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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역사 1335 : 로마 제국 1040 (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 1 )

로마의 역사 1335 : 로마 제국 1040 (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 1 )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 1

(제위 : 서기 306 ~ 337 )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사만이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위인으로 꼽히는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그가 기독교 진흥에 크게 이바지했기 때문이다. '대제'라는 뜻의 '마그누스'를 붙여 부르는 역사상 인물은 머리에 얼른 떠오르는 사람만 해도 세 사람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콘스탄티누스 대제, 그리고 사를마뉴(샤를대제)다.

기원전 4세기에 살았던 젊은 영웅 알렉산드로스를 빼면, 서기 3세기의 콘스탄티누스와 8세기 초의 샤를마뉴는 기독교와 관계가 깊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공인한 사람이고, 로마 제국이 존재했던 시대에는 북방 야만족의 한 부족이었던 프랑크족의 왕 샤를마뉴는 서기 800년에 로마를 방문하여 로마 교황으로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왕관을 받은 사람이다. 신성로마제국이란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 암흑의 중세로 돌입한 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유럽에 기독교를 기치로 내걸고강대한 제국을 건설하려는 시도였다. 프랑크 왕 사를에게 '대제'라는 뜻의 '마뉴'를 붙여서 부른 것은 사를이야말로 당시 유럽의 기독교회에 희망의 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과 관계가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브뤼셀에 있는 EU(유럽 연합) 본부 건물은 '사를마뉴'로 명명되어 있다.

신성로마제국은 결국 제국도 만들지 못하고 용해되어버리지만, 그 창시자라는 이유만으로 '대제'라고 불린다면 콘스탄티누스의 '대제'가 훨씬 자격이 있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에 그렇게 큰 공헌을 하지 않았다면 기독교가 그후 그만큼 융성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해 적지 않은 수의 역사가들이 교회 내부의 끝없는 교리 논쟁으로 피폐해진 끝에 결국 지역 종교의 하나로 몰락했을 거라고 대답할 정도다.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의 이런 관계를 기술할 때 연대순으로 추적하는 방법을 취하고 싶다. 빨리 결론을 내는 데에는 적절치 않는 방법인지도 모르지만, 역사에서는 대상이 되는 문제가 중대할수록 연대순으로 사실을 추적해가는 것이 더 적절한 경우가 많다.

때를 기다린 시기

콘스탄티누스의 정확한 생년월일은 실제로 아무도 모른다. 후세의 우리는 연구자들의 다양한 설을 참고하지만, 마지막에는 눈을 질끈 감고 '에라 모르겠다'하는 심정으로 그 설들 가운데 하나를 채택하는 결정을 내린다. 여기서 275년생이라는 설을 택한 것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는 것을 미리 말해둔다.

발칸 지방의 빈농 출신으로 수많은 백인대장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던 시절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와 선술집 딸 헬레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콘스탄티우스 주니어'라는 의미도 있는 콘스탄티누스였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를 비롯하여 모든 황제의 생년월일이 불확실했고, 나중에 '대제'를 붙여서 부르게 되는 콘스탄티누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출생지는 오늘날의 불가리아의 국경과 가깝지만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에 속하는 '니시'로 되어 있다. 로마 시대에는 '나이수스'라고 불렀고, 도나우 강과 가까운 시르미움에서 싱기두눔(오늘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수도 베오그라드)과 세르디카(오늘날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 하드리아노폴리스(오늘날의 터키의 에디르네)를 지나고 비잔티움(이제 곧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되고 1453년부터 터키령 이스탄불)을 거쳐 소아시아에 이르는 로마 가도, 로마 제국의 서방과 동방을 잇는 그 간선도로 연변에 발달한 도시였다. 따라서 군대 행군로도 되었기 때문에, 백인대장이 선술집 딸한테 반할 확률도 높았다.

나이수스에서 태어난 것도 아버지의 근무지가 자주 바뀌는 바람에 어머니가 친정에서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유년기도 같은 이유로 나이수스에서 보낸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도 아버지 콘스탄티우스는 성실한 남자였는지, 여기저기서 여자를 사귀었지만 그때마다 자식은 낳지 않았던 모양이다. 콘스탄니누스는 부모의 애정이 부족하지는 않았던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가 외아들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는 성실한데다 군사적 재능도 타고났기 때문에, 외아들의 성장과 아버지의 출세는 병행하여 진행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동방, 막시미아누스가 서방을 맡는 형태로 제국 방위를 분담하는 '양두정치'가 시작된 것은 서기 285년이었다. 막시미아누스 휘하의 장수였던 콘스탄티우스의 근무지도 이때부터 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제국 서방으로 정착된다.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본거지는 라인 강 방위선으로 직행할 수 있는 트리어에 있으니까, 황제 휘하의 장수들도 처자식을 그곳으로 불러들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열 살 이후의 콘스탄니누스는 모젤 강 상류, 오늘날 독일의 서쪽 끝에서 군마가 울고 병사들이 오가는 가운데 소년기를 보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이런 생활도 18세가 되면서 완전히 바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