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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토목의 변'과 '탈문의 변'

'토목의 변'과' 탈문의 변'

 


 

 

 

중국 드라마 <대명풍화>가 끝났다. 과거 중국의 역사를 기술한 적은 있지만, 이번에 이 드라마를 보면서 명나라 역사를 다시 실펴보게 되었다. 당시 중국 역사를 기술하면서 내용과 양은 방대하고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되기 때문에 시대별 왕조별로 세부적인 내용은 생략하고 대략적인 내용만 기술했다.

 

당시에는 명나라 역사를 기술하면서 영종에 대한 견해는 참 바보스런 황제였다고 생각했다. 환관의 권유에 따라 젊은 황제가 전략, 전술도 경험도 없이 숫자로 오합지졸의 50만 대군을 거느리고 직접 전투에 나섰다가 적에게 전군이 참패를 당하고 결국에는 포로가 되었고(토목의 변), 나중에 풀려나 돌아온 이후에는 유폐되었다가 반란을 일으켜 성공(탈문의 변)하자 다시 황제가 되었다는 단순한 이야기로 치부해버렸다. 

 

왜 명 영종이 직접 출병하였는지, 전략과 전술은, 군대의 준비 상태는, 적에게 포로가 될 때까지 전투는 어떻게 벌어졌기에 황제가 포로로 잡힌 것인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알 지 못했다. 

 

아래는 '토목의 변'에 대한 내용을 인용했다.

 

 

 

 

토목(보)의 변


명나라 초중기인 1449년, 몽골 계통의 오이라트와의 전투 도중 정통제가 포로로 사로잡힌 사건. '토목보의 변(土木堡之變)' 또는 당시의 연호를 따서 '정통의 변(正統之變)'이라고도 부른다. 영가의 난정강의 변과 함께 중국 한족사 3대 치욕적 사건으로 꼽히기도 한다.

 

 

 

 

 

원인

 

명나라와 몽골 계통 오이라트족 사이의 무역분쟁이 원인이었다. 1406년 영락제가 몽골 부족과의 조공무역을 승인한 이후, 명나라에서는 비단과 의류, 식량을 수출하고, 몽골 부족들은 말과 모피 등을 수출하는 마시(馬市)가 관례화되었다.

 

1440년 경 몽고의 일족인 오이라트가 점차 명나라에 위협이 되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오이라트 족장이 된 에센은 태사라 칭하며 원나라의 후손 톡타 부하를 칸으로 추대하여 전몽골을 지배하고 여진을 억압하였다.

 

당시 명나라와 몽고는 마찰을 피하기 위해 몽고에서는 조공이라는 명분으로 말을 명나라에 보냈고 명나라는 많은 돈을 주고 구입하였다. 

 

 

 



그런데 초기에는 기껏해야 수십 명 단위의 소규모 교역에 불과했던 마시의 규모가 점점 커져 수천 명 단위가 되어버리고, 여기에 위구르 상인까지 가세하면서 무역의 규모가 지나치게 커져버렸다. 게다가 오이라트 쪽에서는 실제 말 숫자보다 명목상의 말 숫자를 늘리는 형식으로 말 값을 몇 배로 올려받았고, 한 몫 잡으려는 사람들이 가세하여 밀무역이 벌어지는 등 이래저래 영종 정통제 시절에는 명나라의 골칫거리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래서 명나라에서는 무역을 제한하기 시작하였고, 환관 왕진이 나서서 조공무역 이외의 무역은 금지하고, 오이라트에도 실제 숫자에 해당되는 말 값만을 지불함으로써 말 값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1448년 당시 명나라 실세 환관이었던 왕진이 말 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자 이를 명분으로  오이라트는 명나라 다퉁(대동)을 침범하였다. 

 

 

경과

 

정통제의 친정

 

갑작스러운 무역 금지 조치에 분노한  오이라트의 에센 타이시는 군을 4대로 나누어 동쪽의 만주에서 서쪽 감숙에 이르는 명의 북방 변경으로 진공하였다. 에센 자신은 군대 2만을 이끌고 1449년 명나라의 산서성 대동을 공격하였다.

 

 

 

 

 

명나라의 참장 오호(吳浩), 서녕후 송영(宋瑛), 무진백 주면(朱冕), 평향백 진회(陳懷), 부마도위 정원(井源), 도독 왕귀(王貴), 오극근(吳克勤) 등이 이끄는 명의 변경 수비대 4만 5천명은 기존에 수축된 방어시설을 거점으로 응전하나, 양화구에서 오이라트군에 참패하여 명군의 대부분은 궤멸되고 장군들이 전사함으로써, 군사 요충지 대동(大同)이 황당하리만치 쉽게 함락되고 명나라의 방어선이 붕괴되어버렸다. 변경 지역의 국방이 공백이 되어버린 상태에서 수도 북경(北京)이 적의 공세에 노출된 위험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에 놀란 왕진은 대책을 모의하며, 황제 정통제에게 친정(親征)을 건의하였다. 군 지휘 경험도 없는 젊은 황제가 출진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전장이었으나 정통제 본인부터 황자 시절부터 무예에 관심을 보인 바 있었고, 친정을 통해 황실의 권위를 바로세우기 위해 중신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정을 강행하게 된다. 병부상서 광야와 호부상서 왕좌가 최후까지 친정을 반대했으나 왕진에게 모함을 당해 처벌을 당해야했고, 정통제는 친히 50만 대군을 이끌고 오이라트족을 벌하기 위해 북경을 나섰다.

 

정통제의 군대는 수도 북경을 수비하는 최정예 경군을 주축으로 하는 전투력이 높은 부대였고 이들을 지휘할 능력있는 장수들도 포함되어 있어 승리를 자신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통제는 군 지휘를 총애하던 환관 왕진에게 맡겼고, 전투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문신과 귀족들이 다수 동행하여 정예 군대라고 해도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꼴이 되어버렸다. 군대를 지휘해 본 경험과 능력이 없던 정통제와 왕진이 지휘권을 휘두르다보니 전장으로 행군하는 것부터 비효율적으로 늘어지며 병사들의 피로만 누적되었다. 정통제가 산서성 대동에 이르렀을 때 오이라트 에센이 직접 주력부대를 지휘하여 대동으로 진격하면서 그 선봉대가 묘아장(描兒庄)에서 오호(吳浩)를 패사시켰다. 이에 명의 송영(宋瑛)은 주면(朱冕)과 석형(石亨) 등과 함께 양화구(산서성 양고북)에서 맞서 싸웠다. 명군은 7월 15일 태감 곽경(郭敬)의 잘못된 지휘로 대패하여 장군들을 비롯한 전군이 전멸하였다. 

 

양화의 대패를 듣고도 7월 16일 왕진은 진정을 강행하지 대다수 관료들은 친정을 반대하였지만 왕진은 고집을 꺽지 않았다. 7월 28일 원정군이 선부(하북성 선화현)에 도착하여 목도한 것은 들판에 가득한 명군의 시체들이었다. 이 때문에 위협을 느낀 왕진은 대동을 거쳐 북경으로 귀환할 것을 결정하였지만 도중에 퇴각로를 변경하여 선부에서 거용관을 거쳐 북경으로 귀환하려고 하였다.  8월 10일 명군이 선부에 도착하엿을 때 에센군은 명군의 후미를 쫓기 시작하였다. 이에 명은 몽골출신 장군인 오극충, 오극권 형제를 파견하였지만 패사하자, 곽경의 지원을 위해 나섰던 주용과 설수가 지휘하는 5만 명의 기병은 주용의 무모한 지휘로 요아령에 미리 배치되어 매복하고 있던 에센의 복병을 만나 전멸하였다.

 

8월 14일 황제 일행은 토목보에 도착하였을 때 광야는 안전을 위해 거용관으로 옮겨 주둔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왕진은 토목보에 주둔하기로 결정했다. 정통제의 피로가 심하여 토목보에 일단 머물러야 했고, 추격해 온 에센의 오이라트군이 근처에 있었지만, 50만 대군을 쉽게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숫자만 뻥튀기한' 것조차도 서류상으로만 뻥튀기했다는 해석까지 있다. 한 예로 같은 시기 조선왕조실록(세종 31년 8월 18일자)에는 황제가 이끈 군대가 8만이라는 기록이 있다.  명나라의 직접 기록이 아니라 간접적인 정보를 획득한 실록의 특성상 부정확할 확률은 있다. 실록에서도 '이 사실은 전해 들었을 뿐, 문서로 전달되어 상고할 만한 것은 없다.'고 적었지만, 그럼에도 '50만'과 '8만'은 차이가 너무 크다.

 

 


 

 

 

토목보의 참변

 

차라리 북경으로 돌아갔다면 비극을 피할 수 있었겠으나 철수 경로에 자신의 고향 지역이 포함된 것을 안 왕진이 자기 고향에 피해가 된다 먼 길을 돌아가게 하는 멍청한 짓을 벌였고, 철수가 늦어지는 와중에 에센군이 보낸 추격대에 몰려 정통제의 군대는 인근 토목보로 숨어들게 된 것이다.

문제는 토목보가 원래 원래 거용관(居庸關)의 전선에 설치된 소규모 작은 성, 곧 흙으로 토성을 쌓은 보(堡)에 불과하였으며, 많은 병사와 전마들이 마실만한 수원(水源)과 대군을 보호할 만한 방어 시설이 부족한 곳이라는 점이었다. 마실 물도 없는 곳에 고립된 명나라군은 점차 피폐해지다가 에센군의 기습 공격에 전면 붕괴, 왕진은 분노한 장수에게 철퇴를 맞고 사망하고 수많은 명나라 장수들이 전사했으며 황제 정통제는 에센의 포로가 되는 참극이 벌어진다.

황제가 이민족에게 포로로 잡히고 장보를 비롯한 조정의 상당수 공경 대신과 장군들이 전사했으며, 수도를 지키는 정예군인 경군이 그 장비와 함께 전멸하는 바람에, 명나라는 수도 북경성이 거의 무방비 상태로 대혼란에 빠졌다.

 

 

결과

 

경태제의 옹립과 북경성 공방전

 

명나라 조정은 남경에 남아있던 제2조정의 신하들이 주축이 되어 남경으로 천도할까 진지하게 논의했지만, 병부시랑 우겸(병부상서 광야는 토목보에서 사망)이 총대를 메고, 남쪽으로 도망간 송나라의 예를 들어가면서 강력히 반발한 까닭에 간신히 진정되었다. 

 

그리고 황제가 포로로 잡힌 상황에서 본국에 황제가 없으면 안 되니까 정통제의 이복동생 주기옥을 황제로 옹립하고, 국가 위기 상황에서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태자는 있어야 하므로 정통제의 장남 주견심을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이후 북경성 방어의 총책을 짊어진 우겸은 거의 총력을 다해 남경의 무기와 병력을 이동시키는 등 방어 전력을 모으고 전쟁에 대비하였다.

 

 

명나라가 그럴 동안에 에센은 우선 정통제를 앞세우고 명나라 변방을 돌아다니면서, 각지의 요새들을 무혈점령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북경처럼 요새화된 도시를 공략하는 건 상당히 다른 차원이라서, 여러 요새에 공격을 시도해봤지만 격퇴당하고, 남쪽에서 근왕병들이 속속 증원되어 올라오자 북경 공략은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사로잡은 정통제를 이용해 협상하려 했는데, 이때는 이미 명나라는 경태제를 세우고 정통제를 버린 상태라 별 성과가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에센은 격노하여 군대 10만으로 북경에 다시 쳐들어갔다. 그러나 명나라는 이미 예상하고 있던터라 22만여 병력을 소집해 베이징에 모아 놨고, 장비들도 남경과 기타 지역, 심지어는 토목보 주변에 버려진 것까지 싹 회수해서 배치한 상태였다. 게다가 단순한 수성전이 아니라, 북경 주변에 있는 옛 성의 성벽 등을 이용해서 주변에 진지도 다수 구축해 놓은 상태. 한마디로 토목에서 당했던 것과 차원이 다른 상태였다.

당시 명군 병사들이 화기를 휴대만 했지 사용법을 몰랐기 때문에 미사용 상태로 화기를 버렸고, 역시 에센의 몽골군도 화기를 사용하는 법을 몰라 그대로 화기가 방치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다만 이는 사실과 다를 수도 있는 것이, 몽골은 원나라가 건국되기 이전인 몽골 제국 시절 이미 북송을 통해 화약 무기를 접했고, 이를 적극 받아들여서 사용했으며, 이는 남송을 멸망시킬 때나 일본 원정을 갔을 때의 기록으로 찾아볼 수 있다. 즉 이전 문서에 "몽골이 화약 무기를 사용하게 된 것은 명나라 말기였다"고 서술되어 있던 것은 잘못된 정보인 것이며, 토목보 주변에 버려진 화기를 몽골군이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은, 단순히 화기를 사용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화약이 수중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가정한다면 차라리 말이 된다.

어쨌든 북경 공방전에서는 그때의 교훈을 살려 병사들에게 화기 사용법을 숙지시켰기 때문에, 명군이 화력 면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다. 그 결과 몽골군은 창의문과 덕승문을 중심으로 벌어진 교전에서 명나라 포병의 공격과 수비군의 저항으로 1만의 사상자를 내면서 북경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북경을 구원하기 위한 명나라의 지원군 22만이 오고 있었기에 난감해진 에센은 북경 공략을 포기하고 강화해 돌아간다. 그렇게 5일 동안 싸우고 돌아온 후, 오이라트 측은 정통제를 내세워 송환 문제를 포함한 협상을 진행시켰지만, 위에서 말했다시피 명나라는 정통제를 이미 포기한 상태였기에 협상 자체가 잘 성사되지 않았고, 에센 칸은 명나라의 분열을 노리고 1450년 정통제를 조건 없이 석방했다.

 

 

탈문의 변

 

경태제는 정통제가 귀환할 경우 황제 자리를 내놔야 되나 싶어서 매우 걱정했지만, 신하들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설득해서 정통제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통제는 사실상 연금 상태에 놓였다. 경태제가 매우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게, 애초에 명나라의 종친왕들은 의전상 신분만 높고, 연금을 주는 등 예우만 해줄 뿐이지, 실권은 박탈된 채 살았는데, 경태제 자신은 예전에 그렇게 살다가 정통제가 사로잡힌 후, 정통제의 생모 성모태황태후가 나서서 그를 옹립해준 것이기에, 후계자로서 필요한 제왕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았고, 민심 안정을 위해 황태자로서는 정통제의 맏아들 주견심을 그대로 놔뒀기에, 권력 기반은 매우 약한 상태였다. 그러니 정통제, 즉 자기 형이 복위하면, 형의 허락도 없이 즉위한 자신의 목숨을 걱정함은 당연했다.

 

 

 






 

 

 














 

 

 








 



권력 기반이 어느 정도 다져진 후, 경태제는 형인 정통제의 아들을 황태자에서 폐위시키고 자신의 아들 주견제를 황태자로 책봉했지만, 몇 년 후 경태제의 태자 주견제는 병으로 죽는다. 그런데 경태제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후계자 지명을 거부해서, 후계자가 없는 상황이 지속되다가, 몇 년 뒤 경태제 본인도 병에 걸려서 위독해졌다. 이에 정통제는 자기를 따르는 군사를 모아 쿠데타를 일으켜 경태제를 퇴위, 감금하고 황제에 복위하였다. 이걸 탈문의 변(奪門之變)이라고 한다. 그리고 연호를 천순으로 바꿔 천순제라고 불리었다.

이 쿠데타를 주도한 사람은 서유정과 조길상인데, 서유정은 토목의 변 당시 남경으로 천도하자고 하다가, 우겸의 꾸중에 입을 다문자고, 조길상은 환관이었다. 이 쿠데타 과정에서, 우겸은 어쩌면 서유정 때문에 죽었는지도 모른다.

천순제로 복위한 이후 베이징을 방어했던 우겸을 사형시키는 등 삽질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예전에 고생한 때문인지, 과거 정통제 시절보다는 조금 괜찮게 정치를 했다고 하며, 포로로 잡혔던 기억 때문인지 그동안 명나라에 전해지던 몽골 악습을 제거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서, 후궁과 궁녀의 순장(殉葬)을 당대에서 금지시켜버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우겸의 사형건은 천순제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전란이 끝난 후 전시에 큰 공을 세운 공신은 반란을 일으킬 용의자 1순위이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 괜히 생겨난 말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그렇지 않아도 쿠데타로 즉위한 천순제에게 우겸은 참으로 부담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더군다나 우겸은 경태제를 옹립시킨 1등 공신이다. 다른 걸 떠나서 자기를 공기로 만든 존재를 용서하긴 쉽지 않다.

하지만 우겸은 제위나 권력에 야심이 없었고, 북경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보여준 그의 능력을 감안하여, 대국적 견지에서 용서했다면, 이후 정통제에게 충성을 다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에서 실책이었다는 견해가 다수다. 실제로 천순제도 우겸을 사형시키고 가산을 몰수하는 과정에서, 우겸이 청렴결백한 신료였다는 것을 알고 크게 후회했다고 하며, 경태제의 즉위 과정을 다시 조사한 후 우겸을 모함한 측근들을 처형했다.

한편 천순제는 자신을 폐위시킨 동생 경태제를 '불효하고 오만불손하고 어질지 않고 정의롭지 않고 도덕을 더럽히고 추문을 드러냈다'며 폄하했다. 따라서 신과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분개했다며 7년 동안 유폐를 당한 원한을 거의 저주에 가까운 악평 수준으로 격하시켰다. 그리고 경태제가 사후에 황릉의 장지로 생전에 천수산에 만들어 놓은 수릉을 없애버리고 그를 서산에 안장하게 했다. 그리고 천순제는 그를 폐위시킨 뒤 성려왕이라는 다른 시호를 내렸다. 그 뜻은 패륜을 저지르고 사나우며 욕심이 많은 성왕이라는 것으로 얼마나 악감정이 심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오이라이트족의 향방

 

토목의 변 이후로 몽골 내부에서 오이라트족을 이끌던 에센의 위상은 크게 올라갔으며 대부분의 몽골 부족들이 그에게 귀부하였다. 그러다 결국 1453년 몽골의 타이슨 카간이 에센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부하의 배신으로 사망하자, 에센은 스스로 카간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에는 황금 씨족(칭키스 칸의 성인 보르지긴 가문, 칭기즈 칸의 후손)만이 카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기에 황금 씨족 출신이 아닌 에센이 카간이 되자 많은 부족들이 반발하였다. 게다가 에센은 카간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부족들을 탄압하여 전 몽골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결국 1455년 에센이 카간의 자리에 오른 지 단 2년 만에 초원 부족들간의 내분으로 에센은 부하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그리고 에센 사후 오이라트의 세력은 약화되어 몽골 서부로 쫓겨났다.

 

 

당시 조선의 반응

 

당시 조선은 세종 재위 31년이었는데, 정통제는 친정(親征)을 하기 전 조선에도 원정을 지원할 병사를 보내달라는 요구를 한다. 그런데 실록의 기록으론, 명나라에서 '우리가 오랑캐들 정벌하러 갈건데, 조선도 평안도에 10만 대군을 배치하고 부를 때 와서 호응해달라.'고 요구했고, 여기에 한 술 더 떠 '조선에 말이 많이 난다고 들었다. 3만 마리쯤 준비해달라. 더 보내도 된다. 돈은 내주겠다.'며 민폐성 요구도 해왔다고 한다. 특히 토목의 변을 당한 후에는 도움을 요청한다.

이런 무리한 요구에 세종은 고민하다가 신하들이 성의 표시로 5천 필만 보내자고 건의하자, 그래도 1만 필은 채워 보내자고 하는 정도로 타협을 봤다고 한다. 그외에도 세종은 만일의 사태를 경계하여 여진 토벌과 몽골 침입의 대비로 6진 개척 후 조정에 있던 김종서를 다시 북방에 파견하기도 한다. 그리고 말 년에 이런 골칫거리에 시달리다 보니 세종은 원래도 안 좋던 건강이 더 나빠져 이듬해(1450) 세상을 떴다.

정통제가 오이라트족에 잡힌 후, 명나라에서 이 소식을 알리고 새로운 황제의 등극을 알리는 칙사가 왔을 때 섭정인 세자 문종은 평소 앓던 종기가 악화되어 세종보다 더 심각한 몸 상태였다. 접대를 할 만한 사람이 없어 혼란이 발생했다. 세종은 노환으로 아프고, 세자 문종도 종기 때문에 위급하고, 세손 단종은 이제 겨우 9살이라 이런 엄청난 문제를 맡기기는 곤란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차남 수양대군더러 접대하라고 하는 것도 외교적 결례이기 때문에, 접대 방식을 놓고 조선 조정은 매우 곤란해했다. 

 

이에 세상물정에 어두운 젊은 유학자 출신 신하들이 "왕이 아프면 세자가 대신, 세자가 아프면 세손이 하면 되지 않나요?"라고 하자, 가뜩이나 건강이 안 좋아서 신경이 날카로웠던 세종이 격분해서 "아오, 이 더벅머리 선비들!"이라고 일갈해했다 전해진다. 어린 세손이 실수라도 해서 쓸데없는 지원 구실을 줄까봐 염려했었고 가뜩이나 약간 역모성이 있는 황제 즉위라 외교적으로 분쟁 여지가 높은 사신인데 이런 소리를 하니 신경질이 날 수 밖에. 

 

결국 사신 접대는 수양대군이 하고, 황제의 칙서는 병상에 누워 있던 문종이 주변의 부축을 받으며 나서서 겨우 받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명나라 사신들은 "왕이 아픈 건 예전에 들어서 알았는데, 세자는 젊은데 아프다고 코빼기도 안 비치니 우리 너무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냐", "수양대군은 세자랑 동모(同母) 형제인 건 맞긴 한가?"라고 했고, 조선에선 세자가 매우 아프다는 게 정말이며 사신 홀대가 아니라고 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