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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악산 화악 터널 고개를 오르다 4

두바퀴인생 2022. 4. 27. 04:31

화악산 '화악 터널 고개'를 오르다 4

 

 

 

캐나다군 가평 지구 전적비 전경

 

 

북면을 지나 가평으로 오다가 길 옆에 있는 캐나다군 전적비에 들러 사진도 찍으며 한참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에 고개가 죽여진다. 그들은 왜 이곳까지 와서 그 소중한 목숨을 바친 것일까. 세계 평화를 위해 공산주의 침략을 저지한다는 자유 진영과 유엔의 기치 아래 이곳까지 달려와서 그 소중한 목숨을 바치며 고귀한 희생을 한 것일 것이다. 마치 우리가 월남전에 파병되어 수많은 젊은이들이 소중한 목숨을 희생한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에 대해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가 의문이다. 

 

가평 재향군인회에서 가평 지구 전투를 잊지 않고 있다는 뜻인지 도로 가로등마다 참전 국가의 국기를 우리 국기가 같이 게양되어 있다. 그래 가평군민이 잊지 읺고 있다는 뜻일게다. 그렇다면 이런 도로옆 전적비가 아닌 외딴 곳인 경강교 근방 보납산 끝자락에 세워진 가평 지구 전적비를 정비해주기를 기대해본다.

 

 

 

 

 

아래는 위키 백과에서 케나다군 한국전쟁 참전에 대한 인용한 내용이다.

 

 

참전 배경

 

6.25 전쟁 참전국 캐나다군은 1950년 7월 30일부터 1953년 6.25 전쟁 휴전까지 총 26,791명이 파병되었다. UN 깃발 아래 한국전쟁에 참전한 16개국 중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은 수의 군대를 파병하였고, 육·해·공군을 모두 파병한 4개 국가에 속한다.

캐나다는 신속하게 대규모의 육·해·공군을 파병함으로써 다른 유엔 회원국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유도하는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휴전 이후에도 1955년까지 캐나다군 약 7000명이 추가 파병되었다.

이처럼 캐나다와 대한민국은 6·25전쟁을 통해 혈맹의 우호관계를 구축하였다.

 

1950년 6월 북한군의 남침 소식을 접한 캐나다는 당시 한국과의 외교관계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UN의 북한국에 대한 응징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하며 1950년 6월 30일 캐나다 의회는 "집단안보의 효율성을 과시하기 위한 정부의 어떠한 조치도 적극 지지한다."라고 발표하며 한국에 대한 파병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당시 캐나다 하원의원의 총리였던 루이 생로랑(Louis St. Laurent)은 "유엔결의의 이행에 참여하는 것은 평화회복을 위한 유엔의 집단안보활동 중의 일부를 담당하기 위함이다."라는 연설로 파병 의의를 설명하였다.

 

참전 규모, 부대

  • 1950년 7월 5일 - 아다바스칸(Athabaskan)호, 캐유가(Cayuga)호, 시욱스(Sioux)호로 구성된 구축함 3척 파병

- 미 극동해군사령부에 배속되어 미 병력수송선 엄호 / 해상초계 / 해상봉쇄 / 해안포격 / 상륙작전지원 등 다양한 임무 수행

  • 1950년 7월 21일 - 제 426항공수송대대 파병

- 미국 워싱턴 맥코드(McChord) 공군기지에 배속

- 공중전 경험이 있는 조종사 22명을 선발해 미 공군에 파견

  • 1950년 11월 25일 - PPCLI(Princess Patricia Canadian Light Infantry) 제 2대대 파병

- 미 제 9군단 산하의 영연방 제 27여단에 배속

  • 1951년 5월 6일 - 캐나다 제 25여단 본대 파병

- 영연방 제 1사단에 배속

캐나다 지상군 참전부대 및 지휘관부대명지휘관계급성명참전기간

제 25보병여단 준장 J.M Rockingham 1951. 5. ~1952. 4.
준장 M.P. Bogert 1952. 4. ~1953. 4.
준장 J.V. Allard 1953. 4. ~1954. 6.
준장 F.A. Clift 1954. 6. ~ 1954. 12.
PPCLI 제 2대대 중령 J.R. Stone 1950. 12. ~1951. 11.
PPCLI 제 1대대 중령 N.G. Wilson Smith 1951. 10. ~1952. 11.
중령 J.R. Cameron 1951. 10 ~1952. 11.
PPCLI 제 3대대 중령 G.C. Corbould 1952. 10. ~1953. 10.
중령 H.F. Wood 1952. 10. ~1953. 10.
중령 C.E.C. MacNell 1952. 10. ~1953. 10.
중령 M.F. MacLachlan 1952. 10. ~1953. 10.
PCR 제 2대대 중령 R.A. Keane 1951. 5. ~1952. 4.
중령 G.C. Corbould 1951. 5. ~1952. 4.
PCR 제 1대대 중령 P.R. Binham 1952. 4. ~1953. 3.
PCR 제 3대대 중령 K.L. Campbell 1953. 3. ~1954. 3.
P22eR 제 2대대 중령 J.A. Dextraze 1951. 5. ~1952. 4.
중령 J.A.A.G Vallee 1951. 5. ~1952. 4.
P22eR 제 1대대 중령 L.F. Trudeau 1952. 4. ~ 1953. 4.
P22eR 제 3대대 중령 H. Tellier 1953. 4. ~ 1954. 4.
중령 J.L.G. Poulin 1953. 4. ~ 1954. 4.

 

 

 




 

케나다군 가평지구전투

 

가평지구전투일시장소교전부대

1951년 4월 23일 ~ 1951년 4월 25일 경기도 가평군 가평천 일대 영연방 제 27여단 vs 중공군 제 118사단

개요

중공군의 제 5차 공세 당시 사창리 지역 한국군 제 6사단 전선으로 돌파한 중공군 제 20군이 가평 방면으로 돌파구를 확대하자 뉴질랜드 제 16포병연대의 지원 아래 영연방 제 27여단 예하 캐나다군 제 2대대, 호주군 대대, 영국군 미들섹스대대가 1951년 4월 23일 ~ 1951년 4월 25일에 저지 진지를 편성하여 가평천 일대에서 중공군의 침투를 저지한 방어전투이다.

캐나다군은 이 전투에서 가평천 건너 맞은편 677고지에 배치되어 영연방 제 27여단의 좌일선 방어를 담당하였다.

전투 경과

  • 1951년 4월 23일 22시경 - 여단 전방의 우측전선을 방어 중이던 호주 대대 정면에 중공군 제 118사단 제 354연대 제 3대대가 모습을 보이기 시작함
  • 1951년 4월 24일 01시경 - 중공군의 선제 공격개시 -> 치열한 공방전 끝 호주군 대대가 적을 격퇴
  • 1951년 4월 24일 17시경 - 중공군의 끊임없는 공격으로 위협을 느낀 호주 대대 철수
  • 1951년 4월 24일 18시경 - 제 1기병 사단 제 5연대 병력을 양분하여 캐나다 대대 후방과 영국 미들섹스대대 후방에 각각 배치되어 지원
  • 1951년 4월 24일 20시경 - 중공군이 박격포를 통해 캐나다 대대 진지를 공격 -> 캐나다 대대의 대응으로 격퇴
  • 1951년 4월 24일 23시경 - 중공군이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하여 캐나다 진지 공격 -> 캐나다군의 진지 일부가 적에게 점령되었으나 곧바로 역습을 감행해 치열한 백병전을 통해 진지를 재탈환함
  • 1951년 4월 25일 새벽 - 중공군이 667고지 공격을 통해 캐나다 대대 진지 일부 탈환 -> 여단의 지원 하 진지 방어에 성공 / 중공군 북쪽으로 이동하며 영연방 제 27여단의 승리로 일단락

결과

영연방 제 27여단이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면서 유엔군은 북한강을 경계로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였다.

이 전투로 캐나다군은 10명이 전사하고 23명이 부상을 입는 인명손실이 발생하였다.









기타 한국전재에서 케나다군이 치룬 전투는 다음과 같다

 

자일리 전투 (1951.5.30) :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각흘봉과 영북면 자일리에서 중공군에 대한 공격 실패. 전사 6명, 25명 부상

 

고왕산 전투(1951.10.23~24) :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고왕리 고왕산 일대에서 중공군의 공격 저지 성공. 18명 전사, 25명 부상, 4명 실종

 

나부리 전투 (1953. 5.2~3) : 경기도 연찬군 백학면 나부리 마을 일대에서 중공군 공격 저지 성공. 30명 전사,41명 부상







 

캐나다군 인명 피해 현황

캐나다군 인명피해 현황전사/사망부상실종포로계

516명 1,212명 1명 32명 1,761명

한국-캐나다의 우호관계 형성

한국과 캐나다 양국은 6.25전쟁을 통해 맺은 우호관계를 통해 1963년 1월 14일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이후 한국은 1963년 1월 28일 이수영 대사를, 캐나다는 1964년 11월 11일 리차드 바워 대사의 신임장을 제정할 뿐만 아니라 1964년 한국은 오타와에, 캐나다는 1974년 서울에 상주대사관을 개설하였다. 이후에도 한국은 벤쿠버와 토론토, 몬트리올에 총영사관을 개설하며 양국의 우호협력을 위해 노력하였다.

2013년 양국은 수교 50주년을 맞아 각각 ’한국의 해‘와 ’캐나다의‘해를 선포함과 동시에 정전협정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전 참전용사의 해‘로 지정했다. 이후에도 양국의 정상 등 고위급 인사교류를 통해 양국 관계의 강화 및 실질적인 협력관계를 쌓아오고 있다.

 

한국-캐나다의 6.25 전쟁 참전기념 활동

한국의 참전기념 활동

한국의 참전기념 건축물이름목적건립일건립자위치

캐나다 전투 기념비 가평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고 캐나다군의 용맹성을 널리 알리기 위함 1983년 12월 30일 가평군, 캐나다 정부, 유엔한국참전국협회 경기도 가평군 북면 이곡리 207-4
홍천지구 전투전적비 홍천지구 전투에 참전하여 중공군의 공세로부터 중부 전선을 확보한 것을 기념하고 산화한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함 1957년 3월 15일 육군 제1사단 강원도 홍천군 홍천면 연봉리 산363-1
유엔기념공원 6.25전쟁에서 전사한 유엔군 장병들을 안치하기 위해 추모시설로 만든 세계유일의 유엔군 묘지 1951년 1월18 일 유엔군 사령부 부산시 남구 대연 4 동 779번지

참전기념 행사

  • 유엔군 참전용사 재방한 사업 - 1975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캐나다군을 비롯한 유엔군 참전용사들 참전에 감사의 뜻을 전하고, 한국의 발전상을 보여줌으로써 참전자의 자긍심과 명예를 선양하기 위한 행사이다. 매년 본 행사를 통해 캐나다 6.25 참전용사들이 한국을 방문한다.
  • 정전협정 및 유엔군 참전의 날 - 2013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으며 국가보훈처 주관 매년 정부기념행사 거행한다. 유엔군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공헌을 기리기 위하여 시행되었다.

캐나다의 참전기념 활동

캐나다의 참전기념 건축물이름목적건립일건립자위치

오타와 한국전 전사자 기념비 전쟁 참전용사 뿐만 아니라 휴전 후 평화복구를 위해 한국에 주둔했던 캐나다군을 기리기 위함 2003년 9월 28일 캐나다 참전용사회 south side of the Mackenzie King Bridge between Elgin St. & the Rideau Canal Ottawa, ON
캐나다 전쟁 박물관 6.25전쟁에 대한 전시실을 마련하고, 가평 전투를 중심으로 전쟁의 발발배경 / 경과 / 결과를 다양한 전시물 및 사진과 함께 전시 1880년 . 1 Vimy Pl, Ottawa, ON K1A 0M8, Canada
캐나다 가평 참전비 가평전투에 참전했던 군인들을 기리기 위함 1997년 1월 10일 캐나다 의회 Radar Hill, Pacific Rim National Park Vancouver Island, BC

참전기념 행사

  • 한국전쟁 참전용사의 날 - 잊혀진 전쟁으로 인식된 전쟁의 참전용사에 대한 예우와 다음 세대에 자유와 평화의 중요성을 알리자는 취지로 2013년 법정기념일로 제정되었다.




 

 

 

케나다군 전적비를 둘러보고 착찹한 마음으로 가평으로 출발하였다. 북면을 지나 가평까지 국도에 지나다니는 비교적 차량이 많은 편이다. 2차선 도로라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는 목숨을 걸고 가야 한다. 그래서 도로에서 로드킬 당하는 야생동물이 되지 않으려고 궁리를 하다가 베낭 뒤에 안전 구호를 달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손바닥 그림을 집에서 만들고 구호를 써서 달게 되었다. 

 

베낭 뒤에 붙인 손바닥 그림과 "감속! 감사!" 안전 구호가 효과가 있었는지 뒤에서 추월하는 자동차들이 조금은 조심하는 것처럼 보인다. 평지에서 밧테리 3단으로 달리면 속도가 시속 25~30키로미터 이상 가능하기에 북면에서 가평까지는 한 시간도 안걸려 빠르게 온 셈이다. 가평 시내를 우회하는 새로 만든 하천 제방길을 따라 가평역에 도착했다. 역광장 그늘에서 음료를 마시고 잠시 정리하면서 휴식을 취한 다음 청춘열치를 타고 호평동 집으로 돌아왔다.

 

 


공도를 달릴 때는 이런 구호가 적힌 그림을 베낭에 달고 달린다. 좀 봐달라는 의미다.
 

 

 

이틀 후 4월 21일 아침 9시경, 사능에 있는 단골 자전거 점포에 도착하여 항상 자상하고 자전거 정비 기술력이 뛰어나고 또 자전거 정비를 매우 예술적으로 자전거를 정비해주시는 사장님께 인사하고 화악산 '화악 터널 고개'를 올랐던 이야기를 하려고 갔는데, 먼저 어떤 사람이 일찍 와서 자전거를 정비를 하고 있었다. 덩치도 좋은 중년인데, 자전거도 비싼 자전거로 좋아 보이고 그 사람도 보아하니 자전거 메니아처럼 보인다. 40~50대 정도 나이인데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올랐던 도마치 고개와 화악 터널은 밥먹듯이 오른다고 한다. 알고보니 '경기도 가평 5고개'를 주로 주파하는데 거의 매일 팀을 짜서 그 고개를 다닌다고 이야기 한다. '경기 가평 5고개'라는 이야기를 나는 처음 듣는데 그 사람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경기도 가평 5고개'란 가평에서 사창리로 넘어 가는 '화악 터널 고개', 사창리에서 다목리로 넘어 가는 '실내 고개', 다목리에서 육단리로 넘어 가는 '수피령 고개', 육단리에서 광덕리로 넘어오는 '하오 고개', 광덕리에서 가평으로 넘어 오는 '도마치 고개'를 가리킨다고 한다. 반시계 방향으로 화악 터널~실내 고개~수피령 고개~하오 고개~도마치 고개를 넘어오는 순환 코스와 8자 코스, 짧게는 화악산만 도는 화악 터널~도마치 고개를 넘는 것이라 한다. 

 

그 사람들은 새벽같이 이동하여 가평역이나 북면 면사무소에서 출발하여 그날 예정된 코스를 돈다고 한다. 서울 근교의 동부 5고개 코스도 있지만 이 경기도 가평 5고개는 한적하고 외진 지역이라 혼자 주행하기에는 위험하고 팀을 짜서 주행한다고 한다. 이동 거리 100 ~129킬로미터가 넘고 해발 2,200미터 상승고도로 백두대간 로드 코스급 라이딩 길이라고 한다. 

 

화악 터널 올랐던 이야기를 하려다가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나는 오늘 '경기도 가평 5고개'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그 사람은 오남읍 근방에 사는 사람으로 한창 나이의 중년들 끼리 팀을 이루어 이 정도 고개는 평지처럼 주행한다고 한다. 사장님 말인즉, 그들은 오르막 오르는 속도가 시속 25~27킬로미터 속도로 달린다고 하니 괴물들임에 틀림없다. 한마디로 '자전거에 미친 사람들'이란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실제 그들은 각종 자전거 경기 대회에서도 상위 수상권에 들고 매일 새벽같이 출발하여 5고개 길을 주행하고 저녁이면 집으로 온다고 한다.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넓고 유능한 인재는 많다는 사실이 증명된 셈이다. 나도 저런 젊은 나이였다면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70대인 이 나이에 도마치 고개와 화악 터널 고개를 오른 것만으로 나는 큰 위업을 이룬 것처럼 만족하고 있는데 5고개라니 난 엄두가 안난다. 이 5고개를 넘으려면 하루에 넘기 힘들다. 밧테리가 감당을 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넘으려면 1박 2일로 잡아 충전기를 챙겨 다목리나 육단리, 사창리 중 어느 한곳에서 1박을 하고 도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혼자서는 위험한 길이라 두려움이 앞선다. 하오 고개는 터널 길이가 무려 1.5킬로미터라니 너무 위험하여 혼자서는 무리다. 능력이 미천한 내가 너무 과욕을 부리면 문제가 생길 우려가 있어 당분간 보류하기로 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