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봄을 기다리며......5

봄을 기다리며......5

 

 

 

가평 지구 전적비

 

날씨가 풀리다가 주말부터 눈비가 섞여 내리면서 다시 추위가 찿아왔다. 내린 눈은 금방 녹았지만 날씨는 기온이 급강하하여 주말에는 하루 쉬었다. 봄이 오는 줄 알고 고개를 내밀던 새순들이 모두 땀짝 놀라 움추러들었으나 지열의 기운을 타고 다시 생기를 되찿고 있다. 양지 쪽에는 각종 잡초들이 분주히 파란 잎을 피우고 있다.  

 

통상 3월 말경에 찿아오는 꽃샘 추위는 기온이 급강하하고 진눈깨비가 내리는 경우가 많다. 내가 경험한 과거 사례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내가 15사단에 근무할 당시, 때는 1990년 3월 26일 사창리 북방 15사던 지역에 갑자기 진눈깨비가 내리면서 기온이 급강하했다. 주요 감시.감청 시설이 있는 대성산, 그리고 15사단 GOP에 위치한 적근산 일대에 밤사이 정전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긴급히 눈길을 헤치면서 대성산, 적근산 현장을 정찰하러 올려보낸 전공들의 보고가 왔는데, 수십 개의 고압 전주들이 성냥깨비가 뿌러지듯 여러 고압주가 쓰러졌다는 보고다. 이유는 고압선에 얼어붙은 얼음 직경이 20~30센티미터 정도로 얼음이 얼어 붙어 그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어느 한 부분 고압선이 절단되면서 연결돤 고압 전주들이 뚝뚝 모두 뿌러지면서 넘어진 것이다. 그후 피해 상황을 보고받고 바로 상급 부대에 긴급 재난 보고를 하고 군단의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자 군단에서 보관하고 있던 고압주가 수송되고 한국 전력 직원과 사단 보병 병력을 지원받아 강판 조립주, 콘크리트 고압주 등 고압 전주를 도수운반으로 옮기면서 세우고 전기를 복구하는데 무려 2주일이나 걸렸던 적이 있다. 이처럼 3월의 날씨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동안 춘천을 자주 다녀온 적은 있으나 중간 지역인 가평을 지나 다니면서 꼭 방문하고 싶었던 곳이 있었다. 바로 '가평 지구 전적비'다. 가평 지구 전투가 6.25 전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게 평가되고 있지만 실제는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를 막아내는 데 기여한 가장 중요한 전투이기도 하다. 특히 국군 6사단이 사창리에서 붕괴되면서 무질서하게 후퇴하자 중공군은 6사단을 뒤따라 화학산을 넘어 가평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경춘가도를 차단하여 유엔군을 동서로 양분할 속셈으로 공세 작전을 펼친 전투다. 이 전투에서 유엔군은 미군, 영연방군 등이 혈전을 거듭한 끝에 지켜낸 전투이기도 하다. 그래서 꼭 전적비를 찿아가 보고 싶었다. 

 

가평 지구 전적비가 분명 가평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가평 시내에서 가까운 북한강 옆 보남산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날 호평동에서 출발, 가평에 도착하여 다시 지도를 살펴보고 경강교로 오르지 않고 가평 구시가지로 향했다.

 

 

 

가평 지구 전적비 가는 길

 

 

 

 

가평 지구 전적비 위치는 북한강 자전거길에서 가평역을 지나 캠핑장을 지나면 통상 경강교로 올라가는 길을 따라 가는데, 전적비로 가려면 경강교로 오르지 않고 경강교 다리 밑을 통과하여 강변길을 따라 구시가지로 방향으로 가다보면 우측으로 강을 건너가는 교량이 나온다. 다리를 지나 어디로 올라가야할 것인지를 살피다가 지나가시는 할아버지께 전적비 위치를 물어보았다. '도로 고개 정상까지 올라가서 우측 산으로 올라가면 된다'고 하셔셔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고 도로를 따라 고개길을 올라가니 정상 부근에서 우측으로 올라가는 입구가 보인다. 지금은 관광객 레일 바이크로 시용되는 폐기돤 철로길 건너 산으로 올라가는 비포장 길이다. 입구에는 어떤 전적비 안내 간판도 없다. 

 

 

 

 

올라가는 입구. 전적비 안내 간판은 어디에도 없다.

 

 

 


페기된 철로를 이용하여 레일 바이크를 운행하며 돈을 벌고 있다. 지자체도 오로지 돈버는 데에만 몰두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입구에는 전적비에 대한 아무런 안내 간판도 없고 표식도 없다. 비포장 돌밭 오솔길, 전적비 올라가는 길이 이런 모양일진데, 전적비 관리도 보나마나일 것이다. 포장된 길도 아니고 안전을 위한 난간도 없다. 돈을 벌기 위해서 폐기된 철로는 번듯하게 정비하여 레일 바이크로 돈을 벌기에 여념이 없지만 이런 전적비에는 정비.보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듯하다. 수많은 이국 젊은이들이 목숨바쳐 이 고장을 지켰지만, 반세기가 지난 지금 그런 고마움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참으로 부끄럽고 안타깝기만 하다. 



가평 시내 강변 도로에서 레일 바이크를 타는 입구가 있다.

 

 

난 자전거를 끌고 올라갔는데, 자갈과 바위가 울퉁불퉁하여 타고 오르기는 불가하다. 입구에 '보남산 관음사' 간판이 보이고 비포장 산으로 올라가는 소로길이다. 거리는 약 500미터. 나는 분노를 삼키며 전몰 장병들에 대한 죄많은 인생을 고행하는 자세로 자전거를 끌고 올라갔다. 자전거도 무겁지만 이런 전적비 관리 태도에 분노가 더욱 차오른다. 겨우 중간쯤 올라가서 휴식을 취하면서 나무 사이로 둘러보니 가평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다시 출발하여 올라가면 허름한 관음사라는 사찰이 보이고 휘돌아서 올라가면 바로 전적비가 있는 정상이다. 

 

 

 

 


올라온 길을 뒤돌아보며 찍은 전경, 전주도 기울어져 있다.



울라가면서 바라보니 가평 시내가 한 눈에 보인다.

 

 

  

가평 시내가 보인다

 

 

허름한 사찰이 전적비 바로 아래 흉물스럽게 지어져 있다. 전적비 주변에는 나무가 자라 주변 전경이 잘 보이지도 않고 전망대는커녕 전적비 주변에 각종 운동기구가 어지럽게 설치되어 있고 주변 환경은 방치된 지 오래된 것처럼 보인다. 나무가 울창하여 외부에서는 보이지도 않고 잡목이 무성하고 허물어진 곳, 낙엽이 쌓여 있어 주변 정리가 되어 있지도 않다. 게양되어 있는 태극기는 빛바래고 낡아 실밥이 보일 정도로 닭았고 너덜너덜하다. 가평군에서 얼마나 관리를 불성실하게 하고 있는지 한 눈에 보인다.

 

올라가는 길이 이렇게 불편한데 사람들이 찿아올 리도 없다. 비포장 돌밭길을 올라가면서 생각나는 것은 이곳을 지키기 위해 중공군의 공격을 미군과 영연방군의 선전으로 가평은 중공군의 점령을 피할 수 있었다. 경춘국도가 적에게 피탈되었다면 둥서 전선이 분리되어 서울이 다시 함락되고 유엔군 전선이 붕괴되었을 지도 모른다. 

 

 

 

 


중간에 쉬면서...... 올라가야할 길


전적비 근방에 올라오니 북한강과 경강교가 눈아래 보인다.

 

 


경강교와 레일 바이크 철교가 보인다. 북한강 상류 방향

 

 


경강교와 멀리 신축 철교가 보인다. 북한강 하류 방향
 

 

물론 6.25 전쟁의 원죄는 일단 조선의 망국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일제의 식민지배와 패망, 그리고 미국의 38도 선 설정으로 한반도를 분단시킨 것은 미국이다. 다시말해 전후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분할 되어야 했지만, 실제는 미국이 일본 본토를 혼자 독차지할 욕심과 소련의 대일전 참전으로 다급해진 미국이 한반도 38도 선을 경계로 소련에게 북한 지역 일본군 무장해제를 허용했기 때문에 남북 분단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도 아닌 우리가 분단되어 비극적인 6.25 전쟁까지 치르고 반세기가 넘도록 남북이 서로 총을 겨누고 이제는 북한의 핵무기를 머리에 이고 살아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가 현재의 자유 민주 체제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얄굿게도 한미 동맹의 끈을 놓지 않는 길 뿐이다. 그 끈을 놓는 순간 진보 세력들이 앞장서서 날뛰면 적화는 순식간에 이루어질 것이고 과거 월남이 월맹에게 함락되듯이 한반도 우리도 북한 공산주의 독재정권에 함락되는 것과 같은 꼴이 될 것이다. 

 

 

 


전적비 아래 자전거를 세워놓고 올라갔다.

 

 

어쩌면 과거를 송두리채 잊고 미래로만 나아가는 우리의 현실이 타당한 것인가. 아니면 지난 과거를 거울삼아 미래를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인가. 역사를 잊은 민족은 멸망의 길을 간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가. 전적비는 번듯이 만들어 놓고 세월이 지났다고 모두가 잊어비리고 내팽개쳐 버린다면 또다시 비극적인 역사를 되풀이 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전적비 관리는 관련 기관과 지자체가 숙고하여 대대적인 정화 작업을 벌이고 매년 기념 행사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전적비 소개 안내 간판

 

전후 미국의 일부 지도층이 생각할 때 한반도는 일제의 일부로 생각한 듯하다. 나라가 없어지고 일제에 합방되었으니까. 그리고 인력과 물자를 동원하여 일본군에 가담하여 미군과 전쟁을 치렀으니까. 그리고 창씨개명을 하여 모두 일본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일제의 일부로 볼 수박에 없었을 것이다. 해방 후 미군정 기간 내내 좌우 대립이 극렬했고 수차례의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남한 만이 단독으로 유엔 감시하 선거를 치르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게 군정을 이양하고 철수했다. 

 

한반도는 미국의 맹방으로 대륙 진출과 차단의 발판으로 그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조선말 미국이 미일밀약으로 러일 전쟁과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에게 한반도를 포기한 것이나, 전후 에치슨 선언에서 보듯이 미국은 한반도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 틀림없다. 미국의 이런 전략적ㅇ닌 안목 부족과 실수로 북한 김일성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일명 '한반도 통일전쟁'이 바로 6.25전쟁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맨주먹의 한국군은 북한군의 전차 공격앞에 지리멸렬, 전 전선이 무너지고 3일 만에 수도 서울도 적의 수중에 남어 갔다. 당시 극동군 사령관 멕아더는 급거 날아와 한강 방어선을 살펴보고 결단한 것이 우선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를 오산으로 급파하여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하고, 동시에 미 제24사단을 대전 일대에서 방어전에 투입하는 계획을 수립토록 지시했다. 그러나 오산으로 급파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남하하는 적 전차를 저지하지 못하고 중과부족으로 무너지면서 대전으로 물러나고, 대전으로 급파된 미 제24사단은 대전 북방에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북한군의 침투 전술에 전 전선이 붕괴되면서 적에게 사단장이 포로가 되는 치욕을 겪었다. 낙동강까지 후퇴하여 낙동강 방어선에서 악전고투하던 유엔군은 멕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를 뒤집고 38선을 돌파하여 북진, 평양을 수복하고 압록강까지 진출하였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주요 전력들이 사방에서 포위가 되자 장비와 무기를 모두 버리고 후퇴한 것이 1.4 후퇴다. 중공군은 후퇴하는 유엔군을 뒤따라 파죽지세로 남하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 이남까지 진출하였으나 유엔군의 조직적인 반격으로 지평리 전투, 용문산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피의 능선 전투, 현리 전투, 백마고지 전투 등으로 서로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으로 벌이던 와중에 가평 지구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어지럽게 설치되어 있는 녹쓴 운동기구들. 

 

전적비 보다 운동하는 시민들을 위해 보문산은 존재하는 듯하다. 전적비가 이런 상태로 관리된다면 차라리 전적비를 철거하고 시민들을 위한 전망대, 운동기구 등을 새로 설치하여 운영하는 편이 낳을 듯하다. 


사람들이 거의 찿지 않는 외로운 전적비, 이 땅을 지킨 호국영령들이 애처롭기만 하다.



북한강 철교 방향


전적비 바로 아래 관음사 사찰 지붕이 나무 사이로 보인다.

 




빛바랜 태극기. 관리가 얼마나 엉망인지 한심하다. 

 

 

 

이틀 후 가평에서 춘천댐으로 넘어가기 위해 가평에서 북면으로 가는 길에 미군 전적비, 호주군 전적비, 뉴질랜드군 전적비, 캐나다군 전적비가 가는 길에 눈에 뛰었다. 나중에 들러보기로 하고 그냥 지나갔는데, 인터넷을 보니 그런 전적비는 해당 국가에서 전사자 후손들이 자주 찿아오는 곳이라 단장도 잘되어 있고 관리도 잘되어 있는 전적비들이다. 그러나 통합적인 가평 지구 전적비는 해당 국가가 없고 오로지 우리 나라에서 관리하고 정비하는 책임이 있을 것이다. 도대체 우리 보훈처는 무엇이고 지자체는 무엇인가? 전적비 관리를 이런 정도로 한다는 것은 전물 장병에 대한 예우가 형편없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실제 보훈처의 유족 관리가 형편없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이런 고지대에 포장도 하고 전망대도 만들고 운동 시설도 하고 전적비 관련 정화작업을 한다면 가평 시내는 물론 주변 경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이 정말 좋은 장소이다. 

 

 

가평 지구 전투 전적비를 방문하는 목적은 6.25 전쟁의 전세 전환의 계기를 만들어준 중요한 전투이기 때문이다. 비록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희미해져가는 전사지만 이국만리 낯선 땅에서 목숨을 희생한 많은 젊은이들이 생각나서다.  

 

가평 지구 전투는 6,25 당시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진출했던 유엔군이 중공군의 기습 침투 공격으로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1.4후퇴를 거듭하여 서울을 다시 빼앗기고 용문산 전투, 지평리 전투를 치루면서 밀고 밀리는 전투가 계속되던 중, 중공군이 서울-춘천을 잇는 국도를 차단하기 위해 사창리에서 가평 쪽으로 공세를 벌여 미군을 포함한 영연방군, 한국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가평 지구 전투는 휴전 회담을 앞당기는 계기가 될 정도로 중요한 전투이기 때문이다.

 

 

가평 지구 전투

 

영연방 제27여단은 1951년 4월 22일 국군 제6사단의 철수를 지원하기 위하여 가평일대로 진출하였다. 여단은 캐나다 대대를 가평천을 감제할 수 있는 좌전방 내촌(內村) 부근의 677고지에, 호주대대를 가평 계곡을 통제할 수 있는 우전방 죽둔리의 504고지에 배치하는 한편 아질 대대를 예비로 가평 부근에 집결 보유하였다. 그리고 여단에 배속된 미 전차 제72대대 1개 소대를 죽둔리에 배치하였다.
 
 


가평 지구 전투 요도 
 
 
사창리를 돌파한 중공군 제118사단이 4월 23일 야간공격을 재개하자, 국군 제6사단은 경계부대인 미들섹스 대대와 함께 철수하여 가평 북쪽 가평천변에 배치되었다. 중공군은 호주대대의 배치 상황을 모르고 신속히 가평을 점령할 목적으로 종대대형을 유지한 채 도로와 계곡을 따라 내려 왔다. 우전방 호주대대는 대대의 화력은 물론 지원된 전차 및 포병화력을 기습적으로 집중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은 4월 24일 01:00경 전방에 배치되었던 전차소대가 재보급을 위해 철수하자 즉시 2개 대대로 포위공격을 기도하였다. 반면 호주대대는 통신이 두절되어 전방중대와 연락은 물론 포병의 화력지원도 요청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후방의 대대지휘소와 박격포진지마저 피탈되어 최악의 상황에서 근접전투를 펼치게 되었다. 대대는 포위된 상황에서도 일부 진지가 피탈되면 즉시 역습으로 회복하면서 새벽까지 504고지의 방어진지를 고수하였다. 날이 밝아 아군의 항공폭격과 포병사격이 집중되자, 중공군은 공격을 중지하고 다수의 사체를 유기한 채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즉시 추격작전을 펼친 영여단 수색대는 죽둔리 부근에서 중공군 40명을 생포하였다.
 
전반적인 상황을 분석한 영 여단장은 적이 일시적으로 철수하였지만 이 지역에서 장시간 체류하면 오히려 피해만 증가할 것으로 판단하고, 호주대대를 미들섹스 대대 후방으로 철수토록 하였다. 대대의 철수를 지원하기 위하여 오전에 연료 보충과 장비 점검을 완료한 미 전차 소대가 복귀하여 화력으로 중공군의 추격을 저지하였고, 제16포병연대도 연막탄과 고폭탄을 사격하여 적의 시계를 차장하고 대대의 철수를 지원하였다.
 
중공군은 23일과 24일 양일 동안 비교적 기동이 용이한 가평천 골짜기를 따라 진출하여 서울∼춘천도로의 차단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여단의 강력한 저지작전과 포병의 화력지원에 많은 인명 피해를 입게 되자 25일 새벽 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따라서 적의 유엔군 전선 분할 기도는 완전히 좌절되고, 아군은 북한강 남쪽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얻게 되었다. 영연방 제27여단은 3일간의 혈전을 종료하고 25일 밤에 양평으로 철수하였고, 부대명칭도 영연방 제28여단으로 개칭하였다. 아군은 사창리가 돌파되면서 가평이 크게 위협을 받게 되었으나 영 제27여단의 선전으로 가평을 고수하여 중공군의 전선분할 기도를 좌절시켰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가평지구전투(加平地區戰鬪))]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악산 '도마치재 고개'를 넘다  (0) 2022.04.10
봄을 기다리며......6  (0) 2022.03.27
봄을 기다리며......4  (0) 2022.03.13
봄을 기다리며......3  (0) 2022.03.06
봄을 기다리며......2  (0) 2022.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