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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역사 1338 : 로마 제국 1043 (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 4 )

로마의 역사 1338 : 로마 제국 1043 (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 4 )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 4

(제위 : 서기 306 ~ 337 )

밀라노 칙령

그리고 운명의 312년이 찿아온다. 서기 312년은 콘스탄티누스에게도 로마 제국에도 그후의 운명을 결정하는 해가 되었다.

이 해에 '밀비우스 다리 전투'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결전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콘스탄티누스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313년, 이제 제국의 서방의 정제로 올라선 콘스탄티누스와 동방 정제인 리키니우스가 밀라노에서 만나 수뇌 회담의 '코뭬니케' 같은 느낌으로 발표한 것이 그 유명한 '밀라노 칙령'이다. 이로써 로마 제국은 아직도 온갖 신이 뒤섞여 있는 '제신혼재' 상태이긴 했지만, 기독교를 종교의 하나로서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에게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다만 '밀라노 칙령'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명기되어 있다.

<오늘부터 기독교든 다른 종교든 관계없이 각자 원하는 종교를 믿고 거기에 수반되는 제의에 참가할 자유를 완전히 인정받는다. 그것이 어떤 신이든, 그 지고의 존재가 은혜와 자애로써 제국에 사는 모든 사람을 화해와 융화로 이끌어주기를 바라면서>

마치 18세기에 나타날 계몽주의 시대의 인권 선언을 선취한 느낌이지만, 그 계몽주의 시대에서 다시 300년이 지난 21세기가 되어도 그것을 읽을 때마다 감개가 새로운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종교를 기치로 내걸고 싸움을 그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읽게 하고 싶다. 게다가 '밀라노 칙령'은 제국의 각 지방에서 실제로 행정을 담당하는 지방장관에게 말하는 부분에서 그 주된 취지를 다시 한번 되풀이하고 있다.

< 기독교에 인정된 이 완전한 신앙의 자유는 다른 신을 믿는 자에게도 똑같이 인정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가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기로 한 것은 그것이 제국의 평화를 유지하는데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고, 어떤 신이나 종교도 그 명예와 존엄성이 훼손당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불평할 수 없는 자유로운 정신의 승화이다. 이 정신으로 현대까지왔디면, 민족이나 국가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도 종교를 기치로 내걸지는 않았을 것이다. 종교를 대의 명분으로 삼지 않으면, 싸움은 인간끼리 문제가 되고 단순한 이해관계의 충돌에 불과해진다. 그래서 싸우면 손해라는 것을 깨달으면 싸움은 저절로 수습된다. 종교를 기치로 내걸면 문제는 항상 복잡해진다.

그래서 '밀라노 칙령'의 문면만 보면, 로마 제국의 방향타를 크게 변경하지는 않았다. 기독교를 공인하기는 했지만 국교로 삼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칙령을 공표한 뒤 콘스탄티누스가 보인 언행에 있었다. 마치 칙령의 문면은 표면상의 방침일 뿐이고 본심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는 언행이었다. 그것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탄압으로 몰수당한 교회 재산의 반환을 명령한 칙령의 마지막 부분에 감추어져 있다. 그 문면은 다음과 같다.

<몰수한 뒤 경매에 부쳐진 교회 재산을 사들여 소유하고 있는 자에게는 그것을 국가에 반환할 때 국가로부터 정당한 값으로 보상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여기에 명기한다.>

3세기 후반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많은 황제들 중에는 기독교를 탄압한 황제도 있었지만, 탄압하지 않은 황제가 더 많았다. 후자의 치세에서는 탄압 당시에 몰수된 재산을 기독교회 관계자에게 반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경매에 부쳐진 몰수 재산은 소유하고 있는 사람에게 국가가 보상해주지는 않았다. 그런데 '밀라노 칙령'은 달랐다. 황제 즉 국가가 보상을 약속한 것이다. 그래서 경매에서 몰수 재산을 구입한 현재 소유자도 반환 명령에 기꺼이 따를 수 있었다.

한편 기독교회 관계자도 이 부분에 감추어진 중대한 의미를 알아차렸을 게 분명하다. 그것은 교회 재산이 기독교회에 갖는 중요성을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비로소 펼 수 있는 정책이었다.

일신교에서는 교조(敎祖)의 언행이 가장 중요한 교리가 된다. 그 교리는 그것을 해석하고 의미를 설명하는 사람을 통해서 비로소 일반 신자와 연결된다. 교리가 존재하지 않는 다신교에서는 전업 재관이나 성직자가 필요없는 반면, 일신교에서는 성직자 계급이 필수불가결한 것은 그 때문이다.

교회 재산의 필요성은 우선 그 성직자를 부양하고 유지하는 데 있다. 두번째 필요성은 물론 불우한 이웃에 대한 자선 사업이다. 기독교가 침투하기 전의 로마인도 불운한 사람에 대한 자선 행위를 '카리타스'라고 불렀는데, 오늘날에도 기독교 관계자들이 이런 비영리 자선사업을 '카리스타'라고 부른다.

요컨데 기독교회의 재산은 교회 활동을 좌우하는 중요하고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콘스탄티누스는 몰수된 교회 재산에 대해 단순히 반환 명령만 내린 것이 아니라 국가 보상을 약속했다. 그런 콘스탄티누스에게 기독교도들의 마음이 기운 것은 당연했다.

'밀라노 칙령'은 어디까지나 서방 정제 콘스탄티누스와 동방 정제 리키니우스의 연명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만이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획기적인 이 칙령이 콘스탄티누스 한 사람의 작품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은 콘스탄티누스가 리키니우스보다 훨씬 열심히 철저하게 칙령을 실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세력권인 제국 서방에서는 기독교 세력이 별로 침투하지 않아서 국가가 보상해야 할 금액이 적었던 점에도 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4세기 초의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 세력의 침투는 동방이 훨씬 높았고 서방이 낮았다. 서방에서 가장 침투가 높은 곳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한 일대였고, 콘스탄티누스의 국가 보상도 이 일대에 집중되어 있었다.

따라서 리키니우스 황제가 콘스탄티누스만큼 열심히 이 문제에 매달렸다면 국가 보상액은 제국 동방이 훨씬 높았겠지만, 리키니우스가 기독교 재산을 돌려주는 데 열심이었다는 증거는 없다. 리키니우스 황제에게 기독교 문제는 종교 문제에 머무른 반면, 그와는 반대로 열심이었던 콘스탄티누스에게는 기독교는 종교 문제를 넘어선 곳에 펼쳐져 있는 또 다른 것이었다. 문명히 말하면 기독교는 그에게 지배의 문제였다. 바로 그것이 리키니우스와 콘스탄티누스의 차이점이었다.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기 위한 단계를 하나씩 착실하게 올라가고 있던 시기의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 문제에 대해서도 하나씩 착실하게 실적으로 쌓아올리는 방식을 택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은 장래에 대한 포석이었고, 다른 의미에서는 아직 자신의 지배아래 들어오지 않은 제국 동방의 기독교도들에게 멀리 떨어진 서방에서 보내는 메세지였다. 그래서 그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경쟁자 리키니우스를 타도하여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는 324년을 기다리지 않고 시책을 차례로 실행에 옮긴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