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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1,085 : 해방과 건국 45 (노무현 '참여정부' 4)

 

 

 

 

한국의 역사 1,085 : 해방과 건국 45 (노무현 '참여정부' 4)

 

 

노무현 대통령이 2일 오후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참여정부 평가포럼' 초청 특강에 참석, 환호하는 회원들을 진정시키고 있다. ⓒ연합뉴스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시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참여정부 평가포럼' 초청 특강에 참석, 환호하는 회원들을 진정시키고 있다.

 

 

노무현 참여정부(2003.2~2008.2) 4

 

 

3. 참여정부 시절의 남북관계

  

참여정부는 김대중정부의 대북정책을 그대로 계승하여 화해와 협력을 위한 장관급회담이 계속 이어지고, 이산가족상봉도 금강산에서 이루어지다가 2005년부터는 화상상봉방식으로 바뀌어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정동영 통일부장관은 2005년 6월 '6.15남북공동선언' 5주기를 기념하여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고 여러 가지 협력사업을 논의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10차례 열린 장관급회담은 경제협력 분야에서 성과를 거두어 2003년 6월 30일 개성공단 착공식을 기졌으며, 2004년 12월 15일에 준공식을 가졌다. 이 사업은 현대아산이 담당하고 있는데, 2005년 3월 16일부터느 공단에 필요한 전력을 한국에서 직접 공급하기 시작했다. 2007년 12월 11일부터는 문산(도라산역)에서 개성 간 화물열차운행이 시작되어 해방 후 처음으로 끊어진 경의선철도가 연결되었다. 한국 기업체 직원은 서울에서 매일 개성공단으로 출퇴근하고, 2008년 말 현재 약 1만 8천 명의 북한 노동자들이 공단에서 일하고 있다. 한국 기업은 우수한 북한 노동력을 싼 값으로 활용하고, 북한은 외화를 벌어들이는 남북협력사업의 좋은 선례를 만들고 있다.

 

그러나 2008년 12월 초 북한은 이명박정부의 대북정책에 불만을 품고 한국 상주 인원을 크게 줄이고, 개성-문산 간 화물열차의 운행을 중단시켜 난항을 겪었다. 이는 금강산관광객 피살사건으로 남북이 경색되자 북한이 결국 이를 빌미로 개성공단을 폐쇄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실보다 득이 많다는 전략적인 실리를 취할 목적으로 북한이 협상에 응하여 지금은 다시 가동되어 운영되고 있다.

 

금강산관광사업도 배를 이용하여 계속되는 가운데 2003년 2월 14일부터는 육로관광이 시작되어 전보다 시간이 크게 절약되었다. 2007년 12월 15일부터 개성관광사업이 시작되어 하루 일정으로 선죽교, 개성박물관(성균관), 박연폭포 등을 보고 돌아오는 코스로 운영되고 있다.

 

남북간 스포츠교류와 대중문화교류도 계속되었다. 2003년 10월 6일에는 정주영 현대회장이 기증한 '평양유경정주영체육관'이 준공되었으며, 이를 기념하여 현대 남녀농구팀이 친선경기를 가졌다. 북한은 2003년 10월 23일 제주에서 열린 '민족평화축전'에 계순희(유도), 정성옥(마라톤), 축구팀, 널뛰기, 그네, 씨름선수 등을 보냈다.

 

2005년 8.15에는 '남북친선축구 및 자주평화통일 8.15축제'를 서울에서 열었는데, 북한대표 단장이 국립현충원을 참배하고 청와대를 예방하기도 했다. 2005년 8월 26일에는 대중가수 조용필이 평양에서 공연을 가져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이렇게 남북관계가 민족공조를 바탕으로 진척되는 가운데 드디어 2007년 10월 2일 두 번째 남북정상의 만남이 평양에서 이루어졌다. 노무현대통령은 김대중대통령이 비행기로 방북한 것과는 달리 휴전선을 직접 걸어서 북한땅을 밟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자동차로 평양에 도착하여 김정일 위원장의 영접을 받았다. 이어 10월 4일 남북정상은 8개항의 '10.4공동선언'을 발표하였는데, 주요 내용은 통일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하고, 군사적 대치관계를 종식시키고 불가침의무를 준수하는 일, 남북협력과 교류를 확대하자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불과 두 달 앞 둔 상황에서 이루어진 방북과 공동선언에 대해 일부 여론은 북한 주민의 굶주림을 더욱 심화시키고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도와줄 뿐이라는 비판도 있었으나 남북정상이 만나 남북 간에 각종 경협사업을 전개함으로써 화해무드가 조성된다는 기대감에 국민들은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남북관계의 개선과는 별도로 북한의 심각한 경제난으로 북한을 탈출하여 제3국을 거쳐 한국으로 넘어온 탈북자는 2007년 5월 현재 1만 명을 넘어섰다. 유엔은 북한 주민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2005년 11월 18일에 '북한인권결의안'을 통과시켰는데, 한국은 남북관계를 고려하여 기권했다.

 

남북관계와 별도로 북한 핵문제는 답보상태가 계속되었다. 2001년 1월에 대북강경정책을 추구한 미국 부시정부가 출범하면서 북한은 이에 반발하여 2003년 1월 10일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하고, 이어 4월에 열린 6자회담에서 핵무기가 이미 있다고 호언하면서 북가침조약체결을 요구했다. 2005년 2월에도 북한은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여 미국을 압박하여 6자회담이 타결을 보지 못하다가 2007년 2월 13일에 극적인 타결을 보았다. 그 결과 북한은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미국 및 일본과 관계를 개선하고, 중유 100만 배럴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이어 미국은 이해 3월 마카오 은행에 예금되어 있는 북한자금 2,500만 달러에 대한 동결을 해제해 준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실제 집행과정에서 미국은 선 핵무기 폐기를 요구하고 북한은 선 지원을 요청하여 6자회담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북한의 지연전술과 능멸전술에 6자회담 당사국들이 질질 끌려다니는 꼴이 되고 말았고 미국은 외교.경제적인 압박 외에 실익이 없는 군사적인 강력한 수단을 강구하지 못하고 있다.

 

 

 

4. 참여정부 시절의 경제와 문화

  

참여정부의 사회경제정책은 그동안 한국사회의 주류를 맡아온 대기업과 서울 강남, 서울대 출신 등 이른바 엘리트계층보다는 소외된 비주류에 속하는 계층을 부각시키는 정책을 추구하였으며 중요한 공기업을 지방에 이전하고, 각도마다 기업도시를 선정하는 등 지방사회 발전에 힘을 쏟았으나 뚜렷한 실적을 올리지는 못했다.

 

김영삼정부 때 외환위기로 국제통화기금 195억달러 차입 후 경제성장률이 둔화되기 시작하여 노무현정권기 5년간에도 4~5%의 경제성장률을 보이는 데 그쳤다. 그래도 2003년의 1인당 국민소득은 13, 460달러, 2004년 15,082달러, 2005년 17,531달러, 2006년 19,722달러, 2007년 21,695달러에 이르러 대망의 2만 달러를 넘어섰다. 경제규모는 세계 13~14위를 기록하였으며 외화도 2,622억 달러를 보유하게 되었다.한국은 2004년 2월에 칠레와 자유무역협정을 맺어 우리의 공산품이 들어가고 칠레의 농산물이 들어오고 있으며, 2007년 4월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어 국회의 비준을 받았다. 미국은 미국의 자동차선업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였고 한국은 미국의 농산물과 쇠고기수입이 농민들에게 미칠 영향으로 우려를 낳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들어 쇠고기 광우병 파동으로 격심한 정치.사회적 갈등을 초래하여 진통을 겪었다.

 

한국 기업 가운데 가장 경쟁력이 높은 것은 조선업과 정보통신 분야, 그리고 자동차 분야이다. 현대중공업, 삼성조선 그리고 대우조선이 현재 세계 1,2,3위를 삼성.엘지 모바일은 세계 2~3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현대자동차도 세계 빅5에 들고있다. 삼성전자는 2004년 9월에 60나노 8기가 메모리를 개발한 데 이어 2005년 9월에 기업이 전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1996년 4,4%에서 2008년 현재 16.9%에 이르고 있어 한국 경제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한편 2004년 7월부터는 근로자의 주 5일 근무제가 실시되어 주말 여가를 즐기는 시대가 열렸다.

 

문화면에서는 2005년 10월에는 용산에 터를 잡은 국립중앙박물관이 마침내 4년간의 공사 끝에 준공되어 세계 10대 박물관에 들게 되었다.

 

스포츠 분야에서도 빛나는 성과를 이룩했다. 2004년 여름에는 아테네 하계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단은 세계 9위를 기록하는 성과를 올렸으며, 2008년의  베이징 하계올림픽에서는 세계 7위를 기록하여 스프츠강국의 전통을 이었다. 특히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역도의 장미란 선수가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였으며, 수영에서 박태환 선수가 2관왕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여자 피겨스케이팅에서 김연아선수가 2006년 이후 세계 그렁프리대회에서 연속적으로 우승하여 국민의 여동생으로 사랑을 받았다.

 

2004년 4월 1일 경부고속철도와 호남고속철도가 동시에 개통되어 시속 300킬로미터의 KTX시대가 열렸다. 서울과 부산을 3시간대로, 그리고 서울과 목포를 고속으로 달리는 시대로 지방의 인구가 병원, 상품구매, 출장, 업무차 등으로 서울로 몰려 인구집중현상이 일어나고 있어 서울은 더욱 혼잡스럽게 되는 역기능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2003년 10월에 이명박 서울시장은 청계천을 하천으로 다시 복원하여 서울의 명소로 자리잡게 했으며, 뚝섬 경마장을 서울숲으로 가꾸어 환경상을 받기도 했다.

 

2007년에는 반기문 외무장관이 유엔 사무총장에 취임하여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한국은 생명공학에도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데,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그동안 송아지와 개를 복제하여 세계적 화제를 모았던 서울대 황우석 교수팀이 세계 최초로 성공했다고 알려진 줄기세포 복제가 위조였다는 논란이 2005년 12월부터 일어나 다음해 서울대학교는 황교수 직위를 해제하는 징계를 내렸다.

 

 

 

5. 참여정부 말기의 정치와 제17대 대통령 선거

  

2004년 3월 12일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한나라당의 탄핵을 받아 직무수행이 중단되는 사태가 오자 한나라당의 행동이 지나치다는 역풍이 불면서 이해 4월 15일에 실시된 총선에서는 여당인 열린우리당(당의장 정동영)이 152석을 얻어 다수당이 되고 한나라당이 121석을 얻었으며, 김대중계의 '새천년민주당'과 김종필계의 '자민련', 정몽준이 만든 '국민통합 21'이 몰락했다.

 

그러나 2004년 5월 14일부터 다시 집권한 노무현대통령은 이해 6월 이해찬 의원을 국무총리로 기용하고 행정수도 이전과 국가보안법 폐지, 취재 선진화방안이라는 명분으로 추진된 기자실 폐쇄 등을 강력하게 밀고 나가면서 다시 인기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북한 핵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면서 서해안의 무력충돌을 막기 위해 북방한계선을 북한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양보설이 돌면서 보수층의 강력한 반발이 크게 일어났다.

 

2007년은 노무현정권의 임기가 끝나면서 12월로 예정된 제17대 대통령선거를 치르는 해로서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인기가 계속 하락하자 대통령이 당직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높았다. 이에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2월 '열린우리당'을 탈당했다. 이런 가운데 차기 대통령 후보를 뽑는 경선이 여당과 야당에서 이해 9월부터 시작되었다. 여당에서는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학규 경기도지사와 '열린우리당'의 당의장과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정동영 등이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정동영이 다시 만든 '대통합민주당'의 후보로 확정되었다. 이 당은 이해 11월 12일 '새천년민주당'과 합당하여 '민주당'으로 불렀다.

 

한편 한나라당에서는 서울시장을 지냈던 이명박이 당대표를 지냈던 박근혜와 치열한 접전 끝에 후보로 확정되었다. 두 번이나 대통령후보였다가 김대중과 노무현에게 패배했던 이회창은 '자유선진당' 후보로 출마했다. 민주당에서는 조순형과 이인제 의원이 경합 끝에 이인제 후보가 당선되었다. 

 

2007년 12월 19일 선거결과 이명박 후보가 48.67%, 정동영이 26.14%, 이회창이 15.07%를 얻어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명박은 이른바 'BBK사건" 등으로 도덕성이 문제되어 고전할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경제 살리기에 적합한 인물로 서민들의 기대와 지난 10년간 진보진영 정권에 반발한 보수층이 결집한 결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낮은 62.9%의 투표율을 기록하여 정치에 대한 국민의 무관심이 높아졌음으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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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 그는 왜 자살로 생을 마감했는가?

 

한 사람의 인간이며 가장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은 온 나라 국민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친인척을 비롯한 측근 비리를 수사하던 즈음 그는 검찰에 불려다니면서 고민하다가 고향 뒷 산 부엉이 바위위로 올라가 몸을 던졌다. 그의 죽음이 참으로 비극적이며 안타까운 점은 한국의 정치.사회 현실이 그를 죽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국민들의 안타까움과 슬픔은 물론 국제적으로 후진적인 한국 정치.사회 현실을 보여준 부끄러운 사건이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 그같은 막다른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심중은 아무도 잘 모를 것이다. 그의 죽음은 우리들에게는 크나큰 비극이었으며 우리를 되돌아보게 만든 사건이었다. 또한 권력자 주변에서 벌어지던 각종 권력형 비리와 부패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심각하게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실감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서민적이고 파격적인 사고로 권위를 타파하고 새로운 정치바람을 불러왔던 그가 남북화해의 물꼬를 확장하고 4대 개혁입법을 추진하는 등 지난 어느 정권보다 개혁과 혁신을 위해 노력하였던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권위주의를 청산하려는 그의 파격적인 행보에 젊은층을 포함한 국민들은 환호와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탄핵의 위기속에서도 국민들의 지지로 이겨냈고 국민들의 성원으로 국회 다수당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국민들의 존경과 성원을 받았지만 그의 주변은 권력형 비리와 부패의 깊은 사슬로 병들어 갔다. 그는 청렴하였으나 주변은 그러지 못하였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 사상과 이념을 떠나 재물에 대한 인간의 탐욕을 어찌 멀리할 수 있을 것인가가 의문이다. 수천년 역사를 통해서 뇌물과 비리, 그리고 부패가 끈질기게 이어져 왔고  인간 사회에 암약하고 자라왔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이러한 탐욕의 사슬을 벗어나기는 힘들 것이다.

 

그가 정권을 내놓고 고향에서 노후를 조용히 보낼 결심을 하였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를 않았다. 차기 정권이 들어서면서 검찰은 그의 주변의 비리를 파고 들었고 비리가 계속 드러나면서 결국 모든 것이 노무현 자신에게 쏟아지는 따가운 눈총을 모면하기가 무척 힘들어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연한 속죄의 길을 선택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죽음은 우리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그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 사회를 더욱 양심적이고 선진화된 모습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의 죽음은 헛된 죽음이 될 것이지만 우리들이 주변을 둘러보고 스스로를 정제할 수 있는 계기로 삼는다면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두 가지 이야기를 참고로 싣는다. 퍼온 글이니 시비는 걸지 마시길......

 

 

  

"BBK-박연차게이트 빅딜 밀약설이 결국 노무현 죽게 했나?"
노무현에게 주어진 운명인가, 또다른 길로 갈 선택의 여지는 없었는가?
 
윤복현 시사비평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돌아보는 국정운영 평가


 박연차게이트 검찰수사 도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후 노무현으로 기술)은 김해 봉하마을 부엉이 바위에서 다음과 같은 유서내용을 남기고 투신자살했다. 심적 고통과 압박이 자살의 원인으로 보여진다.

자세한 자살배경과 의혹은 밝혀 지리라 본다. 특히 2007대선 당시 노건평과 이상득간의 BBK-박연차게이트 수사와 관련하여 로얄티들(노무현.이명박)은 건드리지 말자고 약속했다는 빅딜 의혹의 진상이 명확히 드러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자살의 정치적 배경과 진실이 드러나리라 본다.
 
아마 2007대선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가한 전방위적 검찰수사를 이명박 후보에게 가했다면 아마도 이명박정부는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명박 후보는 BBK검찰수사에서 무혐의 처리받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명한 특검에서도 무혐의 처리받고 결국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이명박정부는 탄생했고, 검역주권을 외면한 미국수입소고기문제와 관련하여 검역주권을 주장하면서 국민건강권수호차원에서 광우병소고기반대를 요구하며 100만 이상의 국민들이 들고 일어난 촛불정국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노사모를 모아놓고 청와대행진.정권퇴진운동하지말고 5년간 잘 되도록 이명박정부를 도와달라고 부탁한 점은 BBK-박연차 게이트 수사와 관련한 노무현-이명박 빅딜의혹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이후 밝혀 지리라 본다.
 
이명박 정권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전 방위적인 수사가 진행됐다. 노무현에 착생했던, 소위 측근들은 아무런 도움이 못됐다. “노짱님의 신출귀몰한 맞짱 능력으로 모든 게 해결된다”라는 해괴한 소리도 나왔다. 역시 아무런 도움이 못됐다. 과거 지지층은 측은함과 한심함이 섞인 눈으로 지켜 봤다. 지지층의 기대를 저버린 정책적 실책이 가져온 뼈아픈 결과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고향에서 서거했다.좀 더 솔직히 말하면, 정치적으로 타살됐다.촛불정국에서 권력이 위기에 몰리자, 촛불시위주동세력을 노무현세력으로 판단한 이명박정부는 머리되는 노무현을 때리기로 선택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한마디로 정치적 살해를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정치적 암습이나, 정치적 저격에 의해 고통 없이 죽은 것이 아니고 수사-피의사실유포-망신주기에 의해 죽을 때 까지 얻어맞고 반항한번 못하고, 처절한 고통 속에서 사망한 것이다. BBK-박연차게이트 수사와 관련한 노무현-이명박 빅딜이 사실이라면 약속을 지킨 쪽은 노무현이고 약속을 위반한 쪽은 이명박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사실이라면 서로에게 치부가 되는 문제로 드러낼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로 드러나면 노무현의 죽음은 자유롭지못한 비참한 죽음이 되고 만다.



이것이 노무현에게 주어진 운명인가, 또다른 길로 갈 선택의 여지는 없었는가?


▲ 2002년 장기기증을 약속한 노무현 전 대통령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 전 남긴 것으로 보이는 유서 전문이다. 이 유서는 사저의 컴퓨터에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의 고통이 너무 크다'라는 제목의 한글 파일로 저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김경수 비서관에 따르면 이 유서 파일이 저장된 시간은 투신 1시간 19분 전인 오전 5시 21분이었다고 한다.
 
노무현의 출생과 성장과정
 
노무현의 아버지 노판석은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이기도 한 전남 강진 사람으로 좌익논란에 휩싸인 인물이기도 하다. 호적에 1946년 경남 진영읍 출생으로 기록된 노무현의 출생과 성장문제와 관련해서는 한국전쟁이후 좌익세력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대대적인 소탕작전이 시작되자, 강진에서 5살까지 살던 노무현을 데리고 목포항을 통하여 부산으로 피신하여 당시에는 전쟁직후라서 호적만들기가 쉬웠다는 시대상황을 전제로 진영읍에서 호적을 새로 만들어 노무현을 입적시켰으며, 김해로 와서 살게 되었다는 소리도 있다.
 
8.15광복이후 국심한 좌우대립정국에서 좌익세력(당시 일본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무장해제시키고 전국적인 자치위원회을 구성하여 민주적인 정부를 구성하려던 몽양 여운형 선생 등으로 대변되는 좌익세력이라 할 때에는 4.3.제주민중항쟁처럼 민족분단과 민족자주.민중복지을 요구하고, 토지개혁과정에서 유상몰수 유상분배에 따라 토지를 가질 수 없었던 소작농들이 토지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좌익으로 매도되었으며, 소위 지리산 빨치산세력이란 평야지대인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토지를 가질 수 없었던 이들 소작농들이 대부분이였다)은  결국 남한지역을 군사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미군정과 이승만 숭미.친일세력의 소탕작전으로 죽어간 사람들이다. 일제하에서 민족의 광복을 위해서 독립운동을 했던 좌.우세력은 모두 민족주의 노선이라는 점에서 하나였다. 따라서 8.15이후 정상적인 우익세력이라면 좌익세력을 미군정을 등에 업고 학살할 수 없는 것이다. 남한지역에서 말하는 우익의 실체는 일본제국주의의 역사논리를 대변하는 뉴라이트 단체와 같은 친일숭미세력이라 할 수 있다. 우익이라는 용어로 자신들의 실체를 가리는 것 뿐이다.
 
노무현은 어려서 부터 매우 가난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때는 이승만을 찬양하는 글짓기반대운동을 주도해서 학교에서 문제아가 되기도 했다. 군입대 후 병장으로 전역한 노무현은 대학갈 가정형평이 못 되어서 결국 막노동을 하면서 봉하마을 정토원에서 9년간의 사법고시공부를 통하여 30대에 합격하고 판사을 하다가 인권 변호사로 나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사회운동에 뛰어 들었으며,김영삼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하여 김영삼의 3당 합당을 반대하며 결별하기도 하였으며, 국회의원 당선 후에 5공 청문회 스타로 부상하여 김대중 정부시절에 해양수산부 장관을 거쳐 민주당 대선후보로 까지 올랐다. 2002대선당시 IMF국정 책임자 김영삼을 찾아가서 김영삼의 시계를 보여주는 바람에 국민적 지지도가 추락하여 민주당내부에서 후보교체론을 들고 나오자 결국 민주당세력과 결별하고 대통령당선과 함께 열린 우리당을 창당하여 친노로 불리우는 노무현세력의 정치시대를 열었다. 그 과정에서 유시민.문성근이 인터넷정당.부정부패청산.상향식 민주주의.지역주의 청산을 기치로 100년 가는 정당만들자며 선동하여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창당한 국민적 개혁정당이 결국 노무현을 위해서 수단화되고 유시민에 의해 불법으로 해산됨으로써 많은 개혁당원들에게 상처와 배신감을 안겨 주기도 하였다. 

▲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과 노제를 마친 후에 서울역으로 향하는 운구행렬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운영,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노무현은 재임기간내내 직설적 화법과 소신있는 언행으로 한나라당과 조중동 등 반대세력의 비난과 표적이 되었으며, 국회탄핵때도 결국 국민들의 반대로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었으나,민족문제인 대북특검, 그리고 한나라당에 연합정권제안, 국익문제인 황우석연구승인취소,한미FTA체결과 이라크파병때는 자신의 지지자들까지 이탈하여 결국 민심위반으로 총선과 대선에서 한나라당에게 참패하고 권력을 내어 주고 말았다.
 
재임기간 공과-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다.중요한 건 그가 추구하는 목적이나 지향점이 대의적이며 홍익인간주의적인가의 여부에 있다.

A.잘했다고 평가받는 국정운영 사항
 
0.취임초기 지역군수를 행정부 장관에 발탁하는  등 파격적인 인사단행-인사가 만사다. 정파초월하여 유능하고 인성이 좋고 국민과 민족에 대한 헌신성이 강한 인재들로 국정을 운영한다면 국민통합과 국가발전과 민족통합에 크게 기여할 할 것이다. 국정 책임자의 통치철학과 마음의 그릇이 커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노무현정부도 영남지역에 편중된 인사를 단행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1.행정수도이전 추진-서울의 인구.환경.교통문제를 해결하는 대안-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로 정지되었으나, 계승하여 추진해야할 정책이다.

2.남북화해협력.동북아시아 평화노선-6.15남북공동선언을 계승하여 구체화시킨 10.4남북공동선언은 한반도평화와 민족통합에 기여한 점이다.그러나 현재 이명박정부는 취임직후 일방적으로 위반하여 남북관계를 냉각시키고 인공위성발사와 관련하여 유엔제제.경제제제로 나가는 미국편에 동조하여 북한을 자극하면서 전쟁을 부추기는 짓만 하고 있다. 북한에 대북특사를 보내어 공개사과하고 남북합의이행을 약속하는 일이다.미국만 바라보는 해바라기 자세는 결국 한반도전쟁으로 가는 길이다. 

3.전국의 균형발전추진-어느 한 지역에 편중된 발전을 차단하는 국민통합의 노선으로 어느 정부이든 계승해야 한다.

4.국제적인 외교노력으로 최초로 한국출신의 반기문 UN사무총장을 배출하여 국위선양에 기여한 점이다.반기문 사무총장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로 대변되는 미국 등 강대국들을 대변하는 UN이 아니라, 유엔의 모든 회원국들에게 유엔의 안건처리를 인류평화차원에서 결정할 수 있도록 모든 회원국들에게 결정권을 부여하는 유엔의 민주화와 개혁에 노력해야 한다. 안전보장회의는 해체되야 하고, 유엔총회가 결정권을 가질 수 있도록 유엔법규를 개정해야 한다. 그래야 세계의 약소국들의 인권과 복지가 보장될 수 있고, 약소국들에 대한 강대국들의 전쟁놀이와 인류를 전멸시켜버리는 핵전쟁를 막을 수 있다.

5.국민소득 2만 달러시대 달성으로 대한민국 경제성장을 달성한 점이다.-국가의 곳간을 알뜰하게 잘 채웠다는 의미가 된다. 곳간을 잘 채우는 자는 그래도 좋은 평가를 받으나, 곳간도 채우지 못하고 곳간을 축내는 권력집단은 양아치들-인간쥐들이란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6.독도문제에 대해 일본에게 강하게 항의하고 대응한 점이다.-독도영유권을 일본이 주장하는 배경에는 박정희군사정권때의 한일회담에서 찾아야 한다. 경제개발을 위하여 박정희가 일본에게 돈을 빌리면서 독도영유권을 명확히 못박지 못하고 3국 중재안으로 영유권을 결정하자는 식으로 양보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은 해저 자원이 풍부한 독도를 차지하기위해 준비해 온 것이다. 일본은 반드시 강대국들의 지원요청과 함께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할 것이며, 일본에게 있어 현재 오사카 출신 이명박은 그 호구대상임에 틀림이 없다. 한국은 독도문제하면 일본이 영유권주장만 할때만 냄비근성으로 일어나서 항의하고 마는 식인데, 그런 식의 대응은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 정부차원에서 확실히 일본과 담판을 지어 매듭지어야 하는 것이다. 민족주의적인 정부라면 이미 매듭을 지었을 문제이다.

7.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미국에 요구하여 이행약속을 받아낸 점이다.-자국의 군대작전지휘권이 미국에게 있다고 한다면 이미 미국의 식민지 나라임을 자임하는 것이다. 이승만이 미국 맥아더에게 작전지휘권을 일임했는데 이승만 스스로가 일제시대 미국이 대신 통치해 주기를 바라는 위임통치안을 임시정부에 상정하여 단재 신채호 선생 등에게 탄핵을 받아 미국으로 쫓겨난 인물이기도 하다. 그것도 임시정부 독립자금까지 공금횡령해 가지고 말이다. 친일숭미세력들이 '대한민국의 건국의 아버지'라는 이승만의 정치의식이 그 모양이라서 당연히 군대작전권은 미국에게 있어야 한다는 노예근성을 가지고 살아온 것이다.
 
8.김대중정부의 전국 인터망구축을 기반으로 인터넷문화.지식정보화를 활성화시킨 점이다.-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박정희군사정권에게 현해탄에서 죽임을 당할뻔 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인터넷전국망을 구축하려던 배경에는 독재권력의 정보독점을 차단하고 국민적 정보공유로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함이였다. 이러한 정책에 힘입어 노무현은 최로로 인터넷을 통하여 노사모 팬클럽이 만들어졌고 기반이 약한 상태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이다.
 
9.친일청산과 과거사 정리작업으로 민족정기확립에 공헌한 점이다.-민족과 나라를 팔아서 안위와 부귀영화를 누리는 반민족 행위자들에 대한 인명사전 편찬사업을 지속적으로 하여 후손들에게 민족정기를 확립해야 한다.
 
B.노무현지지층 감소 및 민심위반과 관련한 국정운영 사항
 
0.한나라당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민족문제인 대북특검으로 남북화해협력에 헌신한 김대중정부의 실세들을 정치적으로 탄압한 행위-정몽헌 당시 현대그룹회장이 수사도중에 투신자살하였고, 민주당과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노무현지지세력이 이탈하는 중대 사안이기도 했다.
 
1.소수가 자본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를 부자되게 하는 기반이 되는 노동자들도 함께 나누어 더불어 함께 살자는 노동운동과 민족의 자주주권에 해당하고 국가재정을 축내는 미군기지이전반대운동을 탄압하여 국민대중으로부터 서민대통령이라는 닉네임을 거부당했다.
 
2.국민소득2만달러시대를 열었으나, 실제로는 빈익빈 부익부라는 사회양극화를 심화시켜 실제로는 분배정책이 미흡했음을 드러내며 신자유주의자라는 닉네임을 얻게 되었다.- 노무현과 이명박의 공통점이 신자유주의 경제노선으로 한국경제에 불리한 독소조항으로 인하여 장차 미국경제구조에 한국경제가 얼마든지 종속될 수 있는 한미FTA체결자이고 추진자라는 점이다.
 
3.국민이 반대한 이라크  파병과 국민합의요구를 무시한 한미FTA체결한 점이다.-헌법1조에는 분명히 국민이 주권과 권력의 주인이라고 명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고 국민적 합의를 요구한 사항을 무시하고 거부했다는 건 결국 권력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은 국민의 정치의식이 성숙하여 국민이 반대하는 사항은 다시 한번 고려하여 시정해야 하는 것이다.
 
4.국익문제인 황우석사태와 관련하여 연구승인을 취소하고 특허관리하지 않는 점이다.-애국 국민들의 진실규명운동을 통하여 충분히 국익문제이고 대한민국의 유능한 과학자를 보호해야할 국가적 사건으로 인식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60만장의 연구승인요구서명용지와 국민80%의 기회요구여론에도 불구하고 거부했다. 결국 총선과 대선에서 노무현세력은 완전히 참패하고 말았다.노무현은 죽었으나 황우석은 살아 남았다. 
 
5.측근과 형 노건평씨의 비리문제에 대해 옹호해 주려는 대국민 발언-자신 스스로 내세운 법과 원칙을 스스로 위반해 버리는 모순적 자세-결국 관련자가 투신자살한 사건이 발생..퇴임직전 인터뷰에서 자신의 언행의 문제점을 반성하기도 했다.
 
6.한나라당에 연합정권을 제안했다는 점이다-국민은 한나라당과 연합정권을 구성하라고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총선에서 뉴타운 공약남발로 서울지역유권자들을 농락하고 국회의원 뺏지를 달았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 추모과정에서도 경찰병력을 내세우는 이명박정부가 보여주듯이 옹졸하고 치사한 권력집단에게 연합정권을 제안했다는 자체가 말장난이라도 결국 노무현을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지지를 포기하고 떠나게 한 주요사안이였다. 연합정권은 정치노선과 정치철학이 어느 정도 맞는 세력과 가능한 일이지, 일본제국주의를 찬양옹호하는 뉴라이트 집단과 짝하고 있는 정당과 연합정권을 제안한다는 자체가 이율배반이요, 국민에 대한 모독이요, 역사에 대한 반역이기 때문이다.
 
7.마지막으로 참으로 아쉬운 점은 투신자살과 관련하여 전두환.노태우 등의 전직 대통령에 비해서는 깜도 안되는 돈이 되겠지만, 상황적으로 불가피하게 돈을 받은 박연차게이트가 퇴임후가 아니라, 재임기간에 발생한 사건으로 액수와 상관없이 스스로 법과 원칙을 위반함으로써 대선당시와 취임당시 부정부패비리척결과 정경유착고리를 끊겠다면서 검은 돈을 받으면 패가망신한다는 교훈을 남겨야 한다고 스스로 말한 내용을 어긴셈이 되었다는 점이다.유서내용 중에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는 그러한 심정을 그대로 드러낸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재임당시의 돈 문제는 이명박대통령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라는 점이다. 


 

 

노무현의 죽음과 친노그룹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이라 불리는 유시민은 추모기간에 가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자네는 정치하지 말고 강의하고 책 쓰면서 살아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얼마나 유시민을 걱정했으면 그런 소리를 해 주었으까 생각하니 유시민을 생각하는 노무현의 정과 인간미가 느껴진다. 유시민은 노무현의 말대로 강의하고 책쓰는게 어울리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정치하면 아마도 노무현이상의 심적 고통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유시민은 불법으로 개혁당을 말아 먹은 경험이 있고, 지역당으로 스스로 매도한 민주당과의 단일후보로 국회의원 뺏지 단 유시민에게 배신과 상처받은 수 많은 국민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강의하고 책쓰고 살았으면 한다. 또한 노무현정부하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취임해서 황우석연구팀에 대한 연구승인을  취소하고 얼마 있다가 사임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미국 수입소고기문제에 대해여 자신은 미국가면 먹고 온다. 안전하다며 미국소고기수입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인물이기도 했다. 미국 소고기문제는 검역주권의 문제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미국소고기가 안전하다는 유시민의 발언은 미국인들은 30개월이상의 소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사실과 함께 노무현정부당시 당시 한미FTA체결을 위한 변명논리에 불과한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비참한 투신자살을 통하여 자신의 책임을 감당하고 자신의 자존심과 명예를 지키려 한 것이고 자신의 측근들과 세력들을 정치적으로 보호하려는 몸부림을 친 것이라고 분석된다. 그러나, 친노세력은 아직도 정치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지역당이라고 매도했던 민주당간판달고 대통합보다는 정동영공천거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자기들 밥그릇챙기기에 바쁜 것 같다. 그래가지고는 정치못하는 것이고 정치할 자격도 없는 것이며, 국민들은 지지해 주지 않는다. 국민들이 노무현 서거를 인간적으로 애통한다고 해서 친노세력을 지지한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현재 국민여론은 여전히 한나라당을 지지하고 있으며 박근혜를 차기대선 후보로 지지하고 있다. 한나라당과 필사즉생 정신으로 싸우지 않으면 한나라당2중대 취급할 수 밖에 없으며, 박근혜에 맞서 승리할 대항마가 없다면 차기 권력도 보장받지 못한다. 참고로 한나라당과 박근혜의 아킬레스건이 바로 친일역사논리를 펴대고 있는 뉴라이트라는 사실을 인지하라!
 
친노세력은 와신상담하는 자세로 지난 5년간의 국정운영에 대해 자성하고 더 국민편에서 더 민족편에서 사회적 약자편에서 말하고 행동하고 정책을 펼치는 정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는 정당은 백해무익하며 지지해 주지도 않는다는 사실과 함께 자신들이 아니면 안 된다는 오만한 패거리 정치의식도 안 된다. 친노세력아니여도 정치할 사람들은 많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법과 원칙을 말하기 전에 양심적이고 서민적이고 국민통합적이고 민족통합적이고 정직하고 권위적이지 않는 대통령과 정치인들을 원하고 있다. 정치가 국민들에게 그 만큼 신뢰를 상실하고 불신만 안겨 주었다는 반증이다. 

패거리주의는 소아의식이다. 대아의식은 반민족세력을 배제한 민족주의 세력의 대통합이다. 한국민족주의에는 좌우의 장점이 다 들어 있다. 그것이 바로 세계주의로써의 홍익인간이념이다.국정책임자와 권력집단이 지향하는 내용성이 중요하고 내용성을 실현하려는 일관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걸 소신과 원칙주의라고 하는 거다. 큰 틀에서 민족주의 노선이 원칙이라면 반민족주의는 반칙이라 할 수 있다.



노무현, 자살 전날 밤 폭음한 권양숙과 대판 부부싸움 벌였다!

 글쓴이 : 김종오
정부고위관계자 본지에 밝혀…“노무현은 줄담배 피며 잠못자고 권양숙은 만취상태서 잠들었다”..
권양숙, 비서관이 깨워도 못 일어나… 노무현 시신 안치된 병원에 뒤늦게 도착


노무현 전 대통령(이하 노무현)의 죽음과 관련한 배경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본지는 그동안 노무현이 자살하던 2009년 5월 23일, 부인 권양숙 여사(이하 권양숙)가 왜 노무현의 시신이 안치된 병원에 뒤늦게 나타났을까 라는 점에 대해 궁금증과 의문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상식적인 계산으로 볼 때 3시간 이상 늦게 도착한 것이다.

이에 본지는 그 동안 노무현 측근들을 상대로 취재를 하면서 노무현이 자살한 시간을 전후한 권양숙의 행적에 대해 물어봤다.

그러나 이 사안에 대해 측근들 대부분은 입을 굳게 닫아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웬일인지 한국 언론에서도 노무현의 자살과 죽음에 대해서만 부각시켰지, 권양숙의 이날 행적에 대해선 별다른 보도를 하지 않았다.

남편이 유고(有故)를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왜 권양숙은 뒤늦게 병원에 나타났을까. 이를 두고 갖가지 소문이 무성했다. 하지만 소문만 갖고 기사를 쓸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 노무현은 오전 6시 40분경 사저(私邸)가 위치한 봉하마을의 뒷산으로 경호원 한 명과 함께 산책을 나섰으며 오전 6시 50분경 속칭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 내렸다.

뒤늦게 투신한 전직 대통령의 모습을 발견한 경호원은 즉시 인근 김해 세영병원으로 노무현을 긴급후송 했다. 이때가 7시 5분경이었다.

의식을 잃은 노무현은 이 병원에서 5분가량 머물렀다.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한 세영병원 측은 자신들 보다 시설이 좋은 부산대병원으로 노무현을 후송했다.

하지만 심한 전신골절을 당한 노무현은 세영병원으로 옮겨질 때부터 소생 가능성이 없었다.

권양숙이 부산대병원에 나타난 것은 노무현이 사망한 지 한참 뒤인 오전 10시 30분께.

일부 언론이나 노무현 측은 이 부분에 대해 권양숙이 오전 9시 25분경 병원에 왔다고

애써 도착시간을 축소시켰다. 그러나 본지 확인결과 그녀는 오전 10시 30분경 시신이 안치된 병원에 도착했으며 노무현의 시신을 확인한 후 혼절했다.

여기서 갖는 의문점은 정상적인 상태의 부인이라면 남편의 투신사실을 보고 받자마자 오전 7시께부터 ‘버선발 차림으로라도’ 승용차나 구급차에 동승했어야 마땅하다.

만약 이때 동행을 못했다면 비서관이나 경호원과 함께 세영병원을 거치지 말고 막 바로 부산대병원행을 택해 최소 오전 8시 30분 이전에는 병원에 도착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권양숙은 10시 30분이 돼서야 초췌한 얼굴로 병원에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노무현이 죽은 후 최소 3시간이 지나서야 자살한 남편의 얼굴을 보게 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 궁금증에 대한 실마리는 엉뚱한데서 풀렸다.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 온 A 씨(전직 뉴욕한인단체장)가 지난 1월 본지에 전화를 걸어 와 한국에서 있었던 얘기를 하던 중 “한국정부 고위층(차관급 이상) B 씨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하던 날의 권양숙 여사 행적과 관련 해 상당부분 알고 있으니 취재를 해 보라”는 제보를 해 왔다.

하지만 본지의 B 씨를 상대로 한 취재는 쉽지 않았다. 몇 번의 전화시도와 측근을 통한 접촉 끝에 어렵게 B 씨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다음은 B 씨와의 일문일답이다.

--왜 권양숙 여사가 시신이 안치된 부산대 병원에 뒤늦게 나타났나.

▲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먼저 익명을 보장해 줄 수 있나.
--물론이다.

▲ 이것은 기자 대 취재원의 부탁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부탁이다.
--알았다. 약속을 지키겠다. 먼저 당시 상황을 누구한테 들었나.

▲ 누구한테 들었는지는 정확하게 말 할 수 없지만 노 대통령 자살 당시 사저에 근무하던 사람에게 들었다.
--비서관인가. 경호원인가.

▲ 그것은 말 할 수 없다.
--직접 만나 들었나.

▲ 그렇다. 내 측근 C 씨와 함께 들었다.
--당시 노무현 사저에 근무하던 사람은 사건 당시 노무현 부부의 상황에 대해 무엇이라 얘기하던가.

▲ 노 대통령이 자살하기 전날 밤부터 새벽까지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부부싸움이 있었다. 고성과 욕설이 오갈 정도였다고 한다. 화가 난 노 대통령이 집기까지 집어 던질 정도였단다.
--당시 어떤 말이 오고갔는지 말해 줄 수 있나.

▲ 내용은 당사자들의 프라이버시이기 때문에 말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원망이 있었다. 노 대통령이 뇌물수수혐의로 ‘치욕적인’ 검찰수사를 받고, 앞으로 수사망이 권 여사에게로 조여 오는 데에 대한 불만과 서로에 대한 원망이었다.
--고성과 욕설이 오갈 정도였으면 두 사람의 정신상태가 불안정했다는 얘기인데.

▲ 그렇다. 권 여사는 만취상태였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소리가 크게 났으면 사저 근무자들이 알았을텐데.

▲ 부부싸움이 워낙 격해 비서관들이 말려도 소용이 없다고 한다.
--부부싸움은 언제 끝났나.

▲ 정확한 시간은 알 수가 없지만 새벽녘이 돼서야 끝났다고 한다.
--부부싸움 이후의 상황은.

▲ 노 대통령은 줄담배를 피우며 잠 한숨 못 잤고, 권 여사는 만취상태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이 부부싸움 직후 유서를 썼다는 얘기인데.

▲ 시간 정황상 그렇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유서를 쓰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노 대통령이 투신한 사실을 권 여사에게 언제 알렸나.

▲ 투신사실을 경호원을 통해 전해들은 비서관이 즉시 권 여사에게 알리려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전 7시 전후라는 얘기인데 권 여사의 반응은.

▲ 권 여사가 만취된 상태에서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인지 비서관이 깨워도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비서관이 깨운 지 얼마 만에 권 여사가 일어났나.

▲ 정확한 시간은 알 수가 없으나 대략 한 시간이상이 지난 후 간신히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 권 여사의 반응은.

▲ 넋이 빠진 얼굴이었다고 한다.
--이후의 상황은.

▲ 언론에 보도된 그대로이다. 이게 권 여사가 부산대병원에 뒤늦게 나타난 이유이다.
--결국 그날 밤의 큰 부부싸움이 노 전 대통령을 자살로 이끌고 간 이유 중 하나가 는 셈인가.

▲ 그렇게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평생 동고동락한 부인으로부터 모진 소리를 듣고 노 대통령의 심정이 정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신은 위험부담을 안고 왜 이번 취재에 응했나.

▲ 노 대통령 자살사건이후 별의별 루머가 다 떠돌았다. 심지어 이명박 대통령에 의한 음모론까지 나왔다. 부부싸움 얘기도 루머에 속해 있었다.

노무현은 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다. 전직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역사에 바르게 기록돼야 한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내게 말을 전해 준 사람이나 나나 확실한 신분의 사람이다. 내가 이명박 정부 내 고위층의 한명인데 허튼 소리를 하겠나. 나 역시 개인적으로도 노 대통령 자살 당일의 상황이 궁금했었다.
--당신의 얘기를 같이 들은 C 씨에게 확인해 볼 수 있겠나.

▲ 그렇게 하라.

이후 본지는 C 씨를 서울에서 만나 B 씨의 얘기를 전해주었다.

C 씨는 “모두 사실”이라며 “오히려 B 씨가 노무현 전 대통령 부부의 프라이버시를 생각해 얘기 안 한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C 씨는 “두 사람의 정확한 부부싸움 내용은 알 필요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사실 노무현 부부의 싸움은 자살 사건이전에도 몇 번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상문 비서관이 봉하마을을 방문하여 권양숙과 나누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된 노무현은 부인의 금품수수사실을 알게 된 후 대노했으며 이후 잦은 싸움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부정부패한 가족과 측근이 “청렴결백만큼은 자신 있다”고 강조한 노무현을 자살로 이끌었다

전직 대통령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은 대한민국에 있어 매우 불행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의 국가 신인도까지 떨어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같은 사건이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선 원인을 밝혀내고 재발방지를 위한 초석을 마련해야만 한다. 먼저 노무현의 죽음은 본인의 잘 못이 제일 크다.

한편으로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가족관리가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 준 점도 있다. 본인이 아무리 청렴결백해도 부인이나 자녀들이 자신 모르게 ‘나쁜 일’을 벌이며 알 길이 없다.

대통령 부인의 문제점을 대통령 면전에 대 놓고 보고 할 만 한 인물이 대한민국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과거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는 이순자 여사와 처가의 문제점을 지적한 측근들이 줄줄이 청와대에서 쫓겨난 일도 있었다.

대부분의 한국 대통령들은 자식관리에 실패했다.

4.19혁명 직후 자신의 친부모인 이기붕 부통령 부부를 죽이고 자살한 이승만의 양자 이강석을 필두로 마약에 손 대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던 박정희의 외아들 박지만, 육영재단을 두고 아직도 분쟁에 휘말려 있는 박근혜와 박근령은 모든 이의 눈살을 찌푸리기에 충분하다.

이후 전두환 비자금 조성에 일조한 전재국, ‘소통령’이라 불릴 정도로 큰 권력을 행세한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 또한 김대중의 아들들은 어떠한가. 김홍일, 홍업, 홍걸 삼형제는 비자금 조성에 큰 몫을 했으며 그 돈으로 지금도 혜택을 충분히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노무현의 경우는 아들 건호가 미국에서 호화생활을 하고 2천만 달러가 넘는 골프장을 매입하러 다녀 세상 사람들의 지탄을 받았으며, 딸 정연은 불투명한 방법으로 뉴저지의 고급주택을 사들여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노무현은 결국 본인만 깨끗했지, 측근들이나 가족은 부정과 비리의 중심에 서 있었다.

노무현은 이점을 못 마땅해 하고 분개해 했을 것이다. 비록 인기 없고 무능한 대통령이라고 욕을 먹으면서도 청렴결백만큼은 자신 있다고 했지만 결국 그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측근과 가족이 죽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인이 모든 책임을 지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본지가 이런 기사를 게재하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노무현의 죽음에 대해 바로 알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인터넷을 뒤지면 이명박 음모론, 노무현 타살설 등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본지의 심층 취재결과 그 같은 루머는 그냥 헛소문에 불과하다.

자존심 강한 노무현은 가족과 측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물론 그들에 대한 원망도 있었을 것이다. 부부싸움을 하던 권양숙의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히기도 했을 것이다.

오는 5월 23일은 노무현이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을 기해 노무현 지지자들이 어떤 발언을 한다 한들 그들은 죄인일 수밖에 없다.

한명숙 전 국민총리가 영결식장에서 “당신을 지키지 못 해 죄송하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궤변에 불과하다.

노무현 측근들은 “우리의 잘못으로 당신을 죽게 만들어 죄송하다”고 말해야 한다. 노무현의 죽음은 측근들 모두의 책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