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1,084 : 해방과 건국 44 (노무현 '참여정부' 3)

 

 

 

 

 

 

한국의 역사 1,084 : 해방과 건국 44 (노무현 '참여정부' 3)

 

 

노무현 대통령이 2일 오후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참여정부 평가포럼' 초청 특강에 참석, 환호하는 회원들을 진정시키고 있다. ⓒ연합뉴스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시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참여정부 평가포럼' 초청 특강에 참석, 환호하는 회원들을 진정시키고 있다.

 

 

 

 

노무현 참여정부(2003.2~2008.2) 3

 

 

<해설>

 

1. 정치권의 세대교체와 이라크 파병

  

2003년 2월 25일 국회의사당에서 취임식을 가진 노무현 대통령은 58세로서 처음으로 해방 후 세대가 대통령이 되었다. 새 정부는 '참여정부'를 내세워 자신을 키워준 '국민의정부'와 차별화를 시도했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로 역대 대통령은 영남이나 호남 등 지역주의에 바탕을 두고 선거에서 승리했다면 노무현은 세대 간 대결에서 승리한 것이 달랐다. 그래서 새 정부 시기는 386세대가 권력의 중심에 들어가고, 젊은 네티즌들의 의견이 정책에 반영되는 등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이것이 노무현정권이 표방한 '참여'의 의미였다. 이들은 권위주의에 저항하던 진보적 학생층이었다가 이제 사회적 주도세력으로 성장한 것이었다. 이들의 감각은 청신하지만, 경륜이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미숙함을 드러냈다. 무엇보다도 기성세대를 지나치게 소외시켜 세대갈등이 일어나고, 이념갈등이 필요 이상으로 증폭되어 정치.사회적 에너지를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새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가장 먼저 부딪힌 문제는 2003년 3월 20일에 발발한 이라크전쟁의 참전문제였다. 이라크가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거나 개발하고 있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것인데, 사찰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자는 유엔의 결의를 무시하고, 미국의 부시정부는 영국 등과 연합하여 이라크를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20여일 만에 수도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그 사이 수천 명의 이라크 국민이 희생당하였으나 정작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아 전쟁의 명분이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의 이라크침공은 석유자원확보와 군수산업 진흥, 그리고 종교적 갈등에서 비롯되었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이라크전쟁이 비록 미국의 단기적 승리로 끝나고, 숨어 있던 후세인 대통령을 체포하여 처단하고(2006.12) 친미정권을 세우는 데는 일단 성공했으나, 자살폭탄 테러로 대응하는 이라크 국민의 저항이 완강하여 미군의 피해도 매우 컸다. 이라크의 이슬람교도는 시아파와 수니파로 나뉘어져 있는데, 타종교에 관용적인 태도를 지닌 시아파가 국민의 절반을 차지하고, 미국에 무장항쟁을 주장하는 수니파가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바, 미국에 저항하는 세력이 바로 수니파다.

 

미국은 이라크 침공에 다국적군이 연합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한국에 대해 파병을 요청해 왔다. 정부는 국민 여론이 찬반으로 엇갈린 가운데 국회의 동의를 얻어 2003년 4월에 연인원 1만 9천 명의 공병부대와 의료부대를 파견했다. 이들을 '자이툰'(아랍어로 평화를 상징하는 올리브) 부대로 불렀다. 다만 한국군은 전투지역인 아라크 남부가 아니라 쿠르드족이 살고 있는 이라크 북부 아르빌에 주둔하여 대민봉사활동에 주력했는데, 현지인들은 '신이 준 선물'이라고 환영했다. 자이툰부대는 4년 3개월 간의 임무를 마치고 2008년 12월 19일에 전원 무사히 귀환했다.

 

이라크 파병은 실리적 이득보다는 동맹국인 미국의 요구를 무시하기 어렵다는 명분과 아울러 해와파병을 통해 전투력을 향상시킨다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한편 한국석유공사가 유전개발권을 얻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한국군의 해외파병은 1960~1970년대 베트남 파병과 1993년 아프리카 소말리아에 평화유지군 파병(공병대), 1999년 10월 동티모르에 419명의 상록수부대를 평화유지군으로 파병, 2002~2003년에 아프카니스탄에 비전투병 파견 등이 있었다.

 

 

 

2. 대통령 탄핵, 개혁과 반발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한 지 1년 만인 2004년 3월 12일 국회에서 탄핵소추를 결의했다. 역사상 현직대통령이 탄핵을 받은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다수당이 된 야당(한나라당과 민주당) 의원 195명 가운데 193명의 찬성을 얻은 결과였다. 47석의 의원을 가진 여당(열린우리당)이 저지하려고 했으나, 경호원들에 의해 본회의장 밖으로 끌려나갔다. 탄핵사유는 대통령이 선거에서 중립을 지킬 의무를 위반했다는 것과 대통령선거 당시 불법선거자금을 받고, 대통령의 사돈(민경찬)이 대선과 경선 당시 수백억 원의 모금을 했다는 것, 그리고 실정으로 경제가 파탄난 데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이었다.

 

집권 1년간 노대통령의 측근비리가 터지고 경제가 불안해지면서 인기도 급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지난 대선 때 이른바 차떼기로 도덕성을 상실한 한나라당이 대통령을 탄핵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 여론이었다. 탄핵소추를 받은 대통령(2004.3.12)은 공직수행이 정지되고 고건 총리가 권한대행을 하게 되었는데, 헌법재판소는 이해 5월 14일 탄핵소추를 기각함으로써 대통령은 다시금 공직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노무현 대통령은 물론 여당은 국민들의 민심이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그러나 탄핵사건을 계기로 인기가 떨어졌던 여당이 야당의 무리수에 대한 반발로 점차 인기가 올라가고 반대로 한나라당은 인기가 떨어졌다. 그래서 이러한 분위기가 2004년 4.15 총선에 반영되어 '열린우리당'이 152석을 얻어 다수당이 되고,  '한나라당' 121석, '민주노동당' 10석,  '새천년민주당' 9석,  '자민련' 4석을 얻었으며, 정몽준이 창당한 '국민통합 21'은 1석을 얻는데 그쳤다. 이로써 김대중계와 김종필계, 그리고 정몽준계가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4.15총선 이후 힘을 얻은 정부는 의도했던 정책을 밀고 나갔다. 행정수도를 국토의 중심부인 연기-공주 지역으로 옮기는 일,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는 일, 사립학교법을 개정하는 일, 친일 반민족 행위자를 소급하여 조사하는 일, 대북 햇빛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일, 보수언론을 개혁하는 일 등이었다.

 

먼저 행정수도 이전은 국토의 균형발전을 도모한다는 취지로 시작되었으나, 사전 충분한 국민적 합의가 없이 추진되면서 여론의 거센 반발을 받았으며, 급기야 헌법재판소는 위헌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그러나 정부는 2005년 3월 행정수도 대신 '행정복합도시'로 바꾸어 특별법을 만들고 토지보상에 들어가 많은 논란과 갈등을 빚으면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착공과 준공,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세종시로 불리는 그곳은 대규모의 정부청사가 이전해가면서 복지시설을 비롯하여 주변 환경이 아직은 열악한 상태로 거주와 근무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많은 공무원들이 별거 또는 매일 개인 자가용으로 출퇴근 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주말에는 서울로 올라왔다가 월요일에 다시 내려가는 고통을 감수하고 있으며, 부서 협조문제로 자주 서울과 세종시를 왕복해야 하는 등 이동시간과 비용도 만만치 않은 실정이다. 많은 공무원들이 갑작스런 환경 변화로 정신적.신체적 고통을 감내하고 있으며 업무협조, 각종 회의 등으로 서울로 자주 출장을 가야하거나 국회에 출석해야 하는 등으로 인해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부처별로 서울에 별도의 서울사무소을 차리는 등 이중적인 낭비요소가 많은 등 여러가지로 해소해야 할 문제점이 남아 있다.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은 남북 간 화해와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조건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폐지의 주요 이유었으나, 이 역시 야당과 보수단체의 거센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사립학교법은 사립학교의 운영과 재정이 불투명하여 사학비리가 드러나고, 경영자와 직원 교사 간에 각종 분쟁이 그치지 않는 것을 시정하여 운영과 재정을 투명하게 만들고, 이사진의 4분지 1 이상을 외부에서 영입하는 아른바 개방형 이사를 두자는 것이 취지였다. 그러나 학교의 설립자나 재단측은 사학의 자율성을 침해할 뿐 아니라 좌파인재들을 키우는데 악용될 우려가 있다는 점을 들어 완강하게 반대하고 나섰으나, 여당은 2005년 12월 이를 강행처리 통과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음에 '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법'은 광복 직후 유야무야로 끝난 친일파에 대한 진상규명을 다시 하여 민족정기를 바로잡겠다는 취지로 여당이 발의하여 2004년 3월 2일에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그리고 이 법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강만길, 뒤에 성대경)가 설립되어 조사에 들어가 2006년에 제1차로 106명의 명단(1904~1919년간)을 발표하고, 이어 2007년 12월에 제2차로 195명의 명단(1919~1937년간)을 발표하여 모두 301명을 확정했다. 그러나 1937년 이후의 친일행위자 명단은 이직 발표하지 않았다.

 

이 사업을 계기로 여당과 야당은 서로 상대방 조상의 친일행위자를 폭로하는 사태가 벌어져 적지 않은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학계에서 할 일을 정치권에서 한 데서 생긴 결과였다. 친일행위자는 자발적인 경우도 있지만 강압과 협박에 의한 경우가 더 많고, 겉으로는 친일하면서 속으로는 독립운동을 도와준 인사도 적지 않으므로, 단순히 직위나 작위만을 가지고 친일파로 규정하는 것은 자칫 일제의 죄악에 면제부를 줄 수도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상 참여정부의 여러 정책은 원칙적으로 필요한 사업이었지만 방법이 조급하고 신중하지 못한 점으로 인해 세대 간 계층 간 심각한 갈등을 유발하여 국론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마디로 민족적 숙원사업이었지만 이미 해방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의해 재등용되어 오랜 기간 세력을 키워왔고 가진자와 지도층으로 자리메김한 친일파 후손들이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의 후손들이 국회에서 서로를 흘뜯으며 사상적 갈등만 남기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친일파에 대한 것도 중요하지만 독립운동에 목숨을 걸고 투신한 가려진 독립투사를 찿아내고 그 후손들에 대한 국가적인 대대적 보상과 지원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하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던진 수많은 이름없는 민초들은 물론 독립운동에 몸바친 인사, 그리고 각종 전쟁터, 작전 임무수행 중 목숨을 던진 순국선열과 전몰장병들의 유가족에 대해서는 후손들이 풍족하고 행복하며 여유롭게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국가에서 충분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앞으로 누가 이 나라를 위해서 묵숨을 던질 것인지를 곰곰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빛바랜 보훈정책에 한숨만 나오는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