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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와 국방/안보 불감증

조선 수군(이순신) 1차 출동

 

 

조선 수군(이순신) 1차 출동

 

먼저 임진전쟁이 일어나던 당시의 남부쪽의 수군의 관할지에 대해 간단하게 알고 넘어가면...
경상좌도(부산에서 울진까지의 동해안)는 동래에 본영을 두고 있는 경상좌수영(수사 박홍)의 관할지였고, 경상우수사 원균의 지휘하에 있는 경상우수영은 거제에 본영을 두고 경상우도(낙동강 하구에서 하동 앞바다의 남해안 일대)의 해안과 도서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다.
여수에 본영을 두고 있던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의 전라좌수영은 여수에서 해남까지를, 해남에 본영이 있던 전라우수영(전라좌수사 이억기)는 해남에서 부안까지의 서해안 일대를 관할하에 두고 있었다.

개전 초기 경상좌수사 박홍과 경상우수사 원균은 휘하 함대를 자침시키고 각각 언양과 남해도로 물러났다. 남해도 근처에서 일본군의 동태를 살피던 원균은 일본수군이 거제도 방면으로 진출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자 육지로 달아나려고 하였으나 옥포 만호 이운룡이 전라도 수군에 구원을 요청하여 남해 앞바다를 지키고자 만류했다. 원균은 그의 건의대로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했는데, 이순신은 휘하 장수를 소집하여 이에 대해 논의했다. 조정의 명령 없이 타 지역으로 출동이 불가하다는 다수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경상도 해역에서 일본군을 막지 못하면 전라도 해역도 위함하게 된다는 녹도 만호 정운과 군관 송희립의 의견을 좇아 출동을 결정하였다.

l차 출동 시 총 전함수는 85척이지만, 전투함이라고 할 수 있는 판옥선은 24척에 불과하고 그 외는 협선 16척, 포작선(어선) 46척으로 이런 배는 실제 전투에는 참가할 수 없었고 보급품 운반과 연락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위에서 보듯 포작선(어선)을 다수 징발,동원한 것은 적에게 세력을 과시할 목적인것으로 추정)
(나중에 합류한 원균휘하의 전함들을 합치면 총 판옥선 27척, 협선 11척, 병력은 약 4700여 명으로 늘어남)

1차 출동시 전투편성표

주장(主將)

전라좌수사

이순신

중위장

방답첨사

이순신

 

중부장

광양혐감

어영담

전부장

홍양현감

배홍립

후부장

녹도만호

정운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

우부장

보성군수

김득광

우척부장

여도권관

김인영

좌척부장

사도첨사

김완

좌부기전통장

순천대장

유섭

우부기전통장

진군관 보인

이춘

한후장

군관

최대성

참퇴장

군관

배응록

돌격장

군관

이언량

유격장

발포가장

나대용

유수장

 

이몽귀

 

 

 


1.옥포해전(5월 7일)

1592년 5월 4일 새벽2시. 여수를 출발한 함대는 남해도 남쪽으로 미조항 끝에 이르러 함대를 둘로 나누어 우척부 김인영, 우부장 김득광, 중부장 어영담, 후부장 정운 등의 함대는 계속 동진하여 개이도,사량도등을 수색하면서 진격하였고, 본진은 평산포, 곡포, 상주포등 남해도 일대를 수색한 뒤 소비포 앞 바다에서 합류하여 첫날밤을 숙영하였다.

5일 원균과의 약속 장소인 당포에 이르러 주위에 정찰선을 띄워 원균의 함대를 찾았으나, 원균의 함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원균은 다음날 1척의 판옥선을 타고 도착하였다.(원균이 도착한 다음 휘하의 기효근등도 판옥선3척과 협선 2척을 이끌고 개별 합류함)

원균에게 그 동안의 전황과 일본군에 대한 정보를 얻은 다음 5월 6일 아침에 당포를 출발하여 거제 송미포에서 숙영하였다. 이 날 밤 거제도 동북쪽 가덕도에 적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5월 7일 새벽4시 경 송미포를 출발하여 적선들이 머물고 있다는 천성 가덕을 향하여 거제도 동해안을 끼고 북상하여 점심때쯤에 옥포 앞바다에 이르니 앞서 항해하던 척후장 사도첨사 김완과 여도권관 김인영등으로부터 적 발견 신호인 신기전이 하늘로 올랐다.

옥포 포구 안에 일본선이 있음을 알게된 조선 수군 함대는 장사진을 펴고 포구 안으로 일제히 공격했다. 일본전함은 30 여척이 정박해 있었는데, 일본군들은 육지에 상륙하여, 민가를 약탈하고 있었다. 조선수군의 갑작스런 기습에 놀라 일부는 배로 돌아와 응전하였으나 조선수군이 일본배를 에워 싸고 옥포만호 이운룡을 선봉장으로 돌격하여 천,지,현,황의 총통과 각종 완구를 이용하여 총공격을 가하니, 일본군들은 견디지 못하고 배를 버리고 도망가거나 조선수군에게 격침되었다.

전과는 적 대선 16척, 중선 8척, 소선 2척, 모두 26척을 격침시켰고, 나머지는 도주하였다. 아군의 손실은 전사자 없이 부상자 1명이다.

2.합포해전(5월 7일)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두고 영등포 앞 바다까지 진출하여 밤을 지낼 계획으로 군사들을 휴식시킬려는데, 오후 4시경에 일본군의 대선 4척과 소선1척이 지나 간다는 척후선의 보고가 들어왔다.
일본선은 조선수군이 뒤쫓아오자 필사적으로 도주하여 합포 앞바다에 이르자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고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 버렸다. 추격하던 김완, 이순신,어영담등의 함대가 전함 4척과 소선 1척을 격침시켰고, 조선수군은 밤을 타고 이동하여 남포 앞바다에서 숙영하였다.
(이날 밤 전라도 도사 최철견이 찾아와 조정이 서울을 포기하고 평양으로 천도했음을 알려준다)

3.적진포해전(5월 8일)

이른 아침에 진해 고리량에 일본군이 머물러 있다는 기별이 척후선으로부터 왔다.
즉각 출동하여 여러 섬과 포구를 수색하였으나 일본군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함대가 항로를 변경하여 저도를 지나 고성쪽으로 서남진하던 중 척후선이 적진포에 일본수군이 13척이 정박 중인 것을 발견했다. 함대가 적진포에 이르니 적선 13척이 포구안에 정박해 있고, 일본군들은 육지에 올라 노략질하고 있었다. 좌부장 신호, 우부장 김득광, 중위장 이순신등이 일제히 공격하여 적선 11척(대선 9척, 중선2척. 나머지 두척은 도주함)을 격침시켰다.

이 전투가 끝난 후 함대의 수리와 보급을 위해 전라좌수영함대는 여수로 돌아가고, 원균의 함대는 고성으로 귀항하였다.

1차출동 5월4일~9일까지 3번의 해전에서 일본수군 전함 42척을 격파하면서도 조선수군의 피해는 전함의 손실없이 부상자 1명뿐이다(이 기록은 전라좌수영만의 기록임)

1차 출동 때의 일본수군은 토도 타카도라 휘하의 수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아쉬운 미수록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