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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역사 1337 : 로마 제국 1042 (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 3 )

로마의 역사 1337 : 로마 제국 1042 (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 3 )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 3

(제위 : 서기 306 ~ 337 )

정식 무대로

12년 동안 엎드려서 때를 기다린 콘스탄티누스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긴접적이기는 하지만 이번에도 디오클레티아누스였다. 305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치세가 20년에 이르렀다는 이유로 퇴위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뜻만 밝힌 것이 아니라 당장 실행에 옮겼다.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도 동시에 퇴위했기 때문에 사두정치는 제2차로 넘어가게 된다. 두 정제가 퇴위한 뒤를 이어 두 부제가 각각 정제로 승격한다. 서방 부제였던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도 서방 정제에 취임했다. 그것을 안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아버지 곁으로 가게 해 달라고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의젓하게 성장한 모습으로 나타난 아들을 아버지는 기꺼이 맞아들였다고 한다.

305년에 친숙한 오리엔트를 떠나 유럽으로 가기로 한 콘스탄티누스의 결단은 옳았을 뿐만 아니라 운좋은 선택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1년 뒤에 아버지가 죽은 것은 예상 밖이었을 게 분명하지만, 그때까지 1년 동안 아버지 밑에서 전투에 참가하고 실적을 쌓아서, '정제' 콘스탄티우스가 죽었을 때에는 아버지 휘하 장병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능한 지휘관을 만나면 자신들의 개죽음을 하게 된다는 것을 병사들은 알고 있었다. 30세에 아버지 곁으로 돌아온 콘스탄티누스는 제국 서방의 방위를 맡은 장병들에게 단순히 '정제'의 아들일뿐만 아니라 용감하고 유능한 사령관이기도 하다는 것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래서 콘스탄티우스가 급사하자 장병들은 후계자로 주저 없이 콘스탄티누스를 옹립했다. 만약 니코메디아 황궁에서 그대로 살고 있었다면 콘스탄티누스의 비약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아버지 쪽에서는 황통을 이어받았지만 어머니 쪽에서는 이어받지 않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런 점이 무시할 수 없는 의미를 갖게 된 상황에서는 실력으로 승부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는 그 길을 냉철할 만큼 교묘하게 나아간다. 30대에 갓 접어든 젊은 나이에 제국 서방의 '부제' 자리를 꿰찬 것이다. 다음 목표는 서방 '정제'인 세베루스를 자결로 몰아넣은 뒤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의 지배자가 된 막센티우스를 타도하는 것이었다.

308년 가을. 도나우 강 연안의 최전선 기지인 카르눈툼(오늘날 오스트리아 페트로넬)에 3년 전에 퇴위한 선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그리고 현재의 '정제'인 갈레리우스가 모여서 회담을 열고 콘스탄티누스를 '부제'로 정식 인정했다. 아버지가 죽은 직후에 아버지 휘하 장병들은 그를 '부제'가 아니라 '정제'로 옹립했다. "콘스탄티누스를 아우구스투스로!"가 그때 장병들이 지른 환성이었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가 마음만 먹었다면 카르눈툼 수뇌 회담에서 내려진 결정에 항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정제'에서 '부제'로 격하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장병의 옹립이 남발되었기 때문에 황제가 항상 단명으로 끝난 3세기의 폐해를 피하기 위헤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사두정치' 창안하고 실행했다. 퇴위하기는 했지만 아직 영향력을 갖고 있던 이 선제가 콘스탄티누스를 '부제'도 거치지 않고 '정제'로 옹립한 장병들의 결정을 간단히 승인할 리는 없었다. 따라서 지금은 단번에 올라갈 것이 아니라 한 걸음씩 전진해야 한다고 미래의 대제인 33세의 젊은이는 생각했을 것이다. 한 걸음씩 전진한다는 것은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현재 시점에서 가능한 수단은 모두 동원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부제에 정식 취임한 308년과 정제로 가는 길을 가로막은 최대의 장애물 막센티우스와 결전을 벌인 312년 사이에는 3년의 세월이 가로놓여 있다. 이 4년 동안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가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지만 기독교가 아닌 사람이 보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을 몇 가지 시도했다.

그중 하나는 자신의 혈통을 더듬어 올라가면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연결된다고 공언한 것이다. 북방 야만족의 한 부족인 '고트족을 정복한 자'라는 의미에서 '코티쿠스'라는 존칭을 붙인 클라우디우스는 로마 제국이 혼란에 빠진 3세기 후반에는 고대의 일리리아 지방이라고 불린 발칸 지방 북부 출신도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일이 드물지 않았지만, 군인 출신 황제인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이 지방 발칸 그룹의 선봉에 선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다른 군인 출신 황제들과는 달리 겨우 1년 반의 치세 뒤에 죽은 것은 장병들의 쿠테타를 일으켰기 때문도 아니오 잠을 자다가 측근에게 목이 짤린 것도 아니었다. 당시 유행한 역병에 걸려 죽었을 뿐이다. 이 점에서도 콘스탄티누스가 자기 조상으로 삼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두번째 시도는 태양신에 대한 신앙을 공공연히 밝힌 것이다. 태양신은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지만 측근의 배신으로 살해된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믿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황제는 살해될 때까지 5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면서, 현직 황제가 페르시아 왕의 포로가 되는 바람에 전대미문의 불상사에 충격을 받아 셋으로 쪼개져버린 제국을 5년 만에 재통일한 공로자인기도 했다. 이 공적 덕분에 죽은 뒤에도 장병들의 존경이 수구러들지 않았다. 그리고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도 개인적으로 무엇을 믿든 개인의 자유였다. 하지만 로마 황제는 최고제사장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의 공식 제사 때에는 로마 전통적 신들을 모실 의무가 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물론 콘스탄티누스도 최고제사장 자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시기의 콘스탄티누스가 이우렐리아누스 황제의 태양신 신앙을 부흥시킨 것은 분명했다. 불멸의 태양이라고 새긴 화폐도 발행했다. 태양신 축제일은 나중에 일요일이 되지만, 이날은 재판을 쉬기로 했다. 유대교나 기독교 같은 일신교는 개인의 신앙과 국가의 종교가 달라도 태연한 로마인과 로마 황제들을 '싱크레티즘'(재신혼재주의)이라고 바판했다. 이 시기 콘스탄티누스는 그야말로 여러 신이 뒤섞여 있는 '재신혼재주의'였다.

이 시기의 콘스탄티누스가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를 자신의 조상이라고 말한 것이나 널리 알려져 있는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태양신 신앙을 부흥시킨 것은 부하 장병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을까. 4세기 로마군의 주력은 발칸 출신이었고,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와 아우렐리아누스는 발칸 출신 황제들 중에서도 걸물로 여겨지고 있었다. 같은 발칸 출신인 콘스탄티누스는 이 무렵 부제에서 정제로 가는 길에 막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그것은 궁극적 목표인 단독 황제가 되는 단계에서 두번째에 해당하는 단계였다. 이 시점에서 그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그 목표를 자신이 이루려면 반드시 필요한 장병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었다. 그 지지를 확실히 얻을 수만 있다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을 조상이라고 부르거나 태양신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것쯤은 간단했을 것이다. 결전까지 4년 동안은 휘하 병력을 준비하는 데 소비했을 게 분명하다. 그 준비는 무기나 군사훈련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