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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마음이 가는 곳에, 두바퀴가 머무는 곳에 13

마음이 가는 곳에, 두바퀴가 머무는 곳에 13

 

 

경기남동부 자전거 주행 8차 - 3

 

 


 

 

 

8차 주행로 : 대성리역 - 신청평대교 - 설악 입구 고개 정상 - 다락재 고개 - 명월리 명달고개 - 352번 도로 - 소나기 마을 - 북한강변길 - 신청평대교 - 청평역 - 호평동 

 

 

'소나기 마을'을 탐방하다.

 



소나기 마을 입구

 

352번 도로를 타고 내려가다가 좌측으로 소나기 마을로 들어가는 간판이 보였고 그 길을 따라 1.6킬로미터쯤 가면 소나기 마을이 나타난다. 다리를 건너 주차장이 넓게 만들어져 있고 입구에는 큰 돌에다 '양평군/황순원 문학촌/소나기 마을' 이라고 새겨져 있다. 

 

안내 간판을 훝어보고 자전거에서 내려 입장료 받는 곳까지 끌고 올라갔다. 자전거 거치대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입장료가 2000원이라 표를 끊어 들어갔다. 코로나로 평일이라 사람은 거의 없고 한적하다. 야외에는 화장실 공사가 한창이다. 오랫 동안 코로나로 이곳도 찿아오는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다. 전시관으로 올라가서 3개 층을 두루 관람했다. 황순원 작가 일대기가 한눈에 보인다. 

 

 

 


입구 다리 위에서 주변 풍경을 찍었다. 벗고개에서 내려오는 길이 보인다


주변 산하는 신록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개천에 물이 말라 있다




 입구 주차장 전경

 





 

입구 주차장

 

 

<소나기>라는 단편소설이 한국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나 자신을 포함 대부분의 시골 출신 총각들은 방학이 되면 서울이나 대도시에서 시골로 찿아오는 인친척 딸이나, 마을 이웃집에 놀러온 도시 소녀를 보게 되면 마음이 설레이는 것은 당연지사, 예쁜 옷에 뽀얀 얼굴에 공주같은 옷을 입고 예쁘장한 신발을 신고 나타난 소녀는 시골 촌놈들에게는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천사나 마찬가지로 보였을 것이다. 

 

소나기의 이루지 못한 순수한 사랑은 시골 촌놈의 순수한 사랑이 승화한 것이 아닐까. 이별이나 이루지 못한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끝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사 모든 일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안타깝게 이루지 못한 성취에 더 큰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넘쳐나는 법이기 때문이다. 황순원 작가는 이런 스토리를 간결하고 상징적인 글로 수많은 한국인의 가슴 속에 영원한 순수성을 심어 주었다고 할 것이다.

 

 

 

 

난 중학교 시절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그동안 삶에 찌들은 내 마음은 순수한 동심으로 돌아가려고 한참이나 걸려 되돌리려고 애를 써보지만 그 시절로 쉽게 깊이 들어가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추억을 되새기며 소나기 마을을 둘러보았다. 

 

사실 '소나기'라는 단편 소설이 교과서 책에 나왔기에 순수서정 문학 작품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지 황순원 작가에 대해서 깊이 알아본 적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린 사춘기에는 문학 소년 소녀가 되기 싶상이다. 물론 나도 문학 소년이 되어 문학에 심취한 적도 있었다. 60년대 당시는 '학원'이라는 청소년 잡지가 유명했는데, 중학교 시절 이웃 동네 L이라는 친구가 학원 문학지에 '물싸움'이라는 제목의 단편 소설이 당선되어 실린 적이 있었다. 

 

난 그 사실을 알고 문학적인 자질이 많은 그를 무척 부러워했고, 심지어 이웃 동내 그 친구 집을 찿아간 적도 있었다. 그의 집안은 우리집보다 부자였는데 집안도 널찍하고 농지도 많이 경작하는 집이었다. 그 친구 방에 들어가니 창가에는 청포도가 주렁주렁 달린 운치있는 분위기였고 깨끗한 온돌방 창가 책상에 앉아 글을 쓰기에도 아늑해보였다. 태양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한여름 방학 때였던 모양이다.

 

'물싸움'이라는 글 내용은 당시 농촌에 모심기를 전후하여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다 논에 넣고 모심기도 하고 몇 번의 논 김메기를 할 동안 논에는 물이 차 있어야 했다. 그런데 아래 논 주인이 자신의 논에 물이 말라가자 밤에 몰래 윗논 논둑에다 조그만한 파이프를 박아 물을 빼서 자신의 논에 물을 댄 것이다. 이튼날 이상하게 물이 줄어든 것을 알게 된 윗논 주인이 논둑을 살피다가 그 파이프를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아랫논 주인과 대판 싸움이 벌어지는 과정을 재미있게 묘사한 단편이었는데 그 글을 학원지에 투고하여 당선 되어 실린 것이었다. 난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문학적인 소질이 많은 그 친구가 무척 부러웠다. 

 

당시 난 글쓰는 방법도 모르고 쓸 줄도 몰랐다. 70년대 이런 저런 글을 읽다가 발견한 단편 소설이 있었다. 작고하신 오영수씨의 '실걸이꽃'이라는 단편 소설을 감명 깊게 읽고 오랫동안 내 머릿 속에 남아 있었다. 임관 후 교관 시절에 그 글을 찿아 다시 읽고 스토리를 만들어 피교육생들에게 5분 드라마로 만들어 재미있게 이용한 적도 있었다. 

 

 

 


















 

 

황순원, 그는 누구인가?

 

황순원(黃順元, 1915년 3월 26일 ~ 2000년 9월 14일)은 대한민국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본관은 제안(齊安)이고 (字)는 만강(晩岡)이다. 황순원의 주요 작품으로는 《소나기》, 《별》, 《독 짓는 늙은이》, 《학》 등이 있다.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에서 아버지 황찬영(黃贊永)와 어머니 장찬붕(張贊朋)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3.1운동 때 평양 숭덕학교 교사로 재직 중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평양 시내에 배포한 일로 옥살이를 했다. 한때 일제 경찰이 뿌린 서슬을 피하여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데, 1921년 당시 6세 때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이사하고, 1923년 만 8세 때 숭덕소학교에 입학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예체능 교육까지 따로 받으며 자라났다. 1929년에는 정주에 있는 오산중학교에 입학한다. 그곳에서 교장 출신인 남강 이승훈을 만나게 된다.

1930년부터 동요 를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1931년 7월 《동광(東光)》에 실은 〈나의 꿈〉이 등단작이다. 이후 숭실중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고, 중학교 시절 거듭 시를 발표하다가 1934년 졸업하고 일본 도쿄로 건너가 와세다 제2고등학원에 입학한다. 이해랑, 김동원 등과 함께 극예술 연구단체 《동경학생예술좌》를 창립하였고, 이 단체 이름으로 27편의 시가 실린 첫 시집 《放歌》를 간행했다. 1936년 와세다 제2고등학원을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교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한다. 그 해 5월에 두 번째 시집 《骨董品》을 냈다. 이후 시를 더 이상 쓰지 않고 문학 편력이 소설로 넘어간다. 그 첫 작품은 1937년 7월 《創作》 제3집에 발표한 〈거리의 副詞〉이다. 이듬해 10월에 〈돼지系〉를 발표하고, 이 두 작품을 비롯해서 창작 연대가 확실치 않은 다른 11편의 단편을 함께 묶어 그로부터 3년 뒤인 1940년에 《황순원 단편집》(나중에 이 책을 늪』라는 제목으로 고쳐 펴낸다)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 후에도 단편소설을 주로 쓰며 활동하다가 1942년 이후에는 일본 한글 말살정책으로 고향인 빙장리에 숨어 지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작품을 발표하지 않은 채 여러 단편을 썼다. 8.15 광복 이후 황순원은 평양으로 돌아가지만 북조선 공산화되면서 지주 계급으로 몰리자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이듬해 월남했다.

월남 후 서울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재직한 황순원은 지속적으로 단편소설을 발표했고, 1953년에는 장편 작가로서 그를 인정받게 한 장편 소설 《카인의 후예》를 발표한다. 1957년에는 경희대학교 국문과 조교수로 전임하여 생활이 안정되면서 김광섭, 주요섭, 조병화 등 동료 문인들과 함께 더 많은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는 1985년 발표한 산문집 《말과 삶과 자유》를 발표할 때까지 왕성한 창작열을 불태우며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2000년 타계할 때까지 소설은 더 이상 쓰지 않았으나 간간이 시작품을 발표하며 말년을 보냈다. 아들 황동규 시인이자 영문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는 현재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으며, 소년의 순수한 사랑을 부각시킨 내용의 뮤지컬로도 제작이 되기도 하였다.

2000년 9월 14일에 노환으로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자택에서 별세했다(향년 86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