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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1,081 : 해방과 건국 41 (김대중 '국민의 정부' 4)

 

 

한국의 역사 1,081 : 해방과 건국 41 (김대중 '국민의 정부' 4)

 

                                                                    

 

 

 

 

 

 

 

 

 

 

 

 

 

 

 

 

 

 

 

 

 

 

 

 

 

김대중 국민의 정부(1998.2~2003.2) 4

 

 

 

4. 김대중정권기의 스포츠와 문화

  

20세기를 청산하고 21세기의 문턱을 넘어서는 시기에 해당하는 김대중정권기는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한 단계 높아진 시기였다. 무엇보다도 2002년 '월드컵축구'를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개최하여 88올림픽에 이어 한국이 전세계인의 주목을 다시 받았다. 특히 한국은 상암경기장에서 개막식을 갖고 기대 이상으로 4강까지 오르는 성과를 거두었는데, 축구팀을 이끈 네들란드 히딩크 감독의 인기는 신드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특히 광화문과 시청 앞 광장에 수백만 시민이 모여 질서있는 응원을 보인 것은 세계인을 감동시켰고, '붉은 악마'로 불리는 응원단이 외쳐대는 '대~한민국'의 응원은 세계적으로 유행이 될 정도였다. 월드컵에 앞서 1998년에 미국에서 이름을 떨친 스포츠스타의 활약도 외환위기에 빠졌던 국민들에게 희방을 안겨주었다. 야구선수 박찬호, 여자 골프선수 박세리가 미국에서 스타로 떠올라 국내팬을 즐겁게 해 주고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한국은 1980년대 이후로 역대 올림픽에서도 일본을 누르고 세계 10위권 안팎의 성적을 거두어 스포츠 강국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한국의 얼굴로 불리는 인천국제공황이 2001년 3월 29일에 착공한 지 8년 4개월 만에 준공된 것도 특기할 만하다. 세계정상급으로 평가되는 신 공항 개통으로 김포공항시대가 끝났으며, 동북아 물류중심의 기능이 한층 높아지게 되었다. 2001년 12월에 인천과 목포를 잇는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돼 서해안지역의 교통난이 완화되었다.

 

한국통신기술과 생명공학은 세계적으로 선진대열에 올라갔는데, 반도체의 메모리부분은 세계 최첨단을 달리고 있으며, 컴퓨터와 모바일전화기의 보급률도 세계에서 가장 앞장서고 있다. 생명공학 분야에서는 서울대 황우석 교수팀이 복제 송아지 '영롱이'를 탄생시켜 화재를 모았다. 

 

김대중정부는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왔던 일본 대중문화의 수입을 개방하는 조치를 내렸다. 다만 영황, 비디오, 만화를 일차적으로 개방하고 가요, 음반, 에니메이션, 게임, 방송 등은 단계적으로 개방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998년 말 <하나비>, <카케무사> 등 두 편의 영화가 첯 선을 보였으나 흥행은 저조했다. 그러나 1999년에 수입한 <러브레타>는 서울에서만 70만 관객을 모으는 성과를 올렸다. 반면 한국의 대중문화도 일본에 상륙하여 인기를 얻어가고 있다. 영화 <쉬리>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2003년에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방영되면서 엄청난 인기를 불러일으키며 '한류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드라마 <대장금>,  젊은 아이돌 가수들을 비롯한 한국의 영화, 드라마, 음악 등 한국 대중문화는 일본은 물론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일대와 중국 등지에서 인기를 끌고 한류붐이 확산되기도 했다. 이러한 한류붐은 한국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는 계기가 되었고 한국에 대한 젊은층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한국 상품 판매, 한국관광 등이 호조를 보이면서 수출확대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1995년 이후로 한국 전통문화유산이 잇달아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세계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미 1995년에 불국사와 석굴암, 종묘, 해인사 장경판전이 등록된 데 이어, 1997년에는 수원 화성과 서울 창덕궁,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이 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고, 200년에는 경주역사유적지구(남산, 월성, 황룡사지 등)와 고인돌지구(고창, 화순, 강화)가 등록되엇으며, 2001년에는 <직지심체요절>과 <승정원일기>가 기록유산으로, 2007년에는 <고려대장경판>과 재경판, 조선왕조<의궤>가 역시 기록유산으로 등록되어 우리나라 기록문화의 우수성을 세계로부터 인정받았다.

 

이밖에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 판소리, 강릉 단오제가 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고, 2008년에는 제주도 한라산,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성산일출봉 등이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앞으로도 더 많은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것으로 기대된다.

 

 

 

5. 여야의 정치적 갈등과 시민단체의 등장

  

김대중정권의 집권 5년은 끊임없는 정쟁의 연속이었다. 과거의 정쟁은 권위주의세력과 민주화세력의 갈등이었다면, 김대중정권기의 정쟁은 민주화세력 내부의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갈등의 형태는 주로 상대방의 비리와 부정을 폭로하는 것이고, 갈등의 무대는 주로 국회였다.

 

1998년은 경제위기 극복이 긴급한 과제여서 큰 정쟁이 없었으나, 1999년부터 정쟁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여당은 주로 전 정권의 비리를 폭로하는데 주력하고, 야당은 현 정권의 비리를 폭로하고 공격하는 데 힘을 쏟았다. 전 정권의 비리로 떠오른 것은 한나라당이 대선 때 국세청을 통해서 선거자금을 모았다는 이른바 '세풍사건'(1999)이었으며, 여당이 공격을 받은 것은 '언론장악' 문제와 대통령 측근의 비리였다. 여야의 정쟁에 실망한 국민들은 점점 정치불신에 빠지고 말았다. 또 카드남발로 국민 대부분이 엄청난 빚쟁이가 되었고 북한에 퍼주고 얻은 것은 서해해전으로 안타까운 장병들의 죽음이었고 북의 핵무기 개발을 도운 것 이외에는 지척된 것이 없는 역사의 교훈을 남기고 있다. 

 

2000년 4월 13일 실시된 제16대 총선거는 57.2%라는 저조한 투표율을 보였으며, 선거 결과 야당인 한나라당이 제1당(133석)으로 올라서고,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이 제2당(115석), 여당과 공조관계를 맺었던 '자민련'은 17석을 얻는데 그쳤다. 한나라당이 다수당이 된 것은 여당에 대한 불신보다도 호남지역과 마찬가지로 영남지역이 한나라당에 몰표를 몰아준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민주당은 영남에서 단 1석도 얻지 못하여 영남과 호남의 지역갈등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자민련의 쇠퇴는 충청도가 민주당으로 선화한 데 이유가 있었다.

 

이번 선거의 또 다른 특징은 이른바 거물정치인들이 대부분 낙선하고, '386세대'(30대, 80학번, 60년대 출생)로 불리는 젊은 신인들이 13명이나 당선된 것이었다. 소비자보호를 목적으로 조직된 'NGO'로 불리는 '비정부시민단체'들이 차츰 정치단체로 변신하여 낙선운동 등 선거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도 국회의원의 세대교체를 가져오는데 한 몫을 했다.

 

국회의 소수당으로 전락한 여당은 의원 몇 명을 자민련으로 당적으로 옮겨 교섭단체를 만들어 줌으로써 자민련과의 공조를 회복했는데, '의원 퍼주기'라는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야당의 약진이 보수언론에 책임이 있다고 보고, 2001년 2월 언론개혁을 명분으로 보수언론사들의 세금포탈을 조사하여 5천억 원 이상의 세금을 추징하고, 조선, 동아, 국민일보의 대주주를 구속했다. 언론사들은 이를 언론탄압으로 간주하고 격렬하게 반발했다. 이는 보수던 진보 정권이던 한국정치의 후진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당을 비판하며 장기간 재야투쟁을 전개하면서 국민들의 신망을 받아오던 지도자도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에 족쇄를 채우고 싶어하는 성향이 강하다는 점을 사실로 보여주고 있다.

 

또 여당과 김대중정부를 더욱 곤경에 빠뜨린 것은 여당의 실세와 대통령의 친인척이 잇따라 비리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대통령 둘째 아들(김홍업)이 2002년 6월 비리로 구속되는 사태가 일어나 김영삼정부의 말기와 비슷한 사태가 벌어졌다. 대통령 주변을 정리하고 감시하지 못한 것이 언제나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몰랐을리 없을 것인데 그것을 방치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민주당의 인기가 추락하자 소장파 의원들은 일찍부터 당풍쇄신운동을 벌이며 2001년 1월 이른바 동교동계 실세로 여러 이권에 개입한 것으로 알려진 권노갑의원을 일선에서 후퇴시키고, 11월에는 대통령이 민주당총재직을 사퇴했으며, 2002년 5월에는 민주당을 탈당했다.

 

2002년 12월 19일은 김대중정권의 임기가 끝나면서 제16대 대통령을 선거하는 날로서 여당과 야당은 모두 경선을 통해 후보를 선출하는 방법을 택했다. 먼저 여당인 민주당은 봄부터 경선을 시작한 결과 4월 27일에 5공청문회를 통해 급속하게 인기를 얻게 된 부산 출신 노무현 의원이 최종후보로 선출되었고, 전주 출신의 정동영 의원이 2위를 차지했다. 야당인 한나라당에서도 경선을 벌여 당총재인 이회창이 후보가 선출되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김대중정권에 식상한 국민들의 성향을 보여준 것으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우세한 것으로 나타나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보인가운데 선거가 치러졌다. 그러나 결과는 의외로 57세의 노무현 후보가 48.9%의 지지를 얻어 46.6%의 지지를 얻은 68세의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투표율은 역사상 가장 낮은 70.8%를 기록했다. 노무현 후보가 승리한 것은 '노사모'를 비롯한 젊은 NGO들의 지지를 얻은 것과 노무현과 공조를 약속했던 정몽준 "국민통합 21' 대표가 투표 전날 갑자기 공조를 철회한 데 대한 젊은층 유권자들의 반발이 작용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선거운동에 있어서도 한나라당이 구세대인 아날로그방식을 썼다면 민주당은 신세대인 디지털방식을 쓴 것도 여당이 승리한 요인이었다.

 

김대중정권의 비리와 부패로 대통령이 당직을 사퇴하고 탈당한다고 허물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정치 현실이 아직은 후진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누구나 권력을 잡게되면 대통령 본인은 몰라도 주변 권력 실세들이 갖가지 부정을 저지르며 자신들의 이권을 챙기는 데 급급한 정치수준이라는 점이다. 정권이 바뀔때마다 대통령 친인척에 줄을 대고 자신의 이권을 챙기는 정치인, 기업가를 포함하여 심지어 지방 조폭까지 서울로 진출하여 권력의 비호하에 서울 조폭세력을 장악하고 이권을 챙기거나 해당 지방 기업가가 서울로 진출하여 하루 아침에 거대기업으로 성장하고 폭력을 미화하는 영화가 줄줄이 개봉되었으며 대통령을 미화하고 영웅화하려는 사람들도 많이 나타나곤 했다.

 

여야가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전 정권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사업을 펼치고 자신을 포함한 무리들의 권력의 비호하에 재물에 탐닉하며 비리와 부패를 막지 못하는 것이 우리 정치현실이다. 역사는 당대에는 절대로 바르게 평가받지 못한다. 세월이 지나 후세의 사가들이 바르게 평가할 것이다. 우리나라가 진정으로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러한 잘못된 정치풍토를 쇄신하는 정치선진화를 이루지 못하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암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