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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역사 1336 : 로마 제국 1041 (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 2 )

로마의 역사 1336 : 로마 제국 1041 (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 2 )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 2

(제위 : 서기 306 ~ 337 )

때를 기다린 시기 (계속)

'사두정치'가 출범한 것은 서기 293년이었다. 사두정치는 동방과 서방의 두 정제가 제각기 부제를 두어 광대한 제국의 방위를 네 사람이 분담하자는 생각으로 만들어진 체제인데, 정제 막시미아누스와 협력하여 제국 서방의 안전보장을 담당할 부제로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가 임명된 것이다. 다만 사두정치의 창안자인 동방의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부제에 취임하려면 정제의 딸과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제국 동방의 부제로 임명된 갈레리우스는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딸 발레리아와 결혼한다. 이미 아내가 있었던 콘스탄티우스도 정제 막시미아누스의 의붓딸 테오도라와 결혼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의 생모인 헬레나와 이혼했다.

정제 갈레리우스가 이탈리아 밀라노로 수도를 옮겼기 때문에 부제 콘스탄티우스는 트리어에 계속 머물게 된다. 라인 강 방위선으로 직행할 수 있는 트리어(로마 시대 이름은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를 본거지로 삼은 것으로 보아, 갈리아 전역을 야만족의 침략에서 지키는 것이 부제 콘스탄티우스의 첫째 임무였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병역을 시작할 수 있는 자격 연령인 17세가 지났는데도 트리어의 아버지 밑에서 군사 체험을 쌓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정제의 딸로 황통을 이은 테오도라가 황후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트리어에는 이혼당한 헬리나가 있을 곳이 없어졌다. 또한 새 결혼은 새 자식의 탄생과 이어진다. 전처의 아들 콘스탄티누스도 트리어에서 계속 살 수 없게 된 곳도 마찬가지였다.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의 아들을 거두어 준 사람이 동방의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였다. 전처와 아들을 가까이에 놓아둘 수 없게 된 콘스탄티우스가 부탁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재혼하자마자 아내와 아들을 잊어버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는 없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수도로 삼은 곳은 소아시아 서쪽 끝에 있는 항구도시 니코메디아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니코메디아에서 18세부터 31세까지 12년을 보내게 된다. 나이도 병역 자격 연령을 지났으니까, 제국 동방의 방위를 책임지고 있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이 젊은이를 놀게 할 리는 없었다.

역사 자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이집트 전투에도 참가했을 테고, 부제 갈레리우스가 총지휘를 맡아 두 번에 걸쳐 치른 페르시아 전투에도 참가했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이렇게 아버지 슬하가 아니라 디오클레티아누스 밑에서 군사 경험을 쌓았다. 18세부터 30세까지라면 훗날의 비약에 대비하여 충전을 하기에는 가장 적절한 시기이기도 했다. 참고로 젊은이와 그를 거두어준 황제 사이에는 서른 살의 나이 차이가 있었다.

청년 시절의 콘스탄티누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 밑에 있었기 때문에 경험한 것이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최고 권력자가 다그치듯 잇따라 내놓은 칙령에 따라 전과는 전혀 달리 체계적이고 철저하게 이루어진 기독교 탄압이었다. 303년부터 연이어 발표된 칙령으로 기독교회와 거기에 소속된 신도들은 박해의 태풍에 휘말렸다.

니코메디아는 소아시아에 있는데, 소아시아에서 시리아, 팔레스티나 지방에 걸친 일대가 기독교 세력이 가장 강한 곳이었다. 이 일대의 기독교 세력은 국가 속의 국가를 형성하고 있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 탄압과 박해가 이 일대, 즉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무릎 밑에서 가장 엄격하게 실시된 것도 제국 어디보다 이 신흥종교의 세력이 가장 강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니코메디아 주교 관저는 광장을 사이에 두고 황궁 맞은편에 있었다. 이 시기의 탄압과 박해를 28세의 콘스탄티누스가 어떤 눈으로 보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