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실걸이꽃 8 본문
실걸이꽃 8

실걸이꽃
실걸이꽃은 주로 해안가에서 자생하는 꽃으로 전설에 의하면 한 어부의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다 영영 돌어오지 않자 해안가에서 바다에 몸을 던져 죽고 난 다음에 그 영혼이 환생하여 해안가에 자생한 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꽃밭을 지나가면 낚시 바늘같은 가시가 옷에 걸리면 뿌리가 뽑힐지언정 가시가 부러지지 않는다고 한다. 일명 옷걸이꽃이라고도 한다.

새벽 자전거 타기와 블로그 할동, 그리고 서울 외곽으로 이주
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 등산을 다니면서 한 1년 쯤 지나자 건강이 호전되었다. 한 5년 쯤 다녔는데, 어느해 여름 폭우가 쏟아지면서 우면산에 대규모 산사태가 나서 등산로는 물론 약수터도 대부분 유실되어 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새벽 운동을 해야 하는데 좋은 게 없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새벽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자전거를 타본 지는 오래 되었다.
어릴 적에 고향 마을에 가내 공업으로 사탕을 만드는 작은 공장이 있었는데, 그 집 일군이 읍내에 사탕을 매일 배달했다. 대형 자전거를 타고 사탕을 박스에 담아 배달하고 있었는데, 난 누나들이 많았기에 동네 모든 총각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난 우리 마을에서 약 4킬로미터나 떨어진 읍내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하교하는 길에서 통상 그 사탕 일군을 만나게 되는데 그때마다 그는 나를 반기며 자전거 앞에 태워주었다. 누나들 덕분에 호강을 누린 셈이다. 내리막길을 달리는데 빠른 속도로 달리자 나는 오금이 저렸다. 짐 운반용으로 튼튼한 자전거였기에 그 무게로 인해 속도는 더 빨랐다. 그리고 자전거 타는 법도 가르쳐 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나는 옛날을 회상하면서 근처에 있는 방배동 한 자전거 점포에 가서 제일 싼 생활용 자전거를 15만 원을 주고 한 대 구입했다.
나는 자전거 타기가 익숙해지자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집에서 출발하여 서초역 ~ 교대역 ~ 강남역 ~ 신사역 ~ 고속터미널 ~ 내방역 ~ 사당역 ~ 방배역을 경유 집으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이 코스는 약 4~5킬로미터로 강남에서 가장 복잡한 노선이다. 특히 야간에는 밤새도록 불야성을 이루는 먹자골목, 클럽, 식당, 노래방이 즐비하고 새벽까지 영업을 하는 가게가 많은 코스다.
길거리 골목마다 비틀거리는 술취한 사람, 무리를 이루어 다투는 젊은이들, 의자나 길바닥에서 자는 사람, 귀가하려고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 등등 골목길은 젊음의 열기가 넘쳐나는 새벽길이었다. 골목길을 달리다 보면 버려진 가방이나 휴대폰, 종이 빽, 허리 벨트, 토설물 등등 무수한 물건들이 길바닥에 버려진 경우를 많이 보았다. 서을은 천국과 지옥이 병존하는 도시였다.
난 자전거 초보라 헬멧도 쓰지 않고 골목길을 잘도 다녔다. 수많은 차량을 만났지만 사고는 없었다. 잠원 근방 아파트를 지나가다 보면 새벽 장을 열고 있는 야채 장사를 만나면 야채도 구입해서 자전거에 싣고 오기도 했다.
싸구려 자전거라 펑크도 많이 났고 고장도 수시로 났다. 그래서 수리하는 수리 비용이 자전거 구입 비용 몇 배로 들었다. 그리고 새벽에는 문을 여는 자전거 점포가 없어 고장나면 문이 열릴 때까지 가게 앞에서 기다리곤 했다.
한강도 나가서 자전거길을 달렸다. 일반 모자에 검정 안경을 쓰고 똥폼을 잡으며 뚝섬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잠수교를 넘어다녔는데 고개가 다소 힘들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바가지 같은 헬멧을 쓰고 타는 모습을 보면서 헬멧을 왜 써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지금 생각하면 완전 초보가 똥폼을 잡고 마구 달린 것이다. 넘어지면 죽을 줄도 모르고 말이다.
이 음악은 신을 찬양하는 음악이라 속세인들은 그 깊은 맛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탐욕을 버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는 순간 이 음악은 당신의 상처난 영혼을 쓰다듬어 주고 위안을 줄 것이다.
한편, 난 블로그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가 다른 사람 블로그를 살펴보다가 나도 블로그를 개설해 보기로 했다. 블로그는 인터넷 세상에서 나의 보금자리와 같다기에 나도 보금자리를 만들어 본 것이다. 그래서 네이브와 다음에 블로그를 개설했다. 블로그 활동도 하면서 역사와 일상에 대해서 글을 작성해서 올리곤 했다. 나의 글을 보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열심히 찿아주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그런데, 처음 블로그를 만들어 시작할 때는 글 쓰는 문제가 아득했다. 무슨 내용으로 어떤 글을 쓸 것인가, 어떤 형식으로 쓸 것인가, 용어 선택, 띄어 쓰기, 맞춤법 등에 대해서도 문외한이었다. 한글이 이렇게 쓰기가 어려운 줄을 몰랐다. 무지한 인간이 무턱대고 시작한 것이다.
망설이다가 처음에는 남의 글을 옮겨 쓰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 남의 글을 복사하여 내 글인양 올리기도 하고, 복사가 되지 않는 글은 옮겨 적어 놓고 요약해서 올리기도 하고, 신문 사설 내용을 인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정한 카테고리와 방향, 주제도 없이 글을 쓴다는 것이 별로 의미도 없고 내키지 않았다.
그러다가 관심있는 주제와 관련된 책을 구입하여 읽으면서 내용이 마음에 들면 그 책을 옮겨 적으면서 블로그 글을 만들기 시작했다. 책은 작가가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두루 갖추고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글을 쓰기 때문에 나도 간접 경험으로 배우고 또 옮겨 적으면서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면서 글을 올리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면 맞춤법과 띄어 쓰기, 적당한 낱말 선택, 표현력, 기술 요령 등이 저절로 터득된다.
처음에는 한국사, 중국사, 종교의 역사, 유대인 관련 글을 올렸다. 그리고 로마의 역사를 약 8년 정도 기술했는데 로마의 역사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사는 저작권 문제로 중단하고 말았다.
그래서 방향을 바꾸어 나의 주변 일상 다반사를 병행해서 글쓰기를 해왔는데, 일상 다반사에 집중해서 글을 썼다. 처음에는 우면산을 오르면서 각종 떠오르는 생각을 사진과 같이 올리면서 적당한 길이의 시리즈로 올렸고, 산을 오른 지 5년 쯤 지나자 어느 여름날 우면산에 대규모 산사태가 나서 중단하고, 새벽 자전거를 타면서 보고 느낀 소감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서울 우리집 있는 동네가 재개발을 한다고 했다. 88년도 지은 연립 빌라집은 내가 살아온 기간이 벌써 30년이 다 되었다. 당시 저축한 돈과 빌린 돈을 모두 합하여 구입한 것이었는데, 집장사가 지은 새 빌라였고 아내가 학군이 좋다고 하여 그곳으로 이주한 것이다. 집장사가 지은 집이라 방수, 단열이 허술했고 좁은 평수라 불편했지만 부동산 재태크에 전무한 가족과 나는 빌라를 한 번도 굴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계속 살다보니 재태크 시기를 놓치고 세월만 흘러버리고 말았다.
재개발한다면 새로운 아파트형으로 지을 것인데 용적율 규제로 억 단위 분담금이 걱정이었다. 그때서야 알고보니 빌라는 통상 대지 지분도 적었다. 어려운 형편에 수 억이나 되는 분담금을 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빌라를 빨리 팔고 아들이 살고 있는 남양주로 이사를 하기로 했다. 우여곡절 끝에 빌라를 팔고 2015년에 남양주 호평동에 있는 평수가 적고 지은지 다소 오래된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가진 돈이 적어 불리함을 안고 매입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