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1,080 : 해방과 건국 40 (김대중 '국민의 정부' 3)

 

 

 

한국의 역사 1,080 : 해방과 건국 40 (김대중 '국민의 정부' 3)

 

 

                                                                    

 

 

 

 

 

 

 

 

 

 

 

 

 

 

 

 

 

 

 

 

 

 

 

 

 

김대중 국민의 정부(1998.2~2003.2) 3

 

 

3. 대북 포용정책과 남북정상의 만남

 

   1) 남북긴장완화의 진전

  

국민의 정부가 이전 정부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대북정책이었다. 새 정부는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에 바탕을 둔 적극적인 포용정책을 추구했는데, 항간에서는 이를 햇빛정책으로 부르기도 한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이 세상을 떠난 지 4년이 되는 1998년에 헌법을 일부 바꾸어 주석제를 폐지했다. 김정일은 국방위원장 자격으로 통치하면서 이른바 '선군정치'를 표방하여 당보다 군대를 최상위에 두어 권력을 안정시키는 정책을 추구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취임을 앞두고 1998년 8월 31일 '광명성 1호'라 불리는 인공위성을 발사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는데, 미국과 일본은 자신들을 겨냥한 미사일이라고 주장하면서 반발했다.

 

그러나 북한은 200년 10월 미국에 특사를 파견하여 장거리미사일 개발의 포기를 선언하고, 그 대신 경제지원과 체제보장의 약속을 받아냈으며, 클린턴 대통령(재임 1993~2001)은 북한을 방문하기 위해 10월 23일 울브라이트 국무장관을 북한에 보내기도 했다. 김대중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을 미국 정부도 수용한 것이다.

 

북한은 처음에 햇빛정책을 북한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한 술책이라고 비난하고 대화에 응하지 않았으나 민간교류만 허용했다. 그런데 1998년 6월 16일에 정주영(1915~2001) 현대명예회장이 500마리의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거쳐 북한을 방문하고, 이어 10월 27일에도 501마리의 소와 승용차 20대를 몰고 재차 방북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 결과 현대는 숙원사업이던 금강산관광사업을 성사시켜 1998년 11월 18일 드디어 1,418명의 관광객을 태운 금강호가 분단 후 처음으로 동해항에서 출발하여 북한의 장전항을 향해 떠났다. 관광객 1인당 300달러를 북한에 지불했다.

 

이렇게 민간교류의; 물꼬가 터지면서 친지방문이나 사업차 또는 고적답사를 위한 민간인 북한 방문도 늘어났다.1998년 한 해에 북한을 다녀온 인사는 3,317명에 이르러, 그 이전 9년간 북한을 다녀온 2,408명을 넘어섰다. 북한은 방문객들로부터 큰 액수의 대가를 받아낸 실리를 취했다.

 

그런데 남북관계를 악화시키는 사건이 1999년 6월 7일 연평도 근해에서 일어났다. 꽃게잡이 어선을 보호하던 북한 해군경비정이 북방한계선을 넘어오자 한국 해군경비정이 이를 제지하는 가운데 서로 충돌이 일어났는데, 6월 11일과 15일에도 교전이 일어나 북한 경비정이 침몰.파손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더 이상 확대되지는 않았다.

 

2000년에 이르러 남북관계는 극적인 전환을 맞이해게 된다. 이해 6월 13~15일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려 5개항의 '6.15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을 전후하여 민간교류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99년 12월 초 북한이 클린턴 대통령의 동생 로저 클린턴을 초청하여 공연을 가질 때 한국 연예인(대중가수)를 함께 초청하여 공연을 하고 돌아왔으며, 12월 21일에는 MBC가 통일음악회에 참석하고, 12월 23일에는 북한 남녀 농구팀이 서울에 와서 현대팀과 경기를 했다. 200년 5월 26일에는 평양 학생소년예술단이 서울의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을 가졌고, 6월 3일에는 평양교예단이 잠실체육관에서 공연했다. 8월 18일에는 조선국립교향악단이 와서 한국의 성악가 조수미 등과 함께 공연을 가졌다.

 

남북정상이 만난 뒤에는 합의사항의 이행을 위한 장관급회담이 2000년 7월부터 12월까지 서울, 평양, 제주도를 오가며 네 차례나 열렸다. 그 결과 경의선철도 복원에 합의하여 2002년 9월 18일 기공식을 가졌고, 2006년 3울에 준공되었으며, 2007년 12월부터 문산(도라산)과 개성을 오가는 화물열차가 개통되어 개성공단에서 필요한 화물을 실어날랐다.

 

그러나 이명박정부가 들어서 남북관계가 악화되자 북한은 2008년 11월 28일부터 화물열차 통행을 중단시켰다.

 

남북이산가족의 재상봉도 2000년 8월 15일, 12월 2일, 2001년 2월 26일, 2002년 4월 28일, 9월 16일 등 6차례에 걸쳐 실현되었으며 매회 남북에서 각각 100명의 이산가족이 서울과 평양을 방문하여 눈물의 재회를 가졌다. 그러나 1천만 이산가족의 한을 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만남이었다.

 

남북화해 움직임은 2000년 9월 15일부터 시작된 시드니 올림픽의 개회식에 남북한 선수단이 똑같은 제복을 입고 함께 입장하여 세계인의 환영을 받았다. 남북화해가 진행되는 가운데 이해 12월 10일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노력, 남북긴장 완화에 대한 공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입었다. 한국인이 노벨상을 받은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남북정상만남, 노벨평화상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비밀리에 막대한 자금을 들였다는 의혹과 비판이 제기되었으나 사실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한마디로 막대한 돈을 북한에 퍼주어 김정일을 만났고 노벨평화상을 받았다는 구설수에 휘말린 점이 안타깝다.   

 

 

 

  2) 부시정권, 고이즈 출범과 남북관계 변화

  

2001년에 들어서자 남북관계는 점차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월 20일에 미국 공화당의 조지 부시(재임 2001~2009)가 43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대외겅경책으로 선회하여 2월 초에 영국과 더불어 이라크의 바그다드 외곡을 공습하고, 북한에 대해서도 '악의 축'이라 부르면서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새해 벽두부터  '신사고'를 강조해 개혁과 개방의 실용주의로 나갈 뜻을 비쳤고, 이어 중국 상해를 방문하여 천지개벽했다고 감탄하고 돌아온 김정일 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에 대한 답방으로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강경정책변화로 북한의 태도도 다시 경직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강경책에 대한 반발은 중동에서도 일어났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위싱턴 D>C의 국방부 건물이 비행기 테러로 붕괴되고, 수백 명이 숨지는 끔직한 사건이 터졌는데, 그 배후에 반미적인 이슬람근본주의자 빈 라덴이 있다고 알려졌다. 미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해 10월 아프카니스탄을 공격하여 12월 초에 이슬람근본주의자 무장단체인 탈레반의 항복을 받아내고, 이어 2003년 3월 20일에는 이라크전쟁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미국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장거리미사일 개발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이를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압박수위를 높여갔다. 그런데 이해 4월 26일에 일본에서도 보수파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이 출범하여 태평양전쟁 전범자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고 왜곡된 역사교과서의 수정을 거부하는 등 한국을 자극하는 정책을 취하여 한국은 4월 10일 주일대사를 소환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일본은 북한에 대해서도 일본인 납치사건을 문제삼는 등 강경책을 쓰기 시작하고, 11월 25일에는 일본 자위대 군함을 중동 해안에 파견하여 미국 정책에 적극 동참하고 나섰다.

 

이렇게 국제정세가 경직되어가자 남북관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해 8월 15일 평양에서 열린 '민족통일축전'에 참가한 모 인사가 국가보안법을 어기는 행동을 하고 돌아와 구속되고, 9.11테러 이후 한국 정부가 테러에 대비해 군사적인 비상경계조치를 취하자 북한은 이를 문제삼아 당국자간 남북회담을 중단시켰다.

 

그러나 2002년 5월 31일부터 역사적인 '월드컵 축구대회'가 열리고, 9월 29일부터 '부산아시안게임'이 열리는 등 큰 행사를 치르게 된 한국은 '6.15남북공동선언'을 지키려고 노력했으며, 북한도 민족공조를 내세워 미국과 일본의 압박에 대응하는 전략을 썼다. 그런데 6월 29일 한국과 터키의 월드컵 3.4위전을 치르던 날 뜻밖에 연평도 근해에서 다시 남북 경비정이 충돌하여 아군 4명이 사망하고 16명이 부상당하고, 경비정 한 척이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북한 정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북한 해군이 이전에 당한 패배에 대한 보복을 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북한 정부의 사과로 일단락되엇다. 그러나 전사자에 대한 보상을 정부가 소홀히 하는 바람에 이에 분개한 유족이 이민을 갔다 다시 돌아오는 등 유족들의 반발을 샀다. 이처럼 우리나라 보훈정책은 아직까지도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북한이 부산 아시안게임 참가할 뜻을 비치자, 정부는 이에 앞서 9월 7일 북한 축구팀을 초청하여 상암경기장에서 한국월드컵 대표팀과 '통일축구' 경기를 가졌으며 , 9월 27일에는 대중가수 이미자가 평양 동평극장에서 '동백아가씨'를 공연하여 갈채를 받았으며, 10월 3일에는 북한 태권도 시범단이 서울에 와서 시범을 보이고 돌아갔다.

 

9월 29일에 개박된 아시안게임에서는 북한 선수단이 참가하여 9위의 성적을 거두고 돌아갔다. 특히 이 경기에 북한 여성연예인으로 구성된 응원단이 함께 와서 눈길을 끌었다. 이어 10월 26일에는 북한 경제시찰단 15명이 내한하여 한국의 산업시설을 견학하고 돌아갔다.

 

이렇게 남북 간의 문화, 예술, 스포츠, 경제 등 비정치적 분야는 교류가 원만하게 진행되었으나, 핵문제만은 한국정부도 미국의 정책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정부가 납북자문제를 들고 나오자, 8차에 걸쳐 진행되어오던 장관급 회담도 10월 19일 평양회담을 끝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북한은 2003년 1월 10일 핵학산금지조약의 탈퇴를 선언하여 국제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미국 부시정부는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하지 않는 한 남북 간의 경제교류도 달갑지 않게 보았다. 여기에 한국은 미국과 공조냐 아니면 민족 간의 공조냐를 놓고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