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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여름 4 : 대진제국의 변법개혁, 성장, 중국 통일과 멸망까지 3

 

 

 

 

 

강남의 여름 4 : 대진제국의 변법개혁, 성장, 중국 통일과 멸망까지 3

 

                                                                                                                 잠원동 새벽

 

요즘은 새벽 5시쯤 되면 날이 밝아온다. 어둠이 서서히 걷히는 서울 강남 거리는 지난밤에 인간들이 버린 온갖 쓰레기로 지저분하다. 특히 교대역 근방 먹자골목은 새벽까지 욕정을 불태우는 남자들과 그런 남자들을 이용하여 돈을 벌고 있는 여성들로 새벽까지 환락의 열기로 가득찬 비틀거리는 골목이다.

 

월드컵의 열기가 식어버린 골목은 썰렁하기만 하고 이 어려운 시절에 국민들의 기대와 환상도 사라졌다. 동네 축구와 프로 축구팀의 차이 정도로 실력과 전술에서 뒤떨어진 한국 축구는 용만 쓰다가 초반에 쓰러지고 말았다. 선수들도 열심히 뛰었지만 감독도 열심히 했을 것이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냉엄한 축구는 골대 속으로 공을 어느팀이 얼마나 더 많이 차 넣느냐에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우리 축구계를 다시 뒤돌아볼 시점인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골목길에서 모래밭에서 공을 갖고 놀며 축구 황제 펠레의 꿈을 키워온 남미와 아프리카 대륙의 축구, 힘과 기술로 막강한 실력을 뽐내는 유럽 축구를 제외하고 아시아를 비롯한 기타 나라들은 시스템과 제도 등 환경면에서 그들과 비교가 되지 못하는 듯하다. 축구 지도자 한 사람에 따라 같은 선수들이 4강까지 가는가 하면 16강도 못 가고 초반에 탈락하는 수모를 겪는 수준의 차이라는 점이다.

 

2002년 월드컵 4강의 기적은 이제 우리들에게는 영원한 전설로만 남을 듯하다. 당시 히딩크 감독은 우리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영웅이었다. 불모지 대한민국 축구를 월드컵 4강까지 올라가게 만든 그는 분명 축구 감독 중 우리 축구역사에서 영원히 영웅으로 남을 것이다. 그는 지난번 인터뷰에서 '선수가 감독을 믿고 최선을 다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아마 그도 한국 축국가 초반에 탈락할 것으로 예상했을 지도 모른다. 어린 유소년 축구 선수 양성부터 프로구단 운영, 선수 관리, 협회, 감독 선발, 선수 선발 등 모든 면에서 아직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축구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나라 돌아가는 꼴이 가관이다. 한마디로 국정의 위기다. 문창극 후보자가 사퇴하고 사퇴를 했던 전임 총리가 유임되었다. 언론은 재활용이라고 비난하며 대통령의 인사시스템을 비난하기도 한다. 그래서 청와대에 인사수석실을 만든다고 한다. 임시변통식이며 땜질식 처방만 난무하고 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근본을 모르는 것 같으며 과거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변화와 개혁을 두려워한다면 이 나라의 미래는 없다.

 

대통령 비서실장은 권력의 핵심이다. 나이 많은 비서실장의 머리속에 새롭고 참신한 아이디어가 떠오를리 만무하다. 모든 과오가 그에게서 비롯된 듯,  언론과 야당에서는 비서실장을 갈아치워야 한다고 아우성이지만 대통령은 묵묵무답이다. 탄력을 잃은 총리가 과연 개혁을 제대로 추진할 수 있을 것인지도 의문이다. 내가 보기에 이미 개혁은 물건너 간 듯하다.

 

축구라도 16강을 갔더라면 국민들의 관심이 쏠려 정치권이 좀 안심이 됐을 것인데, 그것도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전방 총기 사건을 보고하는 국방위 회의에서 말 한마디 잘못으로 국방장관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 군이 날이 갈수록 국민들의 신뢰를 상실하고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한편 인접 일본은 군사적 야욕을 점점 더 드러내고 있고 일본과 북한의 야합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중국 시진평 주석이 답방형식으로 방한한다고 청와대는 자랑스런 듯이 발표했다. 그래서 좀 위안이 될 것인가? 무슨 큰 보따리를 우리에게 넘겨 줄 것인가를 기대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속내를 어찌 알 것인가? 중국은 한반도 통일에 절대적이다. 6.25전쟁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통일의 기회를 상실했던 기억들 떠올리면 한반도 통일을 위해서는 미국보다 중국을 끊어 안아야 할 우리들의 입장이다.  

 

사이비 교주 유병언의 흔적은 오리무중이다. 인천지검 담당 검사는 40일째 사무실에 침대를 펴 놓고 분투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잡을 의지가 있는지 아니면 포기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마 불안에 떨고 있는 여러 사람이 사방에서 유병언 도주를 비호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가 잡히는 날에는 후폭풍이 거셀 것이다. 그가 뇌물을 제공했던 유병언 비망록이나 리스트가 공개되면 여러 사람이 다칠 것이기 때문이다. 

 

차량연비를 놓고 국토부와 산업부 간에 먹거리를 놓고 시비가 붙은 모양이다. 이미 미국에서는 연비문제로 과징금을 엄청나게 물어준 자동차 회사가 우리 국민들에게는 모른체 하고 연비마져 속여왔다. 국민들이 봉인가? 차량 급발진도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잇는 실정이다. 국민의 피를 빨아먹으며 성장하고 있는 대기업의 횡포를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정부는 존재가치가 없다. 그런 대기업을 옹호하며 뒤를 봐준 공무원들을 모두 잡아내 처벌해야 한다.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삼성전자 본사 사옥 앞을 지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철야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일요일은 쉬고 평일에는 사옥 앞에 진을 치고 잠을 자면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경찰 버스가 여러대 대기하고 있고 전경들이 밤을 새며 대기하고 있다. 아마 근로자 문제일 것이다. 기업주 이건희 회장은 아직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깨어나도 식물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벌을 받은 것일까?

 

삼성은 노동조합 설립을 폭력, 해직, 사찰, 감시, 뇌물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철저하게 거부하고 있다.  한마디로 노동자 권익을 철저하게 유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반도체 등 유해한 작업 현장에서 장기간 일하다가 몸이 아파 퇴사하여 직업병이 걸려 목숨을 잃어도 모른채 하며 보상을 거부하다가 얼마전에 피해자들이 단체를 결성하여 끈질긴 노력으로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진 듯하다. 철저한 경쟁을 유도하고 모든 게 성과위주로 평가하기 때문에 보수는 많이 주되 일하는 사람마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한다. 휴대폰 사업이 성공하여 오늘의 삼성전자로 성장한 것이다.

 

 90년대 정부에서 통신시장 개방에 대비하여 엄청난 보조금을 주면서 국민들에게 휴대폰을 대량으로 보급하였고 계속된 새로운 휴대폰 출시로 매출이 급속히 늘었고 따라서 영업이익도 늘었다.  통신 3사로 하여금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엄청난 마케팅을 전개한 결과 휴대폰 제조사인 삼성전자는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모두가 국민들의 피와 땀을 이용하여 성장한 기업인데, 사회적 본분을 망각하고 노동자들에게 막대한 인권유린을 포함하여 사회적 기업으로 그 책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기업이다.

 

정치권을 포함하여 법조계, 학계, 언론 등에 포진한 삼성맨들이 삼성을 돕고 있다. 사이비 교주 유병언의 기업 운영 방법과 다를 것이 없다. 삼성의 금력은 대한민국을 쥐고 흔들 정도로 막강하다. 기업주들이 죄를 짓고도 쉽게 풀려나는 것이 바로 그들이 정치권. 법조계 등에 평소부터 은밀히 뇌물을 제공하면서 키워온 삼성맨들이 재물로 먹이사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6.25가 소리없이 지나갔다. 6.25를 허무려는 무리들이 교과서를 비롯하여 사회전반에 포진하여 역사를 허무려하고 있다. 전쟁의 호칭을 비롯하여 북한과 중국을 옹호하며 중공군을 중국군, 개입을 참전으로 호도하고, 이미 개방된 소련의 비밀문서에서 밝혀졌듯이 김일성의 남침을 희석시키려고 시도하고 있다. 38선 일대에서 여러 차례 교전이 있다가 전쟁이 발발하였다며 남침을 희석시키려 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시도가 젊은 시절 맑스-레닌 사상에 빠져 사상적으로 변질된 종북 좌파 무리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삐뚤어진 사회를 개조하는 일은 시급하다. 우리 사회가 이처럼 변질된 것은 후진적 행태의 정치권과 준엄한 법치가 무너진 원인이 크다. 목숨을 걸고 개혁을 시도할 인물이 정말 없다는 것인가? 정치인과 기업주가 존경받는 나라를 만드는 일이다. 사회 모든 분야에서 기생하고 있는 비리와 부패의 먹이사슬을 끊어야 하고 사상적으로 건전한 진보를 양성해야 한다. 좌익에 물든 진보는 북한 공산집단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의 우리 사회에서는 위험한 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부의 정통성을 훼손하려 하고 역사를 오도하며 김일성 세습 정권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야 말로 자신의 이념과 사상을 실천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김일성 교조사상에 빠진 무리들로 사이비 종교집단에 빠진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지리산, 태백산맥 일대에서 빨치산으로 할동하다가 소리없이 사라져 간 수많은 좌익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한심하고 혼돈스러운 대한민국을 되돌아보며 대진제국의 변법개혁과 성장,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시황제 이야기를 계속한다. 

 

 

 

 

(秦)나라 성장과 멸망까지 3

 

 

31. 진 시황제(始皇帝, 재위 : 기원전 246년 ~ 기원전 222년) : 통일 왕조 시작

 

중원통일

 

진나라는 춘추전국시대 수많은 주변국들과 투쟁을 치루면서도 착실한 국력을 쌓게 되고 합종연횡책, 원교근공책을 구사하면서 31대 진 시황제대에 이르러 중국 역사 최초로 중원을 통일하며 황제로 칭하게 된다. 중국인들은 진 시황제를 중원을 통일한 황제로 중국의 영토와 역사적 근간을 이룬 인물로 16년이란 짧은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불가사의한 치적과 불행한 학정과 폭정 등 공과에도 불구하고 가장 위대한 군주로 생각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치적 뒤에는 여불위, 이사, 진승, 조고,부소 등 수많은 우수한 신하와 장군 몽염, 장한을 포함한 유능한 장수들의 충성심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 시황제 사후, 무차별적인 폭정으로 인해 그동안 숨죽이고 고통받던 백성들과 제후국들이 반기를 들면서 '진승.오광의 난'이 발생하고 환관들의 발호로 권력쟁탈전이 가속화되자  나라가 혼란에 빠지면서 결국 3대 자영대에 이르러 유방과 항우에 의해 진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진 시황제(始皇帝, 재위 : 기원전 246년 ~ 기원전 222년)

진시황제( 秦始皇帝 Qín Shǐ Huáng Dì, 기원전 259년 1월 ~ 기원전 210년 음력 9월 10일)는 진나라의 제31대 왕이며, 중국 최초의 황제이다. 이름은 영정(嬴政)이며, 조나라에서 출생하였기에 조정(趙政)이라고도 한다. 진 장양왕 영자초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당시 세도가 대단하던 조나라의 상인 출신의 승상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불로불사에 대한 열망이 컸으며, 대규모의 문화탄압사건인 '분서갱유' 사건을 일으켜 수 양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도량형을 통일하였고 전국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년 중국 왕조들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전근대의 중국에서는 특히 유학 관료들에 의하여 폭군이라는 비판을 계속 받았으나, 오늘날 중국에서는 병마용 발굴 이후부터 시황제의 진취성과 개척성에 초점을 맞추어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초기 생애

영정은 기원전 259년에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온 진나라 공자 영자초와 그 부인 조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래 조희는 조나라 수도 한단의 기생으로, 조나라의 거상 여불위가 데리고 있었다. 여불위는 조희를 영자초에게 바쳤고, 영자초는 조희를 아내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원래 조희는 여불위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었으나, 여불위가 이를 숨기고 정치적 목적에서 영자초에게 바쳤다는 설도 있다. 그래서 진 시황제는 영자초의 아들이 아니라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건, 영정은 영자초의 아들로 태어나, 줄곧 조나라에서 자라다가 기원전 250년, 영정의 증조부인 소양왕 영직이 동주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소양왕은 얼마 후, 사망하였고 그 아들인 효문왕 영주가 즉위했다. 이에 영자초는 처자와 여불위를 데리고 진나라로 돌아와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효문왕은 즉위한 지 1년 뒤에 사망하고, 태자 영자초가 즉위하니, 이가 장양왕이다.

 

영정은 곧 태자에 책봉되었지만, 3년 뒤에 아버지 장양왕이 훙서하자,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나라의 제31대 왕에 즉위하였다. 진시황은 세계적으로도 중구을 통일한 황제로 유명하다.

                                                                                                                                             

중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   


신화와 고대
선사 시대
신화·삼황오제
황하장강 문명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기원전 1122~기원전 256
 서주
 동주
   춘추 시대
   전국 시대
제국의 시대
기원전 221~기원전 206

기원전 206~서기 220
 전한
 8~23
 후한

삼국 시대220~280
 ,,
265~420
 서진
 동진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남북조 시대420~589
581~618

618~907
무주690~705

오대십국 시대
907~960
916~1125

960~1279
 북송 서하
1038~1227
 남송
1115~1234
1271~1368

1368~1644


1644~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1911~현재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중화민국(타이완)

 

 

 

여불위와의 분쟁

영정은 왕위에 올랐으나, 친정을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기에, 아버지 때에 승상이 된 여불위가 섭정이 되어 국사를 돌보았다. 여불위는 마음대로 국사를 휘둘렀으며, 심지어는 영정의 모친 조태후와도 각별한 사이였다 한다. 이에 여불위는 노애라는 자신의 수하를 환관처럼 꾸며 조씨의 처소로 보냈고, 조씨는 노애와의 사이에서 2명의 아들을 낳았다.

 

이에 조씨는 노애와 함께 수도 함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거처하였다. 하지만, 기원전 238년에 영정은 성인식으로 잠시 함양을 비우자, 노애가 반란을 일으켰다. 소식을 들은 영정은 곧바로 군사를 파견하여 노애를 능지처참에 처하고 어머니 조씨를 감금하였다. 또한 노애와 조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2명을 환관을 시켜 목을 졸라 살해하였다.

 

그리고, 영정은 여불위를 승상의 자리에서 내치고, 자결을 강요하였다. 이듬해인 기원전 237년에 여불위는 결국 자결하였으며 영정은 비로소 친정을 시작 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 통일 과정

기원전 230년부터 영정은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중국 통일을 위한 통일 사업을 시작하였다. 제일 먼저, 진나라는 가장 세가 약했던 한나라부터 멸망시켰다.

 

기원전 228년에는 조나라까지 멸망시켰다. 그 때, 연나라의 태자 희단이 자객 형가를 시켜 잔치자리에서 영정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어, 기원전 225년에는 위나라, 기원전 223년에는 진나라 다음으로 세가 가장 세었던 초나라,  기원전 222년에는 연나라,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드디어 마지막 남은 제나라까지 멸망시켜 영정의 나이 39세에 전국칠웅 중 6국을 멸망시키고 전 중국 땅을 마침내 통일하였다.

 

 

최초의 황제

영정은 왕이라는 칭호가 자신에겐 맞지 않는다며, 새로운 칭호를 원하였다. 그리고 삼황오제에서 '황'과 '제'를 따 합쳐서 황제(皇帝)라 칭하였고, 자신은 처음이니 시황제(始皇帝)로 부르라 명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시황제로 시작하여, 자신의 뒤를 잇는 황제들이 2세, 3세 등 만세까지 진 제국이 지속되기를 바랐다.

 

진시황제 영정은 승상 이사에 의견에 따라 군현제로 나라를 다스렸고,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었다. 또한, 모든 결재는 자신이 직접 챙겼으며, 도량형과 화폐, 문자 등을 통일하여 제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려 하였고, 도로 역시 정비하여 각지의 교통체계를 강화하였다. 시황제는 남쪽으로도 군사를 파견하여 4개 군을 증설시켰으며, 북방의 흉노족이 중국을 위협하자, 대장군 몽염을 변방으로 보내어, 그들을 정벌, 내몽고의 땅 일부도 편입시켰다.

 

 

 

분서갱유와 폭정, 대토목공사

기원전 213년, 어느 연회 때, 박사 순우월 봉건제와 군현제를 놓고 복사 주청신과 언쟁을 벌였다. 이 때, 순우월이 봉건제로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승상 이사는 30일 내에 진나라의 역사와 의술, 농경 등에 관한 책 이외의 모든 책들을 태워버리라 주청올렸고, 시황제는 이를 받아들여 실행시켰다. 이것이 바로 분서(焚書)이다.

 

이듬해인 기원전 212년, 시황제는 방사 후생 노생에게 불로장생의 약을 가지고 오라 명하였으나, 도리어 그들은 시황제를 비판하며, 도망쳐 버리자 화가 난 시황제에게 조정 안에 수상한 학자가 일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학자들은 모두 자기가 아니라며 잡아뗐으나 시황제는 이들을 모두 잡아들였으니, 그 수가 460여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구덩이에 넣고 생매장시켰으니, 이것이 바로 갱유(坑儒)이다. 그리고 이를 모두 합쳐서 분서갱유(焚書坑儒)라 불렀다.

 

이에 분개한 황태자 부소가 시황제에게 간언했으나, 부소는 오히려 시황제의 분노를 사 대장군 몽염이 있는 국경 근교로 쫓겨났다.

 

시황제는 북방에 흉노의 침입을 염려하여 서쪽으로 임도로부터 동쪽으로 요동까지 그 유명한 만리장성을 쌓도록 명했다. 이 만리장성에 동원된 인부가 150만여 명이나 되었고, 그 중에서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 하였다.

 

또한, 시황제는 함양 근교에 아방궁을 쌓도록 하였고, 나아가서는 70만 명의 인부를 동원, 함양 근교의 여산 전체에 자신의 능묘를 건설토록 했다. 이런 대토목공사를 하는 동안, 국가의 재정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법을 매우 엄히 하여 백성들이 무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게 하였으며, 한 사람이 죄에 연루되면 그 친족을 몰살시켰고, 나아가 한 집이 법을 어기면 그 마을의 모든 가구들도 그에 똑같은 형벌을 받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관청으로 가는 길에는 항상 죄인들의 행렬이 즐비했다 전해진다.

 

 

불로장생의 꿈

시황제는 자신이 무병장수 불로장생하길 간절히 빌었다. 그리하여, 전국의 명산에 방사들을 보내 불로장생의 약을 얻으려 하였으나, 없었다. 그리하여 죽으면서까지 그 약에 매우 집착을 하였는데, 그 중 서복이라는 사람이 시황제에게 왜국에 그 약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시황제는 많은 돈을 서복에게 내주고 왜국으로 가 어서 그 약을 가져오라 명했다. 하지만, 몇 년이 다 되도록 그 약을 구할 수 없게 되자, 시황제는 서복에게 독촉을 했고, 서복은 소년소녀 3000명을 데리고 왜국으로 건너가 다시는 진나라로 돌아오지 않았다.

 

 

전국 순행

시황제는 재위 기간 중 무려 다섯 차례씩이나 전국 곳곳을 순행하였다. 그러나, 이런 때에 많은 협객이 폭군 시황제를 죽이려 하였다. 그리하여 시황제는 순행 시, 언제나 5개의 수레를 수 십만 군사들이 호위토록 하고, 자신은 그 수레 중 하나에 탔다. 시황제가 자신을 죽이려 드는 협객을 얼마나 두려워 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시황제는 길가에 자신의 송덕비를 세워 자신의 공적을 과시하기도 했다. 한번은 시황제가 금릉(金陵, 현재의 남경)에 왔을 때, 왕기가 일어났다. 이에 분개한 시황제는 근처에 소나무를 빽빽이 세워 왕기의 기운을 막으려 했다. 그리고 금릉은 삼국 시대까지 말릉(枺陵)으로 불리었다. 이렇게 시황제는 거의 온 중국 대륙을 돌아다녀 자신이 성공한 군주임을 천하에 과시하였다.

 

 

 

진시황릉의 병마용

 

진시황릉의 또다른 병마용

 

시황제는 기원전 210년에 마지막 순행을 하였다. 여기에는 승상 이사와 중거부령인 환관 조고, 그리고 자신의 26번째 아들이자 막내 아들인 호해가 자신을 뒤따랐다. 사기에 따르면 시황제는 돌아오는 도중 평원진에서 유성이 떨어졌는데 그 운석에 누군가가 '시황제사이지분(始皇帝死而地分)' 즉, 시황제가 죽고 천하가 갈라진다고 써놓았다. 이에 충격을 받은 시황제는 병으로 쓰러졌다고 한다.

 

그리고 시황제는 사구 지방에 이르자, 병이 매우 위독해졌으며 유언장을 조고에게 쓰라 하고, 그 내용은 옥새를 적장자인 황태자 부소에게 전달케 하고, 부소에게 함양에서 자신의 장례를 주관하라 명하였다.

 

기원전 210년 음력 9월 10일, 진시황제 영정은 50세의 나이로 붕어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자신이 만든 지하궁전인 여산에 묻혔다. 이 능묘는 1974년 우물공사를 하면서 부장품인 병용(군사모양의 인형)과 더불어 발견되어 지금도 발굴 중이다.

 

그러나 이사와 조고, 호해는 시황제의 죽음을 숨겼으며 시황제의 시신이 있는 수레 옆에 절인 생선을 같이 운반하여 시신 썩는 냄새가 들키지 않도록 했다. 조고는 시황제의 유서를 조작, 황태자 부소와 대장군 몽염에게 자결을 명하였고 부소는 자결하였으나 몽염은 이 명에 대해 의심을 품어 자결하지 않았다. 그러나 군사들에게 체포당해 압송된 후 처형당했다. 얼마 뒤, 시황제의 26남 호해가 황제에 오르니 그가 진 이세황제이다.

 

 

진나라 통일 이후

진나라는 기원전 221년 제31대 왕인 영정이 모든 나라를 멸망하고 통일하여 황제(皇帝)의 위에 오르면서 중국 최초로 제국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오래 가지 못했다.

 

진나라 시황제는 상앙의 변법개혁 이후 줄곧 법가사상으로 하여금 부국강병을 이루었고 결국 중국을 통일하였다.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후 함양을 수도로 삼고 약 30여년이 지속됬다. 멸망 원인은 강압적인 만리장성 축조와 아방궁 축조, 환관들의 발호, 엄격한 형벌 등에 의해서 제후들과 백성들의 반란으로 망하게 된다.

 

기원전 247년에 즉위 한 영정은, 이사(李斯)를 승상을 임명하고 국력 증강에 노력했다. 기원전 223년에 진나라의 최대의 적인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해, 스스로 황제(첫 황제이므로, 시황제라고 한다)를 자칭했다. 이 황제의 칭호는, 중국의 전설상의 성왕인 삼황오제로부터 따온 것이다.

 

시황제는 도량형·문자의 통일, 군현제의 실시등 여러가지 개혁을 실시했다. 또, 흉노 등의 북방 기마민족에게 침략을 대비 하기 위해서 각각의 나라가 독자적으로 만들고 있던 장성을 정비하고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건설했다. 만리장성의 건설은 주로 농민을 사역해 행해졌지만, 가혹한 노동과 극도의 법치주의에 국내는 불만이 높아져, 반란의 싹을 길렀다. 흉노에 대해서는, 장군 몽염을 파견하여 북방으로 격퇴했다. 게다가 남방에도 원정 해, 현재의 베트남 북부까지 영토를 펼쳤다. 이 때, 남방에는, 남해, 상, 계림의 세 개의 군이 놓여졌다. 이것은, 중국 왕조에 의한 남방 지배의 시작이기도 하다.

 

시황제의 사후, 환관 조고(趙高)가 태자 부소(太子扶蘇), 승상 이사나 시황제의 혈족자 등 권력자를 차례차례로 암살해, 어리석은 2세 황제는 허수아비 황제로 조고가 권력을 제멋대로 부리면서 폭정을 하였다. 시황제의 사후 진나라는 혼란에 빠지면서, 다음 해에는 진승, 오광의 반란이 발발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분열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진 이세황제와 조고는 장한(章邯) 장군을 반란군 토벌군으로 보낸다. 장한은 군사적 능력을 발휘해, 진승군을 격파하고, 그 다음에는 초나라의 반란군인 항량군도 격파했다. 그러나 항량의 조카 항우와의 결전에서 패배하여 장한은 포로가 된다. 항우는 함양으로 향하는 도중에 반역의 기색을 보인 진나라 병사 20만을 죽여 버렸다.

 

장한이 대패한 것을 들은 조고는 낭패해졌고, 2세 황제를 폭정의 오명을 씌운 다음 살해하고, 자영을 세워 민의의 안정을 도모하려고 하지만, 반대로 자영등에 의해서 조고는 주살당했다.

 

그 후, 유방이 함양에 들어가자, 자영은 항복하고 진은 멸망 했다. 유방은 자영을 죽이지 않기로 하였으나, 나중에 함양에 도착한 항우는 자영을 죽이고, 함양의 미녀와 재보를 약탈하고, 화를 걸쳐 함양은 폐허가 되었다.

 

진시황은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초기에 36군을 설치하였으며 주변정복에 따라 군이 추가되었다 여기서는 46개군(郡)으로 소개한다 (42군설도 48군설도 있음)

 

요동군(辽东郡)、구원군(九原郡)、운중군(云中郡)、요서군(辽西郡)、상군(上郡)、태원군(太原郡), 거록군(巨鹿郡)、교동군(胶东郡)、감단군(邯郸郡)、낭야군(琅琊郡)、북지군(北地郡)、동해군(东海郡)、농서군(陇西郡)、함양(咸阳)、남양군(南阳郡)、한중군(汉中郡)、구강군(九江郡)、회계군(会稽郡)、남군(南郡)、형산군(衡山郡)、촉군(蜀郡)、파군(巴郡), 검중군(黔中郡)、장사군(长沙郡)、풍중군(闽中郡、남해군(南海郡)、계림군(桂林郡)、상군(象郡)、우북평군(右北平郡)、어양군(渔阳郡)、광양군(广阳郡)、상곡군(上谷郡)、대군(代郡)、안문군(雁门郡)、상산군(常山郡)、제북군(济北郡)、임치군(临淄郡)、하동군(河东郡)、하내군(河内郡)、동군(东郡)、설군(薛郡)、삼천군(三川郡)、탕군(砀郡)、영천군(颖川郡)、진군(陈郡)、사수군(泗水郡).

 

통일 진(秦)제국 황제

 

진나라 황제 열표
대수 시호 성명 재위기간
- 태상황제
(太上皇帝)
(진 시황제 추숭)
영자초(嬴子楚) -
제1대 진 시황제
(秦始皇帝)
영정(嬴政) 기원전 221년 ~ 기원전 210년
제2대 진 이세황제
(秦二世皇帝)
영호해(嬴胡亥) 기원전 209년 ~ 기원전 207년
제3대 진 삼세황제
(秦三世皇帝)
영자영(嬴子嬰) 기원전 206년

 

 

이사(李斯, ? ~ 기원전 208년 )는 한나라 사람으로 이이(노자)의 후손이다. 이사는 진시황을 도와 진의 법치주의 기반을 확립하는 데 큰 기여를 한 사람이다.

 

순자 문하에서 한비자와 동문수학하고, 통일하는 진나라에 출사하여 승상에 올랐다. 통일 진나라의 도량형과 소전체 한문을 보급하였다. 이사는 진시황 사후, 진승과 오광의 반란 시에 조고의 탄핵으로 오형(다섯가지 형벌)을 받아 요참형되었다. 슬하에 이량이 유명하다.

 

부소(扶蘇,? - 기원전 210년)는 진시황제(秦始皇帝)의 장남이다. 총명하다고 알려져 아버지나 많은 중신들로부터 장래를 촉망 받았다고 한다.

 

부황(父皇)인 시황제의 정치(분서갱유[焚書坑儒])에 간언 했기 때문에 분노를 사 버린다. 이것에 의해, 북방의 기마민족·흉노에 대한 국경 경비의 감독을 명령받아 벽지의 장군 몽염(蒙恬)과 그곳으로 갔기에 중앙의 화를 미리 피할 수 있었다. 그 후, 순행중의 시황제가 급사해, 시황제의 상(喪)을 주관하던 환관 조고(趙高)와 승상 이사(李斯)가 불필요한 혼란을 부르는 일을 막을 수 있도록 시황제의 죽음을 비밀로 부쳐졌다.

 

하지만 시황제에게 있어서는 부소는 소중한 적자로서 제왕학의 일환으로서 몽념 아래에 가게 했다고 하는 생각이었다고 추측된다. 당연히 후계자는 부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앞일의 두려움을 간파한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는 둘째 아들 호해(胡亥)를 옹립해 황제로 받들 것을 결의하고, 부소에게는 자해를 권하는 거짓 성지(聖旨-황제의 뜻을 담은 명령서, 임명장 등)를 내리게 된다. 하지만 장군 몽념은 그것이 거짓 성지인 것을 간파 해, 곧바로 부소에게 진언 했지만, 부소는 「의심하는 것 자체가 도리(道理)에 반(反)한다」며 말하고 그것을 받아 들이지 않고, 그 성지의 내용에 그대로 따라, 스스로 생명을 끊었다.

 

소설이나 군담 등에서는 진의 마지막 군주인 자영(子嬰)은 부소의 아들이라는 말이 있지만, 사마천(司馬遷)의「사기」등의 사서에 의하면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조고(趙高, ? ~ 기원전 207년)는 전국 시대(戰國時代) 말기부터 전국 시대를 통일한 (秦) 시대까지 살았던 환관이자 정치가. 중국 역사상 최악의 환관라고 말해진다.

 

시황제(始皇帝)가 사거(死去)하고 승상 이사(李斯)와 중거부령인 환관 조고(趙高)는 이를 영호해와 함께 조작하였고, 시황제의 운구가 수도 함양(咸陽)으로 돌아간 후에 조작한 유서를 증거삼아 영호해가 제위에 올랐다. 황태자였던 부소는 조작된 시황제의 유언을 보고 스스로 자결하였다.

 

영호해는 왕위에 오른 후, 부소를 비롯한 형제들을 모두 죽였으며, 자신은 이사와 조고에게 모든 정치를 맡기고 사치에 빠져 있었고 실권은 간악한 환관 조고의 손에 있었다. 조고는 진나라의 개국공신인 이사와 몽염을 고문 끝에 반역을 저지르려고 했다는 허위자백을 받아 가족과 함께 숙청하였다.

 

그러나, 진나라는 이미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난을 시발점으로 하여 많은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조고는 같은 편이었던 이사를 모략으로 죽여버리고, 자신이 승상이 되어 나라를 좌지우지하였다. 그리고 조고는 점점 역심을 품고 있었다. 기원전 207년 10월에 조고는 결국 군사들을 이끌고 함양궁으로 쳐들어와 사치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영호해를 자결하라 다그쳤다. 겁먹은 영호해는 조고에게 살려달라 애걸하였으나, 조고는 자신의 조카를 시켜 영호해를 죽여버린다. 이 때, 영호해의 나이는 겨우 24살이었다.

 

그 후, 조고는 황제에 맞는 적임자를 찾았고, 그 적임자가 바로 억울하게 죽은 시황제의 황태자 부소의 장남 영자영이었다. 영자영은 여러 장수들과 비밀리에 모의하여 조고를 죽일 계획을 세웠고, 즉위식 전에 은밀히 자객들을 보내 조고와 그 가문을 몰살시켰다.

 

 

진승(陳勝, ? ~ 기원전 209년)은 진나라 말기의 반란 지도자. 자는 섭(渉). 유방이나 항우에 앞서 진나라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나라의 토벌군에 공격받아 전쟁에 패해서 죽었다. 후에, 한나라의 유방이 진승을 은왕(隠王)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진승은 기원전 209년 7월에 진나라에 불만을 품고 농민 900명을 바탕으로 오광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진승과 오광은 순식간에 중국 하남성 일대를 점령하고 갈영이라는 농민과도 합류했다. 또한 수많은 농민들이 반란에 가담해 불과 1달만에 1000기 말과 5만 명의 병사를 거느렸다. 농민 반란군은 하남성의 중심지 진주성을 무혈입성하여 함락시키고 8월에 스스로 제왕의 자리에 올라 나라 이름을 '장초'라 하였다. 그러나 진승은 곧 부귀영화에 물들어 초심을 잃어버리고 갈영을 처형시켰다. 그리고 오광에게 2만 군사를 주어 낙양을 공략하고 주장에게 3만 군사를 주어 함곡관을 돌파하도록 하였고 진여와 진승은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진나라 장수 장한의 대공격으로 주장 함곡관에서 패배하여 자살하고 오광마저 부하 전장에게 살해당했다. 결국 진나라의 총공세로 12월 진주성이 함락당하고 진승은 수레를 타고 동쪽으로 도망가다가 수레를 끌던 마부 장가에게 암살당했다. 이로써 진승과 오광의 난은 6개월 만에 진압되고 진승은 현재 중국 하남성 영성시에 묘가 있다.

 

 

아방궁( 阿房宫, 병음: Ēpánggōng)은 진나라 시황제가 세운 궁전이다. 함양 위수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다. 유적은 섬서성 서안 시 서쪽 13km의 아방촌(阿房村)에 남아 있다. 시황제의 사후에도 공사가 계속 되었지만, 진나라의 멸망으로 미완성으로 끝났다. 명칭이 없었던 것을 세인이 지명을 따서 아방궁으로 지었다. 1961년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은 아방궁 유적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하였다.

 

아방궁 전경

 

 

시황제가 즉위 하면서, 효공이 세운 함양 궁전은 협소하다고 하여, 황하 지류의 남쪽에 해당하는 상림원(上林苑)에 새로운 궁전을 지을 계획을 세웠다. 아방(阿房)의 땅에 궁전을 만들려고 했지만, 시황제의 생전에 완성하지 못했다.

 

사기》에 의하면, 궁전 건축물의 규모는 동서로 5백보(3000척), 남북으로 50장(500척)라고 한다.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동서로 약 600~800m, 남북으로 113-150m에 이른다.

 

그 궁전 위에는 10,000명이 앉을 수 있으며, 전하에는 높이 5장의 기를 세울 수 있었다. 전 외에는 책목(柵木)을 세우고 복도를 만들어, 이곳으로 남산에 이를 수 있고 복도를 만들어 아방에서 위수를 건너 함양의 궁전과 연결되었다.

 

그 건축에 동원된 인력의 수는 70여 만에 달했다. 더욱 더 여러 궁을 만들어 관중에 300, 관외에 400여개, 함양 부근 100리 내에 세운 궁전은 270 여개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민가 30,000호를 여읍(驪邑)에, 50,000호를 운양(雲陽)에 각각 이주 하게 했다. 각 6국의 궁전을 모방하여 6국에서 데려온 비빈을 모두 이곳으로 배치하였고, 진나라 궁전을 만들어 진나라의 미인들을 그곳에 배치했다. 거기서, 조나라(趙)의 비(肥), 연나라의 수(痩), 오나라의 희(姫), 월나라의 여(女) 등 각각의 미를 겨루어 조가야현(朝歌夜絃), ‘삼십육궁혼의 봄’이라는 광경을 이곳에서 출현하게 했다. 두목의 ‘아방궁부’(阿房宮賦)에 노래한 것이 반드시 과장은 아니다.

 

《사기》에 기술된 진나라 멸망 부분에 기록된 “아방궁은 초나라 항우에 의해 불태워 졌다”(3개월간,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는 것이 현대까지의 정설이었다. 하지만 “항우에 의해서 불탄 것은 함양궁이며, 아방궁은 불타지 않았다”라는 설이 2003년에 제기되었다.

 

또한 현재, 유적의 부근에 아방궁을 재현한 테마파크가 만들어져 관광 명소가 되고 있다.

 

 

만리장성( 萬里長城, 간체: 万里长城, 병음: Wànlĭ Chángchéng 완리창청)은 흉노족 등의 북방 민족을 막기 위해 BC 208년 전국 시대 제, 연나라에 의해 처음 착공된 후 중국의 고대 (시황제)때까지 서로 연결하여 세워져 현재까지 존재하는 오래된 성곽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줄여서 장성이라고 하며, 중국인들도 평소에 만리장성이라는 낱말보다 장성이라는 낱말을 일상 속에서 사용한다. 허베이 성(河北省) 〈산하이관〉(山海關)에서부터 간쑤 성(甘肅省) 〈자위관〉에 이르는 총 길이 6,352km에 달한다. 그 거대함 때문에 "달에서도 보이는 유일한 인공 건축물"이라고 거론되었으나, 2004년 12월 8일, 우주 공간에서 사람의 눈으로는 관측할 수 없다는 것이 중국과학원에 의해 확인되었다.

역사

 

진나라 시대의 만리장성(엉터리 중국측 자료)

 

만리장성 공사 과정(엉터리 중국측 자료)

한반도까지 장성을 연결하여 표시하고 있다.

 

전국 시대 와 같은 몇몇 국가는 장성을 건설하여 북쪽의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또한 이민족뿐 아니라 각 나라의 국경 사이에도 성을 쌓았다.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중국 안에 있던 장성은 파괴하고 북쪽에 만들어졌던 여러 성들을 서로 연결시켜 거대한 장성이 되었다. 이 시기의 장성은 흙으로 쌓은 것이기에 말이나 사람들이 넘어다니기에 그리 어렵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높은 성벽은 아니었다. 또한 현재 쌓여진 장성의 위치보다 더 북쪽에 위치하였다.

 

전한시대 무제는 흉노를 몰아내고 영토를 확장하면서 장성을 서쪽의 〈옥문관〉까지 확장시켰다. 그 뒤, 오호십육국 시대에 이민족의 힘이 강해지고 북위는 장성의 위치를 남쪽으로 옮겨 현재 위치에서 새로운 장성을 쌓았다.

 

그러나 이후 북방 민족이 세운 국가인 거란 , 여진 , 몽골 은 어렵지 않게 장성을 넘어 침입하여 중국은 3세기 동안 북방 민족의 세력 하에 들어갔다. 원을 몰아내고 명이 세워진 뒤 원의 재침입을 막기 위해 장성을 강화하여 지금 형태의 장성이 되었다. 농경 민족과 유목 민족의 경계선이라는 말도 있으나, 실제로는 초원에 건설된 것이다. 중국인의 북방 민족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을 보여준것이지만, 몽골계 민족은 명대에도 장성을 넘어 침입하기를 되풀이하였고, 명 말에는 만주의 여진족이 다시 장성을 넘어와 명을 멸망시키고 을 세우기에 이른다.

 

명나라 말에 만주족(여진)이 발흥해 후금을 건국하면서, 명나라와 사이에 장성의 동단을 둘러싸고 사투가 반복되었다. 후금은 명나라와 유리한 싸움을 진행하면서도 명장 원숭환의 방해로 장성의 동단의 산해관을 넘을 수 없었다. 그러나 원숭환은 후금의 이간책 계략으로 명의 숭정제에게 주살 당했다. 그 후 명나라는 이자성의 반란으로 멸망되고 후금으로 개명했던 청나라는 명나라 장수였던 오삼계의 항복과 안내로 산해관을 넘어 중원으로 진출하여 청나라의 중국 지배가 시작되었다.

 

현재 중국 정부는 중요한 역사적 문화재로서 보호하고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시켰다. 세계 유수의 관광 명소로 이름이 높았으나, 지역 주민이 집의 재료나 관광객에 판매하기 위해 장성의 벽돌을 갖고 돌아갔기에 파괴가 지속되었다. 또한 장성이 댐 공사로 인해 일부가 물에 잠기기도 하였다. 장성 주변의 감숙성과 섬서성(陝西省)은 중국에서도 가난한 지역 중 하나로 당국은 대책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2006년 4월에 열린 중국의 학술단체 중국장성학회의 조사에 의하면 "만리장성이 안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지역은 전체의 20% 이하이고, 일부 현재 존재하는 지역도 30%이고, 남은 50% 이상은 모습이 사라졌다"라고 보고되었다.


연혁

  • 전국 시대 당시에 , , 3국이 장성을 쌓음
  • 기원전 221년 진 시황제가 연과 조의 장성을 연결하고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대비해 서쪽으로 더 연장시킴
  • 대에 무제 우웨이 주취안에 장성을 연장시켜 쌓음
  • 남북조 시대 북주 북제가 성벽을 대규모로 축조함
  • 양제가 장성을 보수하고 오르도스 남단에 새로운 장성을 쌓음
  • 타타르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싱안링 산맥에 대규모로 장성을 쌓음
  • 영락제가 지금의 만리장성을 쌓고 동쪽 산해관을 설치함
  • 명의 정통제 북경 정면 부분의 2중으로 장성을 쌓음
  • 명의 가정제가 대대적으로 장성을 개축함
  • 이후에 16세기에 지금의 만리장성이 완성됨.

베이징 동쪽

  • 노룡두 장성(老龍頭長城)
  • 산해관(山海關)

베이징 주변

  • 사마대 장성(司馬台長城)
  • 금산령 장성(金山嶺長城)
  • 반용산 장성(蟠龍山長城)
  • 고북구 장성(古北口長城)
  • 대진욕 장성(大榛峪長城)
  • 황화성 장성(黃花城長城)
  • 모전욕 장성(慕田峪長城)
  • 전구 장성(箭扣長城)
  • 팔달령 장성(八達嶺長城)
  • 수관 장성(水關長城)
  • 거용관, 거용관 장성(居庸關・居庸關長城)
  • 삽전령 장성(挿箭嶺長城)

베이징 서쪽

  • 노우만 장성(老牛灣長城)
  • 임유진 북루(楡林鎭北樓)
  • 삼관구 장성(三關口長城)
  • 텐겐사막 장성(톈겔砂漠長城)
  • 단협구 장성(丹峽口長城)
  • 가욕관(嘉峪關)
  • 하창성(河倉城)
  • 옥문관(玉門關)
  • 양관(陽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