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안보와 국방/안보 불감증

조선 조정의 초기대응...

 

조선 조정의 초기대응...

 

조선 조정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김성일의 허위보고 문제로 경상우병사로 부임한 김성일을 한성으로 압송하기 위하여 금부도사가 내려가서 김성일을 한양으로 압송해 오는 중 영의정 이산해와 좌의정 유성룡이 선조를 설득하여 경상우도 초유사로 삼아 민심을 수습하고 군사를 모아 적과 싸우라고 재임명 하였다.

 

조정에서는 매일 어전회의가 열리고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현 병조판서 홍여순을 김응남으로 교체하고 대간들의 건의로 유성룡을 도체찰사,김응남을 부도체찰사로 임명하여 전군을 총 지휘토록 했다. 무엇보다 파죽지세로 북상하는 일본군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천혜의 요새인 조령,죽령,추풍령에서 일본군을 저지하는게 급선무였다.

 

그리하여 선조는 함경도 병마절도사시 이순신을 죽이려고 핍박하여 백의종군시킨적이 있는 당대의 명장이라는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내려가 성주를 방어토록 명하였다. 그런데 대려갈 군대가 없었다. 사흘동안 모은 병사가 300여명이 되어 별장 유옥으로 하여금 추가적인 모병을 하여 뒤따라 오도록 임무를 부여하고 이일은 먼저 출발하였다.

 

조정은 전 전라병사 성응길을 좌방어사로 삼아 죽령을 방어토록 하고, 전 강계부사 조경으로 하여금 우방어사로 삼아 추풍령을 방어토록 하고,문경새재는 변기,추풍령은 유극량으로 하여금 조방장으로 임명하여 지키도록 하였다.

 

선조는 당대 명장이라는 한성판윤 신립에게 순병사로 삼아 충주를 방어토록 하고 의주목사 김여물을 종사관으로 삼아 80명의 병사들을 대리고 출발하였던 것이다.

 

일본군 제1대는 4.19 밀양,23일 안동,낙동강 도하, 24일 선산,25일 상주외곽에 도착하여 진영을 편성했다. 일본군 제2대는 4.19일 언양,21일 경주,22일 영천을 경유하여 진격중이며 제3대는 4.20일 김해,21일창원-영산-창녕-현풍을 거쳐 27일에는 성주를 함락시켰다.

 

이일은 문경새재를 지나 문경에 도착하니 성은 텅비어 있었다. 4.23일 상주에 도착하니 목사 김해는 도망가고 없으며 판관 권길이 혼자 지키고 있다가 농민병 800명을 대리고 왔다.4.24일 일본군 제1대 고니시군이 상주 남방20리 지점 장천까지 진출하여 진영을 편성하고 청찰활동을 벌이고 있었으나 이일은 전혀 일본군의 동태를 몰랐다.개령 사람인 백성이 와서 일본군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자 이일은 민심을 교란한다는 명목으로 감옥에 가두었다가 다음날 아침 참수하였다. 이일은 군사 800명을 대리고 북천으로 나가서 군사훈련을 시키고 있었는데 일본군 척후병이 동정을 살피고 사라지자 잠시후 일본군의 전면적인 기습공격이 시작되자 오합지졸 병사들은 산산히 흩어지고 이일은 갑옷을 벗어버리고 상투를 풀어 헤친체 맨몸으로 문경에서 패전 장계를 올리고 조령을 넘어 충주의 신립장군 진영으로 도망갔다. 4.26일 일본군은 문경을 점령하였다.

 

신립장군이 충주에 도착하니 충주목사 이종장이 군사 8000여명을 모아 놓고 있었는데 대부분 기마병 부대였다. 신립장군은 새재를 정찰하려 나갔다.새재를 정찰하면서 참모들이 새재방어를 건의 하였으나 묵살하였다. 충주로 돌아온 신립은 4.28일 충주성에서 군사를 이동하여 북쪽 10리 지점 달천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립은 함경도 여진족 토벌시 기마부대를 잘 운용하여 여러번 승리했던 기억에 기마전으로 회심의 일격을 가하기로 하였다. 신립이 탄금대 배수진으로 결정하게 된 동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는데 새재방어를 하기에는 시간적으로 너무 늦었다고 판단하였으며 당시 병사들이 제대로 훈련이 되지 않은 병졸들로 전선이탈의 우려가 많았고 보병에는 기병부대가 공격에 효과적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미 기병부대를 막아내는 전술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기병대에 대한 대기병 방책이었다. 사산으로 방책을 설치하고 사선으로 늘어선 조총병이 달려오는 기병대에 1,2,3제대를 편성하여 각 제대가 순서대로 일제사격을 가하는 방법이었다. 신립의 기병대는 1차 1000기가 먼저 공격하고, 2차 2000기가 뒤이어 공격하였으나 조선 기병대는 낙엽처럼 쓰러졌다.  계속적인 공격에도 일본군은 물러나지를 않았다. 희생은 계속 늘어나고 마지막 잔여부대를 투입하였으나 일본군 조총앞에 이슬처럼 사라졌다. 일본군의 압박에 신립장군을 포함한 남은 전병사들이 달천으로 뛰어들어 산화했다. 이일은 이 와중에도 달천을 건너 도망치면서 조정에 탄금대 전투 패배를 보고했다.

 

신립장군이 탄금대 전투 전 4.1일경에 좌의정 유성룡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당시 환담내용이다.

유성룡: "장군! 머지 않아 나라에 변고가 있을 것 같은데, 그때면 그대가 군사를 책임지고 적을 막아내야 할 것인즉 자신 있어요?"

신립:"그까짓 것 쯤 걱정할거 없소이다!"

유성룡: "전에는 왜병들이 짧은 병기를 사용하였으나, 지금은 조총이라는 신무기를 사용한다는데..."  

신립:"왜병들이 조총이 있다지만 그게 어디 쏠 적 마다 다 맞는 답디까?"

유성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