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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여름 3 : 대진제국의 변법개혁, 성장, 중국 통일과 멸망까지 2

 

 

강남의 여름 3 : 대진제국의 변법개혁, 성장, 중국 통일과 멸망까지 2

 

 

                                                                                          잠실역 사거리 초고층 빌딩 공사 모습

 

 

 

진나라의 변법개혁과 성장, 그리고 중국을 통일 한 후 멸망까지를 살펴보는 것은 개혁을 눈앞에 둔 우리나라 현실과 비교해 볼 때 유익할 것이다. 박대통령이 지난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심각하게 병든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조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개혁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판단아래 국민들의 여망과 여론의 질책에 따라 개혁을 시도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개혁은 그리 쉽게 생각할 것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개혁이 성공한 경우보다 실패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개혁은 기존의 기득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제도와 시스템을 바꾸는 과정에서 엄청난 반발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혁은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내놓지 않으면 쉽사리 성공할 수가 없다. 자신의 이상과 꿈을 펼친다는 각오 아래 모든 사심을 버리고 오로지 국가의 중흥을 위한다는 일념하에 실시해야 되기 때문이다.

 

우선 개혁의 대상과 범위를 두고 어느 정도까지 시도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쩌면 개혁의 대상은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비리와 부패를 우선적으로 척결하기 위해서는 백만 공무원을 비롯하여 그동안 기득권을 누리며 이득을 누려오던 권력층, 가진자, 기업가 등의 무리들이 상당한 반발이 예상된다. 사회 곳곳에 뿌리내려 자신들의 이득을 즐기며 대대로 물려줄 생각까지 하고 있는 각종 마피아 집단 등 기득권 집단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빼앗기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각종 마피아 집단을 포함하여 국가 예산을 감빼먹듯이 하는 무리들, 은밀한 뒷거래로 뇌물과 댓가성 편의를 봐주는 풍토, 전관예우와 유전무죄무전유죄의 법조계의 실태와 현실, 정경유착으로 권력과 기업가가 밀착하여 이권을 챙기는 구조,  정권이 바뀔때마다 반복되고 있는 낙하산 인사 등 이로 인해 우리 사회는 비리와 부패가  만연해 있는 실정이다. 준법, 정의, 평등, 공정은 사라지고 불법, 불의, 불평등, 불공정이 국민들의 의식구조 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갈취하기 위해서 직위, 직급, 계급, 감사권, 징세권, 정치권력, 검.경찰 등을 이용하여 약자에게 군림하는 사회구조 자체가 이제는 자본주의적 말기현상은 물론 신분 상승의 기회가 상실된 역동성이 없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개혁이란 말로만 하는 개혁이 아니라 실질적인 개혁을 이루려면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고 시행하지 않으면 실패한다는 점이다. 개혁을 시도하는 총리 혹은 대통령은 총리와 대통령 직은 물론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고 강력하게 시행해야 한다. 개혁을 시행하는 총리에게 최대한 전권을 위임해주고 대통령이 뒤에서 전적으로 지원해야 하며 총리를 믿고 끝까지 믿어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선발하는 총리는 우선 개혁에 대한 청사진을 갖고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편협하지 않은 사고와 넓은 식견, 미래에 대한 청사진, 강력한 실천의지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작금에 전개되고 있는 신임 총리지명자에 대한 우려가 걱정된다. 청와대 인사팀에서 어떻게 검증했는지는 몰라도 그 사람이 개혁에 대한 청사진과 사고, 이념이 명확하고 강력한 의지가 있는지를 살폈는지 모르겠다.  돌아가는 추세를 보면 아마 소문만 듣고 자세한 검증없이 주먹구구식으로 골랐을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개혁을 시도하는 당사자에게 직급은 물론 법적인 권한을 최대한 행사할 수 있도록 위임해주어야 하고 전적으로 지원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한 정권에 그칠 것이 아니라 법제화하더라도 다음 정권은 물론 최소한 수십 년은 지속되도록 규정되어야 한다. 또 개혁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전체적인 청사진이 있어야 하고 사전 충분한 토의와 검토를 통하여 어떤 제도와 구조, 관련 법제화, 개혁 후 추구하는 목표 등이 병행되어야 한다. 또 개혁가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고 시행하는 검허한 자세가 필요하다. 그 개혁이 가져다주는 엄청난 부국강병의 결과를 가져오려면 한 시대에 그칠 것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과연 지금 우리나라 인재중 세태에 물들지 않은 고려 공민왕 시절의 신돈같은 무지막지한 인물이 없는 것인가? 조선 정도전같은 새왕조를 설계할 정도의 지식과 신념, 의지를 가진 지식인은 없는가? 중국 전국시대 진나라 상앙같은 개혁가는 없는 것인가?

 

그래서 중국 춘추전국시대 전국 7웅을 제압하고 중국을 통일하기까지 진나라 부국강병의 그 기초를 다진 진나라 상앙이 펼친 변법개혁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잠실역 저녁 풍경

 

 

(秦)나라 성장과 멸망까지 2

 

(秦, 기원전 221년 ~ 기원전 206년)은 주나라,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 존재하였던 왕조다.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지만, 기원전 206년에 멸망 했다. 왕실의 성은 영(嬴), 통일 시의 수도는 함양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진은 은나라 주왕의 시중을 든 간신 악래의 후예라 한다. 기원전 900년즈음에 효왕(孝王)을 시중들고 있던 비자(非子)가 말의 생산을 실시해, 공적을 올렸으므로의 영(嬴)이라는 성을 받아, 대부가 되어, 진 땅에 영지를 받았다고 한다. 전설에서는 영(嬴)씨는 제순의 신하 백익(伯益)이 받았다고 여겨진다.

 

진이 최초로 흥한 장소는 현재의 감숙성 례현 부근이며, 현재 이 땅에서 진의 선조의 능묘라고 추정되는 것이 발견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기원전 770년에 주나라가 견융에 쫓겨 도성을 동쪽으로 천도하는 과정에서 양공은 주의 평왕을 호위 한 공으로 주의 구지인 기(岐)에 봉해지게 되었고, 이후 진은 제후의 반열에 오른다.

 

 

 

 

춘추, 전국시대

진은 춘추시대에 들어가는 동시에 제후가 되었지만, 풍속적으로는 중원 제국(諸國)과 크게 달라 변방의 가난하고 국력이 미약한 약소국으로 야만스러운 나라라고 업신여겨지고 있었다. 대대의 진의 제후는 주로 서융과 항쟁하면서 영토를 확장했고, 법률의 정비 등을 실시하여 나라의 기틀을 만들어 나갔다. 기원전 677년에는 수도를 옹(雍, 현재의 섬서성 봉상현(陝西省 鳳翔県))에 두었다.

 

9대 목공(穆公)은 백리해 등 타국 출신자를 적극적으로 등용, 서융을 크게 토벌해 서융의 패자가 되었고, 주변의 소국을 합병하고 영토를 넓혀 이웃 (晋)에 필적할 정도가 되었다. 때마침 진(晋)이 여희의 난을 겪으면서 혜공을 옹립하지만, 혜공은 배신을 일삼았다. 목공은 혜공의 군대를 한원에서 격파했다. 또한 혜공 사후에는 혜공의 형 중이를 진공(晋公)으로 즉위시켰고 중이가 진의 명군 문공(文公)이 되었고, 그의 치세에는 진(晋)은 다시 강국의 풍모를 되찾는다. 그러나 문공 사후, 진(秦)은 다시 진(晋)을 격파하고, 영토를 강탈했다. 이러한 실적에 근거하여 목공은 춘추 오패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러나 목공이 죽었을 때, 177명의 가신들은 순장의 풍습을 따라 함께 죽었고, 명군과 인재를 한 번에 잃은 진나라은 기세를 잃어 영토는 축소되었다. 나라를 유지할만한 힘은 아직 유지하고 있었지만, 춘추시대 중기 이후 강대국은 북쪽의 진(晋)과 남쪽의 (楚)였고, 이에 비하여 진(秦)은 한 발 밀려나 있던 상황이었다.

 

전국시대에 진(秦)은 전국칠웅의 하나로 불린다. 그러나 강대국이던 이웃나라 진(晋)은 내부의 권력 싸움의 끝에 (韓)·(魏)·(趙)의 삼국으로 갈라졌다. 이렇게 갈라진 삼국을 삼진(三晋)이라 부른다. 삼진 중 위나라가 전국 초기, 명군 문후에 의해 강하게 성장하였고, 진(秦)은 위에게 압박을 받고 영토를 빼앗긴다.

 

 

진나라 효공과 상앙의 변법개혁

 

이 상황에 분개한 진의 제25대 군주 효공(孝公)은 넓게 인재를 구해 대세를 만회할 수 있는 방책을 찾았다. 이에 응한 자가 그 유명한 상앙(商鞅)이다.

 

상앙은 행정 제도의 개혁·십오제(什伍制)의 채용 등을 실시해, 진을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이러한 상앙의 변법 운동에 의해 진은 철저한 법치주의 국가로 변모하였고, 국내의 생산력, 군사력을 높여 서서히 다른 6국을 압도해 갔다. 효공은 기원전 350년, 도성을 함양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천하 경영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진나라 당시 주변국들도 많은 사상가들이 등장하던 시대라 인재를 등용하여 개혁을 물론 시도했다. 그러나 개혁은 대부분 당대에 끝나버리고 후대에는 지속되지 못했다. 개혁은 절대로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지속되어야 그 실효성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진나라는 효공이 재임하던 기간 내내 20년 이상 변법을 지속했다. 물론 잔혹한 형벌로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받았고 관리들도 엄정한 변법에 진저리를 쳤지만 개혁은 멈추지 않고 지속되었던 것이다.

 

효공이 상앙과 변법개혁을 시도한 지 20여 년이 지난 후 진나라는 그동안 새로 양성한 신군(新軍)을 이용하여 위나라를 침공하여 옛영토를 되찿는 등 점차 변법개혁의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효공이 죽고 효공의 아들 혜문왕(惠文王)은 이처럼 강해진 국력을 기반으로 하여 기원전 324년에 왕을 칭한다.

 

기원전 316년에 혜문왕은 촉을 점령해, 이 땅의 개발을 실시하여 한층 더 생산력을 올려 장강의 상류를 차지하게 되었고, 장강의 흐름을 따라 진격할 수 있게 되어 초를 압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초와의 싸움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섰다. 혜문왕은 모략가인 장의(張儀)를 등용하고, 초를 질질 끌어 돌려 전쟁으로 격파해, 초의 회왕을 사로잡는데 성공한다. 혜문왕은 위와 한의 왕들을 각각 마부와 배승으로 삼을 정도로 굴복시켰다. 하지만, 혜문왕의 아들 무왕의 시기에 그가 장의를 내쳐버리자 장의는 위에 망명, 이로 인한 한과의 격전 끝에 진나라는 많은 군사를 잃었고, 무왕 자신은 갑자기 사고로 사망하게 되자 진나라는 후계자 싸움이 일어나 전력이 후퇴해 버린다.

 

이 시기 동쪽에서는 제나라가 신장하고 있어, 은나라의 후예인 송을 병합하는 등 주변 제국을 압박하고 있었다. 기원전 288년 당시에는 제를 동제, 진을 서제라고 칭했다. 제나라가 곧바로 제호를 취소했으므로, 진도 취소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 시기는 서쪽의 진나라, 동쪽의 제나라의 2강국 시대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제나라는 연나라의 악의가 지휘하는 5개국 연합군에 의해 수도 임치가 함락. 망국 직전까지 몰리는 위기를 겪게 되었고,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 진나라는 강국의 위치를 굳건히 할 수 있었다.

 

혜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이복동생인 소양왕(昭襄王)의 시대에 재상 위염(魏冄)과 백기 장군의 활약으로 진은 주변국과의 싸움에서 여러 번이나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소양왕을 즉위시킨 재상 위염의 권력이 너무 커진 것을 우려한 소양왕은 재상 위염을 숙청하고, 대신 범저(范雎)를 등용한다. 범저가 진언한 것은 유명한 원교근공책이다. "가까이에 있는 한·위를 거느리고, 먼 제나라와의 싸움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이것으로는 승리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은 먼 토지가 되어, 지키는 것이 어려워져 버린다. 이것에 대해서 먼 제나라나 연나라와 동맹해 가까이의 한·위·조를 공격하면 가까운 지역의 토지가 손에 들어 오게 되었고, 이는 곧바로 진의 영토로 집어 넣는 것이 용이해진다." 이것이 '원교근공책'이다. 이 진언에 감동한 소양왕은 이 진언을 채택하고, 범저를 재상으로 삼았다. 기원전 260년에는 백기가 조나라로 진격, 장평 전투를 통하여 조군을 격파, 조의 포로 40만 명을 생매장하여 조나라의 예기를 꺾어버린다. 기원전 255년에는 주나라를 멸해 그 영지를 접수하여 진의 위세는 한층 더 높아졌다.

                                                                                                                           

역대 군주

중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


신화와 고대
선사 시대
신화·삼황오제
황하장강 문명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기원전 1122~기원전 256
  서주
  동주
    춘추 시대
    전국 시대
제국의 시대
기원전 221~기원전 206

기원전 206~서기 220
  전한
  8~23
  후한

삼국 시대 220~280
  , ,
265~420
  서진
  동진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남북조 시대 420~589
581~618

618~907
무주 690~705

오대십국 시대
907~960
916~1125
960~1279
  북송 서하
1038~1227
  남송
1115~1234
1271~1368

1368~1644


1644~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 1911~현재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중화민국 (타이완

 

 

  • 진중(秦仲, 재위 : 기원전 845년 ~ 기원전 822년)
  • 장공(莊公, 재위 : 기원전 821년 ~ 기원전 778년)
  1. 양공(襄公, 재위 : 기원전 777년 ~ 기원전 766년)
  2. 문공(文公, 재위 : 기원전 765년 ~ 기원전 716년)
  3. 영공(寧公, 재위 : 기원전 716년 ~ 기원전 704년)
  4. 출자(出子, 재위 : 기원전 703년 ~ 기원전 698년)
  5. 무공(武公, 재위 : 기원전 697년 ~ 기원전 678년)
  6. 덕공(德公, 재위 : 기원전 677년 ~ 기원전 676년)
  7. 선공(宣公, 재위 : 기원전 675년 ~ 기원전 664년)
  8. 성공(成公, 재위 : 기원전 663년 ~ 기원전 660년)
  9. 목공(穆公, 재위 : 기원전 659년 ~ 기원전 621년)

진 목공 영임호(秦穆公 嬴任好, ? ~ 기원전 621년)는 진나라의 제9대 군주이다. 그는 춘추시대의 오패 중의 하나로 주나라 양왕(襄王) 때 진나라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그는 많은 조언자를 얻었는데 백리해(百里奚), 건숙(蹇叔), 비표(丕豹), 공손(公孫) 등이었다.

 

목공은 덕공(德公)의 아들이며 성공(成公)의 동생이다. 그의 딸 회영(懷嬴)은 희중이(姬重耳, 진 문공)와 결혼하였다. 목공은 사위를 도와 성복전투(城濮之戰)에서 주나라를 격파하였다.

 

  10.  강공(康公, 재위 : 기원전 620년 ~ 기원전 609년)

  11.  공공(共公, 재위 : 기원전 608년 ~ 기원전 604년)

  12.  환공(桓公, 재위 : 기원전 603년 ~ 기원전 577년)

  13.  경공(景公, 재위 : 기원전 576년 ~ 기원전 537년)

  14.  애공(哀公, 재위 : 기원전 536년 ~ 기원전 501년)

  15.  혜공(惠公, 재위 : 기원전 500년 ~ 기원전 491년)

  16.  도공(悼公, 재위 : 기원전 490년 ~ 기원전 477년)

  17.  여공(厲公, 재위 : 기원전 477년 ~ 기원전 443년)

  18.  조공(躁公, 재위 : 기원전 443년 ~ 기원전 429년)

  19.  회공(懷公, 재위 : 기원전 428년 ~ 기원전 425년)

  20.  영공(靈公, 재위 : 기원전 425년 ~ 기원전 415년)

  21.  간공(簡公, 재위 : 기원전 414년 ~ 기원전 400년)

  22.  혜공(惠公, 재위 : 기원전 399년 ~ 기원전 387년)

  23.  출공(出公, 재위 : 기원전 386년 ~ 기원전 385년)

  24.  헌공(獻公, 재위 : 기원전 385년 ~ 기원전 362년)

 

 

제24대 헌공 (秦獻公, ? ~ 기원전 362년)은 중국 전국 시대의 진나라의 제24대 군주(재위:기원전 384년 ~ 기원전 362년)이다. 전국시대 당시 6국에게 멸시받던 나라의 부흥을 위하여 힘을 쏟았다. 옹성(雍城: 섬서 鳳翔縣 경내)에서 역양(櫪陽: 서안시 閻良區武屯鄕, 악양이라고도 불림)으로 도읍을 옮기고 동방경략(東方經略)을 꾀하였다.


당시 진나라는 나머지 6국에 비해 서쪽에 치우쳐져 있었으며, 가장 힘이 약한 나라였다. 당시 7개국 중 패권국이었던 위나라와는 매해 전쟁을 거듭하던 상태였다. 헌공은 진나라에 남아있던 악습인 순장(또는 순사) 풍습을 없애고 도읍을 악양으로 옮겼다. 하서지방 공략에 힘을 쏟았다. 훗날 하서수복전을 전개하다 위군이 쏜 독화살에 맞는 중상을 입었고, 회복하지 못하고 끝내 숨을 거두었다. 두 아들 중 둘째 아들인 거량에게 공위를 물려주었고, 이는 진나라 부흥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제25대 효공(孝公, 재위 : 기원전 361 ~ 기원전 338년)

 제26대  혜문왕(惠文王, 재위 : 기원전 337년 ~ 기원전 311년)

 제27대 무왕(武王, 재위 : 기원전 311년 ~ 기원전 307년)

 제28대 소양왕(昭襄王, 재위 : 기원전 306년 ~ 기원전 251년)

 제29대 효문왕(孝文王, 재위 : 기원전 250년 ~ 기원전 250년)

 제30대 장양왕(莊襄王, 재위 : 기원전 249년 ~ 기원전 247년)

 

 

제25대 효공(孝公, 재위 : 기원전 361년 ~ 기원전 338년)

진 효공 영거량 (秦孝公嬴渠梁, 기원전 381년 ~ 기원전 338년)은 중국 전국 시대 진나라의 제25대 군주(재위:기원전 361년 ~ 기원전 338년)이며, 헌공의 아들이다.

 

군주의 자리에 오른 후에 온 힘을 다하여 치국에 힘써 진나라를 무시했던 제후들을 마음속으로 깊이 승복시키고 아래로는 영을 내려 인재를 찾았다. 위(衛)나라 출신 상앙을 중용하여 기원전 359년 기원전 351년 두 번에 걸쳐 변법을 시행했다. 이로써 진나라는 급속하게 국력이 신장되어 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효공 11년 기원전 350년 함양으로 천도하고 진나라 역사상 최초로 군자를 위한 부세를 징수했다. 대외적으로는 초나라와 화친하고 (韓)과 맹약을 맺고, 다시 진(秦), 조(趙), 제(齊) 삼국동맹을 맺어 당시 최대 강국이었던 위나라를 동서에서 협공하고자 했다. 여러 번에 걸친 위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위나라의 안읍(安邑)을 점령하고 낙수(洛水) 이동의 땅을 개척했다. 전국 초기 초강대국이었던 위나라는 진나라의 동진정책에 밀려 그 도성을 하동의 안읍에서 동쪽의 대량으로 옮겼다. 병이 들어 비교적 젊은 나이인 44세에 죽었다.

 

 

상앙(商鞅, 기원전 395년? ~ 기원전 338년)

고대 중국의 전국시대 진나라의 유학자이자 법가를 대표하는 중요한 정치가였다. 후작이 되어 상앙으로 부르며 본래의 성(姓)은 (姫), 씨(氏)는 공손(公孫), 이름은 (鞅)이다. 또 다른 별칭으로 위나라 공족(公族)출신이라서 위앙(衛鞅)이라 불렸다. 주나라 왕족과 위나라 공족의 후예였으며, 생전에는 유학자를 자처하였다. 거열형의 창시자였는데, 진이 중국을 통일하는 데 기초를 다졌지만 지나친 개혁이 관료들의 반발을 사 정작 후일 그 자신이 거열형으로 처형된다.

 

진 효공의 지원으로 그의 법철학에 따르는 여러 가지 개혁을 실행하였다. 병제, 세제, 법제를 정비하고 토지제도와 군현제를 시행하는 대개혁을 단행했다. 그것은 진나라가 주변국에서 군사강국인 중앙집권 국가로 변화시켰다. 행정을 교육제도에 중점을 두어 변화시키고 귀족의 권력을 줄였다. 그렇게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으며, 그 공적으로 열후(列侯)에 봉해지고 상(商: 陜西省商縣)을 봉토로 받으면서 “상앙”이라 불렸다.

 

오가작통법의 창시자였으며 당대에 채택되지는 않았으나 노비 제도의 폐지를 동양 최초로 제장하기도 하였다.

 

부국강병의 술책으로 진효공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여 좌서장을 거쳐 총리 격인 대량조(大良造)로 승진하여 정치개혁의 총설계자가 되었다. 두 차례의 변법을 성공시켜 약소국 진나라를 일약 강대국으로 만들어냈다. 저서로는 《상군서 》(商君書) 29편이 있으며, 병법 지식도 박식하여 병서(兵書)인 《공손앙》(公孫鞅)27편을 짓기도 했다.

 

 

 

생애

기원전 395년위나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 연대는 다소 불확실하여 기원전 396년생 설과 기원전 390년생 설도 있다. 그의 가계는 주나라 왕족과 위나라 공족의 후예였으며, 진 효공의 지원으로 그의 법철학에 따르는 여러 가지 개혁을 실행하였다. 병제, 세제, 법제를 정비하고 토지제도와 군현제를 시행하는 대개혁을 단행했다. 그것은 진나라가 주변국에서 군사강국인 중앙집권 국가로 변화시켰다. 행정을 교육제도에 중점을 두어 변화시키고 귀족의 권력을 줄였다. 그렇게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으며, 그 공적으로 열후(列侯)에 봉해지고 상(商: 陜西省 商縣)을 봉토로 받으면서 “상앙”이라 불렸다.

 

그는 생전 공자를 사숙, 공자의 문도를 자처였으며, 공자의 제자 중 자궁의 학통을 계승한 순자의 문도였다.

 

 

진(秦)의 변법

상앙이 추진했던 변법은 당시 법가사상을 바탕으로 강력한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였다. 천대받는 서생에 북과했던 그는 자신의 정치사상과 법가를 실현할 나라로 진을 선택했다. 또한 강력한 부국강병을 원했던 진효공과 뜻을 맞추어 소국에 불과했던 진을 전국시대 6국에 필적할 나라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변법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오가작통법: 다섯집을 하나로 묶어 하나의 단위로 만들었다. 이는 납세와 징병의 단위가 되었다.
  2. 상업 억제: 상앙은 강력한 중농주의자였다. 그는 상업을 악업으로 보았고 농업에 전념하기 위해 상업을 강력히 탄압했다. 그러나 후에 진나라가 어느정도 국력이 상승하자 농업과 상업의 균형있는 성장을 꾀하였다. (상업을 포기한 것은 아님)
  3. 노예제 폐지: 노예제를 폐지하고 지주들의 노예를 해방시킴으로써 이들의 힘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양인을 확충하여 재정과 군사력을 확충하였다.
  4. 군공수작제: 군공수작제를 통해서 누구나 전쟁터나 국가를 위해서 공을 세웠다면, 그에 마땅한 작위를 내림.(국가에 대한 백성의 전쟁참여도 및 민심을 모으기 위함)
  5. 악습 및 구습 타파: 봉토에 대한 토지제도 개혁 등 진나라에 내려오는 잘못된 악습이나 오랜 전통을 타파함으로써 백성들의 의식 향상을 도모하였음

 

변법에 대한 반대

진효공과 상앙의 강력한 추진에도 불구하고 이 변법을 좌초시키기 위한 시도는 여러번 일어났다. 특히 진 최고의 유력부족인 맹,서,백씨 부족의 반발과 당시 태사였던 감룡과 두지의 반대로 변법은 여러번 중단 위기를 맞는다. 진 효공에게 이르는 반대 상소만 하루 수천개였다 하니 실로 나라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상앙의 엄벌주의

상앙은 변법에 대한 반대자는 용서치 않았고 변법을 어길시 강력한 엄벌주의로 대처하였다.이 변법 앞에서는 당시 태자였던 영사(훗날 진 혜문공)도 예외는 아니어서 태자가 변법을 어기자 스승이었던 공자 건(진 효공의 형)를 잡아 그의 코를 베는 형벌을 내렸다. 이 일로 공자 건은 영원히 은둔했으며 태자는 상앙에 대한 증오를 품게된다

.

당대에는 과격하다는 평가도 있었으나 법을 위반하였을 때는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예외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 일각에서는 이를 열렬히 환영하였다.

 

 

변법의 성과

20년동안 부지런히 변법을 추진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하서 수복: 지금의 장안부근을 장악함으로써 당시 최대 패권국가였던 위나라를 제압하고 전국시대의 패자로 등극한다.
  2. 함양 천도: 지금의 장안인 함양으로 천도함으로써 중원으로 진출할 발판을 마련한다.
  3. 강력한 군사력: 양인이 많아지면서 군사수가 증대했고 재정이 확충되어 강력한 군대를 만들 수 있었다.

상앙은 이 공으로 대량조에 올라 명실상부한 사실상의 공동군주가 된다.

 

 

조량과의 논쟁

상앙이 재상이 된 지 10년이 되었는데, 왕족과 외척들 사이에서 그를 원망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때 상앙은 조량(趙良)이라는 선비를 만나게 되었다. 평소에 조량의 명성을 들었던 상앙은 그와 친교를 맺기를 희망하였으나 조량은 공손하게 거절하였다. 이를 궁금하게 여긴 상앙이 물었다.

그대는 내가 진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시오?
 
상앙
반성하면서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총(聰)이라 하고,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명(明)이라 한다고 들었습니다. 순임금께서 말씀하시길 '스스로 낮추면 더욱더 높아진다'라 하셨습니다. 마땅히 이에 따르셔야지 저의 의견 따위야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조량
원래 진나라는 오랑캐의 풍습에 젖어서 아비와 아들의 구별도 없이 한 집에서 살고 있었으나 내가 그런 풍습을 고쳐서 남녀의 구별이 있게 하고 위엄도 있는 궁궐도 만들었소. 선생께선 나와 옛 목공 때의 재상 백리해 중 누가 더 정치를 잘한다고 보시오?
 
상앙
천 마리의 양 가죽도 한 마리의 여우 가죽만 못하고, 아첨꾼 천 명의 말도 정직한 사람의 한 마디 말보다 못합니다. 주나라 무왕은 신하들이 바르고 옳은 소리를 할 수 있어 크게 일어났고, 은나라 폭군 주왕은 신하들이 감히 간언하지 못했기에 멸망을 면치 못 한 것입니다. 만일 무왕이 틀렸다고 생각치 않으신다면 제가 하루 종일 정직한 말씀을 드려도 소용없지 않겠습니까?
 
조량
겉치레의 말은 허황되고, 내심에서 나오는 말은 진실되며, 쓴 말은 약기고 달콤한 말은 독이다'라는 말이 있소이다. 선생이 진정으로 용기 있게 하루 종일 바른 말을 해 준다면 나에게 약이 될 터인데 왜 마다하겠소?
 
상앙
옛날 목공 때의 백리해는 가난했지만 현명한 사람이였습니다. 목공께서 그의 현명함을 들으시고 만나보고자 하셨으나 백리해는 여비가 없어 나그네에게 몸을 팔아 소를 치면서 따라갔습니다. 목공이 이를 알고 백리해를 소 치는 신분에서 백관의 위에 서게 하셨으나 진나라에서는 감히 불만을 품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백리해가 진나라의 재상이 된 지 6,7년이 지나서 동으로는 정나라를 쳤고, 진(晉)나라의 군주를 세 번씩이나 교체시켰으며, 초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준 적도 있습니다. 백리해가 어진 정치를 베푸니 오랑캐까지 복종해 따랐습니다. 백리해는 재상을 지내면서 아무리 피곤해도 수레에 앉지 않았고, 더워도 수레 덮개를 씌우지 않았습니다. 백리해가 행차할 때는 수행하는 수레를 거느리지 않고 무장한 갑병(甲兵)도 없었습니다. 백리해의 공로는 문서 창고에 기록되어 보존되어 있으며, 덕행은 후세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백리해가 죽자 진나라의 모든 사름들은 눈물을 흘렸고, 아이들조차 노래를 하지 않았으며, 방아를 찧는 사람들도 흥얼거리지 않았습니다.이것이 백리해의 정치요 덕입니다.
그런데 상군께서는 왕과의 만남부터가 명예롭지 못했습니다. 왕이 부르신 것이 아니라 왕의 총애를 받던 경감(京監)에게 소개를 부탁하지 않으셨습니까? 재상을 지내면서도 백성을 위한 일은 하지 않고 궁궐이나 크게 지을 뿐이었으니 그것을 공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또 태자의 스승에게 형벌을 가하고 서슬이 퍼런 법으로 백성을 죽이고 다치게 했으니, 이는 결국 원망과 화를 쌓은 것입니다.
상군의 명령이 왕의 명령보다도 무거워, 왕께서 부르기보다는 상군께서 불러야 더 빨리 옵니다. 지금 상군께서 많은 법을 바꾸면서 이것을 교화라고 하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법을 바꾼 목적은 다만 상군의 권위를 내세우려는 목적이겠지요, 상군께서는 마치 왕처럼 자신을 과인이라 칭하고, 많은 왕족들을 핍박하시고 있습니다. 《시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쥐에게도 예의가 있는데, 사람으로써 예의가 없구나. 사람으로써 예의가 없는데, 어째서 일찍 죽지 않는가?'
이 시를 보면 상군께서 축복을 받으며 오래 살 것 같지는 않습니다. 태자의 스승인 공자 건(虔)은 8년 전 의형(劓刑)을 당한 이후로 지금까지 두분불출하고 있습니다. 《시경》에는 또한 이러한 구절도 있습니다. '인심을 얻는 사람은 일어나고, 인심을 잃는 사람은 망한다' 상군께서는 지금 아침 이슬처럼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계십니다. 지금이라도 무사히 장수하고 싶으시면 하사받으신 열다섯 개 읍을 왕에게 되돌려 드리고, 시골에 가서 화초나 가꾸면서 지내시는 것이 좋겠지요. 그러면서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인재를 천거하십시오. 또한 노인을 봉양하고, 고아를 돌보며, 부모와 형을 공경하고, 공로 있는 사람에게 알맞은 지위를 주며 덕이 있는 사람을 존중하도록 왕께 건의하십시오. 이렇게 하시면 조금 마음이 편해지실 겁니다. 그런데 상군께서는 아직도 부를 탐하고 국정을 독점하면서 백성들의 원성을 듣고 계십니다. 효공께서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는 상군을 체포하려는 사람들이 어찌 한둘뿐이겠습니까? 상군의 파멸은 발끝을 세워 기다리는 것처럼 순식간의 일이 될 겁니다.
 
조량

그러나 상앙은 조량의 충고를 듣지 않았으며 이로부터 5개월 후 효공이 죽고 태자가 즉위했다.

 

 

비참한 최후

그의 후원자이자 지기였던 진효공이 죽자 그에게 증오를 품고 있는 태자 영사가 즉위한다.(진 혜문왕) 혜문왕 즉위 후부터는 진나라는 왕의 칭호를 사용하게 된다. 그는 상앙의 반대파 (여기에서 상앙의 반대파는 이제껏 상앙의 변법을 반대를 해 온 진나라의 주요 원로세력이다. 진 목공 이후 진나라의 정치는 원로세력과 왕권의 균형을 통해 이루어졌으나 점차 그 균형이 무너져 원로세력이 득세하게되었고, 진 효공 이후 다시 회복하고자 변법을 시행하였다.)를 규합하여 상앙을 탄핵했고 하루아침에 반역자가 되어 거열형에 처해진다.

 

 

저서

병법에도 능했던 그는 병서(兵書)인 공손앙 27편을 짓기도 했다.

  • 《상군》(商君)29편
  • 《공손앙》(公孫鞅) 27편

 

사후 평가

그는 강력한 법가만이 모든걸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교육과 교화는 전혀 필요없다고 생각했으며 사람간의 마음이나 인정등은 불필요한 것이라 생각했다.그는 반대파를 포용할 줄 몰랐고 그들과 토론할 줄도 몰랐으며 오직 자신의 생각만이 옳고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다.이는 강력한 추진력으로 단시간에 성과를 만들어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반대파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상군서

상앙은 생전에 상군서라는 책을 집필하여 남겨놓았다.이는 전국시대 역사연구에 아주 중요한 사료가 되며 상앙 자신의 생각을 아주 잘 알 수 있어 귀중한 책이라 할 만하다.

 

  

 

 

 

제26대 혜문왕(惠文王, 재위 : 기원전 337년 ~ 기원전 311년)

진 혜문왕 영사(秦惠文王 嬴駟, ? ~ 기원전 311년)는 진나라의 제 26대 군주이다. 효공의 아들. 무왕 탕(武王 蕩)과 소양왕 직(昭襄王 稷)의 아버지. 아버지 효공의 방침을 계승해, 파촉(巴蜀)을 정복해 진의 국세를 더욱 높였다. 재위 때에 진으로서는 처음으로 왕호를 사용했으므로, 왕호 사용 이전의 혜문군이라고도 불린다.

 

 

상앙 숙청

태자 시절 상앙의 변법을 어겨, 그 벌로 부역과 스승인 공자 건(公子虔)과 교육 스승인 공손 가(公孫賈)가 각기 코를 자르는 형과 문신을 새기는 형에 처해졌다. 또 시종인 축환(祝懽)이 처형된 과거가 있었다. 태자는 그것을 원망하여 효공의 사후에 상앙에게 죄를 씌워 상앙을 거열형에 처하였다. 그러나 상앙의 변법은 그대로 사용해, 기본적인 국정 방침은 효공 시대와 다르지 않았다.

 

 

장의 등용

진나라는 상앙의 개혁에 의해, 큰폭으로 국력을 증강하여, 주변에 있는 나라는 이것을 무서워해 주나라에 주어야 할 선물이 주어지는 만큼 강해졌다. 이 국력을 바탕으로 모략가인 장의를 등용하고, 종종 위, 제, 초나라등을 토벌해, 기원전 324년에 왕호를 사용했다. 기원전 318년에 한, 조, 위, 연, 제나라의 5개국이 연합군을 결성하여 진나라에 쳐들어왔으나, 혜문왕은 저리질(樗里疾)에 군사를 맡겨 이들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파촉의 병합

또 기원전 316년에는 관중(진의 본토)의 배후지인 파촉을 병합한다.이 지역에는 삼성퇴문화(三星堆文化)를 근본으로 한 독자적인 문화를 가진 나라가 번창하고 있었고, 이 나라는 주나라에 복속하고 있었다. 촉 정벌 전에 장의와 사마착(司馬錯)에게 촉을 취해야할 것인가를 자문했는데, 장의는 이것에 반대해 나라의 중앙인 주나라를 취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사마착은 촉을 취하고 배후지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혜문왕은 사마착의 의견을 채용하고 촉을 정벌해, 진은 큰 곡창지대를 얻었다. 또한 장강 하류에 있는 초에 대하여 강을 사용한 진나라군의 이동이 가능하게 되어, 이전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섰다.

 

 

초나라 토벌과 한중군 설치

그리고 기원전 312년, 초나라가 진나라에 쳐들어가 왔을 때에는, 반대로 초의 한중 지방에 쳐들어가, 그 땅에 한중군을 설치한다. 그 후, 초가 다시 침공해 왔을 때에는, 함양에 가까운 남전(藍田)의 땅에서 이들을 격파했는데, 이 사건은 초나라 쇠망의 전초가 된다.

 

혜문왕은 다음 해인 기원전 313년에 사망했다. 상앙을 미워하면서도 그 법은 보관 유지한 일은, 같은 국정 개혁의 기수인 오기를 살해한 초나라가 그 후, 오기의 개혁의 성과를 파기한 일과 비교할 때 높이 평가받고 있다. 또한 파촉을 병합한 일은, 진이 최강국으로 성장한 요인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장의(張儀, ? ~ 기원전 309년)

위나라 출신으로, 연횡책의 대가이다. 친구 소진(蘇秦)과 함께 귀곡 선생(鬼谷先生)에게서 수학한 적이 있었다. 그는 진나라에 등용되기 전까지 갖은 수모를 겪다가 마침내 진 혜문왕을 만나 정치 고문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재상으로 승진되었는데, 촉나라를 평정하고 위나라의 일부를 차지하는 공을 세웠다.

 

6년 뒤에 진나라와 짜고 위나라의 재상이 되었는데, 위나라로 하여 진을 섬기게 하려 했으나 말을 듣지 아니 하자 진에게 몰래 연락해 위나라가 크게 지도록 만들었다. 이듬 해 제나라 위나라를 공격하고 마침내 진나라가 위를 공격할 목적으로 먼저 한나라를 쳐, 8만 명을 몰살시켰다. 이에 장의는 위나라 왕을 설득하여 소진이 이룩해낸 합종책의 약속을 깨고 진나라와 화친했으며, 장의는 다시 진으로 돌아가 재상이 되었다. 3년 뒤 위는 진을 배반하고 합종에 재가담했으나, 진이 공격하자 다시 화친했다.

 

장의는 강대국 초나라로 달려가 초를 망국의 위기에 몰아넣고, 다시 한나라로 가 그 왕을 협박, 한 역시 진을 섬기도록 했다. 진나라로 돌아간 그는 혜문왕으로부터 무신군(武信君)이라는 칭호를 받고 다시 제나라로 갔다. 제나라 왕 또한 장의의 설득을 듣고 진을 섬기게 되었으며, 조나라로 간 장의는 또한 왕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연나라까지 설득하여, 진나라와의 연횡책을 완성시켰다. 그러나 그는 진나라로 돌아갔으나 왕이 혜문왕의 아들 무왕으로 바뀌어 있었다. 진 무왕은 어릴 적부터 장의를 싫어하였을 뿐더러, 이를 눈치챈 신하들의 비방을 하기 시작했다. 장의와 왕의 관계가 예전만 못하다는 소문이 퍼져 다시 모든 나라는 연횡책을 버리고 다시 합종책을 택하였다. 이후 장의는 자원해서 위나라로 간 뒤 1년 동안 재상으로 있다가 죽었다.

 

소진(蘇秦, ? ~ 기원전 317년?)

동주(東周)의 낙양(洛陽)에서 태어났고 자는 계자(季子)이며, 장의와 친구간이며 같이 귀곡자로부터 배워 장의는 연횡가로, 소진은 종횡가가 되었다. 전국시대 (秦)에 맞서 6국을 연합하는 합종책을 유세하여 6국의 재상을 지냈다.

 

15년간 중원에 평화를 가져왔으나 동문인 장의의 등장으로 결국 비명횡사하게 된다.

 

 

연횡책(連衡策)은 중국 전국 시대에, (秦)나라의 장의(張儀)가 주장한 외교 정책이다. 기원전 328년 위나라가 진에 항복하고, 동맹을 맺음으로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311년 장의에 의해 연이 진에 동맹을 맺음으로서 완성되었다. (韓)·(衞)·(趙)·(楚)·(燕)·(齊)의 여섯 나라가 종(縱)으로 동맹을 맺어 진나라에 대항하자는 합종설에 맞서서, 진나라가 이들 여섯 나라와 횡(橫)으로 각각 동맹을 맺어 화친할 것을 주장하였다.

 

 

제27대 무왕(武王, 재위 : 기원전 311년 ~ 기원전 307년)

진 무왕(秦 武王, ? ~ 기원전 307년, 재위:기원전 311년 - 기원전 307년)은 중국 전국시대의 진나라의 27대 군주이며 2대 왕이었다. 그는 진 혜문왕의 왕자로, 성은 (嬴) 휘는 (蕩)이었다. 진 소양왕의 이복형이었다.

 

기원전 311년 혜문왕이 붕어하자, 태자 탕(蕩)이 즉위하였다. 즉위한 태자 탕은 사후 무왕이라 불리었다. 혜문왕의 신하를 중용하였고, 상앙이 받았던 영지를 빼앗아 검중군(黔中郡)을 설치하는 성과도 거두었다. 중국 최초로 승상제도를 도입하여 좌승상에는 저리질(樗里疾)이 우승상에는 감무(甘茂)를 임명을 한다. 우승상 감무에게 의양(宜陽)을 정벌하고 낙양으로 들어가, 주나라 왕실 보물인 구정(九鼎)을 보고 장사 맹열(孟說)에게 들게 하여 맹열이 구정을 들어올리자, 호기심이 강한 무왕이 스스로 구정을 들다가 힘이 빠져 놓치게되어 깔려서 죽게 되었다. 그리고 태자시절부터 모략가였던 장의와 어울리지 못하였고, 군신들은 장의를 참언하였다.

 

 

제28대 소양왕(昭襄王, 재위 : 기원전 306년 ~ 기원전 251년)

진 소양왕 또는 소왕(秦 昭襄王, 秦昭王, ? ~ 기원전 251년, 재위:기원전 306년 ~ 기원전 251년)은, 중국 전국시대의 진나라의 제28대 군주이자 제3대의 왕이며, 혜문왕의 서자이다. 는 영직(嬴稷)이다. 효문왕의 아버지이다.

 

기원전 306년 무왕이 죽자, 영직은 진나라의 왕이 되려고 하였고, 조나라의 지원으로 영직은 결국 왕좌를 차지하였다. 기원전 260년 소양왕은 조나라와의 장평 전투를 위해 군사를 징발하였다.

 

 

장평 대전(長平大戰, 장평 전투, 장평 대회전)

 

장평 전투(또는 장평 대전, 장평 대회전)은 중국의 전국 시대의 판도를 변하게 만든 대표적인 전투의 하나이다. 장평의 승리는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패전국인 조나라의 몰락을 가져온 결정적인 전투였다. 중국의 고전에도 이 전투를 상당히 중요한 전투로 평가하고 있다.  

                

장평 전투
날짜 기원전 252년
장소 장평
결과 진(秦)의 승리로 전국통일의 기반 마련, 조(趙)는 몰락의 단초가 됨.
교전국
진(秦) 조(趙)
지휘관
왕홀, 백기 염파, 조괄
병력
100,000여명 추정 400,000여명 추정
피해 상황
기록 없음 400,000여명 추정(포로 전원 생매장)

 

 

발단

기원전 265년, 당시 진나라는 상앙이 실시한 변법의 성공으로 전국의 패자가 되어 있었다. 당시 군주였던 소양왕은 국력이 미약해진 한(韓)나라를 공격했다. 당시 지휘관은 맹장 백기였다. 백기는 진군을 지휘하여 한나라 영토인 야왕(野王)이라는 지역을 점령하자, 상당 지역의 17개 현은 도읍 신정과 연락을 취하지 못하고 포위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가뜩이나 작은 나라인 한나라는 두동강이 나고 말았고, 상당의 백성들은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당시 상당 태수였던 풍정은 백성들과 모의하여 상당을 조나라에 바치기로 하였는데, 도읍지인 신정으로 가는 길이 막혔고, 조국(한나라)이 자신들을 도와주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또한 당시 진나라에 흡수된 백성들이 진나라의 법치에 적응하지 못하여 괴로워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이 지역의 백성들 또한 이 의견에 동조하여 대거 조나라로 넘어가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 것이다. 진, 조, 한 3국은 곧 술렁이기 시작했다.

 

조나라 조정의 결정

당시 조나라 군주는 효성왕이었다. 그는 평원군과 평양군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의견은 제각기 엇갈렸다. 평양군은 "상당을 받으면 필시 진과 분쟁이 생기니, 이를 받지 않아야 합니다"라고 하였으나, 평원군은 "조건 없이 17개 군을 받는 것이니 취하십시오"라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효성왕은 평원군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태수 풍정을 화양군으로 봉하였다. 곧 조나라 군이 급히 상당 지역으로 이동하여 피난민들을 위로하였고, 진나라의 만행을 만천하에 공포하였다. 그러나 다른 4개국은 움직이지 않았다. 당시 진나라의 재상인 범수는 "원교근공책"을 외교전략으로 내세웠는데, 당시 강대국들은 이에 동조하여 움직이지 않았고, 조나라는 홀로 진나라와 맞서게 되고 말았다.

 

전투의 진행

진나라의 장수 왕홀은 군사를 이끌고 상당을 접수하기 위하여 이동하였다. 그러나 이미 군민들은 조나라로 도망간 상태였고, 진나라의 지도부는 왕홀에게 상당 군민들을 추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을 간파한 조나라는 명장 염파를 파견하여 군민들을 접수하고 진군을 막게 하였다. 양국 군대는 중원 깊숙한 지역에 위치한 장평에서 부딪쳤다. 초기의 움직임은 조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진군은 염파의 심리전에 밀리고 말았다. 간헐적인 전투에서 승리는 계속 거두고 있었으나 결정적인 승리는 얻지 못한 상태였다. 염파는 장평에 강력한 보루를 쌓고 진군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6월과 7월의 맹공은 진군의 승리로 끝났으나, 진군은 6국이 합종하여 쳐들어온다는 소문에 심하게 동요하고 있던 상태였다. 이대로 가면 조군이 승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진의 승부수

당시 양국 조정은 나름대로 초조했다. 당시 상황이 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효성왕은 다급했다. 방어만 하고 있는 염파가 자신의 자존심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천하통일을 목표로 하고 있는 진은 이 싸움에서 밀리면 6국에 위신이 떨어지게 되며, 통일을 향한 길은 더욱 험난해질 수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게다가 당시 재상이었던 범수는 이미 몇 차례의 실책으로 징계를 받았다. 이번 전투에서 패배한다면 그의 몰락은 자명한 일이었다. 진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범수는 두 가지 승부수를 띄웠다. 우선 당시 지휘관이었던 왕홀을 몰래 백전노장 백기로 교체하였다. 그리고 이를 발설하는 자는 가차없이 처형하였다. 이를 조에서 알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조나라 장수 염파가 전장을 지휘하면 승리할 수 없음을 알았기에 이간책을 써서 지휘관을 바꾸기로 하고 조나라 내부에 첩자들을 투입하여 이러한 소문을 퍼뜨리게 하였다. "염파가 진을 공격하지 않는 것은 뒤에서 진과 내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이 두려워하는 것은 조괄이 장군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효성왕은 염파를 지휘관 자리에서 내치고 대신 조괄을 임명하였다.

 

지휘관이 교체되다

조나라의 새로운 지휘관인 조괄의 부친은 명장 조사(趙奢)였다. 그는 생전에 진의 군사들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전력이 있었던 장수였다. 그는 병사들을 아꼈고, 욕심이 없어서 전투에서 이긴 후 왕에게 하사받은 은상을 병사들에게 모조리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런 조사가 정작 자기 아들을 천거하기는 꺼렸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성품 때문이었다. 조괄은 병법에 통달한 수재였으나 외우기만 한 병법을 실전에 응용하는 능력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거들먹거리고 뽐내는 것을 좋아했다 한다. 그래서 조나라의 조정에서 조괄을 지휘관으로 삼으려 하자 조괄의 어머니는 조정에 아들을 천거하면 안 된다는 건의까지 올렸으나, 이는 무시되고 말았다. 반면, 진군의 새로운 지휘관인 백기는 백전노장이었다. 당시 수많은 강대국들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백여 개가 넘는 성을 빼앗을 정도의 공적을 거둔 장수였다. 이러한 지휘관에게 조괄은 애송이에 불과했다.

 

 

전투 경과

 

유인책과 포위

기원전 252년 7월말, 상앙이 변법을 실시한지 100년 후인 그때 조나라 장수 조괄이 장평에 도착하였다. 실전경험이 전무한 조괄은 도착 즉시 총공격을 지시한다. 이는 백기가 기다리던 것이었다. 그는 아군을 거짓으로 패하게 한 후, 복병을 배치하고 조나라의 40만 대군을 매복 지역에 위치한 본진으로 끌여들였다. 보병 중심의 조군은 진의 본진으로 쇄도하였다. 그러나 진의 본진은 이미 보루를 높게 세우는 등 조군의 공격에 대한 방비를 철저하게 한 상태였다. 조군은 진군의 수비를 돌파하지 못하고 시간을 허비하였다. 바로 그 순간, 백기는 대기하고 있던 복병에 신호를 보내어 조군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조괄은 전군에 전열을 가다듬고 재공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미 군사들의 전열은 흩어지고 있었다. 백기가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곧 진군의 본진에서 기병 5,000기가 쏟아져 나왔다. 기병대는 방진 사이를 헤치고 나와서 조군의 종심을 가로지르며 진격했다. 조군의 대열은 와해되기 시작했고, 진군의 경보병 부대가 조군의 본진을 타격하자 조군은 완전히 와해되어 버렸다. 당시 진군은 철저한 훈련 덕에 단병접전에서는 당할 국가가 없었다. 이런 상황이 되자 조군은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조괄은 서둘러 그 자리에 보루를 쌓게 했다. 공포에 질린 병사들은 순식간에 꽤 튼튼한 보루를 만들어 내었다. 아무리 진군이 조군을 초토화 시켰다 하더라도 40만이나 되는 병력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리하여 조군은 진군에게 포위된 채 전쟁은 또 다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총력전

승전은 했으되, 구원병이 온다면 단번에 역전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백기는 본국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소양왕은 직접 장평 근처의 하내로 행차하여 병사들에게 작위를 1계급씩 하사하고, 적의 보급로를 막게 하였다. 본래 진의 법에서는 적병의 수급을 취한 자에게만 작위를 수여했으니 소양왕이 얼마나 사태를 급박하게 여겼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이렇게 되자 전쟁은 총력전의 분위기로 흘러갔다. 단기적으로는 조나라가 유리했다. 그러나 변법으로 정교한 법체계와 행정체계를 갖춘 진나라는 사태를 충분히 역전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조나라는 국가의 전병력을 모두 동원한 상태였으나 진나라는 아직 넉넉하게 여유가 있었다. 결국 조군은 완전히 포위되어버리고 말았다.

 

조괄의 전사

이렇게 병사들이 진군에게 포위된 지 46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군사들은 산 사람을 잡아먹는 비참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조괄은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정예군을 이끌고 퇴로를 뚫으려던 그는 진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고, 장수를 잃은 조군은 진군에 항복하고 말았고 전투는 종결되었다.

 

전투의 결말

전투는 끝났으나 결말은 아직 나지 않았다. 한꺼번에 40만이라는 엄청난 포로를 받게 된 진나라는 고민에 빠졌다. 이렇게 많은 포로를 먹일 군량이 진나라에는 없었다. 결국 백기는 이들을 모두 생매장해버리는 끔찍한 선택을 했다. 이러한 행동으로 얻게 된 효과는 상당했다. 당시 다른 5국에 경고하는 의미(진나라에 대항하는 자는 죽음 뿐이다)도 있었으며, 조나라에게는 항전의 의욕을 완전히 꺾어버린 것이었다. 게다가 농사를 지을 남자들이 거의 남지 않게 된 조나라는 이후 완전히 몰락해 버리고 말았다. 다시는 예전의 힘을 회복하지 못한 조나라는 결국 약 30년 후인 기원전 225년 멸망하고 말았다.

 


백기(白起)
중국 최초로 통일 제국을 건국한 인물은 익히 알려진 대로 진시황이다.  특히 진시황때에 이르러서  이미 초,연,제, 한, 위, 조 6국을 모두 합친  군사적, 경제적 규모와 대등할 정도에 이르렀다.
 

이것은 다른여러나라들이 한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는 기간에도 충실하게 국력을 축척시킨 결과였는데, 특히 소양왕(기원전307~251)은 당시 군사적 강국이었던 조나라와 한나라의 연합을 깨고 대승을 거두어 군사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소양왕대에는 백기(白起)라는 전국시대 최고의 명장이 있었다. 백기 장군은 소양왕 13년에 한나라와 위나라의 연합군과 싸워 무려 24만명을 전사시켰으며, 다음해에는 위나라 61성을 점령하고 5년후에는 조나라 광랑성을 함락시켰고, 7년 후에는 초나라 수도 영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소양왕34년에는 한,위,조의 3국연합군과 맞서 13만명을 참살시켰으며, 2만명을 황하강 전투에서 수장시켜 버렸다. 10년 후에 한나라를 재침 5개 도읍을 함락시켜고, 군사 5만명을 죽였으며, 그로인해 한나라는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처럼 진나라의 공격이 계속되자 한나라와 조나라는 다시 손을잡고 진을 공격, 진의 상당 지역을 점령하였다. 하지만 이 점령은 일시적인 것이어서, 진의 장군 왕흘은 상당지역을 공격하여 곧바로 회복하였다.


그러자 상당지역에 있던 주민들은 조나라로 피난하게 되었고, 조나라는 장평에 군대를 주둔시켜 이들을 보호하였다. 그리하여 조나라와 진나라 군대는 장평지역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기에 이르렀다.

왕흘은 기세를 몰아 장평지역을 점령하려 하였지만, 조나라의 장군 염파가 요새를 굳건하게 지키자 전투는 장기전 양상으로 돌입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염파장군은 정면대결에서는 많은 병력을 잃었지만, 의외로 요새의 수비태세가 견고하여 수십차례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전과를 올릴 수 없었다.

염파장군이 요새를 지키고 있는 이상 장평을 함락시키기는 힘들었다. 따라서 진의 재상 범수는 반간계를 꾸며, 진나라가 두려워 하는 것은 조사의 아들 조괄뿐이며, 염파는 곧 항복하고 말 것이라는 허위소문을 퍼뜨렸다.

 

조사는 장평대전이 일어나기 8년전 조나라의 장군으로서 진나라의 군대를 크게 격파한 인물이기도 하다. 조괄역시 병법에는 매우 밝은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전쟁은 목숨을 거는 일로써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며 아들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조괄에게 군대를 맏길경우 반드시 파멸할 것이라는 말까지 남겼으며,  사후 조괄이 염파의 후임으로 결정되었을 때도, 조괄의 어머니는  아들이 거만할 뿐 아니라 나라에서 받은 상금을 혼자 독차지한다며 왕명을 거두어 줄 것을 부탁하는 편지까지 올리기도 하였다.

그렇게 본다면 조괄은 군대에 있어서 인화단결의 중요성을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의 국왕은 이미 왕명으로 결정한 일이어서 돌이킬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게 조괄이 부임해 오자 진나라에서는 백전노장인 백기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 반격의 기회를 살피게 된다.

그런데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였던 조괄은 군대를 수비체제에서 공격체제로 전면 개편하고, 곧바로 성문을 열고 총 공격에 나섰다. 노련한 백기 장군에 있어서도 요새안의 병력을 끌어내는 작전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적군이 스스로 성문을 열고 나와 준 것이다. 이제 백기장군에게는 어떻게 하면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 하면서 적군에게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것인가에 대한 고민만 남은 것이다.

백기장군은 의도적으로 패하면서, 조괄의 군대를 최대한 본진과 멀리 떨어지도록 유도하였다.  하지만 조괄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진나라 진영까지 육박하고 말았다. 그러나 조괄의 병력만으로는 숫적으로도 월등히 많은 진나라의 진영을 정면돌파하는 일이 불가능하였다. 

 
이렇게 조괄의 군대가 막히자 백기장군은 2만 5천명을 동원 조나라의 보급로를 차단하였고, 다시 1만 5천명을 동원하여 본진과 조괄의 군대를 양분시켜 버렸다.

 이렇게 되자 조나라의 군대는 군량수송이 끊겨버렸고, 조괄의 군대는 엄청난 타격을 입은체 어렵사리 본진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번 빼앗긴 군수물자 보급로를 회복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것은 1차 접전에 입은 타격보다 더욱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조괄이 요새안에서 꼼짝않고 있는 동안, 백기장군은 대규모로 군사를 증파하여 조나라부터의 구원병과 식량보급을 완벽하게 막아 버렷다.

 군사에서 지면 전투에서 지지만 보급에서 지면 전쟁에서 진다고 했던가... 식량 보급이 끊긴체 46일이 되자, 조나라 요새안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지옥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제 굶어 죽던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잡아 먹힐 지경이었다. 조괄은 어떻게든 활로를 뚫기 위해 여러번 공격을 시도하였지만 진나라의 포위망이 워낙 견고하였기 때문에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 조괄에게도 최후의 순간이 오고 있었다. 아마 자신이 먹을 비상식량도 바닥이 드러나고 있었을 것이다. 조괄은 결사대를 조직하여 최후의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조괄역시 포위망게 갇혀 날라온 화살에 맞고 전사하고 말았다. 결국 그의 아버지의 유언대로, 그의 어머니의 걱정대로 조괄은 조나라의 군사를 함몰시키고 말았다.
 
 조괄이 사망하자  성에서 항전하던 40만에 이르는 군사들과 주민들도 모두 항복하였다. 백기장군은 포로로 잡힌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전에 상당이 진나라에 의해 함락되었을 때, 진나라 백성이 되는 것이 싫어 조나라로 도망쳤다. ...언제 변심할지 모르니 모두 없애지 않으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백기 장군은 40여 만명을 모조리 생매장시켜 버리고, 다만 어린아이 240 명만을 살려 두었다고 한다.

이로써 백기장군은 장평대전을 승리고 마감하였고, 그의 장수 시절 함락한 곳은 무려 70여성이나 된다. 하지만 공적이 커진만큼 그를 시기하거나 두려워 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범수라는 인물은, 백기장군이 더이상 공적을 세우지 못하도록, 조나라의 땅을 할양받는 조건으로 군대를 철수 시킬 것을 간하였고, 소양왕은 그 의견에 따랐다.

 

그해 9월 소양왕은 왕릉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계속하여 지원군을 보냈지만, 총 사령관을 5명이나 잃었고, 열달의 포위에도 한단은 무너지지 않았다. 왕은 백기에게 총사령관직을 맡기고 다시 공격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백기장군은 지난 장평대전에서 진나라가 입은 피해역시 만만치 않을 뿐 아니라,  조나라를 공격하는 틈을 타 다른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하면 위험해 질 수도 있다며 왕의 명령을 거듭 거부 하였다.

 그러나 소양왕은 분노하여 백기를 일개 병졸로 강등시키고, 음밀이라는 벽지로 유배보내려 하였다. 하지만 백기는 몇달동안이나 병을 핑계로 왕의 명령을 계속 연기하였다.


 여기에 조나라와의 전투에서 패전소식만 거듭전해지자, 소양왕은 더욱 화가나 백기장군에게 즉시 수도에서 조금 떨어진 두우라는 땅으로 이주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 사이 재상 범수는 '백기는 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오히려 왕을 원망한다'고 말하였다. 결국 소양왕은 백기에게 칼을 보내 스스로 목을 밸 것을 명령하였다.

칼을 받아든 백기는 잠시 고민하였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 하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죽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평생 진나라를 위해 싸웠으며, 단 한번도 적에게 패한 일이 없다.  그가 뺏은 적의 성은 70여개나 되고, 조나라와 한나라의 연합에 맞서 진나라를 지켜 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자신이 사형당해도  마땅할 이유를 발견하였다.

" 장평대전에서 승리하였으면서도, 포로로 잡힌 40만을 무참히 살해하지 않았는가? 죽어 마땅하다."
결국 자신이 이루어 냈던 수많은 승리 중 가장 큰 승리가 죽음의 이유가 된 것이다. 아무리 전쟁중이었다고 해도, 무차별적인 대한 대학살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 시킬 수 없음을 그는 마지막 순간에 깨닫고 만 것이다
.

이 때가 진나라 소양왕 50년 11월 추운 겨울이었다.


 

 

 

제29대 효문왕(孝文王, 재위 : 기원전 250년 ~ 기원전 250년)

진 효문왕(秦孝文王, 기원전 302년 - 기원전 250년, 재위 : 기원전 251년 ~ 기원전 250년)은 중국 전국시대 진나라의 왕으로 휘는 영주(嬴柱)다. 즉위전의 칭호는 안국군(安國君)이며, 아버지는 소양왕, 아들은 장양왕이다.

 

그의 치세에 관하여 특별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이는 많은 추측을 낳았는데, 가장 많이 받아들이는 의견은, 그가 왕위를 계승하였을 때, 이미 연로했다는 것이다. 그의 전임자인 소양왕은 50년간 왕위에 있었다.

 

그러나 여불위가 독살했다는 음모론도 있다. 이는 그의 아들 자초(장양왕)가 단지 3년만 다스렸다는 것과도 연관이 있는 이론이다.

 

 

여불위(呂不韋, 기원전 292년 ~ 기원전 235년)

중국 전국시대 진나라 승상이다. 여불위는 한나라의 상인으로 조나라 볼모로 잡혀있던 진나라의 공자 영자초(장양왕)를 도왔다. 그는 후에 진나라의 태후가 되는 자신의 애첩 조희를 이때 공자 영자초에게 주었다.

 

그 후 공자 영자초가 귀국하여 진나라의 왕의 위에 오르자 여불위는 진나라의 승상이 되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하여졌다.

 

진 장양왕이 죽고, 13세의 어린 나이로 영정이 왕의 위에 오르자 상국이 되어 중부(仲父)로 불리며 왕을 도왔다.

후에 여불위는 태후 조씨의 밀통사건에 연루되어 파면 당하고 자살하였다.

 

기원전 239년 여불위는 전국의 식객들을 모아 여씨춘추를 편찬하였다. 그는 완성된 여씨춘추를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성 성벽에 진열하며, 이 글에 한자라도 더하거나 깎는다면 천금을 주겠다고 하였다. 이리하며 일자천금이라는 고사가 생겨났다.

 

여불위에 관한 주요 정보는 사마천 사기의 '여불위전'과 유향의 전국 그리고 설원(說苑)이 있다.

 

조희(趙姬) 또는 자초부인(子楚夫人)은 진 시황제의 생모이다.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 한단에서 태어났다. 여불위의 애첩이었으나 진나라의 공자 영자초(징양왕)에게 바쳐진다.

 

그녀는 진나라 환관 노애 밀통을 나누는 관계였으며, 노애와의 사이에서 2명의 아이를 두었다. 노애가 일으킨 반란이 실패하자 노애는 진 시황제에게 죽임을 당하고, 노애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던 두 아이 또한 죽임을 당하였다.

 

 

제30대 장양왕(莊襄王, 재위 : 기원전 249년 ~ 기원전 247년)

진 장양왕(秦莊襄王, 기원전 281년 ~ 기원전 246년)은 중국 전국시대의 진나라의 왕이다. 초명은 영이인(嬴異人)이었지만, 후에 자초(子楚)로 개명했다. 아버지는 효문왕. 어머니는 하희(夏姫)이다. 시황제의 아버지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