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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47 : 해방과 건국 7 (모스코바 삼상회의와 민중의 항쟁 3)

 

 

 

 

한국의 역사 1,047 : 해방과 건국 7 (모스코바 삼상회의와 민중의 항쟁 3)

 

 

 

              

 

 

 

 

모스코바 삼상회의와 민중의 항쟁 3 

 

 

 

아래는 루즈벨트 미대통령과 미행정부의 대한반도 정책에 대한 참고자료이다.

 

 

 

루즈벨트 행정부의 신탁통치 구상과 對韓政策

  
                         목       차

  I. 서론                                                 

 

 II. 신탁통치의 기원과 역사적 배경              

 

III. 루즈벨트 행정부의 신탁통치 구상과 입장  

 

IV. 신탁통치에 대한 열강들의 입장           

  1. 중국의 입장

  2. 영국의 입장

  3. 소련의 입장

  4. 한국의 상해 임정 승인노력과 반발입장                               

 

 V. 루즈벨트 행정부의 불승인정책과 대한인식 
 
  VI. 결론 
  
 

I.  서  론

  돌이켜 보건대, 해방 이후 한국현대사의 비극은 미·소 양국이 日帝를 무장해제시키는 군사점령을 강행하면서 가져다준 한반도 분단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분단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연합국, 특히 미국 루즈벨트 행정부의 전시정책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이라는데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이 전시정책은 미국 루즈벨트 행정부가 구상한 전후 세계질서의 구상과 연관된 신탁통치안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 그러므로 분단의 의미를 올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신탁통치에 관한 연구가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한다. 그동안 냉전시대에 국내외 학계, 특히 정치학계와 한국현대사 전공자들(조순승,  이호재, 심지연, 최상룡, 이우진, 이완범, 이동현, 이재도, 차상철, 매트레이 James I. Matray, 커밍스 Bruce Cumings) 사이에서 신탁통치 구상이 관련된 한국분단에 관한 책임에 대한 많은 논의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특히 90년대초 소련연방의 해체가 가져온 脫冷戰시대로 인해 공산권의 풍부한 사료가 공개되고 구공산권에 대한 여행의 자유가 확대되면서 역사가들의 지평선이 넓어져서 새로운 역사인식의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제 기존의 연구경향을 비판적으로 종합, 재검토하여 보다 광범한 시야와 풍부한 사료를 통해 해방전후사를 재평가 하기위한 부단한 노력이 요구되고 있다.

 
  본고의 목적은 첫째로, 루즈벨트 행정부가 신탁통치를 전후정책의 일환으로 정책 결정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규명하고, 둘째로, 다른 열강들(중국, 영국, 소련)이 미국의 신탁통치안에 대한 입장과 반응을 종합하여 정리해 보았다. 셋째로, 왜 굳이 미국이 한국에 신탁통치를 강행하려고 했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를 미국의 부정적인 대한인식의 측면과 미국의 전시, 전후정책의 측면이라는 2가지 차원에서 고찰해 보았다. 미리 밝혀두고 싶은 점은 이 글의 목적이 전쟁 후반기에 신탁통치의 원래 의도가 전쟁 종반기의 급박한 상황을 맞이하여 어떻게 굴절, 변질되어갔는가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신탁통치의 원래 구상과 그 기원을 추적하는데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논의의 범위를 전쟁초기에서 1943년 11월 카이로선언까지로 국한하였다. 왜냐하면 한국문제는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카이로선언 이후에는 크게 진전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II. 신탁통치의 기원과 역사적 배경

  국제사회에서 신탁통치 구상을 처음으로 제창한 인물은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였다. 루즈벨트가 정치적인 성장을 거듭하면서 그에게 정치적으로 가장 크게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 두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와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을 꼽을 수 있다. 어린 시절에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정치적 업적을 보고 배우면서 미국 제국주의가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게 했다. 정치의 초년생시절 루즈벨트는 필리핀, 중남미, 멕시코, 푸에토리코에서 제국주의 정책을 식민지의 개화와 진보를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미국의 제국주의 노선을 열렬히 지지했다. 훗날 윌슨이 추구한 숭고한 도덕적 이상주의 노선도 역시 루즈벨트에게 많은 정치적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윌슨이 1919년 파리 강화 회담에서 국제연맹을 창설하였지만 미상원이 국제연맹에 대한 미국의 참여를 거부함으로써 고립주의의 강한 여론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정치적 교훈을 루즈벨트에게 안겨주었다. 1920년 루즈벨트는 민주당 부통령후보로 출마하여 국제주의(Internationalism)를 호소하면서 미국의 국제적 책임을 강조했지만 고립주의의 여론에 밀려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1928년 루즈벨트는 뉴욕주지사로 당선되어 정치적 재기에 성공했지만, 미국 고립주의 여론을 무마하면서 국제적 참여를 주창한 윌슨적 이상주의(Wilsonian Idealism)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하는 점에 골몰하게 되었다. 


   루즈벨트의 신탁통치에 대한 구상은 이러한 제1차 세계대전이후 국제연맹이 독일 등 추축국의 식민지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발전한 윌슨시대의 위임통치의 정치적 유산을 이어받은 것이다. 루즈벨트가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지지노선을 버리고 독자적인 反제국주의적 사고를 하게 되는 변화는 1928년 Foreign ffairs지에 기고하면서 부터였다. 그는 그 글에서 중 남미에서 추진된 미국 제국주의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개입의 고리를 끊고, 자치정부의 발판을 만들 것을 주장했다.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중남미에 대한 善隣政策을 추진하면서, 중남미에서 해병대를 철수시켜서 중남미 제국으로부터 상당한 호응을 얻고 고무되었다. 이리하여 30년대 후반기에 오면서, 루즈벨트는 신탁통치 구상을 구체화되었다.


  루즈벨트가 전후 식민지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 신탁통치 정책을 선호한 또 다른 이유는 미국이 필리핀에서 얻은 경험과 자신감 때문이었다. 그는 1942년 11월 15일에 행한 연설에서 "지난 40년간의 필리핀의 역사는 매우 실제적인 측면에서 세계의 다른 작은 국가들과 인민들의 미래를 위한 모형을 제공하고 있다"고 역설하면서, 그는 2가지 유형을 제시했다. "첫째는 교육의 보급과 물질적, 사회적, 경제적 필요의 안정과 충족을 위한 준비기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지방 자치를 시작으로 완전한 국가의 지위에 이르는 다양한 단계들을 통과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독립주권 국가에 도달하는 自治훈련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III, 루즈벨트 행정부의 신탁통치 구상과 입장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루즈벨트 행정부는 전쟁수행의 전략과 전후 신질서의 마련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이 전시, 전후 기획에는 국무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군부와 재계는 물론 민간의 두뇌집단까지도 광범하게 동원되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국제연합 창설, 집단안보, 신탁통치 등 보편적 개념에 기초하여 전후 구상을 추진하며 이 과정에서 국무부 정책 실무자들과 개별 사안을 두고 이견이 노출되었으나, 한국문제에 관한 한 국무부관리들과 대통령 사이에 별다른 이견이 제시되지 않았다.


  신탁통치와 관련된 전후 정책은 국무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한국문제를 전담하는 부서는 국무부의 극동국(Division of Far Eastern Affairs)이었다. 전쟁 초기 국무부 극동국이 한국문제에 관해 취한 첫 조치는 연합국 공동접근 방식이었다. 국무부는 한국문제에 관해 독자적 입장을 취하기 전에 중국과 영국의 태도를 타진하려 했다. 1941년 8월 중경주재 고스(Clarence E. Gauss) 대사에게 중국정부를 상대로 "비밀리에" 상해 임정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다음해 2월에는 런던의 미국 대사관에 상해 임정과 한국 문제에 관한 영국정부의 견해를 타진하진하면서, 미국에서 한국독립 및 임정 승인을 요구하는 청원이 강력히 제기되고 있으나, 현 단계에서 임정 승인은 고려되고 있지 않다는 점, 그러나 한국민의 일제의 압제를 종결짓는데 관심이 있음을 표명하기 위해 어떤 종류의 일반 선언을 공포해야할 필요성을 느낀다는 국무부의 분위기도 전달했다.

 
  그러나 중국과 영국의 반응은 모두 부정적이었다. 중경의 고스 대사는 반년후 1942년 1월 임정문제 보고서에서 그들의 활동이 열성적이지 못하고 지지자들도 200명을 넘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런던의 외무성도 중경주재 영국 대사가 국민당 정부와의 의견을 거친 다음 미국무부에 보낸 2월말의 회신에서 영국정부의 입장을 9가지로 정리하여 전달하였는데 결론은 현단계에서 한국독립은 시의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영국은 종전때까지 이런 동일한 입장을 견지한다. 국무부는 영국의 견해가 미국과 일치한다고 평가하고 중국과 영국이 보여 준 기존의 입장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1942년 2월 20일자 미국 국무부 극동국의 한국문제 전문가 윌리엄 랭돈(William R. Langdon)이 제출한 "한국문제에 관한 주요 메모(memorandum)"는 루즈벨트로 하여금 한국에서의 신탁통치는 필연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했으며 향후 루즈벨트 행정부의 대한반도 정책의 기본 골격을 완성하는데 기여했다. 그는 보고서에서 "한국인의 절대 다수가 文盲 상태이고 가난하며 정치적으로 미숙하고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다. 40년간 일본의 지배시대를 겪으면서 단지 노년층만이 자유가 무엇인지 기억할 뿐이다. 이같은 상황을 고려하여 한국이 근대 국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한국은 강대국에 의해 보호되고 지배를 받으며 근대
국가의 지위를 갖도록 도움을 받아야만 할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미국은 만주에 자리잡고 있는 게릴라 부대와 같이 한국 내부와 연결을 갖고 있는 것으로 증명된 해외 독립 운동 단체에 대해서는 지원을 해야하지만 '명목상의 조직체(shadow organization)'에 대해서는 '성급한' 승인을 피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한다. 랭던은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식의 약속조차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에 해가 될 뿐이며, 나아가서 아시아 민족의 독립을 약속하면 우리의 우방-영국과 같은 식민지 문제를 안고 있는-들을 애태우게 하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랭던은 결론적으로 미행정부가 중국과 소련과의 협의를 거친 뒤에 한국에 관한 명백한 정책을 구상할 것을 건의했다. 이런 견해는 루즈벨트 뿐만 아니라, 국무부 관리들의 한국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었다. 이제 한국은 루즈벨트의 신탁통치 구상이 적용되는 범주에서 속하게 되었다.

 
  한편 국무부는 한국에 대한 일반 선언에 대해 논의해 볼 것을 지시했다. 고스 대사는 1942년 3월 28일자 메모에서 중국이 이 문제를 검토하고 있지 않으며 미국의 군사적 공세가 성공하지 못하는 현상황에서 일반 선언을 중국과 한국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다. 그는 나아가 한국독립에 불리한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즉 한국문제는 인도 등 다른 아시아 식민지문제와 관련하여 처리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중국이 인도의 즉각 독립에 대해 동정적이기 때문에 다른 식민지문제에 대한 어떠한 시사도 없이 한국의 독립만을 공약하는 일반 선언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중국과 영국의 입장을 충분히 전달받은 극동국은 다음과 같은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한국문제는 아시아 식민지문제의 하나로 언급되어야 할 시기가 오거나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이 상당한 구체적 발전을 보일 때까지 한국의 궁극적인 독립에 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국무부는 한국독립 승인과 관련하여 또 다른 관심을 보인 안건은 대일전에서 한국인들을 투입하거나 한국내의 항일운동을 일으킬 가능성 문제였다. 국무부는 이점에 관해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현단계에서 한국인들의 독립 열망에 찬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고, 모든 한국 독립단체들이 단결, 완전한 권위를 갖추어 한국을 대변할 수 있는 위원회를 구성하여 일본의 패배에 공헌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시기가 도래하면 다른 열강들의 태도를 고려하여 좀더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리하여 1942년 가을 국무부의 극동국은 중국, 네델란드, 미국 대표들로 위원회를 구성하여 한국에서의 통일된 정책을 개발한다는 계획안을 내놓았다. 이 위원회는 "한국인들과 협조하여 통일 정부를 수립하고... 잠정적인 신탁통치를 구상하는데 지원, 이에 자문과 기술적 원조를 제공하는 방안"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국무부 관리들은 또한 소련과의 협력 방안을 제시했다.

 
  실제로 미국은 전세가 연합국측에 유리하게 전개될 때까지 한국문제를 미루었다. 전쟁의 반전(反轉)은 유럽에서는 1943년 1월 스탈린그라드 회전에서 소련 적군이 승리한 것이고, 아시아에서는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해군의 승리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전세의 反轉에도 불구하고, 한국문제에 대한 입장표명을 1943년 말 카이로 선언 때까지 미루었다. 이 기간중 정확하게 말해서, 1943년 3월 영국외상 이든(Anthony Eden)의 워싱턴 방문을 계기로, 미국과 영국은 신탁통치의 개념과 적용에 관한 솔직한 의견교환을 나눔으로써, 한국 문제에 관해 한걸음 더(바람직하지 않는 방향으로) 진전을 이루어졌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이 회담에서 루즈벨트는 한국을 미국, 중국, 그리고 1-2개국이 참여하는 국제 신탁통치 아래 둘 것을 제의하고 이든은 이를 마지못해 받아드렸다. 또 같은 시기에 태평양전쟁협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워싱턴을 방문한 송자문 중국 외교부장에게 영·미간의 워싱턴 회담을 설명하고 한국문제를 언급하여 미·영·중 3국이 한국문제에 관해 상호, 협조할 것을 약속받았다.

 
  이든과의 회담이후, 미국이 한국문제를 완전히 방치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두 방면에서 한국문제를 검토하고 미국의 입장을 정리했다. 하나는 비공식 기구인 대외관계협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가 전후 국제질서의 전반적 처리의 일환으로 식민지와 같이 전후 국제적 지위에서 가변성을 띤 지역들의 정치적 장래와 영토의 재배치하는 작업에 한국도 포함시켰다. 한국은 여기에서 신탁통치의 대상이 되었다. 두번째는 1943년 10월 국무부내 정책그룹(policy group)이 제시한 관련국 메모(inter-divisional memorandum)와 비슷한 연구보고서에서 한국문제를 동아시아와 관련시키거나 혹은 독자적으로 검토하였다. 대외관계협의회에서는 국무부관리들 참석하여 여기에서 토의된 내용이 국무부의 공식 외교정책 논의과정에 투입되며, 따라서 협의회의 검토는 공식적 논의 이전에 비공식적 논의의 성격이 강했다.

 
  미국무부의 관련국에서 한국문제를 다룬 3개의 메모는 '한국독립 문제'(Problems of Korean Independence)와 '극동문제에 대한 소련의 태도' (Possible Soviet attitude towards Far Eastern Questions) 그리고 '전후처리에서 중·소 문제'(Sino-Russian Problems in the Post-War Settlement)와 관련된 부분 등이 있다.


  이 중 한국문제만 집중적으로 다룬 첫번째 메모에 의하면, 한국문제의 핵심은 한국의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이 메모는 일제의 한국에 대한 식민통치는 가혹했으며, 일본의 정책으로 한국인들은 자치의 경험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한국의 독립문제는 이외에도 일본·중국·소련간의 십자로에 위치한 한국이 전략적, 경제적, 정치적,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더욱 복잡하다. 즉 한국은 대서양헌장에 의해 독립국이 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나 한 강대국이나 국제기구의 지원이 없으면 국제적 압력이나 음모에 굴복할 것이다. 여기에서 이 메모는 한국의 실질적인 독립은 국제적 신탁통치 아래 과도정부를 거쳐 승인한다는 해결안을 제시한다. 국제연합은 한국의 독립운동단체 중에서 어느 특정한 단체를 승인하지 않으면서 전후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독립 승인의 주체는 미국이 아니라 국제연합이 되는 것이다. 이 메모는 결론적으로 국제적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여러 장점을 거론하며 나열하고 있다.


  두번째와 세번째 메모는 강대국이 한국을 통치할 때 나타날 위험성, 특히 중·소간의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검토한 것이다. 중국과 소련은 한국에 대해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져왔으며, 특히 중국은 한국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통치국이 되는 것이 논리이나, 중국도 전후 복구과업에 집중해야 할 것이며 한국의 통치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 소련의 한국통치는 중국이 반대하고 있으며, 소련이 한국을 담당하면 중국이 전후 문제 처리에서 자신감을 상실할 수 있고, 다른 지역에서 단독 통치를 모색하려 할 것이다. 소련은 그들 방식에 의한 식민지의 해방과 주민들의 정당한 취급을 내세우며 또 극동 시베리
아의 경제력 강화, 부동항 획득, 중국 및 일본을 상대로 하는 전략적 요지를 점령하려는 욕구로 한국에 야망을 가질 수 있다. 만약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여 한국을 점령한다면 이것은 동아시아에서 완전히 새로운 전략적 상황을 조성하여 일본과 중국에 엄청난 충격을 주겠지만, 이 시점에서 한국의 장래에 대해 소련의 견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어떤 시사점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 메모는 소련의 한반도 점령이 동아시아에 상당한 세력권의 변화가 올 가능성이 있지만, 소련의 의도를 알 수 없다고 조심스런 태도를 보였다.


  세 번째 메모에 의하면, 미국은 한국의 통치국에 중국과 소련과 더불어 포함되는데, 한국을 둘러싸고 야기될 중·소간의 문제에서 중재적인 위치를 강요받는다는 점에서 '불행'이라는 것이다. 다만 한국통치에 가급적 여러 국가들을 참여시키면 중국과 소련간의 적대감을 완화시키는 (cushioning the antagonism) 책임을 분담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한반도에 안정되고 우호적인 정부가 수립된다면 양국간의 갈등을 피할 수 있으나, 정치적 무정부 상태가 지속된다면 소련은 한국에 개입하려는 유혹을 받을 것이다. 특히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여 한국에 진주하게 되면 한반도에는 중국군과 소련군이 함께 주둔하는 더욱 복잡한 사태가 야기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메모들은 미국이 개전후 2년동안 한국문제에서 검토한 과정에서 제기된 문제점들, 중국과 영국과 논의를 통해 제기된 문제점들, 그리고 앞으로 한국문제 해결에 중요하다고 간주되는 여러 문제들을 종합한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미국의 "소극적인" 접근방식이다. 한마디로 미국이 단독으로 담당하기 싫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을 신탁통치와 같은 방식으로 처리한다는 전쟁 초기의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한국정책의 변화가 아니라, 기존의 연합국 공동정책이란 정신을 더욱 강화하며 공식화시키려는 시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하여 루즈벨트는 전후 세계평화를 위해 "4대국"(미·영·중·소)들이 경찰국가의 역할을 수행하고 나머지 국가들은 무장이 해제되며, 대부분의 국제문제를 새로 창설되는 국제연합에서 처리하는 방식으로 전후 질서를 구축하기를 희망하였다. 
 

 

IV. 신탁통치에 대한 열강들의 입장

 

1. 중국의 입장

  중국은 전쟁 초기에는 영국처럼 한국의 독립에 부정적인 입장이었으나 점차 1942년 가을부터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원하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미국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중국 정부는 상해 임정과 김구 주석이 1933년 이후부터 중국 장개석정부로부터 본격적으로 원조를 받고 있었으므로 중국에 우호적인 정부의 수립이 한반도에서 불가능하다고는 판단하지 않았다. 장개석 총통은 내심으로는 일본의 패망후에 한국의 "즉각적인 완전한 독립"을 원했지만, 루즈벨트 대통령의 강권에 못이겨 한국에 대한 국제 신탁통치를 수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은 상해 임정에 대한 재정적, 군사적 원조를 강화시켰지만, 종전이 가까이 올 때까지 한국인의 독자적인 전투부대의 결성을 기피하였다.

 
  1942년 4월 중국의 외무장관 송자문(宋子文)은 상해 임정의 승인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국무부 극동국장 스탠리 혼벡(Stanley K. Hornbeck)은 4월 11일자 메모에서 미행정부가 한국의 독립에 관한 공약을 발표하는 것은 심각한 불안감을 표시했다. 그는 한국이 즉각적인 독립 자치 정부를 수립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전후에 어떤 형태든 "자치령(식민지) 지위(dominion status)" 상태로 있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전후 평화 수립을 위한 승전국의 노력이 전쟁 기간에 과도하게 발표한 공약으로 지장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한국 임정에 대한 승인을 현재로는 연기해 줄 것을 충고했다. 루즈벨트와 헐 국무장관은 한국문제에 대해 중국의 자유재량권의 억제를 강조하고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국의 전쟁노력의 진전과 특히 인도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결책이 나올 때까지 사태의 추이를 더 기다려 보자는 입장이었다. 다만 루즈벨트는 국무차관 섬너 웰즈(Sumner Welles)의 권고를 받아들여 비정상적인 한국군(게릴라부대)을 창설하는 계획이 유익한 점을 인정하고, 연합국이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간에 단결을 도모하도록 격려해야 한다고 입장을 정리했다. 중국측은 어쩔 수 없이 미국의 입장을 수락했다. 태평양 전쟁 위원회(Pacific War Council)는 4월 15일 국무부의 이 정책을 공식적으로 인준하게 되었으며, 종전시까지 대체적인 윤곽은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중경의 국민당정부 장제스(蔣介石) 총통은 쉽사리 한국문제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1942년 12월, 그는 자신의 미국인 고문, 오웬 라티모어(Owen Lattimore)를 불러서 "한국을 準獨立國(semi-independence state)으로 만들어 미국과 공동으로 통치하고 이 지역에서 소련을 배제하자"는 안을 제안했다. 루즈벨트는 답신에서 아시아에서 중국의 역할을 강조했지만 장제스의 제안을 거절했다. 루즈벨트는 중국이 이웃 나라를 지배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으며, 또한 동북 아시아에서 소련의 고립은 이 지역에서 불안정을 야기시킬 것으로 판단했다. 라티모어는 장제스 총통에게 소련의 견해가 역시 중요함을 상기시켰다. 중국의 반소적 분위기는 미국이 잘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중국 지도자들에게 중요한 점은 동북 아시아의 전후 처리방안에 대해 소련을 참여시킬려는 미국의 결심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는데 있다.

 
  중국은 상해 임정의 분열로 적극적인 지원을 하지 못했고 여기에 다가 전후 식민지 처리에 대한 대영제국이 식민지 처리에서 보수적이고 미온적 태도를 보여서 중국에 비협조적으로 나와 마찰을 빚었고 동북 아시아에서 기회만 있으면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소련의 도전에 과감히 맞서지 못했다. 그 이유는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마오쩌뚱(毛澤東)이 이끄는 연안의 공산당과 싸우는데 많은 군사력을 투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일전에서 미국이 원하는 만큼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중국의 장제스 총통은 테헤란 회담에서 전후에 미국과 손을 잡고 동북아시아에서 소련을 견제하면서 한반도에 대한 공동의 협력체제를 구축하기를 루즈벨트에게 제안하였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이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 이유는 루즈벨트가 장차 대일전에서 소련의 참전을 기대하고, 전후에도 미소 협력 관계를 강조한 對蘇政策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서 동북아시아시아에서 전후 소련을 견제하려는 장제스 총통의 희망은 수포로 돌아갔다.

 

 

 2. 영국의 입장

  루즈벨트 행정부의 식민통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발은 영국측으로부터 나왔다. 이미 1941년 8월 대서양 헌장을 선언할 때부터, 전후 식민지처리를 둘러싸고 처칠과 루즈벨트와의 신경전은 시작되었다. 루즈벨트는 대서양 헌장 발표이후 간헐적으로 전후 식민지 지역에 신탁통치안을 내비치면서 영국측의 신경을 자극하였다. 1942년 11월 처칠은 "자신이 대영제국의 해체를 주관하기 위해 수상이 된 것은 아니다"고 강변하고 대영제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기존 권익을 고수할 것이라고 명백히 천명하였다. 영국측의 입장은 식민지의 자치능력 여하에 따라서 차등을 두어서 충분한 자치경험과 국제적 지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1943년 3월 영국외상 이든(Anthony Eden)이 전후 문제에 대한 미국의 의향을 타진하기 위해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식민지 문제는 영·미간의 주요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루즈벨트는 3월 27일 이든을 만난 자리에서 식민지 지역주민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보편적 적용성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천명하고 "인도차이나에는 신탁통치가 실시되고, 만주와 대만은 중국에게 되돌려주고, 한국은 중국과 미국  및 그외 한 두개 나라가 참여하는 국제적 신탁통치 아래 둘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거론하였다. 이든은 루즈벨트의 이와 같은 제안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그것은 신탁통치 구상이 미래의 국제연합의 신탁국들의 상이한 이해관계 때문에 실제로 운영되기 어렵고, 더구나 그 구상이 궁극적으로 미래의 독립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영국의 식민지에 미칠 영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전후 식민지 처리 문제는 영·미간에 대립한 주요 갈등현안으로 표출되었다.

 
  신탁통치 문제에서 영국과 미국의 입장이 서로 상충되었던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자국 식민지에 대한 신탁통치는 궁극적으로 독립을 향한 것이므로 자국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국익을 해치는 것이라고 파악했던 반면에, 미국으로서는 전후에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식민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했다. 루즈벨트는 국제연합을 만들어서 국제연합으로 하여금 식민지를 관리, 운영하고 국제연합은 미국의 영향권내에 두는 전후의 국제질서를 구상했다. 즉 미국은 국제연합을 통한 세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영국측의 입장에서는 비록 미국측의 제안이 지나치게 理想主義的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고 판단했어도 공개적으로 미국의 전후 정책을 비판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전쟁수행과 무기대여의 원조를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영국도 대서양 헌장, 미국의 여론 및 루즈벨트 대통령의 理想主義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식민지의 전쟁 이전 상태 복귀라는 원래의 정책을 약간 수정하였다. 즉 宗主國(parent state)이 후견권을 가지고 종속민이 자치능력을 가질 때까지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기구를 지도, 개발한다는 것과 종주국은 자국 및 식민지 대표 그리고 당해지역에 주요 전략적,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진 몇몇 나라 대표로 구성하는 지역위원회(Regional Commission)의 지도를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3, 소련의 입장

  가장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 소련의 신탁통치에 대한 내부정책이다. 1941년 6월 독일군의 소련침공이후 국가존망이 걸린 독일과의 전쟁 때문에 전쟁의 중반기까지 소련은 극동정책을 수립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1943년 후반기 이후부터는 장차 대일전에 참전한 경우에 대비한 군사작전을 수립하였다. 1943년 테헤란에서 스탈린은 한국의 신탁통치에 관해 공약은 할 수 없지만, 카이로에서 합의된 극동관계 공동선언을 승인한다고 말했다. 스탈린은 카이로선언에 전적으로 찬성했고 "한국인은 아직 독립 정부를 영위, 유지할 능력이 없으며 40년간 신탁통치를 받아야한다"는 루즈벨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를 표했다.

 
  테헤란 회담에서 처칠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의 대가에 대한 스탈린의 의향을 알기 위해 극동에서 不凍港 공여안을 제안했으나, 스탈린의 반응은 조심스러웠다. 루즈벨트가 大蓮항의 사용 가능성을 제안하자 스탈린은 중국의 반대를 우려했고 不凍港 획득 가능성이 가장 쉬운 한국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침묵을 지켰다. 스탈린은 주도면밀한 정치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스탈린과 소련 외교관들이 한국문제를 먼저 제기한 적은 없었다. 다만 서방 열강의 대한반도 정책을 우선 묻고 확인할 뿐이었다.


  전시중 한반도가 미국에게는 단순히 이상주의를 실현할 실험대상의 지역이었던 반면에, 소련에 있어서 한반도는 국가안보에 긴요한 지역이었다. 스탈린의 대한반도 정책목표는 유럽의 폴란드 경우처럼 전후 경제기반을 강화하여 소련의 확고부동한 위성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최근 공개된 문서에 의하면, 스탈린은 1944년 가을경에는 한국의 북반부의 부동항을 접수하기 위한 군사작전이 수립되어 한반도에 대한 개입의지를 강화시켜 나갔다.

 
  그러면 왜 열강들은 영국의 반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미국의 신탁통치안을 순순히 승낙했을까? 그 이유는 우선 신탁통치가 목적으로 하는 보편적 대의명분이란 차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즉 신탁통치의 궁극적 목적은 식민지 제도의 해체, 식민지의 해방과 독립이다. 식민지 해방을 통해 민족의 자결권(self-determination)과 식민지 주민의 개인적 인권(human rights)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후 발전된 위임통치라는 구체적인 형식을 띄게 되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탁통치로 한차례 더 발전하는 국제정세의 분위기로서 이를 전적으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강은 이 제도의 보편적 적용에 한국을 포함시킨다는데 어쩔수 없이 합의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미국이 무기대여와 참전을 통해 연합국의 전쟁노력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므로, 열강들은 미국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4, 한국의 상해 임정 승인노력과 반발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상해 임정은 12월 10일 對日宣戰布告를 발표하여 동맹국의 일원으로 對日戰에 參戰할 뜻을 서방세계에 선포하고 그 선포문을 미·영·중·소 4개국에 발송하였다. 동년 11월에는 상해 임정은 歐美外交委員을 워싱턴에 설치하여 이승만을 위원장에 임명하여 대미외교를 담당하도록 했다. 전쟁 초기 미국은 전쟁상태에 돌입했지만, 적어도 일본의 한국에 관한 권익주장에 대해서는 미·일 양국이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므로 이승만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한국독립승인요청 공함도 정부차원의 공식 공함이 아닌 개인적 서신으로 접수되었다. 따라서 답신도 "아무런 확약도 없는 의례적인 것"이었다. 상해 임정에서 발표한 대일선전포고문이나 승인문제는 미국무부 관리들에 의해 철저히 무시당하게 되었다. 이런 미국측의 무시는 종전까지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상해 임정 승인노력은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1942년 1월 2일 이승만은 당시 헐 국무장관의 보좌관이었던 알저 히스(Alger Hiss) 와 극동국 스탠리 혼벡을 만나러 국무부를 방문했다. 이승만은 유럽의 여러 망명정부처럼 상해 임정에게도 승인과 원조를 제공해 주도록 미국측에 요구했다. 히스는 이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이승만이 "실제로 한국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이어서 소련이 시베리아 무역 통상의 돌파구로서 사계절 얼지 않는 한국항구들을 장악하려고 반세기 이상의 세월을 노력해왔다고 지적하고, 미국이 한국 독립에 대해 선수를 쓰지 않으면, 일본 패망후 소련이 반드시 끼어들어 한국을 强占하게 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히스는 이승만의 진술을 가로막으며 자기는 미국의 주요한 전시 맹방인 소련을 공격하는 것을 조용히 않아서 들을 수 없다고 쏘아부쳤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한 해결은 모두 일본 패망이후로 미루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1943년 11월 루즈벨트, 처칠, 장개석이 카이로에서 회담한 결과 "한국을 적절한 과정을 거쳐서(in due course) 일제의 노예상태에서 해방시킬 것"을 선언했다. 여기에 신탁통치의 복안이 숨겨져 있었다.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는 미주 교포들은 카이로 선언을 듣자 열렬히 환영하였다. 그러나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카이로 선언에 불만을 나타내고 "적절한 과정을 거쳐서"라는 구절을 해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김구는 연합국의 대한정책이 한국에 대한 지배의 연장을 획책하므로 한국인들에게는 모욕적이며 수치스런 것이라고 비판을 제기했다. 해방 이후 독립을 바라던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카이로 공동선언은 커다란 실망을 안겨다 주었다. 김구, 이승만을 비롯한 임정 지도자들과 각 교포단체들은 "적절한 과정을 거쳐서"라는 조건을 강력히 규탄하고 나섰으나 미국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V. 미국의 불승인 정책과 대한인식

   만약 미국정부가 상해 임정을 전시중에 승인하여 독립국가를 세우도록 후원했다면, 해방후 현대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끈질긴 임정승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상해 임정의 승인을 거절했다.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 연유한 것인가?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임정의 승인요구를 할 때마다 미국정부가 공식적인 단골메뉴로 지적한 것은:

 
  첫째로, 상해 임정이 국내에 기반이 없다는 것이다. 즉 영토지배도 없고, 국내 인민의 신임을 확보하는 절차가 없었다. 둘째로, 다른 단체들과 비교해 배타적 대표성을 주장할만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즉 한인단체 사이의 분열과 알력이 심하다는 점을 들어 임정의 정통성이나 대표성 모두를 부인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폴란드나 프랑스와 같은 유럽의 망명정부에 대해서도 공식 승인을 삼가고 있었으므로, 미국의 이런 태도는 전시 정책상 형평의 측면에서 일견 시종일관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런 미국정부의 공식적인 거절이유외에 주목해야 할 점은 미국정부가 가진 부정적인 대한인식의 역사적 경험이 그 뿌리가 대단히 깊다는 점이다. 미국인들은 처음부터 한국이 독립되어도 한국인들은 ‘근대적인 의미'의 독립국가를 이끌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었다. 불행하게도, 미국인들은 해방될 때까지 한국인의 자립능력을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인들의 대한인식은 그들이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어떻게 평가했는가라는 물음과 연관되어 있다. 솔직히 말한다면, 미국은 개항을 전후하여 조선과 통상교섭을 하는 과정에서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한국에 대한 관심이 훨씬 적었음을 증명해 보였다. 예를 들어, 막부 일본의 완강한 쇄국정책을 페리(Perry) 제독이 함포사격으로 문호개항을 성사했으나, 한국의 경우 대동강에서 제너럴 셔만(The General Sherman)호가 불태위지고 선원들이 피살되는 등 심한 저항을 받고 개항노력을 포기하였다. 또 미국이 필리핀을 합방하기 위해, 일본과의 태프트-가쓰라밀약을 체결하여 일본의 조선 합방을 승인함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미국은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중시하지는 않았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동아시아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전략적 가치를 두는 지역을 순서대로 배열하면, 첫째가 필리핀,  두번째가 일본, 세번째가 중국(만주), 네번째가 한국이다. 전통적으로 미국은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고 않고 있었다.

 
  설상사상으로 36년간 한국에 관한 정보와 언론매체를 장악한 일본제국주의의 오랜 식민통치는 미국을 포함한 서구 열강들에게 한국과 한국인들에 대해 그릇되고 왜곡된 정보를 심어주는 데 크게 공헌했다.  비록 3.1운동으로 인해 미선교사들이 본국에 한국인의 저항의지와 단합된 애국심을 알리는 글을 보냈지만, 미정부와 미국민들의 장기적인 동정과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일본과의 전쟁준비가 채 안된 미국은 한국문제로 인해, 일본과 군사적 충돌이 일어남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루즈벨트 행정부가 한국 문제를 다루는 입장이 변하게 결정적 계기는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내의 반일감정이 격화되어 일본에게 전쟁을 선포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여기에는 물론 상해 임정과 미주의 독립운동가들의 적극적인 외교노력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에 대한 관심이 약간 증대되었지만, 대부분 미국민들의 주된 관심은 전쟁을 하루 빨리 끝내는 것이었고, 전체적으로 미국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은 여전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루즈벨트 행정부가 상해 임정을 불승인한 이유로서는 불충분하다. 미국이 상해 임정을 승인하지 않은 근본적 이유를 루즈벨트 행정부의 전시정책이라는 각도에서 볼 필요가 있다. 임정의 자격을 승인하는 것은 미국의 전후정책에 대한 의도가 달랐기 때문이다.

 

 첫째로, 루즈벨트는 전후 세계평화를 위해 특히 소련과의 협력을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소련을 무시하고 선제적 조치를 취하기를 꺼려했다. 더구나 전쟁의 조기 종전과 미군 사상자의 감소를 위해,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목마르게 기대하는 미군부는 루즈벨트에게 소련을 자극하지 말 것을 권고하였다.


 둘째, 미국정부는 임정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경계하였다. 미국은 임정내부가 복잡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즉 임정 내부에는 친미적 성향 뿐만 아니라 급진적 요소도 존재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해방후 이들 단체들이 어떤 방향으로 선회할 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셋째, 조기에 임정을 승인했다고 임정의 분열상, 협소한 지지기반 때문에 향후 초래될 정치적 부담과 불이익을 우려했다. 미국은 한인포로에 대한 심문이나 정보기관을 통해 수집된 국내정세 관련정보를 통해 이승만과 임정의 정치적 기반이 배타적 대표성을 주장하기에는 미흡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특히 국무부는 이승만계열이나 김구계열의 협소한 정치적 기반과 극우적 성향이 미국측 의도를 관철시키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이들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넷째, 더구나 중국 장개석 정부의 영향력하에 있는 상해 임정이 해방 이후 어떤 성향으로 변화할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특기할 점은 루즈벨트 행정부는 장개석 정부의 상해 임정에 대한 깊은 관심과 승인노력을 접하면서 중국을 소련보다 더 위협세력으로 간주하게 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임정이나 이승만의 대연합국 외교는 종래의 소극적인 선전외교에서 탈바꿈하여 무장부대를 통한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전략을 수립하고, 이에 대한 원조를 모색하는 등 외부 정세에 능동적으로 기민하게 대처했지만, 외교사업은 인원과 자금이 부족하였고, 광복군의 활동도 중국군의 보조요원이나, 부분적인 첩보작전의 수행에만 머문 채, 독자적인 작전전개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등 이를 추진할 만한 역량은 취약한 상태였다.

 
  당시의 국제정세는 한국의 독립운동세력에게 국내외를 불문하고, 대동단결과 민족통일전선의 결성, 이를 통한 혁명역량의 결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들 독립운동세력들은 그러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 채, 외교적 방법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강대국의 승인을 얻어내려 하였다. 이들은 장개석 정부의 정식 승인과 미국정부의 승인을 얻어내는 데도 실패하고 말았다. 이승만의 고문이었던 로버트 올리버(Robert Oliver)의 회고에 의하면, 임정 승인과 원조지원의 마지막 기회는 1943년 여름 이승만이 한길수와의 제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 제휴를 단호히 거절했고, 중국의 송자문은 루즈벨트에게 한인들의 분열상과 반목을 강조하면서 한인들이 지원받을 가치가 없다고 단언하였다. 특히 미국 수도 워싱턴을 무대로 빚어진 이승만 세력과 한길수 세력과의 파쟁은 급기야 미국 및 중국정부 지도자들에게 한국독립운동가들은 분열을 일삼는다는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미국정부의 입장에서는, 한국은 "패전국의 식민지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전시중 한반도는 미국의 이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전략 지역으로서 관심을 끌지도 못했다. 물론 전후에 한반도가 미국에게 차지하는 전략적 비중을 강조하는 학자들도 있다. 국무부의 내부 메모를 보면 한반도가 전후 분쟁을 일으킬 지역으로는 인식한 것 같다. 예를 들어, 1943년 8월 국무부 극동국장 혼벡이 헐 국무장관에게 보낸 서신에서 전후에 한국에서 분쟁의 가능성을 예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한국의 장래는....소련과 중국에게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믿어진다. 소련의 장래는 한국정부가 소련정부에 대해 호의를 갖고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소련과 공감되도록 노력을 경주 할 것이다. 소련이 이같은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한다면 중국의 한반도 정책과 충돌하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

 

  혼벡 국장은 이어서 헐과의 비공식 대담에서 한국의 중립화가 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필수적이며 여기에는 중국과 소련과의 합의가 필요하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러므로 루즈벨트 행정부는 한국의 신탁통치를 위해 4개국간의 합의에 도달하는 문제에 전념하게 되었다.

 
  루즈벨트 행정부는 1943년 12월 1일 발표한 카이로 선언에서 "일본이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상의 모든 도서를 박탈하고 만주, 타이완, 펑후열도 등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탈취한 영토를 중국에 반환하고 한국은 언젠가는 '적절한 절차를 거쳐서' 독립할 것"이라고 발표했을 때,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의 기본 윤곽이 마련되어있었다. 이 기본적인 윤곽은 전쟁의 진전과 다른 열강들과의 협의에서 부분적으로 수정이 되었지만, 종전될 때까지 큰 틀은 변하지 않았다. 즉 미국은 전후 세계질서재편과 국제연합을 통해 신탁통치에 대한 확고한 방침 을 천명했던 것이다. 

 

 

 

VI. 결  론

   루즈벨트 행정부가 전후 식민지 처리구상으로 국제적 신탁통치를 꾸준히 주장했던 것은 신탁통치가 세계평화에 대한 보편주의적 발상으로 세계 여론의 호응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미국의 국가이익에 최대한으로 봉사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시 미국의 고위 정책입안자들은 식민지에 대한 신탁통치 구상이 전후 미국의 국가이익에 가장 알맞는 대안처럼 보였던 것이다.

 

 첫째로, 미국정부는 전후 국내의 고립주의의 영향을 심각하게 고려하여, 종전후 군비가 축소될 것을 예상하여 동아시아에서 독자적으로 분쟁에 개입됨을 꺼려하였다. 둘째로, 영국, 프랑스 등 유럽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에 대한 전후 영향력을 축소시키면서 동시에 미국이 자유롭게 무역과 통상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셋째로, 루즈벨트가 고안한 '4대국 경찰론'의 전제조건인 전후 열강들의 협조체제(concert system)에 맞아떨어진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4대국에 의한 신탁통치는 그들 각국가간의 협조체제를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제도였기 때문이다. 미국의 신탁통치 발상의 이면에는 신탁통치가 미국의 국가이익을 최대한 보장할 것이라는 확신이 분명히 존재했었고, 이것이 4대국의 협조체제와 양립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루즈벨트 행정부는 내부적으로 신탁통치안을 검토하면서, 중·영·소 등 3대 동맹국들의 반발을 의식하여 그들의 동의를 얻으려는 외교적 협상을 계속하게 되었다. 이들 3대 동맹국들은 전시에 미국의 무기대여 원조가 전쟁의 승리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므로 현실적으로 미국의 입장을 거역할 수 없었고, 또한 한반도에서 어느 일국이 지배적 역할을 떠맡지 않는다면 굳이 미국의 신탁통치안을 반대할 아무런 명분이 없었다.

 
  루즈벨트는 카이로에서 처칠과 장개석과 회동하면서 "적절한 절차를 거쳐서" 한국을 독립시킨다고 선언하여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정책은 굳어졌다. 하지만, 구체적인 세부사항의 마련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워낙 전쟁의 와중에서 긴급히 처리할 사항이 많았겠지만, 신탁통치를 성공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전제조건들이 충족되지 못하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우선 첫번째로 지적되어야 하는 점은 미국의 신탁통치안은 법적으로 성공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추진력이 약했다는 점이다. 신탁통치국이 3대국(미·소·중)의 참여에서 영국을 포함한 4대국의 참여로 확대된 뒤에도, 만약 4대국이 신탁통치에 관해 합의를 보지 못한다면, 미국의 구체적 대안이 무엇인가에 대한 미국측의 고민이 부족했다. 미국은 막연하게 신탁통치가 실행되어야한다는 당위론 속에서 정책을 밀고 나아갔다. 더구나 전쟁 초기부터 상해 임정은 조소항과 이승만 등을 통해 신탁통치가 한국민에게는 치욕적인 것이므로 받아드릴 수 없음을 강경하게 전달했지만, 루즈벨트 행정부는 계속 이런 한국인들의 민족주의적 저항을 과소평가하고 철저히 묵살함으로써 해방후 한반도 점령과정에서 막대한 시행착오를 거듭하게 되었다.

 

이런 실책은 아시아 약소국가에 대한 역사인식의 무지와 강대국이 가진 자만심에서 나온 태도라 아니할 수 없다. 무엇보다 한국문제는 미국의 주된 관심사항도 아니었고, 전쟁목적도 아니었다. 미국의 최우선의 전쟁목적은 미군사상자 발생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전쟁을 조속히 종결하는 일이었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은 미·영·소간의 굳건한 대동맹체제의 유지였다. 혼벡의 지적대로, 한국문제는 "골머리를 앓게 하는 것"으로 미국에게는 "다른 나라에게 주자니 아깝고, 獨食하기에는 별 이득이 없는 닭 갈비(鷄肋)과 같은 존재"로 비쳐졌다. 이런 미국측의 대한인식에서 "귀찮음과 골치아픔"은 처음부터 미국의 전후 처리 방식에서 비극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

 
  루즈벨트는 또한 신탁통치국의 전제조건이 되는 신탁국의 이념적 동질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특히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의 성패는 소련과의 협력관계를 전제조건으로 한 것이었지만, 루즈벨트는 생전에 전후에 발생할 소련문제를 너무 낙관적으로 판단하였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적 상이점은 너무나 뚜렷했지만, 전쟁의 급박한 상황속에 은폐되어 있었던 점을 그는 간과하였다. 루즈벨트의 '4대국 경찰론'은 1815년 이후에 오스트리아의 수상 메테르니히(Metternich)가 주도한 4국 동맹(Quadruple Alliance: 영국·러시아·프러시아·오스트리아)을 모방한 것이었다. 이 4국동맹은 최소한의 이념적 동질성은 존재했는데, 그것은 기독교 정신이었다. 1815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1세의 제창으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평화를 유지하자는 神聖同盟(Holy Alliance)의 창설을 주창했고, 이것은 4국동맹을 묶어매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것이다. 루즈벨트는 이러한 19세기의 협조체제(Concert of Europe)를 20세기 후반에 다시 결성하여 반세기이상, 다시는 대전쟁의 참화가 없는 세계평화를 달성하려는 大構想(Grand design)을 꿈 꾸었다. 루즈벨트는 19세기의 협조체제가 약소국의 권리를 희생시켰다는 부정적 측면이 있으므로, 약소국의 권리 신장은 국제연합 등 국제기구를 통해 약점을 보강하면 된다고 믿었지만, 전후 미·소간의 냉전의 도래와 열강들의 현실주의적 입장에 의해 그의 大構想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의 상해 임정 불승인 정책은 그들이 장기적으로 한국에 대해 인식한 부정적인 역사적 경험이 바탕이 되었으며, 종전이 될 때까지 그런 인식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한국의 해방과 한국의 독립은 애초부터 별개의 사안이었다. 서구 열강들은 한국인들의 분파성과 자치능력 결여가 일제의 오랜 강압적 식민통치가 마련한 결과로 나타났다고 판단하기 보다는 조선시대부터 일제시대 이전까지 가진 선천적 특성이므로 한국인들은 근대국가를 운영할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런 대한인식은 루즈벨트 행정부의 대한정책을 집행하는데에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가뜩이나 소련의 눈치를 지나치게 살피는 루즈벨트 행정부의 상해 임정에 대한 불승인 정책을 '고착화'하는데 좋은 구실이 되었다. 건국 50년의 한국현대사에서 전시 미국의 신탁통치 구상이 주는 비극적 교훈은 "인간의 역사적 인식이 극히 주관적"이라는 점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사례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