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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여름 2 : 대진제국의 변법개혁, 성장, 중원통일과 멸망까지 1

 

 

강남의 여름 2 : 대진제국의 변법개혁, 성장, 중원통일과  멸망까지 1

 

 

                                                                                                        새벽 아침태양, 세화여고 뒷 길

 

지난주 수요일은 하루 종일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가 내렸다. 어떤 곳은 우박이 내려 과실수와 채소, 가지가 뿌러지는 등 피해도 속출했고 고양에서는 강력한 회돌이 바람이 불어 일대 비닐하우스와 지붕을 초토화시켰다. 지구의 기상이 점차 이상기온으로 인해 기상청도 잘 감지 못하는 기상상태를 속출하고 있다. 화요일부터 내린 비로 인해 새벽 자전거 타기는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각종 역사드라마 다시보기로 새벽을 보내곤 하였다.

 

물론 매년 6월경에는 비가 많이 내려야 한다. 그래야 모내기도 하고 농작물에 적절한 강우량을 주어 초여름 성장을 돕고 잘 자라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늘이 노했는지 땅이 노했는지는 몰라도 이 땅에 이런 불규칙한 기상이변이 속출한다는 자체가 지구의 기상이변이 온실가스로 인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남북극 빙하가 빠르게 녹고 있고 해수면이 점차 높아질 것이라는 과학자들의 경고가 계속 나오고 있고 전 세계는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선진국부터 앞장서서 노력하고 있다. 탄산가스 배출 산업이 점차 줄어들고 친환경적인 산업이 계속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가정 저렴하고 경제적인 탄산가스 배출 관련 에너지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한 탄산가스 배출은 지속될 전망이다.

 

이러한 기상이변은  옛날로 치면 나랏님의 부덕이요 집권층의 탐욕에 하늘이 노했다고 제사를 올리고 잘못을 빌었다. 궁궐내에 초막을 짖고 음식을 줄이고 검소한 생활로 백성들의 고통을 분담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집권층이 그러한 노력을 게을리 하고 가난한 서민의 고통을 분담하려는 노력은 잘 보이지 않는다.

 

 

 

 

 

세월호는 아직도 바다속에 잠긴채 거센 물살에 선체가 허물어져 가고 있고 남은 실종자는 찿을 길이 막연하다. 죽은 잠수사들은 누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게 된 것일까? 모두가 우리 사회의 부패와 부조리에 의해 목숨을 잃은 청소년과 일반인, 관련자들이라 안타깝다. 교통사고, 자살자, 질병사를 합치면 하루에도 수백 명이 이 세상을 하직하고 떠나고 있다. 어쩌면 인간의 목숨은 파리목숨인지도 모른다.

정도전이 민본을 외치면서 조선을 개국하는 데 일조하였지만 이방원에게 무참하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가 주창한 민본은 이상은 좋았으나 실제 조선은 오백년 내내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는 양반사대부들만을 위한 나라로 변질되고 말았다. 무능한 왕에 대비하여 유능한 신하들이 왕을 교도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신권주의는 왕을 무시하고 중국에 사대하며 조선을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폄하하면서도 백성들을 수탈하며 자신들은 호의호식하며 권력을 잡기 위해 학벌, 지연으로 파벌을 나누어 당파싸움으로 일관하고 말았다. 나중에는 외척들이 준동하여 허수아비 왕을 세우고 세도정치로 일개 가문이 조정의 권력을 독식하면서 비리와 부패가 만연하게 되어 나라는 병들대로 병들고 말았다. 흥선이 개혁을 위해 불끈했으나 거센 사대부들의 반발에 허물어져 버리고 말았고 결국에는 고종대에 왕족끼리 권력싸움에 외세를 서로 끌여들이더니 나중에는 갑오개혁도 허사로 돌아가고 을사오적에 의해 나라를 송두리채 일제에 헌납하고 말았다.

무능한 검찰은 사이비종교 교주와 신도들에 의해 농락당하고 있으며 국가 공권력은 권위가 실추되고 있다. 청와대가 새로운 개혁총리 후보에 문창극 언론인을 지명한 모양이다. 여러 명의 장관과 청와대 수석들도 교체되었다. 그런데 새로 지명된 문창극 총리 후보에 대해서 말이 많다. 문 지명자는 극우언론인으로 그동안  여러 글과 말로 인해 야당에서는 그 사람의 편향된 이념을 문제삼아 잘못된 선택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는 함석헌의 역사의식과 같은 사고로 교회에서 강연한 내용을 두고 야당과 언론이 앞 뒤를 짜르고 일정 부분 내용을 빌미로 친일파, 극우파 등으로 매도하고 있다. 이젠 고위공직자가 되려면 과거 블로그, SNS, 강연, 설교, 논문, 기고, 책, 기타 사석에서 조차 함부로 극단적인 말을 조심해야 할 판이다. 극단적인 말을 내뱉는 순간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인사청문회 대상 고급 직위선발에 발목을 잡는 세상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번 총리 지명자는 청와대에서 고심끝에 골랐는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편향적인 이념에 문제가 있는 듯하다. 바람직한 후보는 진보와 보수에 지우치지도 않고 청빈하며 검소하고 탐욕이 없으며 강력한 지도력과 합리적인 사고, 법치를 우선으로 하는 편향되지 않은 인사가 필요한데 이번에도 청와대는 잘 못 고른 듯하고 야당의 반발로 인사청문회도 쉽게 넘어 갈 것 같지 않다. 극우성향의 이념 문제로 야당이 가만 있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자신이 골라 쓰고 싶은 사람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대통령이 총리, 장.차관 등에 자신이 고른 사람을 기용하려면 청와대에서 일방적으로 고르는 게 아니라 별도의 인사검증위원회를 두어 인재은행을 만들어 가용한 인적 자원을 선발하여 사전에 철저한 검증으로 스크린하고 비축해두는 방법이 필요할 것이다.  현재 각급 국가 공공기관 전체에 내려간 낙하산 인사도 전부 퇴출시키고 각 직급별로 이러한 인사검증위원회를 거쳐 선발한 복수 인재 중 대통령이 낙점하는 방법이 필요 할 것이다.  인사검증위원회에는 시민단체, 재야인사, 각분야 전문가, 지식인, 미래학자 등 다양한 인사를 사회 각계층에서 선발하여 편성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러한 인사검증위원회는 정권이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도록 법제화하여 상설기구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아마 야당의 집중적인 총리 후보자에 대한 이념논쟁으로 청문회가 무사히 치러질지도 의문이다. 교회 장로이며  말을 잘하는 것과 글을 잘 쓴다는 것이 자격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며 한쪽으로  사고가 편향되었다는 것은 다양한 계층을 아우를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개혁에는 피를 부른다. 개혁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강력하게 시행하지 않으면 실패하기 쉽다. 왜냐하면 기득권층의 반발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세기 때문이다.  개혁은 대통령이 그를 믿고 전권을 행사하도록 해주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개혁을 하다보면 피해를 받는 당사자들은 억울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잘나가다가 하루 아침에 낙마하여 쫒겨나는 사람도 있게 된다. 자신과 무리들이 그동안 불법이던 준법이던 쌓아올린 권익을 침해당하고  엄청난 재산상  손해도 볼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나라가 바로서고 국정이 반듯해져 대형사고가 줄고 국민들의 권익이 보장되며 삶이 평등해지고 억울한 사람이 적어지고 공정하고 안전하며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면 그리고 부국강병을 이룩할 수 있다면 그러한 기득권층의 피해는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코 기득권층은 반드시 자신이 잃은 권익을 되찿기 위해 다시 결집할 것이며 은밀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개혁가에 대한 음해와 모략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국가는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성장하는 것입니다."  -진나라 효공 시대 개혁가 상앙-

 

개혁을 성공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중국 춘추전국시대 진나라다. 당시 진나라는 서부에 위치하여 가난하고 쓸모없는 산악지대와 적은 인구, 허약한 국력 등으로 인해 주변 전국 7웅 중 가장 약소국에 불과했던 진나라가 수백 년 후 주변국을 모두 제압하고 중원통일을 기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진효공 때 상앙에 의해 개혁을 제대로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진나라 제25대 효공(영거량)은 개혁을 시도하기 위해 유능한 인재를 모집하였는데 그 중에 법가사상가인 상앙을 개혁가로 받아들여 20년간 지속적인 변법을 강력하게 시행하여 새로운 신군을 양성하여 위나라와 전투에서 승리하고 옛 영토를 되찿는 등 부국강병을 이루게 된다.

 

효공이 죽자 효공의 아들 제26대 혜문왕은 그동안 대부분의 기득권을 잃고 절치부심하며 숨죽이고 있던 조정 대신들이 상앙을 모함하기 시작하자 심적으로 동요하기 시작한다. 또 혜문왕 자신이 어린 시절 백성을 죽이는 등 법의 어겨 태자에서 쫒겨나 오랜시간 전국을 떠돌게 되었고 그의 스승이던 효공의 친형인 영사, 그리고 스승까지 코를 베이고 낙형을 받는 등 징벌을 당하였던 사실로 인해 상앙에 대한 복수심이 남아 있던 중 대신들이 법을 어긴 상앙을 몰아세우면서 처벌을 강요하자 그는 결국 상앙을 처벌하기로 하고 나라를 위하여 희생이 필요하다면서 상앙을 압박하자 상앙은 스스로 죽음을 자처하여 능지처참형에 처하게 된다.

 

상앙을 죽이고 난 혜문왕은 부왕의 유언과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변법의 실효성을 실감한 터라 상앙이 만든 변법을 그대로 지속적으로 시행하여 부국강병을 지속시킨다. 소진의 합종책을 무력화 시키고 장의를 등용하여 연횡책을 구사하면서 초나라를 토벌하고 한중군을 설치하는 등 차례로 주변국을 토벌해 나간다.

 

혜문왕의 아들인 제27대 무왕대를 거쳐 혜문왕의 서자인 제28대 소양왕이 왕위을 계승하자 장군 백기를 등용하여 주변국을 토벌하면서 조나라와 장평전투를 벌여 40만 대군을 포로로 잡아 생매장시키는 엄청난 승리를 쟁취하게 된다. 이때가 상앙이 변법을 시행한지 꼭 100년이 되는 해였다.

 

장평전투 이후 진나라는 차례로 주변국을 소멸시켜가면서 중원통일의 길을 가는데, 소양왕의 아들 제29대 효문왕을 거쳐 제30대 장양왕 때는 여불위가 승상이 되었고 장양왕의 아들 제31대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게 된다.

 

이처럼 진나라는 춘추전국시대 여러 주변국들과 투쟁을 치루면서도 착실한 국력을 쌓게 되고 합종연횡책, 원교근공책을 구사하면서 31대 진 시황제대에 이르러 중국 역사 최초로 중원을 통일하며 황제로 칭하게 된다. 중국인들은 진 시황제를 중원을 통일한 황제로 중국의 영토와 역사적 근간을 이룬 인물로 16년이란 짧은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불가사의한 치적과 불행한 학정과 폭정 등 공과에도 불구하고 가장 위대한 군주로 생각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치적 뒤에는 여불위, 이사, 진승, 조고,부소 등 수많은 우수한 신하와 장군 몽염, 장한을 포함한 유능한 장수들의 충성심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 시황제 사후, 무차별적인 폭정으로 인해 그동안 숨죽이고 고통받던 백성들과 제후국들이 반기를 들면서 진승.오광의 난이 발생하고 환관들의 발호로 권력쟁탈전이 가속화되자  나라가 혼란에 빠지면서 결국 3대 자영대에 이르러 유방과 항우에 의해 진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이처럼 개혁을 성공하여 지속적으로 시행한 결과 장평전투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쟁취하기까지 100여 년이나 걸렸다. 그러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멸망은 빠른 시간내에 초래하고 말았다. 그래서 개혁은 시도도 어렵지만 지속도 어렵고 그 효과는 50~100여 년이 지나야 나타나는 법이다. 물론 지금의 상황과는 다르지만 그만큼 개혁은 어렵다는 이야기다.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가 나라를 망해먹은 결정적인 원인은 분서갱유와 만리장성 축조 등으로 백성들에게 너무나 가혹한 변법을 시행하였기 때문이다. 개혁은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 유연하게 대처하며 법치가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지속되어야 하며 지속적인 새로운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나라가 흥하다 망하는 것은 대부분 법치가 무너지는 순간부터 시작되고 지도자와 지도층, 그리고 가진자들의 부패가 만연하면 나라는 저절로 망하는 법이다. 

 

 

 

 

 

 

변법(變法)

이 말은 『상군서(商君書)』 「경법(更法)」에서 처음으로 나온다. 선진(先秦) 시대에서 이에 대한 주장은 주로 법가(法家)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특히 공손앙(公孫 )은 변법사상을 최초로 제기하고 그것을 실천한 사람으로 기록된다. 그는 위의 「경법」에서 \"지혜로운 자는 법을 만들고 우매한 자는 그것에 제약된다\"라고 하면서 국가 부강을 위한 변법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의 주장의 요지는 옛 제도의 혁신, 곧 변고(變古)에 있었으며, 그러한 주장은 당시의 보수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秦)의 효공(孝公)에 의해 받아들여져 그대로 시행되었다. 그 결과 진나라는 부국 강병을 실현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진나라에 의 한 중국 통일의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공손앙의 사상은 한비자(韓非子)에게 큰 영향을 주어 그로 하여금 그 사상을 계승하게 하였다. 그러나 한비자는 기본적으로 변법을 주장하면서도 그것이 자주 시행되어서는 안된다는 태도를 표명하였다. 공손앙 이후 변법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실천하려 한 유일한 사람은 왕안석(王安石)이었다. 그는 법가적 기초 위에서가 아니라, 문왕(文王)과 공자(孔子)를 존숭하는 유가적 기초 위에서 변법을 주장하고 실천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당시 보수파의 반발에 부딪쳐 관철되지 못하였다. 또한 청말(淸末)의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强運動)은 일면 전통적 변법사상과 연계를 가지면서도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요구를 반영하는 혁신적 내용을 가미하여 전개된 운동으로 평가된다.

 

개혁(改革)은 급진적이거나 본질적인 변화가 아닌, 사회의 특정한 면의 점층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고 고쳐나가는 과정 사회 운동의 하나이다. 개혁 운동은 혁명과 같은 더 급진적인 사회 운동과는 구별한다.

 

다음회부터는 진나라의 성장과 멸망까지를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