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북한강 자전거길 정취 2 : 다산 정약용 문화거리 탐방 1

북한강 자전거길 정취 2 : 다산 정약용 문화거리 탐방 1

 

 

 


다산 생가 모습

 

 

다산 정약용 문화거리 탐방 1

 

기억에도 가물거리는 오래 전 우연히 이곳 근방을 지나가다가 도로 옆 '다산 생가'란 팻말을 보고 다산 생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생가와 묘지만 덩그러니 있고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이 그야말로 아무런 흔적도 없는 옛날 그대의 모습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다산에 대해 조선 시대 대표적인 실학자라는 생각이 들어 그분의 진취적인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조선이 망국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안타까운 마음에서인지 생가 뒷편 산에 조성되어 있는 다산 선생 묘지에 올라가 절을 올리고 잠시 생각에 적었던 적이 있었다.

 

지난 10월 중순경 어느날, 팔당댐 터널을 지나 옛 능내역으로 가다보면 중간에 신호등이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내리막 도로를 타고 가다 가파른 고개를 넘으면 우측으로 다산 문화거리로 가는 길을 만나게 된다. 몇 번이나 찿아가려다가 휴대폰으로 지도를 보고 찿아갔다. 고개길은 경사가 심하여 밧테리를 5단으로 놓고 최저속으로 올라갔다. 대부분 자전거족들이 이런 가파른 길 때문에 방문을 꺼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다산 문화거리를 둘러보면서 너무나 많이 변한 모습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남양주시에서 다산을 내세워 신도시도 만들고 다산길도 만들고 온통 다산 이름이 곳곳에 들어간 것을 보면 남양주시가 얼마나 다산 홍보에 열심이고 남양주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이 될 정도다. 마치 구리시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을 내세우는 것처럼 말이다. 

 

다산 문화거리는 생가와 박물관, 도로, 모형, 표지석, 다산의 대표적인 글귀, 주차장 등 이곳을 찿아오는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엄청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주변에는 식당도 보이고 다산 유배지인 전남 강진에 있는 정자도 그대로 이곳에 재현해 놓았다.   

 

 

다산이 실학의 중요성을 깨달은 이유는 무엇일까. 5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유교 사상에 함몰되어 양반 사대부만을 위한 나라 조선, 지극정성으로 중국을 섬기며 한반도 안에 안주하면서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호의호식을 누리던 양반 사대부의 나라 조선이 새로운 세상의 물결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나라가 망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그러면 조선은 500년 동안 개혁을 시도할 기회는 없었을까. 사람이나 국가는 큰 변고를 겪고 나면 정신을 차리고 그런 엄청난 변고를 두 번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 지도자부터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개혁을 시도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은 그런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교 사상에 함몰되어 변화를 거부하고 개혁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 기회는 아래와 같다. 

 

우선, 임진왜란이다. 임진년을 포함하여 정유재란까지 7년 전쟁 동안 조선군은 이순신 장군을 포함한 수많은 관군이 전사하고 전국의 백성들이 도륙을 당하고 전국토가 왜눔들의 손아귀에 혈뜯기며 갖은 고통을 당하였다. 전쟁 초기 이일이 상주에서 패전하고 조선 최고의 장수 신립이 탄금대에서 4천 조선군과 같이 왜군에게 괴멸되자, 선조는 백성과 수도 한양을 버리고 북으로 도망쳤던 것이다. 이순신의 승전 장계를 처음에는 믿지도 않았다. 의병이 들불처럼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서 고군분투하는 사이 명의 구원으로 겨우 왜적을 몰아내게 되었던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여 개혁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두번째로, 인조 반정으로 등극한 인조는 후금의 침공으로 병자호란을 당하여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목숨을 부지하였지만, 50만 명이 넘는 조선인 포로를 포함하여 소현세자까지 볼모로 후금에 끌려갔다. 남자들은 전쟁터로 노비로, 여자들은 처첩으니 창녀로 치욕스런 포로 생활을 겪었고 환향녀가 되어 돌아왔지만 씻고 씻어도 이미 더러워진 몸은 부인이나 딸이나 며느리로 남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갖은 고초와 노력으로 조선인을 거두고 돈을 주고 조국으로 돌려보내고 명청전쟁터에 끌려다니면서 청이 일어나고 명이 멸망하는 모습을 눈으로 보았고 서양 선교사 아담 샬을 통해 신문물을 접하면서 발전된 문명에 비애감을 느낀 소현세자는 8년 볼모 생활을 끝내고 귀국하였다.

 

소현세자가 서양 문물을 접하고 부푼 꿈을 안고 돌아왔지만, 천주교를 포함한 사양 문물을 접한 조선 양반 사대부는 유교라는 종교에 이미 광신도가 되어 눈이 멀고 귀가 멀었던 것이다. 청의 압박과 위협이 노골화되자 인조는 자신의 자리를 세자에게 빼앗길까봐 점차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권신들과 처첩들의 간언에 인조는 서양 신문물이 기존의 유교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며 자신의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여 세자는 독살시키고 처 강빈은 사사시키고 자신의 손자들 3명은 모두 제주도로 유배를 보냈다. 무능한 군주가 나라를 어떻게 망치게 되었는지 개혁의 기회를 어떻게 상실하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여실히 느끼고 있다. 이것으로 두번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인조의 뒤를 이어 등극한 효종의 북벌도 대안없는 구호에 그치고 말은 것이 당시 강성하게 일어나는 청나라를 우리가 감히 침공을 할 수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명을 배신하고 청에 귀부하여 권세를 누리다가 일으킨 오삼계의 삼번의 난을 진압할 때까지는 청이 자랑하는 팔기군은 가히 세계적인 강군이었다. 그런 대국의 강군을 상대로 인력과 재정이 빈약한 조선이 청나라 자신들의 고향이 있는 만주를 조선이 침공한다? 글쎄, 그 당시 효종이 북벌을 외치다가 갑자기 죽고 숙종대에는 성을 수축하고 방어 진지를 강화하였지만 청나라의 압력으로 북벌을 주장하던 윤휴 등 강경파를 처형함으로써 북벌은 구호에 그치고 말았다. 당시 조선이 얼마나 군비를 충실히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내 생각에는 효종이 백성들의 청에 대한 분노를 누그러뜨릴 속셈으로 '북벌'은 그냥 명분상 해본 소리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세번째 기회는 또 한번 있었는데, 조선은 영.정조 시대를 거치면서 당쟁을 타파하고 개혁을 시도했어야 했으나 실패했다. 영조는 탕평책을 내세우며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으려 했고, 경종 독살설에 시달리면서 어머니 숙빈 최씨가 외부에서 임신했다는 비정통성 등으로 일어난 이인좌의 난, 나주괴문서사건 등 정통성 시비에 시달리다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등 오랜 통한의 아까운 치세를 끝내고 말았고, 뒤를 이은 정조는 많은 젊은 실학자들을 등용하고 개혁을 시도하려고 노력했으나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이 모든 것을 수포로 만들고 말았다. 

 

어린 순조의 섭정을 맡은 정순왕후는 노론 세력을 지지하면서 정조가 추진하던 모든 정책을 되돌리는 바람에 정조의 이런 개혁 시도는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이 세번째 조선이 일어설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것이다.

 

따라서 다산 정약용은 정조의 총애를 받고 중책을 맡아 많은 직책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지식과 학문 연구에 몰두하면서 실용주의 노선을 지향해나갔다. 그러나 천주교라는 종교를 만나게 됨에 새로운 학문에 대한 탐구 정신으로 접촉을 시도하다가 반대파의 공격을 받고 결국 18년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이 유배 생활 동안 수많은 저서를 남겼고 거의 대부분의 저서가 이 시기에 제작되었다. 그의 이런 저서들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너무나 귀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저서들은 그의 치밀하고 위대한 사상과 이상, 꿈, 인간적인 채취를 느끼면서 오늘날 권력과 재물에 탐닉하는 우리들이 바른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다산 선생 생가와 묘지 입구. 코로나로 문은 닫혀 있었다.

 

 

여기서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해 백과사전에서 인용하면서 그의 생애를 살펴본다.

 

정약용(丁若鏞, 1762년 8월 5일(1762년 음력 6월 16일) ~ 1836년 4월 7일(1836년 음력 2월 22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아명은 귀농(歸農), 는 미용(美庸),  다산(茶山)·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문암일인(門巖逸人),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2012년에는 다산 탄생 250주년을 맞이하여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었던 적이 있다.

 

 

 





 

 

출생과 성장

1762년 8월 5일(영조 38년 음력 6월 16일)에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마현(馬峴), 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94)에서 태어났다. 정약용이 태어난 양수리 두물머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지점이다. 강원도 태백에서 발원한 남한강은 정선, 영월, 충주, 여주를 거쳐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합류한다. 현재는 생가터와 실학박물관등 정약용 유적지가 잘 조성 되어있다.

부친 정재원은 첫 부인 의령 남씨와 사이에 큰아들 약현을 낳았고, 둘째 부인인 고산 윤선도의 오대손녀인 윤소온(해남 윤씨, 조부 윤두서, 부친 윤덕렬)씨 사이에 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딸 한 명을 낳았으며, 정약용은 4남 2녀중 네번째 아들이었다. 정약용이 태어난 해에는 영조의 노여움을 산 사도세자가 뒤주속에 갇혀 죽는 일이 벌어졌다.(5월) 부친 정재원은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하였고 그해 6월에 태어난 정약용의 아호를 귀농(歸農)이라 지었다. 벼슬을 탐하여 당쟁에 휘말리지 말고 농촌에 귀의하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정약용의 선조들은 8대를 연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모두 홍문록에 올랐는데 고조부, 증조부, 조부의 3대에 이르러서는 벼슬에 오르지 못했다. 아버지 정재원은 1762년 3월에 생원시에 합격한 후에는 대과에 응시하지 않았다. 출세에는 큰 욕심이 없었기에 사돈인 채제공이 대과 응시를 여러차례 권유하였으나 마다하였다. 뒤늦게 음관으로 벼슬길에 나간것은 생활고 때문이었으며 호조좌랑, 울산부사, 진주목사(정3품)까지 지냈다.

 

가문의 내력

본관은 압해(押海)였다. 지금은 전라남도 신안군에 속하는 섬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나주목에 속해있었기에 나주 정씨로도 불렸다. 조상들은 고려 말에 황해도 배천에 살다가 조선이 개국하자 서울로 이주했다. 11대 조부 정자급(丁子伋)이 승문원 교리를 지낸 이래 8대에 걸쳐 벼슬을 하였다.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정수강, 병조 판서를 지낸 정옥형, 의정부 좌찬성을 지낸 정응두, 대사헌을 지낸 정윤복,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정호선, 홍문관 교리를 지낸 정언벽, 병조 참의를 지낸 정시윤이다. 8대 조상이 연이어 모두 홍문관 명부에 이름을 올렸는데, 홍문관은 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삼사(三司)로 불린 중요부서로 학문이 높은 학자관료만 들어갈 수 있었다.

조선의 역대 문과 급제자들의 명부인 '국조문과방목'을 보면 홍문관에서 근무한 자들은 따로 표시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조선시대 청요직(淸要職)의 상징으로서 정승·판서 등 고위 관리들은 거의 예외없이 이곳을 거쳐갔다. 그래서 정약용은 평소 팔대옥당(八代玉堂)이라 하며 학문명가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여 남인이 몰락하자 5대조 정시윤은 당쟁을 피해 경기도 광주 마현(馬峴)으로 옮겨 살았다. 고조부 정도태(丁道泰), 증조부 정항신(丁恒愼), 조부 정지해(丁志諧)는 벼슬을 하지 못했다.

 

언문 습득

정약용은 특별한 스승이 없이 부친 정재원의 임지를 따라다니며 부친으로 부터 학문을 배웠다. 형 정약전은 성호 이익의 학맥을 잇는 녹암 권철신으로 부터 사사했으나 정약용은 부친의 가르침 이외에 독학하였다. 이가환, 이승훈과 교류하게 되면서 이익의 학문을 접했으나 유작을 통해서 사숙(私淑)했을 뿐이다.

네 살에 천자문을 배웠고 일곱 살 때 '바다'라는 를 지은 것이 남아있다. 열 살 이전의 어린 시절에 지은 시를 모아 《삼미자집》(三眉子集)이라는 책을 냈는데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삼미(三眉)라는 별명은 어릴 적에 걸렸던 천연두가 나으면서 생긴 흉터 때문에 눈썹이 세 개 생겼다는 뜻이다. 아홉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맏형수 경주 정씨와 계모 김씨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 열살 때 경서와 사서를 모방해서 작문한 글이 자신의 키만큼 쌓였다고 한다.

어릴 적에 천연두에 걸렸으나, 왕족 출신의 사가 명의였던 이헌길의 진료로 인하여 살았다. 정약용은 훗날 이헌길의 《마진기방》을 바탕으로 한층 발전된 홍역 치료서 《마과회통》을 집필하고, 이것은 현대 의학이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조선의 생명을 구한다. 또한 정약용은 이헌길의 생애를 다룬 《몽수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성호학파 입문

1776년 결혼하여 처가에 왕래하기 위해 서울을 자주 드나들면서 이때 성호 이익의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같은해 아버지가 다시 벼슬을 하여 호조 좌랑이 되었으므로 서울에 집을 세내어 살았다. 1776년 4월 10일(음력 2월 22일)에 승지 혼문으로 명성이 높은 이가환과 매부 이승훈을 만났다. 이가환은 이승훈의 외삼촌이었으며, 성호 이익의 종손으로 당시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는 중심인물이었다. 이승훈도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영향을 받아 정약용도 그 이익의 유서를 공부하게 되었다.

이들에게서 이익의 학문을 접하면서 실학사상의 토대를 다졌다. 이익은 근기학파의 중심적 인물이었다. 정약용이 어린 시절부터 근기학파의 개혁 이론에 접했다고 하는 것은 청장년기에 그의 사상이 성숙되어 나가는 데 적지 않은 의미를 던져주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정약용 자신이 훗날 이 근기학파의 실학적 이론을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게 된 단초가 바로 이 시기에 마련되고 있었다.

1777년(15세) 화순 현감이 된 아버지를 따라가서 화순현 북쪽에 있는 동림사에 가서 형 정약전과 함께 서책 학습에 매진했다. 1780년(18세) 아버지가 경상도 예천군수로 부임하자 예천에 가서 살았다. 1782년, 서울에 집을 마련하여 정착 한 후 과거 공부에 전념하였고 1783년에 세자 책봉 경축 증광시에 합격하고 회시로 생원이 되었다. 22세에는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매달 치르는 시험과 열흘마다 치르는 순시(旬試)에 매번 높은 성적으로 뽑혀서 책과 종이와 붓을 상으로 하사 받으며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대과 급제

 

화성성역의궤에 실린 거중기

1789년(정조 13년),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규장각에서 정조의 총애를 받아 공부하면서 한강에 배와 뗏목을 잇대어 매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다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 때 공서파의 모함으로 인해 서산 해미에 유배되었으나 11일 만에 풀려났다. 이후 사간원 홍문관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791년에는 수원 화성 설계에 참여하여 거중기를 활용하였다. 30세가 되던해인 1792년에는 아버지 정재원이 죽는다.

 

성균관

1794년에는 성균관에서 강의하게 되고, 음력 10월에 경기도 암행어사로서 연천, 삭녕 등을 순찰하였다. 1795년 을묘박해 사건이 벌어졌을때 모함을 받아 그해 음력 7월에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다. 이어 병조참지, 좌부승, 곡산 부사 등을 지냈다. 1799년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

 

곡산부사

곡산 부사로 부임하기 전에 이계심이라는 농업 노동자의 조세 저항 운동인 이계심의 난이 일어났다. 법학자 조국 서울대학교 교수에 따르면, 정약용은 민중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조항 10여 조를 가지고 직접 나아온 이계심을 처벌하지 않고 관리의 부패에 항의하는 자들에게는 천금을 주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용기를 격려하였다. 즉, 정약용은 민중들을 국가의 권위와 법으로 억누르는 게 아니라, 생존권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항의를 귀담아듣는 애민 관리였다. 1799년 형조참의가 되었는데 곧 탄핵을 받아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고 사퇴하였다.





 화성 신축 때 사용한 다산의 거중기 모습

 

 

천주학 입문

1776년 이가환, 이승훈과의 만남으로 성호 이익의 학문에 연을 맺었다. 자연스럽게 남인 소장파 학인들과 교류하게 되면서 성호 이익 문하에서 학습하여 학문적 명성이 자자한 권철신과도 연을 맺게 된다. 또한 이들이 천주학과 서양 학문을 많이 연구하는 터라 정약용도 자연스럽게 이를 접하게 되었다. 권철신이 주도하여 1777년과 1779년에 경기 양주 주어사와 천진암을 오가며 여러 날에 걸쳐 서학 교리 강습회를 열었는데, 정약용은 이벽, 정약전, 권일신, 이가환, 이기양, 이승훈 등과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학문적 호기심에 서양 학문과 함께 천주학을 접했다. 1784년 4월에 큰 형수의 제사에 참여했다가 귀경하면서 큰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으로 부터 천주교 교리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천지창조의 기원, 영혼과 육신, 생사의 이치에 관한 이벽의 설명은 놀랍고도 오묘하여 즉시 매료되었다. 이를 계기로 천주교에 대한 책을 여러권 탐독하며 심취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천주교와의 인연은 곧 악연이 되어 훗날 많은 고초를 겪게 된다.

 

명례방 사건

1784년,이벽에게서 세례를 받은 후 천주교인이 되었다.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후 귀국한 이승훈이 서울 명동에 있는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신앙 모임인 '명례방공동체'를 운영하였는데 정약용도 이 모임은 참여하였다. 1785년 초에 포졸들에게 이 비밀 모임이 발각되어 형조에 끌려가는 명례방 사건이 벌어진다. 중인 신분인 역관 김범우만 투옥되고 정약용을 비롯한 양반 출신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김범우는 유배지에서 사망했고 이벽은 그의 부친과 갈등끝에 식음전폐하다 죽었다. 이승훈은 가문의 압박 속에 배교했으며 모임의 주축이었던 양반 출신들이 모두 떠나자 '명례방공동체'는 와해되었다. 이때 정약용도 일시적이나마 배교했으나 훗날 천주교인들과 은밀하게 교제를 재개했다.

 

반회사건

1787년(정조 11) 10월경, 반촌에 있는 김석태(金錫泰)의 집에서 정약용은 이승훈, 강이원 등과 은밀히 천주교 서적을 연구, 토론하였다. 그러한 사실을 안 이기경(李基慶)이 천주교 배척론자인 홍낙안(洪樂安)에게 알리자, 척사유생들의 상소가 잇따랐다. 그로 인하여 당사자들에게 직접적인 처벌은 내려지지 않았으나, 천주학 도서의 도입과 유포가 문제되어 조정에서 그 폐해에 대해 논의가 있었다. 

 

한글로 번역된 천주교 서적은 목판으로 간행되어 저렴한 가격에 팔리고 있었는데, 충청도 지방의 산골마을에까지 보급되어 있었다. 1788년에 8월에 이경명이 서학 엄벌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금령을 내렸다. 아울러 전국에 천주교 관련 서학 서적을 색출, 소각하는 조처가 내려졌다. 반회사건이 발생한 직후 아버지 정재원은 자식들에게 천주학을 멀리하라고 명했다. 정약용은 정약전과 함께 아버지 말씀을 따랐으나 정약종은 천주학을 내려 놓치못했다.

 

신해박해

1791년, 전라도 진산에 윤지충이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른 후 제사를 폐함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는 진산사건이 발생했다. 정약용의 집안도 큰 충격에 휩싸였다.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가쪽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조상 제사 거부는 유학의 핵심인 '효'를 부정하는 일로써, 이는 곧 나라의 어버이 되는 왕에 대한 '충'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이는 유교 이념으로 떠받쳐져 있는 조선의 지배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도전하는 것이었다. 윤지충과 그의 행위에 동조한 외사촌 권상연은 참수당했다. 평택 현감으로 있던 정약용의 매부 이승훈은 삭탈관직 당했다.

그동안 정조는 천주교를 일시적인 종교 현상으로 이해하여 묵인하는 온건한 정책을 펼쳤었다. 그러나 지난 1788년에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도 극형을 명한 후 홍문관에 소장되어 있던 서양 서적을 소각하여 불온한 서양 사상의 전파를 차단하는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서인들은 윤지충이 남인이었던 관계로 이 사건을 정쟁화하며 사건을 증폭시켰으며 남인들 조차 공서파와 신서파로 분열하였다.

한편 천주교가 사악한 종교로 낙인이 찍힌 이 사건을 계기로 정약용은 천주교와 관계를 완전히 청산했다. 그러나 윤지충과 친척이었던 관계로 서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집안내에서도 약간의 갈등이 발생했다. 둘째 형 정약전도 이번 사건 발생 직후 배교를 했으나 셋째형 정약종은 반회사건과 신해박해로 전국이 소란스러웠는데도 불구하고 천주교에 대한 열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정약종은 교리에 따라 제사 참여를 거부하며 갈등하다가 처자식을 데리고 한강 건너 양근의 분원으로 이사를 가버렸다.

 

을묘박해

1795년 6월, 포도청이 밀입국 후 은밀히 활동하던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를 체포하는데 실패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 관련자들이 체포되여 선교사의 도피처를 추궁받았으나 이들은 끝까지 함구하였고 모진 고문끝에 옥사하였다. 조용히 지나가는듯하던 사건은 2개월 뒤에 대사헌 권유(權裕)가 세 사람이 일찍 죽는 바람에 선교사 주문모 체포의 기회를 놓쳤는데, 이는 포도대장의 경솔함과 사건의 진상을 덮으려한 의혹이 있어 보이니 치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조정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부사과 박장설이 이승훈·이가환·정약용이 주문모 도주사건에 연류되었다고 의혹을 제기하자 이들을 성토하는 상소가 연이어 올라왔다.

노론 벽파의 공세가 빗발치자 정조는 한발 물러서게 되었는데, 결국 1795년 7월 25일에 이승훈을 예산으로 유배 보내고, 이가환은 충주 목사로, 정약용은 충청남도 홍주 금정찰방으로 좌천시켰다. 당시 충청지역에 천주교의 교세가 크게 성장하고 있던 터라 정조는 이 지역으로 이들을 보내어 교세 확산을 막음으로 천주교에 심취했었던 과오를 속죄하고 지방 좌천을 통해 노론 공격의 예봉도 차단하려 내린 초치였다. 정약용은 무려 7품계나 떨어지며 체면이 몹시 구겨졌다. 그러나 정약용이 금정에서 교세 저지를 위해 펼친 노력은 실효를 거두었고 충청지역 천주교계의 거물인 이존창을 체포하는 공도 세웠다.

 

신유박해

정조의 급사

형조참의를 제수받아 재직하던 중에 대사간 신헌조가 형 정약전을 부당하게 탄핵하자 '자명소'를 올리고 1799년 7월 26일에 사직하였다. 잠시 서울에 머물다가 1800년 초에 낙향하여 마재에서 지내던 중 6월 28일에 정조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급하게 상경하였다. 국장을 치루는 동안에 독살설등 많은 유언비어가 나돌며 어수선해지자 정약용은 처자를 마재으로 내려보내고 홀로 서울에 머물면서 정국을 살폈다. 겨울에 주상의 졸곡(卒哭)이 지나자 낙향하였고, 오직 초하루와 보름날 벼슬순서에 따라 차례로 열을 지어 곡하는 곡반(哭班)에만 참석하였다. 그 나머지 시간은 고향집에서 경전을 읽으며 지냈다.

 

숙청 작업

염려했던 대로 어린 순조의 섭정을 맡은 정순왕후가 1801년 음력 1월 10일에 천주교 탄압령을 내리며 남인에 대한 숙청 작업을 시작했다. 오가작통법을 적용하고 역율로 다스리라는 엄명이 전국에 떨어졌다. 정순왕후는 과거에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섰던 전력이 있어 정조의 즉위를 반대했었기에 정조가 즉위한 후 집안은 몰락했고 오라비 김귀주가 귀양지에서 사망하며 정조와는 원수지간이었다. 이런 정순왕후의 목표는 정조 때 성장한 남인을 몰아내고 재기하지 못하도록 박멸하는 것이었다. 선왕 정조는 노론 벽파를 견제하기 위해서 남인을 중용하였다. 남인들이 서학에 관심을 두고 천주교에 가까운 자가 많았으니 좋은 명분이 되었다.

노론 벽파의 최우선 목표는 정조의 총애를 받던 이가환, 권철신, 정약용 3인의 제거에 있었다. 이가환과 권철신은 남인을 이끌고 있었고 정약용은 남인을 이끌 차세대 젊은 주자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가환은 반드시 죽여야 했는데, 이는 이가환의 가문이 조상때부터 있었던 노론 벽파와의 악연 때문으로 이가환은 노론벽파가 가장 기피하는 인물이었다. 이가환은 1791년 진산사건 직후 배교하며 천주교 탄압에 앞장섰다는 사실을 노론 벽파도 알고 있었으나 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노론 벽파가 원했던 것은 이가환이 천주교를 버렸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의 목숨이었다. 이가환과 권철신은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구속과 석방

정약용은 가슴 졸이며 지내던 중에 셋째 형 정약종이 서적과 서찰등을 숨기려다 관아에 적발되어 모두 압수당했다는 소식을 1월 29일에 접하였다.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2월 8일에 전격적으로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국문장에서 단지 학문적 관심으로 천주교를 접했을뿐이었기에 이미 1791년 진산사건(신해박해)이후 천주교와 결별했다고 자신을 변호했다. 그러나 그의 목숨을 노리는 노론 벽파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2월 11일에 정약종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그밖에도 이승훈, 최창현 등 많은 이들이 투옥되었다.

정약용은 1791년 진산사건에 충격을 받고 천주교를 버렸다. 1797년 천주교도로 오해 받자 《자명소》를 써서 반박했고 1799년에는 《책사방략》을 저술하여 배교를 분명히 한적이 있다. 또한 '동부승지 사직상소'에서도 배교했음을 분명히 밝힌적이 있었다. 이번 국문 중에도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론하며 천주교 지도자인 권철신, 황사영 등을 고발하였다. 또한 천주교 신도를 색출하려면, 믿음이 약한 노비나 학동을 신문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으나 자신의 구명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자 체념하였다.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후 천주교 선교 활동을 주도했던 이승훈은 정약용의 매형이고 천주교 교리 연구회장인 정약종은 셋째 형이며 지난번 진산사건(1791년)을 일으킨 윤지충은 외사촌 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잡혀온 여러 신자들의 국문이 거듭될수록 정약용의 배교 사실에 대한 증거들이 쏟아져 나왔다. 분명한 물증들로 인해 정약용과 정약전은 구속된지 18일만에 유배로 감형된후 석방되었다.

 

 

 

 














귀양살이

 

정약용은 18년간 경상도 장기전라도 강진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 기간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을 저술하였으며, 둘째 형 정약전도 물고기의 생태를 기록한《자산어보》라는 명저를 남겼다. 고난을 겪음으로써 학자로서의 지성이 자라는 새로운 경험을 한 것이다.


 

말년

 

1818년(순조 18) 음력 5월에 귀양이 풀려 승지(承旨)에 올랐으나 음력 8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혼인 60주년 회혼일 아침인 1836년 4월 7일(음력 2월 22일)에 마현리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다산이 남긴 마지막 시는 〈회혼시〉였다. 정약용이 죽기 전 자녀들에게 신신당부로 이른 말은 "한양을 벗어나는 순간 기회는 사라지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한양에서 버텨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