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 전투...
4월 30일 도성을 떠난 선조의 피난 행렬이 혜음령을 지날 때부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처음 한양에서부터 선조를 따라나섰던 일행들 중 상당수가 이미 대열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그날 저녁 임진강변에 도착하였으나 이번에는 건널 배가 5,6척 밖에 없고, 주위가 어두워 도강이 어려웠다.그나마 작은 배에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탈려고 하여 소란이 일었다.강변의 옛 승청(丞廳) 건물에 불을 질러 주위를 밝혀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밤이 되어 동파역에 도착하였을 때 파주 목사 허진과 장단부사 구효연이 음식을 가져와 일행을 맞았으나, 굶주린 일행이 다투어 먹어버려 세자 이하 대신들은 먹을 것이 없었다.다른 사람 몫을 다 먹어버린 사람들이 잘못한 것인데, 허진과 구효연은 자신들이 죄를 뒤집어 쓸까 봐 달아나 버렸다. 이튿날인 5월 1일 선조는 경기관찰사 권징에게 임진강 방어 대책을 수립할 것을 명령한 다음 개성으로 떠나, 그날 저녁 개성부에 도착하였는데, 개성의 인심이 매우 사나워 백성들 가운데 선조의 잘못을 큰소리로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돌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지만, 누구 한 사람 나서서 말리지도 못하였다고 한다.켕기는 것이 있는 조정인지라 백성들에게는 한 마디 말도 못했지만, 다음날(2일)이 되자 정치적 희생양을 찾기 시작했다.먼저 나라를 잘못 이끈 죄로 영의정 이산해가 파직되고, 좌의정 유성룡이 영의정이 되었다.하지만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정치판인지라 그날 저녁 유성룡에 대한 탄핵이 있자, 다시 그를 파직시키고, 좌의정 최홍원을 영의정에 임명했다. 유성룡은 아침에 영의정이 되어 저녁에 파직되어 아마도 조선 역사상 가장 짧은 제직기간을 가진 영의정이 되었다.
선조는 개성에 5월 3일까지 머물러 있다가 도성이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3일 다시 개성을 떠나 봉산, 황주를 거쳐 7일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이미 한강 방어선이 붕괴되고 도성마저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조선군은 임진강을 일본군의 북진을 막는 최후의 저지선으로 판단하고 전 병력을 집중시켜 방어에 나섰다. 경기도 문산(汶山)과 장단(長端) 사이를 흐르는 임진 나루터는 서울에서 파주를 거쳐 개성에 이르는 길목의 요충지였다.
한편으로는 명나라에서 돌아온 한응인을 제도도순찰사(諸道都巡察使)에 임명한 후 평안도의 정병 3천 명과 도원수 김명원의 명령을 듣지 않아도 되는 독자적인 지휘권까지 부여해 준 다음 임진강 방어선에 투입시켰다.
5월 10일 한성을 떠난 가토 키요마사의 일본군 제 2번대는 파주를 거쳐 13일쯤 문산 쪽 임진강 남안에 도착하여 북안의 김명원 군과 대치하였다. 임진강은 수심이 깊을 뿐만 아니라, 나룻배들이 모두 북안에 집결되어 있어서 가토 군은 도하수단을 강구하기 위해 강변에 진을 치고 있었다.
13일 고니시는 본토의 명령을 받아 야나가와 노리노부를 항복을 권유하는 사신으로 조선조정에 보내었다. 사신으로 조선군의 진영으로 떠나던 야나가와는 제 2번대를 찾아가 가토 키요마사에게 임진강에서 일단 후퇴하라고 종용하였다. 야나가와가 조선군측에 강화를 요청한다는 연락을 보내자 조선군측은 3일 안에 행재소에 보고해 회답을 보내겠다고 연락해 왔다. 그러던 중에도 일본군은 임진강 남안에서 조선군과 대치하며 서로 활을 쏘거나 조총을 쏘면서 신경전을 벌이면서 사흘이 흘렀다. 그러던 중 야나가와의 철수 종용을 받아 들인 카토의 제 2번대는 17일 강가에 세웠던 막사를 철거하고 무기들을 수레에 실고 일부 병력만 남겨두고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강 북쪽에서 이를 지켜보던 조선군 지휘부에서 의견이 서로 엇갈렸다.
한응인과 신할은 일본군의 퇴각으로 보고 강을 건너 추격하자고 주장하였지만, 도원수 김명원과 일부 장수들은 주저하였다. 그러나 한응인은 이미 선조로부터 김명원의 명령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출전을 반대하던 몇 몇 병사를 죽인 다음 독자적으로 공격에 나섰다. 이 때 조방장 유극량이 죽음을 무릅쓰고 추격작전을 반대했다. 신할이 칼을 빼려는 듯 하였으나 유극량은 『나라를 위해 반대하는 것이오』라며 자신의 주장을 굽하지 않았으나 결국 출전을 막지는 못하였다.
김명원이 주저하고 있는 동안 신할이 강을 건너 추격을 시작했고, 할 수 없이 유극량도 강을 건넜고, 독전관 홍봉상도 뒤를 따랐다.
(※註:징비록에는 이 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임진강변 깍아지른 절벽 위에서 강물로 떨어져 죽는 조선군 병사들의 모습이 마치 모진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과도 같았다》)
김명원, 한응인, 검찰사 박충간과 잔류 군사들은 강 북안에서 속수무책인 채 이 광경을 보고만 있어야 했는데, 이 때 갑자기 박충간이 도망치자 군사들은 도원수가 도망치는 것으로 착각하고 앞다투어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김명원과 한응인이 군사를 수습하려 했지만 남아 있는 군사는 1천이 채 되지 않았다. 일본군이 아직 도강도 하지 않았는데, 김명원과 한응인은 방어선을 포기하고 행재소로 후퇴했고, 권징은 가평으로 후퇴해 버렸다.
일본군 2번대는 곧바로 도강하지 않고 한동안 휴식을 취한 다음, 임진강 상류인 대탄으로 북상한 후 조선군의 동태를 살폈다. 대탄에 진을 치고 있던 이양원은 일본군이 강 남안에 나타나자 싸워보지도 않고, 군사를 거두어 강원도로 철수해 버렸다. 고니시는 일본군 1번대를 응원군으로 이끌고 벽제관까지 왔다가 승전보를 듣고 서울로 되돌아갔고, 그 뒤 일본군은 작전계획에 따라 길을 나누어 한 편은 개성 쪽으로, 한 편은 강원도 쪽으로 진군하였다. 이로써 임진강 방어선도 붕괴되고 방어선은 이제 대동강 전선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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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 임진강 방어작전은 오합지졸의 극치...
조선군은 임진강 방어작전시 오합지졸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지휘체계의 이원화,적의 계략에 속아 적정을 살피지도 않은체 강을 건너 공격하는 무식한 용기를 보여준 조선군은 우매함의 극치였다. 이러한 군대의 기강과 통제력 상실로 조선군은 임진강이라는 천혜의 방어선에서도 힘없이 무너졌다. 군졸들은 오합지졸로 장수가 도망가면 무조건 도망가는 상황이었고 장수들도 적과 제대로 싸움 한번 해보지도 않고 자기 목숨 구하기에 급급했던 당시의 분위기는 나라가 평소 얼마만큼 부정과 부폐,무능한 관리들에 의해 백성들이 고통스럽게 살아야 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군대의 기강은 물론 전략.전술에 대한 기본도 없는 문관출신 지휘관들, 그리고 만만한 여진족이나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하였던 조선의 무장들도 기만책과 용병술,지형지세를 이용하는 군사적 안목은 커녕 무식하게 용감성만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 서울에서, 서초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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