 결과 승첩의 해전 소식을 접한 해안지역에서는 의병 봉기가 시작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의병 봉기는 조선 전역으로 확산되어갔다. 아래는 조정이 <옥포파왜병장>을 받아본 무렵의 <선조실록>이다.
(5월 23일) 임금이 평양에 있었다.
(왜적을 치기 위해) 17일 밤을 타고 임진강을 건넜다. 그러나 좌위장 이천(李薦)은 강 상류의 언덕에서 왜적과 마주쳐 적에게 패하였고, 유극량은 죽었으며, 신할도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왜적은 강 하류로부터 은밀히 행군하여 강을 건너왔다.
<선조실록> (
임진강 방어전에 나섰던 조선군 1만 5천이 왜군의 유인책에 속아서 강을 건너가 추격하려다가 섬멸 당한 전투에 대한 기록이다.조선군이 격파되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2만 군은 철령을 넘어 함경도로 향했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3만 군은 황해도를 거쳐 평양성으로 향했다. 임진강 패전과 왜군의 임진강 돌파 소식을 들은 조정은 눈앞이 캄캄했는데, 바로 그 때에 <옥포파왜병장>이 올라왔기 때문에 모두가 통곡했던 것이다.
전라좌수사
<선조실록> (
(임금의 이 지시에 따라) 조정에서는
<선조수정실록> (1592. 5)
왜란이 일어난 이후 최초로 접하는 승첩의 소식에 조정에서는
<옥포파왜병장>이 도착하자 조정은 그때서야 해로와 해군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초보적인 단계의 논의를 시작한다.
선조 : 바다 길목에는 다 척후를 내보냈는가?
최흥원 : 경기 수사가 응당 해야 하는데 수사가 도망쳤으므로 다시 새로운 사람을 뽑아 보냈습니다.
선조 : 경기 수사가 정말로 도망쳤는가?
최흥원 :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도망쳤다고 하는데 그럴 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한준 : 신도 길에서 들었는데 수사는 군사가 패하자 강원도로 향해 갔다고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
좌의정
비변사에서 보고하였다.
“난을 피하여 바다로 나가 모여 있는 경강(京江)의 배가 무려 수백여 척이나 됩니다. 도 경성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 지금 강화, 인천, 남양, 교동 등지에 많이 들어가 있는데 이들을 불러 모은다면 장정들로 구성된 군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선조실록> (
피난한 백성들의 대규모 선단이 파악되었고, 서해 해로가 열리고 있으며, 조정의 지휘체계도 갖추어지기 시작했다.그런데 6월 1일 고니사와 구로다군이 대동강 건너편에 모습을 드러내자 문신으로 수성된 선조의 조정은 기가 죽었다. 이때 평양성의 수비군은 4천 명, 왜군은 3만이었다.피아간의 직선 거리는 약 1km. 만약 왜군이 강을 건너 평양성을 공격하면 이전의 부산성과 동래성처럼 성이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왕과 비빈들이 미리 성을 빠져 나간다고 하더라도 왜군 기마대에게 하루 이틀이면 붙들릴 수 있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위기 속에서도 선조는 6월 11일까지 평양성에 머물러 있었다.
그 이유는 첫째, 전라, 충청, 경상도의 근왕군(勤王軍) 5만이 한성 탈완을 위해 북상하고 있었고(이미 6월 3일에 대패했다).
둘째, 평양성을 잃으면 더는 갈 곳이 없었으며,
셋째, 명나라가 구원병을 보내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기대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게 되자 선조는 ‘의주?’, ‘강계?’ ‘아니면 설한령을 넘어 강계?’ 하면서 무작정 평양성을 빠져 나갔다. 아슬아슬했던 조선왕조의 역사이다.
그리고 6월 14일 왜군이 대동강을 건너기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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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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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테마 [02:00] /작곡 : 원일 /편곡 : 김진근 /음악감독 : 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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