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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북한강 자전거길의 정취 3 : 다산 문화거리 탐방 2

북한강 자전거길의 정취 3 : 다산 문화거리 탐방 2

 

 



 

 

다산문화관

 

 

정조와 정약용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丁若鏞)은 정조 시대 청년기에 벼슬에 나가 정조의 깊은 총애를 받아 임금의 측근에 있었으나 보수 집권 세력인 노론 벽파(僻派)의 공격에 시달리며 순탄치 못한 관료기를 보내게 된다. 그를 신임하고 총애하였던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그의 정치생명도 끝이 나고, 결국 서학 문제로 인해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18년간의 유배기를 보내게 된다.


정조보다 10세 연하인 정약용이 정조를 처음 만난 것은 22세에 회시(會試)에 생원으로 합격한 후 창덕궁 선정전(宣政殿)에 나가 임금에게 사은(謝恩)의 예를 올릴 때였다. 정조가 다산을 처음 만난 후 정약용이 그의 눈에 들게 된 것은 성균관 태학생 시절이었다. 정조가 성균관 유생에게 제시한 '중용'에 관한 70개조의 질문에 대해 정약용은 이벽과 토론을 거쳐 '중용강의(中庸講義)'라는 답안을 제출하였고 정조는 경연석상에서 정약용의 답안을 극찬하였다. 이외에도 정약용은 정조가 친히 낸 과제마다 우수한 답안을 제출하여 정조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고 정조는 상으로 규장각에서 찍은 서적으로 최고수준의 문장을 모은 '팔자백선(八子百選)', 국가 기본법전인 '대전통편(大典通編)', 국왕의 행적을 기록한 '국조보감(國朝寶鑑)'과 '병학통(兵學通)' 까지 친히 하사하였다.

정조 12년(1788) 2월부터 정조17년(1793)에 이르는 기간은 남인 채제공이 우의정에 기용되며 노론 소론 남인의 보합체제가 출현하여 정조의 정책에 우호적인 시파(時派)우위 정국이 전개되던 시기였고 남인 세력의 정계진출이 활발하던 시기였다. 더욱이 정조14년(1790) 9월부터 15년 12월 까지 남인계의 영수 채제공의 독상체제(獨相體制)가 이어지며 정조는 그 동안 구상해 왔던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신해통공의 실시, 서얼허통의 진전, 현륭원 이장, 수원 읍치 조성, 내 외영 체제로 장용영 정비, 토지개혁론 노비제 개혁 논의 등이 추진되었다.

정조는 이러한 개혁 추진을 위한 기반으로 신진관료 가운데 우수한 인재들을 당색이나 문벌에 관계없이 초계문신으로 선발하여 왕이 규장각에서 직접 지도 재교육하여 탕평정치를 보좌할 실력 있는 관료 집단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정조는 10회에 걸쳐 138명의 초계문신을 직접 선발하였고 이들 중 반 이상이 정3품 당상관인 승지 이상의 고위관직에 진출하였다. 바로 이 시기에 정약용은 28세 때인 정조12년(1789) 3월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가게 된다.

일찍이 정약용을 인재로 알아본 정조는 정약용이 과거에 합격한 해에 초계문신에 임명하였고, 정약용은 규장각에서 내준 과제에서 여러 차례 장원하였고, '문체책(文體策)'에서 패관잡설(稗官雜說)의 폐단을 지적하며 개혁을 요구하고 '인재책(人才策)'에서는 신분과 지방색에 따른 인재등용의 제한을 비판하며 인재 사용에서 전문성과 자질의 중시를 요구하는 등 혁신적 정책을 제시하여 정조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정약용을 깊이 신임하고 총애한 정조는 종7품 희릉직장(禧陵直長)으로 관료 생활을 시작한 정약용을 여러 내직을 거쳐서 정조 19년(1795)에는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하여 정3품 당상관으로 승진시키고 같은 해 2월에는 다시 병조 참의에 임명하여 화성의 현륭원 행차에 배행하게 한다.

또한 정조는 정조 13년(1789) 현륭원 능행을 위해 한강에 설치 할 주교(舟橋) 가설에 대한 설계를 정약용에게 명령하였고 이에 정약용이 제출한 제안이 그대로 시행되는 큰 성과를 이루었다. 이러한 정약용의 기술적 역량은 화성 축성에서 다시 발휘되었다. 정조는 정조17년(1793)에 화성 설계를 정약용에게 명령하여 정약용은 윤경(尹?)의 보약(堡約)과 류성룡(柳成龍)의 성제(城制)를 종합하면서 독창성을 발휘한 선진화된 성제를 지어 올리고 아울러 정조로부터 하사 받은 '도서집성(圖書集成)'과 '기기도설(寄器圖說)'을 연구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지어 올려 화성축조에 기중기의 사용으로 4만 냥의 공사비를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정약용은 정조의 깊은 신임을 받으면서도 반대파로부터 공격에 시달렸는데, 그가 남인 출신이었고 정조의 친왕세력의 대표자로 정약용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채제공(蔡濟恭)과 통혼관계(채제공의 서자 채홍근과 정약용의 누이가 혼인하였음)에 있었으며 그 자신을 포함하여 그의 집안이 서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최초의 세례자인 이승훈(李承薰), 천주교 공동체를 조직했던 이벽(李檗)이 정약용과 인척관계였고, 그의 형인 약전(若銓)과 약종(若鍾)도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또한 정약용의 외종형인 윤지충(尹持忠)은 진산사건(珍山事件,1791)의 당사자였다.

정조 15년(1791)의 진산사건과 정조19년(1795)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변복 잠입 사건 등 서학 관련사건으로 노론 벽파는 채제공계 남인세력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자 정조는 반대파의 공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1795년 7월 정약용을 종6품 금정 찰방으로 좌천시켰다. 그러나 정조는 이듬해 10월 정약용에게 이만수(李晩秀), 박제가(朴齊家) 등과 '사기영선(史記英選)'을 교정하도록 명령하였고 12월에는 병조 참지(參知)를 거쳐 좌부승지로 승진시켰다. 정조21년(1797) 봄에는 '춘추경전(春秋經傳)', '두시(杜詩)', '육시(陸詩)' 등을 교정하게 하고, 같은 해 6월 다시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하자 정약용은 극심해지는 반대파의 비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직상소를 올렸고 비방이 계속되자 정조는 이를 피하기 위해 정약용을 황해도 곡산 부사로 나가게 하였다.

정조23년(1799) 4월 정조는 곡산 부사로 있던 정약용을 다시 병조참의로 조정에 불러들이고 이어 형조참의에 제수하자 다산에 대한 반대파의 시기와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결국 정약용은 39세인 1800년 봄 벼슬을 버리고 고향 마재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자 정조는 다시 정약용을 불러들여 규영부에서 교정하는 일에 종사하게 하였으나 같은 해 6월 정조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이것이 정약용에 대한 정조의 마지막 부름이 되었고 정약용의 정치적 역정도 끝을 맺게 되었다. 결국 서학문제로 인해 순조 1년(1801)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18년간의 유배기를 보내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조와 정약용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화성의궤),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관 내부 모습


 

 

 

 

















정약용 생애(계속) 

 

결혼

 

장인 홍화보

1776년 2월 22일에 무관 홍화보의 여식인 풍산 홍씨와 혼인하였다. 장인 홍화보는 몸이 마르고 키도 작은편이었으나 용맹스러운 무신(武臣)으로 호탕한 성품에 병법에 밝았다고 한다. 1771년에 황해도 장연부사로 있으면서 병영을 설치하여 청나라 해적선 퇴치에 공을 세운 바 있다. 영조 51년(1775)에는 승지로 제수되었는데, 이는 무인이 승지가 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정조 4년(1780)에는 영남우도 병마절도사를 지낸바 있다. 이런 장인의 영향을 받은 정약용은 〈아방비어고〉등 병서를 지을 수 있었다.




 

 

정약용의 철학사상

  • 당시 주자학을 절대시하여 이기설·예론 등의 논쟁에만 골몰하던 학계의 현실을 개탄하고 보다 참되고 가치있는 경세치용의 실학을 건설하기 위하여 한대 이후의 오도된 유학을 거부하고, 공자·맹자의 싸발원시 유학 수사학(洙泗學)으로 돌아가 유학의 본질을 파헤쳐 후인에 의하여 왜곡되고, 날조된 이론을 바로 잡으려고 하였다.
  • 이이·유형원·이익의 경세학적 태도를 이어받아 새 시대의 새 학문을 건설하려고 하면서, 당시 중국에 유입되고 있던 서양의 종교·과학 등에 접촉하여 이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 새 학문의 목적을 고증·경세(經世)·목민(牧民) 등에 두고 공자로부터 재출발하여 전연 독자적인 체계를 수립하였다.
  • 천(天)을 유형천(有形天)과 주재천(主宰天)·역리천(易理天)으로 구분하고, 주재천에의 신앙을 강조하였다.
  • 천명을 정치적으로는 인심으로, 윤리적으로는 정명(正命)으로 보아 백성을 위한 군자의 사명을 강조하였다.
  • 주자의 천리설(天理說)과 이기설(理氣說)을 부정하고 천명이 도심(道心)에 있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 인성론(人性論)에 있어 인간의 본성은 기호(嗜好)라는 성기호설(性嗜好說)을 주장하고, 사람에게는 도의지성(道義之性)과 금수지성(禽獸之性)의 양성(兩性)이 있음을 밝혀 이들 양자간의 갈등을 인정하였다.
  • 인물성동이논변(人物性同異論辨)에 있어 한원진의 인물성이(人物性異)를 지지하면서도 기질(氣質)의 성(性)은 같되 본연의 성은 다르다는 새로운 입장을 취하고, 주자학의 기질지성청탁수박설(氣質之性淸濁粹駁設)을 부정하였다.
  • 주자 이기론(理氣論)을 전면 거부하고, 공자·맹자의 양기설(養氣說)을 다시 주장하고 이를 목민(牧民)사상과 연결지었다.
  • 역리(易理)의 성립과정을 합리적·과학적으로 해명하여 음양(陰陽) 64괘(卦) 등을 미신적인 교리(敎理)로 보는 데 반대하였다.
  • 성인(聖人)을 신격화하는 데 반대하고, 인간은 누구나 성(誠)을 다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 공자의 충서(忠恕)·효제(孝悌) 이외에 자(慈)를 강조하여 윗사람의 아랫사람에 대한 의무·사명으로 하였다.
  • 성정중화론(性情中和論)에 근거하여 예악중화론(禮樂中和論)을 전개하고 원시 유교의 왕도(王道)사상을 강조하였다.

요컨대 정약용은 한나라 이후 유학의 병폐·타락을 성리(性理)·훈고(訓話)·문장(文章)·과거(科擧)·술수(術手) 등 다섯 가지로 지적하고, 공자에게로 돌아가 보다 합리적이고 건전하며 실제적인 신유학(新儒學)을 건설하여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려고 한 주체적·혁명적 사상가였다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 토지정책

1755년 사형당한 유수원 선생이 <우서>에서 비판한 대로, 다산 당시 농토의 100%를 사대부가 독점하여 평민들은 모두 소작농이었다. 이 상태는 일제강점기까지 계속되었다. 1944년 일제의 통계는 전국 농토의 64%가 소작된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36%는 사대부가 머슴들을 부려 직접 경작한 것이다. 이는 조선 사대부 계층이 일제와 협력했다는 증거다. 다산의 <전론>에 따르면 당시 인구 800만 추정(백골포 징수로 사망 신고를 해도 산 사람으로 처리하여 세금을 징수 하는 등으로 정확한 추정 불가) 농토가 800만결이었다. 일 가구당 1결이 되어야 굶어죽지 않는다. 다산의 추정에 따르면 사대부 1인이 평균 990명분의 농토를 차지하였고, 영남의 최씨와 호남의 왕씨는 3990명이 소유할 농토를 독점하고 있었다. 사대부는 소작인에게 세금까지 부담시켰다. 소작료는 평균 소출의 25%였으나 30%까지 올랐다. 당쟁과 홍경래의 난 등으로 당재에 패한 양반들과 난에 가담한 평민들이 노비계층으로 떨어져 헌종 때는 노비의 인구 비중이 35%에 달했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에 노비 제도가 없어져 노예의 신분에서는 벗어났지만 빈곤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승만의 토지 개혁을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토지정책이라 할 수 없듯, 다산의 정책 건의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 부를 수 없다.

중농주의 실학자로서 토지의 무상 분배, 공동 노동-공동 분배를 함으로써 토지 불평등을 개선하고자 한 사회주의 토지 정책인 여전론 정전론을 상상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였다. 정전론은 토지를 우물 정(井)으로 나누면 모두 9구역의 땅이 나오는데, 이중 8구역은 8명의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어 농사를 짓도록 하고, 1구역은 공동 노동을 하여 국가공동체의 복리를 위한 비용인 세금을 내도록 하자는 것이다. 여전론은 여(이문 여,閭)를 농민들이 공동 노동, 공동 분배하는 사회주의 토지정책이다. 그렇지만 일한 만큼 나눠주는 정책이니 현재 북한과 같은 토지정책은 아니다. 정약용 선생이 자신의 사회주의 사상을 실천하기 위한 점진적인 방법이 1819년 정약용이 전라도 강진군에서 유배를 할 때에 상상한 정전론이다.

 

청렴하고 평등한 경제

다산의 사상을 연구하는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에 의하면, 다산 선생은 평등하고 청렴한 경제(공렴,公廉)로써 불평등하고 부패한 경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산은 부자의 것을 덜어서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손부익빈(損富益貧)으로써 소득불평등을 풀어가고자 했고, 사회경제적 약자들인 4대 궁인 (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노약자, 어린이, 초상을 당한 사람, 질병을 앓은 환우, 재난피해자 등 사회와 국가에서 배려하는 애민(愛民)사상으로써 조선이 복지국가가 되기를 바랐다.

 

과학기술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른 활차녹로(滑車轆轤 : 도르래)를 만들고 그를 이용해 거중기를 고안하였다. 또한,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하였다. 문집으로 여유당전서가 있다.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 정조의 다른 최측근인 홍국영과 친인척 관계이기도 하다.

 

 

 




 

 

평가

조선 근대 공학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정약용은 유형원·성호 이익을 통해서 내려온 실학사상을 한 몸으로 집대성했다. 한국 근세에서 남인학파의 불평의 비판과 정치적으로 비현실적인 태도에 비하여, 다산은 남인학파 중에서도 정치적으로 다분히 실제적인 경험을 지녔고, 자기의 학문·사상의 체계화를 정리한 귀양지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보내기까지의 중앙 관리의 경력, 지방행정의 경험, 연천(連川) 방면의 암행어사 행각, 청년 시절의 왕환(往還)과 부친의 임소(任所)에 수행한 견문, 그리고 귀양살이 등은 그대로 생생한 교훈이며, 평생을 통하는 힘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사상에 현실적인 인식과 자료로 제공되었다. 다른 실학자들처럼 성리학·천문·지리·역상(曆象)·산학(算學)·의복(醫卜)에 관련된 저서는 물론 《경세유표》와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은 모두 ‘다산학’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경제·사상의 총괄 편으로 정박명절(精博明切)하며 탁견(卓見)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사상이 급속도로 붕괴해 가던 조선 사회에 적절히 적용되지는 못했지만, 다산이야말로 조선조 학계에 전개된 진보적인 신학풍을 한 몸으로 총괄·정리하여 집대성한 실학파의 대표인 것이다. 일찍이 위당 정인보

선생(茶山) 1인에 대한 요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근세사상의 연구요, 조선 심혼(心魂)의 명예(明銳) 내지 전조선 성쇠존망에 대한 연구

라고까지 평하여 그의 학문·저술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다산 선생이 저술한 약 500권의 책과 그 속에서 꺼지지 않은 불꽃으로 타오르는 실학사상의 정신을 조형물로 형상화한 모습

 

 

3대 저서

정약용은 한자가 생긴이래 가장 많은 책을 저술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저술한 500 여권의 책 중에 이른바 '1표 2서'라 불리는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는 정약용의 주요 저서로 꼽힌다.

  • 목민심서》 : 백성을 다스리는 지방 목민관(牧民官, 수령)의 치민(治民)에 관한 요령과 감계(鑑戒)가 될 만한 마음가짐과 태도 등을 저술한 책이다.
  • 흠흠신서》 : 곡산부사로 재직할 때 실제 수사했던 사건들을 바탕으로 서술한 판결과 형벌 및 치옥(治獄)에 대한 주의와 규범에 관한 책으로 사람의 생명에 관한 일을 가벼이 처리하지 않도록 유의할 점을 적었다.
  • 경세유표》 : 관제·군현제와 전제(田制)·부역·공시(貢市)·창저(倉儲)·군제·과거제·해세(海稅)·상세(商稅)·마정(馬政)·선법(船法) 등 국가 경영에 관한 일체의 제도 법규에 대하여 적절하고도 준칙(準則)이 될 만한 것을 논정(論定)한 책이다.

 

기타

  •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 정약용이 회갑을 맞던 해 자신이 직접 쓴 자신의 일대기이다.
  • 《맹자요의》
  • 《춘추고징》
  • 《상서고훈》
  • 《매씨서평》
  • 주역사전
  • 《역학서언》
  • 《대학공의》
  • 《대학강의》
  • 《중용자잠》
  • 《중용강의》
  • 《아언각비․이담속찬》
  • 《문헌비고간오》
  • 《소학주관》
  • 《소학기언》
  • 《심경밀험》
  • 상례사전
  • 《상례외편》
  • 《상의절요》
  • 《제례고정》
  • 《의례문답》
  • 《상례작의》
  • 《악서고존》
  • 《시경강의》
  •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 《대동수경》
  • 《풍수집의》
  • 마과회통
  • 《삼미자집(三眉子集)》 : 정약용이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았다가 나았는데, 그때 오른쪽 눈썹에 그 자국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 나뉘어 삼미(三眉)라 불렸다. 이 《삼미자집》은 정약용이 10세 이전에 지은 글을 모은 문집이다.

 

편지 모음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01년부터 1818년까지 장기와 강진에서의 유배길에 올랐을 때에, 두 아들(학유,학연)에게 보낸 편지, 부인이 결혼할 때에 입은 치마에 써내려간 시(히피첩), 따님에게 보낸 시화집을 창비에서 출판했다.(《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박석무 편역/창비)





다산 문화거리 입구

 

세계기념인물(UNESCO)

정약용은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장자크 루소 헤르만 헤세가 함께 선정됐다. 2012년이 다산 정약용 탄생 250주년되는 해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네스코는 2004년부터 유네스코가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가 일치하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 명사의 기념일을 유네스코 연관 기념 행사로 선정해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2013년에는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이 유네스코 기념의 해로, 2021년은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유네스코에서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한 바 있다.

 

노론의 적개심

생전 500여권 이상의 저작들을 출간하였다. 저작들의 대부분은 유배생활 19년간 집필한 것이다.

20세기 초반 까지도 노론계 인사들은 남인에 속하는 정약용을 혐오하였다. 한국에 서점의 개념이 도입된 1890년대 이후, 자유롭게 책을 사서 읽을 수 있었음에도 그의 저술들을 외면하였고, 윤치호 노론계 인사들이 그의 책을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어젯밤 추도식을 지낸 다산 정약용이야말로 이조가 배출한 아니 박해한 위대한 학자이다. ...(이하 중략)... 그는 16년 동안 유배 상활을 하면서 매우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 70여 권의 귀중한 원고를 남겼다.
그런데 요즘에도 노론계에 속하는 인사들은 그가 남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책을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

-윤치호일기, 1935년 7월 17일자

노론은 정약용이 죽은지 130년이 지난 뒤에도 정약용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유지하였다.

 

홍국영과의 관계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 정조의 다른 최측근인 홍국영과 인척관계이기도 하다. 정약용의 장인 홍화보 홍국영의 증조부뻘, 혜경궁에게는 할아버지(조부)뻘이 된다. 홍이상의 둘째 아들 홍영(1584년생)과 넷째 홍탁(1597년생)은 13년 나이차였고, 홍영의 증손자 홍중기(홍만용의 아들)와 홍탁의 손자 홍만기가 동갑이었고, 홍탁의 손자 홍만기는 40세가 다된 늦은 나이에 아들 홍중후를 봤다. 홍중후는 1687년생으로 8촌인 홍중해(홍국영의 고조부), 홍중기(혜경궁 홍씨의 증조부)와는 29세와 38세의 나이 차이가 난다. 따라서 같은 친척임에도 항렬차가 많이 나게 되었다.

 

 


 

가계

 *  조부: 정지해(丁志諧, 1712년~1756년), 자는 우경(虞卿)

  • 조모: 풍산 홍씨(1712년~1753년), 홍길보(洪吉輔)의 딸
    • 아버지: 정재원(丁載遠, 1730년~1792년), 자는 기백(器伯)
    • 전모 : 의령 남씨(1729년~1752년), 남하덕(南夏德)의 딸
      • 이복 형님 : 정약현(丁若鉉, 1751~1821) : 자는 태현(太玄), 이벽(李檗, 1754~1786)의 누이와 혼인, 3남 6녀를 두었으며 맏딸 정난주(丁蘭珠, 아명 命連, 1773~1848)는 황사영 백서사건을 일으킨 황사영(黃嗣永, 1775~1801)과 결혼하여 아들 황경한(黃景漢)을 둠.
    • 생모: 해남 윤씨 윤소온(尹小溫, 1728~1770) : 윤덕렬(尹德烈)의 딸, 윤두서의 손녀, 윤선도의 오대손녀
      • 형님 : 정약전(丁若銓, 1758~1816) : 자는 천전(天全), 물고기 이야기인 자산어보를 썼다.
      • 형님 : 정약종(丁若鍾, 1760~1801) : 자는 양중(養重), 신유박해 때 순교자로 장남 정철상(丁哲祥, ?∼1801)도 같이 순교. 후처 유소사(柳召史, 세실리아, 1761~1839), 후처소생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1795~1839)과 정정혜(丁情惠, 1796~1839) 역시 기해박해로 순교.
      • 본인 : 정약용(丁若鏞)
      • 부인 : 풍산 홍씨(1761~1839) :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홍화보의 딸과 1776년 4월 10일(음력 2월 22일)에 혼인하였다. 10번 잉태하여 첫 잉태 때 유산하고 6남 3녀를 낳았지만 4남 2녀가 요절하였는데 요절한 자녀들은 대부분은 천연두로 사망하였다.
        • 장녀 : 정씨(1781.7 ~ 1781.7), 4일만에 사망
        • 장남 : 정학연(丁學淵, 1783.9.12~1859) : 아명은 무장(武䍧) · 무아(武兒), 초명 후상(厚祥), 자는 치수(穉修)
          • 손자 : 정대림(丁大林, 1807.5.28~1895) : 진사, 현감. 자는 사형(士衡)
            • 증손자 : 정문섭(丁文燮, 1855.1.20~1908.8.15) : 문과 급제, 생부 정대무(丁大懋)
              • 고손자 : 정규영(丁奎英, 1872.10.20~1927.6.27)
              • 고손자 : 정규훈(丁奎薰), 정대초(丁大楚)의 아들 정헌섭(丁憲燮)의 양자로 입적
            • 증손자 : 정최섭(丁㝡燮) : 참봉
          • 손녀 : 정씨, 청풍 김씨 인물 김형묵(金亨默)에게 출가
        • 차남 : 정학유(丁學游, 1786.7.29~1855) : 아명은 문장(文䍧) · 문아(文兒), 초명은 학상(學祥), 자는 치구(穉求)
        • 며느리 : 청송 심씨, 심오(沈澳)의 딸, 예조판서 심각(沈瑴)의 증손녀
          • 손자 : 정대무(丁大懋, 1824.5.18~?) : 참봉, 현감. 자는 자원(子園)
          • 손자며느리 : 청송 심씨, 심동량(沈東亮)의 딸, 예조판서 심각(沈瑴)의 현손녀
          • 손자 : 정대번(丁大樊, 1833~?)
          • 손자 : 정대초(丁大楚, 1835~1904)
          • 손녀 : 풍천 임씨, 임우상(任祐常)에게 출가
          • 손녀 : 해남 강씨, 강은주(姜恩周)에게 출가
        • 삼남 : 천연두로 사망(1789.12.25~1791.4.2), 아명은 구장(懼䍧) ·구악(懼岳)
        • 차녀 : 천연두로 사망(1792.2.27~1794.1.1), 아명은 효순(孝順) · 호동(好童)
        • 삼녀 : 정씨 (丁氏 1793~?), 친구 윤서유(尹書有, 1764~1821)의 아들 윤창모(尹昌模, 1795~1856)와 1812년 혼인
        • 사남 : 천연두로 사망(1796.11.5~1798.9.4), 아명은 삼동(三童)
        • 오남 :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연두로 사망(1798~1798)
        • 육남 : 천연두로 사망(1799.12.2~1802.11.30), 아명은 농장(農䍧) · 농아(農兒)
      • 첩 : 남당네, 유배 생활을 함께 한 첩으로 한시 《남당사》의 저자로 추정
        • 서녀 : 홍임
      • 누이 : 이승훈(李承薰)에게 출가
      • 누이 : 채홍근(蔡弘謹)에게 출가
      • 누이 : 이중식(李重植)에게 출가
    • 서모 : 김씨 (金氏, 1754~1813) : 생모 해남 윤씨 별세 후 정재원의 소실로 들어와 정약용 형제를 양육함.
      • 이복 동생 : 정약횡(丁若鐄, 1785~1829) : 자는 규황(奎黃)
    • 숙부 : 정재운(丁載運) : 할아버지의 아우인 정지열(丁志說)의 양자로 출계
    • 숙부 : 정재진(丁載進)





북한강 철교 방향으로 나가는 길



입구에 세워져 있는 '천일각'

 

천일각은 다산 선생이18년 강진 유배 생활 중 1808년부터 10년이 지난 동안 거쳐하던 다산 초당에서 약 110미터 떨어진 곳에 세워진 정자로 이곳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심신을 달래고 소일하던 곳이라 한다. 강진에 있는 그 정자롤 그대로 이곳 다산 문화의 거리에 재현했다고 한다.





 

정약용 문화 거리를 탐방하고 떠나면서 가슴 속에는 여러가지 감회가 스쳐간다. 그가 정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조선이 개혁해야 할 여러가지 방안을 제시하고 모색하고 실천하였지만, 대부분은 사람들은 사리사욕에 빠져 실천이 불가하였고, 정조가 승하하면서 그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가득하다. 꿈과 비젼이 넘쳐나는 총명한 젊은이가 군주의 지원으로 꿈을 펼친다면 그 나라는 부흥하기 마련이다. 

 

정치란 부국강병을 이루어 나라의 안정은 물론 백성들이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부단한 개혁이 요구되고 정치적인 안정과 경제적인 풍요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무를 담당하는 관리의 청렴이 요구된다. 그래서 관리란 청렴해야 하고 개인의 이기심과 사리사욕을 멀리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 대부분은 이기심과 사리사욕을 멀리하기 힘들다. 이러한 이상적인 괸리의 모범을 보이면 옳다고 생각하는 일부 사람들은 따르겠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은 따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청렴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회 지도층과 공직사회에 요구하는 기본 덕목 중 하나이다. 서양에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로 지도층의 윤리적 의무를 강조하고 있고, 다산 정약용 선생도 ‘목민심서’에서 다음과 같이 청렴을 강조했다.


‘청렴이란 목민관이 지켜야할 근본적인 의무이다. 모든 선의 원천이자 모든 덕의 뿌리이다. 청렴하지 않고는 목민관의 역할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산 선생이 청렴을 강조한 것은 탐욕을 부리기 쉬운 인간 본성을 통찰하고 이를 잘 통제해야만 목민관으로서 바르게 소임을 다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청렴’이라는 글자 자체의 의미는 ‘투명함과 곧음’이다. 사람이 청렴하다 함은 성품과 행실이 높고 맑으며 탐욕이 없음을 의미한다. 청렴한 공직자란 ‘일을 사사롭지 않게 공정하게 처리하는 사람’이며, 청렴한 조직이란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을 말한다.

그러나 개인의 욕심을 버리는 것이 사람에게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부귀영화를 누리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권세와 재물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출세하면 자식과 가족, 일가친척을 위해 자신에게 부여된 권력을 사용하여 백성을 위하는 데 쓰는 척 하면서 제 주변 사람들의 사익을 챙겨주려고 애쓴다. 혈연을 무시할 수 없고 후손들에게 흠모와 존경을 받기 위해서다.

 

인류의 역사가 이러한 인간의 사익과 탐욕이 사라지지 않기에 오늘날까지 역사가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흥망성쇠는 모두 이러한 이유 때문이 일어나는 일이 아닌가. 무능하고 탐욕스런 관리들이 넘쳐 나는 인간 사회는 오늘도 권력과 재물을 얻기 위해서 노심초사 애쓰는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는 현실이다. 우리는 정조와 정약용의 위대한 사상을 가슴 깊이 새기고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노력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