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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와 국방/안보 불감증

어이없이 무너진 한강/한성 방어전...

 

 

어이없이 무너진 한강/한성 방어전...

 

 

한편, 4월 26일 이일의 상주 패전 보고를 접한 조정은 서둘러 도성수비 대책을 수립하고, 병조(兵曺)에서는 도성 안의 군사를 징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조정안에서는 한양을 지킬 것인가? 피난할 것인가를 두고 중신들 사이에서 갑을박론이 벌어졌다.결국 대놓고 도망가자는 주장을 하지 못한 피난파가 수성파에게 꼬리를 내려 한양 사수가 결정되었다.그에 따라 김명원을 도원수로, 신각을 부원수, 우의정 이양원을 유도대장, 이전을 한성우위장, 변언수를 한성좌위장, 박충간을 한양순찰사로 각기 임명하고 사수작전을 지휘하게 하였다.

하지만, 한양의 성곽을 지키기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애시당초 한양의 성곽은 전투용이 아니라 왕도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한 도성으로써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방어전투를 위한 성채로서는 길이가 너무 길었다. 한양성은 세종 때 증축 되어 전체 길이가 27km가 되었으며 성벽의 높이는 평균 12m정도였다. 적과 싸울 수 있는 성가퀴는 4,664개소로 각 성가퀴에 활을 쏘는 사수 1명, 조수 1명, 예비병 1명 등 3명씩의 군사를 배치해도 모두 1만 4,000명의 병력이 필요했다.
물론 이론상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어쨌든...그러던 중 신립의 충주패전 보고가 올라오자, 지금까지 결사항전, 죽음으로 한성을 지키야 한다고 외쳐돼던 사람들도 별 수 없었던지 슬그머니 피난파의 손을 들어 도성수비를 포기하고, 선조가 직접 피난을 결정하였다.하지만, 그동안 시간을 벌 요량으로 한강에서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도원수 김명원은 제천정(보광동)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의 순찰사에게도 한강 방어전에 동참하라는 통문을 보내는 한편, 이제 막 무과에 급제한 신임 무관 50여 명과 군사 천 여명을 한강의 도섭(徒涉)이 가능한 지역에 배치시킨 다음, 나룻배를 모두 강 북안에 계류시켜 일본군의 도하공격을 대비하게 하였다.

4월 30일 새벽, 선조는 이양원과 김명원에게 도성 및 한강 방어를 일임하고 북행길에 올랐다.

5월 2일 경 일본군 제1번대와 제2번대가 각각 한강 동쪽과 남쪽에서부터 도착하였다. 김명원은 적의 세력을 보고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는지, 무기를 강물에 밀어넣으라고 명령한 뒤 자신은 백성의 옷으로 갈아입고 전선을 이탈하였다. 이 때 종사관 심우정이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총지휘관인 김명원이 전선을 이탈하자 휘하의 군사들도 전의를 상실하고 부대를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강원도 조방장 원호의 군사가 홀로 여주 북쪽의 언덕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그쪽의 일본군들은 쉽게 도하를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는데, 그 때 강원도 순찰사 유영길이 불가항력을 자인하고 원호의 군사에게 강원도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가토는 조선군의 별다른 저항이 없자 병사 한 명을 시켜 북안에 매여 있는 나룻배를 가져오게 하여 이를 타고 수 명이 도하한 다음, 다시 여러 척의 나룻배를 남안으로 가져가 차례로 도하를 완료하였다. 이렇게 해서 일본군은 도하를 저지하기 위한 이렇다 할 저항 한 번 받지 않고 쉽게 한강을 건너 한양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유도대장 이양원은 한강 방어선이 붕괴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한양 방어를 포기하고 양주로 퇴각하였다

이 무렵 충주 - 양근 - 용진을 거쳐 북상한 일본군 1번대는 북한강을 건너 5월 3일에 동대문 방면으로 진입하여 텅 빈 도성에 무혈 입성할 수 있었다. 이 때 일본군 제 2번대도 남대문으로 입성하여 도성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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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패전이 보고되자 조선 조정은 선조를 비롯하여 공황상태에 빠진다.

조선 최고의 장수 신립이 8천군사와 전멸했다는 비보는 선조로 하여금 몽진을 서두르게 만든다. 곧 밀어닦칠 일본군에게 잡히는 것은 절대절명의 치욕이 될 것이다. 한양을 포기하고 북으로 도망가는게 최상의 방책이었다. 선조는 한성방어 책임을 평소에 바른말 잘하는 미운 유성룡에게 임무를 부여하자 대간들이 탄원했다. 장차 명나라와 관계를 고려하여 유성룡을 대리고 가야 한다는 간언이었다. 선조는 할 수 없이 김도원으로 하여금 한성방어의 총책임자로 임명하고 몽진을 떠난다. 궁궐사람 대부분이 도망가고 비내리는 가운데 100여명의 조정신료들과 같이 떠나는 선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임금이 북으로 도망가자 백성들은 궁궐에 불을 지르고 약탈이 시작되었다. 도원수 김명원은 한간방어선에서 조선군을 결집하기 위하여 각지의 병력을 불러 모았다. 5월2일 일본군이 한강 남쪽에 나타나자 김명원은 갑자기 적의 위세에 놀라 모든 병기를 강물에 버리게 한뒤에 자신은 일반 백성복장으로 옷을 갈아입고 전선을 이탈하게 된다. 그러자 모여있던 군사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한강은 일본군에게 무혈도하를 허락하게 된다.

 

천혜의 요새 조령,죽령,추풍령에서 일본군을 저지하지도 못한 조선군은 한강이라는 천연적인 장애물도 아무런 대항 한번 하지 못하고 내 주게 된다.궁궐수비를 하던 병력들도 한강방어선이 붕괴되었다는 보고를 접한 유도대장 이양원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을 가게 된다.

 

조선의 책임자들은 한강방어를 포기하고, 도성도 버리고 조선의 방어책임자들은 모두 도망가기에 급급하였다. 그들에게는 이미 충이니 애국이니 선비,지도자,양반은 없었다. 모두 자신의 목숨지키기에 급급하였고 세치 혀로 살아가던 중신들 아니였던가! 백성들을 수탈하기에 바빴고 당쟁에 바빴고 오로지 입신출세에만 관심이 많았던 양반들이었다. 원리원칙을 지킬줄 몰랐고 권세에 대한 탐욕만 가득하였다.

 

조선의 운명은 창업후 200여년을 지내면서 명분,형식,이론이 사고의 주종을 이루었고 부정.부패로 심화된 정치.사회로 이미 운명이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