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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46 : 해방과 건국 6 (모스코바 삼상회의와 민중의 항쟁 2)

 

 

 

한국의 역사 1,046 : 해방과 건국 6 (모스코바 삼상회의와 민중의 항쟁 2)

 

 

 

              

 

 

 

모스코바 삼상회의와 민중의 항쟁 2 

 

일제 식민통치하 국내외 많은 인사들이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남북이 분단되고 한반도는 두 동강 나버렸다. 이는 우리들이 자력으로 일본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자주독립을 쟁취하였으면 모르겠으나 강대국에 의해서 갑작스런 해방을 맞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한반도는 카이로회담 이후 '적절한 시기에...... 가장 빠른 시기에...... 절차에 따라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내용에서 보듯이 한국은 이미 루즈벨트의 이상대로 신탁통치안이 예견되고 있었고 소련, 영국, 중국 등 연합국들도 이에 동의하였다. 그래서 해방이 되자 일제 무장해제를 빌미로 한반도 남북에 진주한 미.소에 의해서 각각 군정이 실시되는 과정에서 모스코바 삼상회의가 열리고 미국의 요구대로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자 반탁과 찬탁으로 갈린 남한 사회는 좌우익이 서로 격렬한 대립과 반목이 격화되면서 극심한 사회혼란을 야기하였고,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공동위가 열렸으나 각자 참여단체 문제로 서로의 이견을 좁이지 못하고 모두  결렬되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북한 지역에는 이미 좌익 세력이 거의 지배하고 있었고 소련의 지원 아래 소련이 내세운 김일성을 포함한 공산당 세력이 권력을 잡고 신속하게 민주개혁을 전개하여 공산정권 수립에 박차를 가하였으나 남한 사회는 이미 내부 깊숙히 성장하고 있던 좌익 세력에 의해 혼란만 가중되고 있었다. 그러자 미군정은 북에서 점차 정권 수립이 가시화되어가고 있고 남한에서는 혼란만 가중되고 있는 관계로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유엔의 결의에 의해 남한에서도 단독정권이 수립됨에 따라 남북으로 두 동강 난 상태로 분단이 기정사실화 되었고 우리들이 원하던 새로운 통일국가건설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것은 강대국이며 전승국인 미국의 대통령 루즈벨트의 신탁통치안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의 근간이 신탁통치안(trusteeship)으로 루스벨트 대통령의 전쟁 이후 신세계질서 구상의 일환이었다. 이 정책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반영되었고, 집단안전보장의 개념이 포함되었으며 미국 중심적인 정치․경제체제 우월주의의 표현이었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그리고 전후에 있어서 한반도를 동유럽과 동일하게 국가 안보상 중요지역으로 보았다. 따라서 주축국으로부터 해방시킨 후 민족․공산 세력의 연합정권을 수립, 점차 공산당이 이끄는 사회주의 위성국으로 만든다는 적극적․혁명적인 정책을 구체적 행동계획으로 치밀하게 수립하여 소련군의 북한 진주와 함께 체계적으로 실천에 옮겼다. 때문에 소련의 대한반도 정책은 우리나라의 분단의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소련 역시 처음에 한국의 즉시독립을 주장하였다. 이미 한국사회를 장악하고 있던 것은 좌익이 주축이 된 인민위원회였고 민족주의세력도 힘이 있는 이들은 중도좌파에 속해있는 인물들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소련에 우호적인 정부가 수립되리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미 미소가 분할점령한 상태에서 미국이 그런것에 응할리가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외교적인 방법으로 자국의 이익을 실현하려했고 그런 상황에서 삼상회의가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미국은 미․영․중․소 주도의 신탁통치안을 실시한다는 것을 얻어내었다. 미국은 자본주의 진영대 공산주의 진영이 3대 1이라는 것을 높게 봤던 것이다. 반면 소련은 그것을 양보한 대신 한국임시정부의 참여를 확정지어 나름대로 이익을 챙겼다. 한국임시정부의 구성은 좌익이 강세일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삼상회의 결정은 양국의 이익이 교묘히 배합된 것이었다.

 

신탁통치안을 처음 주장한 미국조차 어떤식으로 이루어질 것인가를 몰랐지만 어쨌든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의문은 통과되었다. 결의문을 살펴보면 미소공위 설치, 국내 제 정치단체들과 협의, 임시정부수립, 임정참여하의 신탁통치방안 협의, 미소의 확정의 순서대로 진행될 것이었다. 즉 외국군에 의한 점령통치가 아니었고 소련이 처음에 생각한 것처럼 미소의 후견하에 임시정부의 주도로 나라가 운영될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 찬탁반탁의 문제는 임시정부가 수립된 다음의 문제였는데 거센 반탁운동 속에서 이런 점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임시정부가 수립되면 어떤 형태로든지 일관성 있는 의견을 더욱 영향력 있게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즉시 독립에의 강한 열망은 삼상회의 결의를 좀더 객관적으로 보기 힘들게 하였고 이를 악용하여 득세한 민족반역자들에의해 결국 폐기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미소가 너무도 불안정한 국내정세를 보고 결의 당시부터도 가변적이었던 신탁통치안을 계속 추진하기보다는 이미 확보한 자국의 세력을 더욱 공고히하는 것을 택한것은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탁치안의 지지목적도 결국은 자국에의 우호적 정부수립이었고 단정수립으로도 그 목적은 충분히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래는 미.소의 한반도 정책과 신탁통치안 배경에 대해서 쓴 논문을 참고로 싣는다. 

 

미소의 한반도 정책과 신탁통치안 배경

 

 

Ⅰ. 서론


Ⅱ. 본론

 1. 해방이 오게 된 배경

 

 2. 대한정책의 결정

 

 3. 대한정책의 실시

  ◎신탁통치 - 4대국 공동관리

  ◎대륙적 가치의 모색

  A. 미국의 입장 - 통일관리

  B. 소련의 입장 -현상유지

 

 4. 미국과 소련의 주요회담

  ◎카이로 회담

  ◎테헤란 회담

  ◎얄타 회담

  ◎포츠담 회담

  ◎38도선 획정

  ◎모스크바 3상회의

 

 5. 통일민족국가 수립에 실패한 과정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6.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과정


Ⅲ. 결 론


 

1. 서론


  우리나라의 해방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진 해방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 의해서, 특히 미국과 소련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과 소련이 한국을 공동으로 점령하기로 한 것은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보아 제2차 세계대전이 낳은 불행한 유산이었다. 당시 세계정세로 보아 한국의 장래는 원초적으로 미․소 양국이 전후 얼마나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양대 초강국 간에는 추축국들을 멸망시키고 난 후 루스벨트가 염원하던 대동맹의 정신이 급격히 사라졌고, 세력팽창과 방어라는 갈등 구도 속에서 한반도는 극동에서 첫 번째 냉전의 주요 결전장이 되어버렸다.

 

또한 해방이 된 후에도 미국과 소련에 의해서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말하자면 1945년부터 48년 사이의 이른바 `해방정국‘은 미․소 양국이 각기 남과 북으로 진주하여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군정을 펴나감으로써 남북 간의 대립구도를 원초적으로 형성한 시기이다. 이로 인해 해방운동 과정에서부터 존재하던 좌익세력의 대립을 통일 민족국가의 수립으로 해소시키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들은 수립 분단지향세력들에 의해 분단국가가 성립되었다. 이후 나누어진 분단 국가들은 그들의 이데올로기로 통일을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방된 후 남한에서는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게 되며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해방을 오게 한 것은 우리 민족해방운동전선의 투쟁과 연합국의 승리였다. 그렇다면 우선 민족해방운동전선은 어떤 해방을 추구했고, 실제로 민족해방은 어떻게 왔으며, 그 당시 우리 민족해방운동전선은 어떤 상태였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하겠다. 또 연합국들은 한반도를 어떻게 해방시키려 했으며 일본이 항복한 후 어떻게 처리하려 했는지, 전쟁이 끝날 당시 연합국들은 한반도 점령정책을 어떻게 실시했으며 한반도를 어떤 경로를 밟아 독립시키려 했는지 등을 정확하게 알아야 하겠다. 특히 연합국들은 처음부터 한반도를 분단시키려 했는지, 38도선은 누구에 의해 왜 그어졌는지, 또 처음부터 영구분단선으로 그어졌는지,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분단선으로 되어간 경위는 무엇인지, 신탁통치안은 왜 나왔는지 하는 문제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우리 현대사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2. 본론


1. 해방이 오게 된 배경


  8․15 당시 민족해방운동전선의 상태를 먼저 알아보도록 하겠다. 우리 민족은 근대사회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일본제국주의의 군사적 강압과 대한제국 지배층의 무능과 부패, 그런 왕조를 스스로 뒤엎지 못한 국민적 역량의 한계 등이 원인이 되어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식민지 피압박민족사회가 당면한 절대 과제는 당연히 민족의 해방과 독립이었다. 그러나 해방을 이루는 방법과 해방 후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방법, 즉 민족국가를 다시 수립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었다.

 

  해방의 방법을 생각하여 보면 우리 민족의 경우 무력적 강압에 의해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최선의 방법은 우리 민족 스스로 무장독립군을 양성해서 한반도를 점령하고 있는 침략자 일본군과 싸워 그들로부터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해방을 쟁취하는 길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당연히 해방 후 신탁통치나 국토분단 등의 불행한 일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넓은 국토를 가진 중국과 비교하여 볼 때, 우리 민족의 경우 국토가 좁아서 완전식민지로 된 상황에서는 독립군을 양성할 `해방구‘를 가질 수 없었다. 그 때문에 한때 만주지방을 `해방구’로 삼아 무관학교를 세우고 군대를 양성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만주지방을 완전히 장악하여 지배하게 된 이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중국 본토 지역이나 소련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 민족이 양성한 독립군이 독자적으로 일본군과 싸워 이기지 못할 조건이라면, 차선의 방법으로 민족해방운동전선의 좌우익을 막론하고, 소규모의 군대나마 유지하여 일본을 패망시킬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는 길이 있었다. 유럽의 자유프랑스군처럼 연합국과 함께 서울에 입성하고, 일본의 항복조인에 우리 대표가 참가하여 전승국의 일원이 되는 길이었다. 그것이 가능하였다면 해방 후 신탁통치나 분단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최선의 방법에 의해 해방을 이루어내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서도 민족해방운동은 꾸준히 계속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조선독립동맹, 그리고 조국광복회 등과, 그들의 군사력인 한국광복군, 조선의용군, 동북항일연군 속의 조선인민혁명군 등이 활동한 궁극적 목적은 바로 이 차선의 방법을 통해 해방을 성취하는데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민족해방운동군들이 연합군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 군사력의 모체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조선독립동맹, 혹은 소련으로 옮긴 후에도 실존했는지 의문이지만 재만한인조국광복회 등 민족해방운동의 주요 `정치단체‘가 연합국의 승인을 받는 일이 중요했다. 이 때문에, 중경으로 옮겨간 임시정부는 좌우익 민족해방운동전선의 통일을 지향하면서 연합국의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연합국측은 한민족의 민족해방운동단체가 통일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를 주로 내세워 승인하지 않았다. 물론 한국의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은 이유가 그것만은 아니었다. 한국의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경우 종전 후 미국․영국․프랑스 등 연합국들이 가진 식민지를 바로 해방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도 있었던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이 가까워질수록 우리 민족해방운동전선은 좌우익 통일전선을 이루기 위해 적극 노력하였다. 그래야만 연합국의 승인을 받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연합국이 끝내 좌우익의 어느 단체도 승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하게 되었다.

 

  다음은 해방 후에 독립국가를 이룩하는 방법, 즉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방법 문제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일본에 강점당할 때 대한제국은 입헌군주제에도 못 미치는 젠제군주제였다. 다행히도 일제강점 시대의 민족해방운동은, 특히 3․1운동을 계기로 복벽주의를 청산하고 공화주의운동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곧 사회주의 사상이 들어오고 그 계통의 민족해방운동전선이 형성됨으로써 민족해방운동은 이제 해방 후에 우익, 자산계급 중심의 민족국가를 건설할 것인가 아니면 좌익, 노․농계급 중심의 국가를 건설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민족해방운동전선을 통일해야 할 필요성이 높아지고, 그에 따라 좌우익 통일전선운동이 발전하면서, 민족해방운동단체들끼리 통합하거나 연합할 뿐만 아니라 그 정강․정책도 어느정도 통일된 면모를 보이게 되었다.

 

한편 중국 관내지역의 민족해방운동전선에서는 어느정도 좌우익 통일전선체가 형성되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이 통일전선체의 정치체제와 헤게모니 문제를 포함하여 권력구조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당시 장개석정부 지역의 임시정부는 김구 중심의 세력과 김원봉 중심의 세력 사이에 통일전선이 형성되어 이미 좌우합작 정부가 된 상태였으므로, 위와 같은 문제들은 임시정부와 중국공산군 지역인 연안에 있던 조선독립동맹의 통일전선 교섭이나, 국내의 건국동맹 및 국외의 임시정부와 조선독립동맹의 통일전선이 완성되면서 결정될 사안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국내외 민족해방운동전선 사이의 통일전선이 완성되기 전에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하게 된 것이다. 그 때문에 김구가 탄식했듯이 민족해방운동전선은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기 보다 오히려 해방 후의 문제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2. 대한정책의 결정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까지 미국은 한국에 관하여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커다란 이해관계가 없었으므로 거의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였다. 미국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항전 지원요청으로 비롯되었다.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한지 사흘 만인 1941년 12월 11일 임정은 대일본 선전포고를 행하는 한편, 이승만(李承晩)을 통하여 미 국무성에 임정의 승인과 광복군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고 교전 중에 있음에도 미국이 만일 임정을 승인한다면 일본 지배하 또는 곧 일본 지배하에 들어갈 지역에 있던 미국인들에 대하여 일본이 보복행동을 할지 모른다는 이유에서 국무성으로서는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다는 회답을 보내왔다. 주중 미국대사관의 조사결과를 보면 “한국이 근대국가로 발전하기 위하여서는 강대국들에 의해 보호․지도․원조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1942년 4월에 들어서자 이번에는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임정을 즉시 승인할 것이라는 의사를 미국에 통보하여 왔다. 헐(Cordell Hull) 국무장관이 루스벨트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중국에 보냈던 공식회담은 “만일 중국이 임정을 승인한다면 소련 또한 친소련 독립운동단체를 구성, 또 다른 임시정부를 승인할 우려가 있으므로 중국은 심각하게 임정 승인을 재고하여 봄이 바람직하다” 라는 것이었다. 이는 외교적 수사를 통한 강한 거부의 표시였다.

 

  루스벨트는 카이로 회담에서 영국과 중국이 한국에 대한 3개국 신탁통치안에 동의하도록 상정할 작정이었으나 장제스가 종전 즉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는 성명을 즉각 발표할 것을 강력히 촉구함에 일본 대신 중국이 한국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거나 친중국적인 한국임정을 통해 정치적 지배를 꿈꾸고 있다고 의심했다. 이에 카이로 선언의 “한국인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한국이 ‘적절한 과정’(in due course)을 거쳐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가 될 것” 이라는 표현에는 신탁통치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미국과 영국은 일정한 잠정기간 동안 한국에 신탁통치를 실시할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테헤란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자신의 이상주의의 하나인 신탁통치의 일환으로 한국문제를 언급했고, 스탈린은 카이로 선언에 대해 전적으로 찬동했으며, 한국은 독립정부를 유지할 능력이 없으므로 미․영․중․소 4대 강국들에 의한 40년간의 신탁통치가 필요하다는 루스벨트의 의견에 원칙적으로 동의하였다.

 

  1944년에 접어들어 추축국들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미국정부는 종전 후 가능할지도 모를 한반도 점령에 대한 정책수립에 부심하게 되었다. 국무성의 각국간 지역의원회(Inter Divisional Area Commitee)는 한국에 관한 3개의 정책연구를 제출하였다.

 

첫째, 해외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한국국민의 지지가 의심스러우며 이들은 행정경험이 미숙하다는 점과 만일 소련이 참전하면 소련군은 그 휘하의 3만 5천 명의 한국인을 앞세워 한반도의 상당부분을 점령할 것임을 주안점으로 했다. 둘째, 미국․영국․중국․소련이 한국의 점령과 통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또한 어느 한 강대국의 단독통치는 피해야 하며 분할점령의 경우, 조속히 통일 통치제재를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 연구안은 일본 총독부 관리들의 활용에 관한 것으로 일본 항복 후 한국인 요원만으로써는 자치능력이 없고 산업시설 등을 운영할 수 없으므로 자격 있는 한국인들을 구할 수 없는 분야에서는, 일본의 기능요원들이 계속 작업토록 허용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 당시 루스벨트가 당면한 정책목표는 어떻게 하면 소련을 대일전에 참가시키는가 하는 것이었으므로 대소련화합론이라는 정책기조안에서 움직였던 미국관리들은 소련의 참전이 과연 전쟁종료 후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한국이 미국의 안보에 별로 중요치 않았기 때문에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가 문제되지 않았으며, 현안문제가 생기면 연합국들 사이의 회의에서 해결하면 된다는 안이하고 낙관적인 생각이 있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은 소련의 대일 참전시기를 대독승리일(V. E. Day) 이후 3개월 이후라고 루스벨트에게 약속했고, 루스벨트는 스탈린의 참전조건을 전부 받아들였다. 물론 한국은 그 조건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러나 회의기간 중 사석에서 루스벨트가 한반도는 미국․소련․중국의 공동신탁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자 스탈린은 “영국도 참전해야 하며 신탁통치기간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을 것”이라고 대답했고, 외국군대가 한반도에 주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가 사망하고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계승하면서 동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련의 위성국 수립노력은 해방된 지역에서 미국이 추구하려는 목적에 상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소련의 팽창주의에 대처하려 했다.

 

  그러므로 트루먼과 대소련방어론을 주창했던 정책보좌관들은 루스벨트의 구상대로 일본과의 전쟁에 소련을 참전시키는 것이 과연 현명한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해리만 대사나 그루(Joseph Grew)국무차관은 트루먼에게 루마니아나 폴란드에서 보여준 소련의 행동으로 미루어보아 소련은 기회만 오면 만주와 한반도에서도 똑같이 패권확립 기도를 반복할 것이며 미래의 한국정부는 틀림없이 소비에트화 될 임을 확신시켰다. 따라서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사전점령만이 한국의 독립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군사력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군부지도자들은 트루먼에게 일본을 패배시키는 것이 최우선과제임을 강조하고 소련의 대일전 참전만이 수많은 미국인들의 희생을 막는 길임을 상기시켰다. 함동참모본부는 국무성의 대소련방어론 전략에 의거하여 실제적으로 미군 병력을 만주와 한국에 투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오히려 일본군의 항복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소련군이 만주와 한국으로 공격해 들어가야 한다는 논지였다. 따라서 트루먼은 국무성의 의견에 심정적으로 가까웠으나 현실적으로 군부의 전략을 따르기로 하고 소련군의 한반도 전체 점령 및 위성국화를 저지하는 방안으로 루스벨트의 한반도 신탁통치정책을 부활시키기로 결정했다.

 

  한편 미 국무성은 포츠담을 위한 준비서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미국측은 정작 포츠담 회담에서 식민지문제에 과민반응을 보였던 영국의 태도 때문에 이 안을 회의에 상정하지도 못했다. 포츠담 회담은 결국 모든 신탁통치에 관한 문제를 후일 외상회담(Council of Foreign Ministers)으로 미루어버렸다.

 

  또한 포츠담회담에서 트루먼이 한반도 신탁통치에 관한 소련의 의사타진을 거론치 않은 데에는 핵폭탄실험의 성공이라는 요소가 있었다. 핵능력을 가지게 되었던 미국으로서는 소련의 태평양전쟁 참가가 더 이상 긴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의 요청이 없더라도 자국의 이익이 존재하는 한 소련이 대일전에 참가치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따라서 미국은 외교적 지연전술을 쓰는 한편, 소련의 참전 이전에 일본이 항복하게 되기를 고대하는 편이 유리하다는 생각에서 포츠담에서는 만주와 한국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핵폭탄이 사용되어 일본이 조기항복하게 된다면 소련이 참전의 기회를 잃은 상태에서 전쟁이 끝나게 되며 대소 흥정은 필요가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의 항복이 임박하자 소련은 얄타회담에서 양해된 참전 대가, 즉 사할린, 쿠릴 열도 그리고 만주에 대한 이권과 미국의 토의 지연정책으로 인해 생겨난 보너스, 즉 한반도에 있어서 패권확립의 기회를 위해 조속히 참전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소련은 만주에 관해 중국과의 협상이 타결된 후에 참전하겠다는 원래의 공언도 묵살한 채 얄타회담에서 양해되었던 대일 참전일(독일 항복일이었던 5월 8일 이후 3개월 이후)이 되는 8월 9일 대일본 선전포고를 발표했고, 만주공격과 거의 동시에 나진(羅津)항에 대한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소련군의 재빠른 한반도 진입은 미국정부를 놀라게 만들었다. 이에대한 미국의 대응은 38도선의 획정이었다. 스탈린이 미국의 한반도 분할 제의를 받아들여 38도선 이북만의 점령으로 만족했던 이유는 뚜렷한 근거를 가지고 논할 수가 없다.


 

3. 대한정책의 실시


  미국과 소련이 한국을 공동으로 점령하기로 한 것은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보아 제2차 세계대전이 낳은 불행한 유산이었다. 당시 세계정세로 보아 한국의 장래는 원초적으로 미․소 양국이 전후 얼마나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양대 초강국 간에는 추축국들을 명망시키고 난 후 루스벨트가 염원하던 대동맹의 정신이 급격히 사라졌고, 세력팽창과 방어라는 갈등 구도 속에서 한반도는 극동에서 첫 번째 냉전의 주요 결전장이 되어버렸다.

 

  사회주의 혁명을 획책하는 소련의 정책에 대항하기 위하여 미국은 한국 점령지역에서 좌익혁명세력을 억제하고 보수계열인사들과 제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날이 갈수록 38선은 반소 방벽선으로 고정되어갔다. 그러나 신탁통치안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 열강들과 맺은 약속이었으므로 그 실시를 쉽게 포기하기 힘들었고, 한편 일본군의 항복을 받는다는 명분의 38선이 고정화되는 것을 한국인들이 강하게 비판하자 미군정이 한반도에서 반소정책을 수행하기란 처음부터 순탄할 수 없었다.

 

  미군은 남한 점령 초기 한국을 일본의 일부로 취급, 패전국에 대한 전승국의 태도로 임했다. 따라서 8월 15일 광복의 시점부터 치안을 유지해 왔던 건국준비위원회나 9월 초 급조되었던 인민공화국의 존재는 철저히 무시되었고, 하지는 ‘유자격자(有資格者)라고 지칭되었던 우익인사를 규합할 때까지 주로 총독부의 일본인 고관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의 ’조언‘을 들어 남한통치를 구상했다. 그러나 곧 하지는 한국인의 항의의 행진에 굴복하여 일본관리들을 사임시킬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은 행정공백을 조속히 메우기 위하여 군정청 조직을 한민당 당원들과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구미유학생 출신인사들, 그리고 일제하의 식민관리들로 채움으로써 반민족적인 편의주의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남한에서 미군정이 추진했던 우익보수계의 정치권력 강화 목표가 원활하지 못하자, 미국은 정치적 안정을 목적으로 김구를 비롯한 임정요원들과 이승만의 구국을 주선해 주었다. 물론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들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서의 귀환조건이었다.

 

  9월 12일부터 10월 2일까지 개최되었던 런던 외상회담에서의 미․소 간 대립은 8월 15일 이후 관망상태에 있던 스탈린의 극동정책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 당시 스탈린이 구체적으로 원했던 것은 동유럽의 위성국화와 이탈리아 식민지였던 리비아였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소련이 요구하던 두 문제를 다 거부했다. 이에 스탈린은 리비아는 미국과 영국에  게 넘겨줄 터이니, 그 대신 소련에게 동유럽에 대한 영향권을 할애하라는 흥정을 제시했으나 이 역시 거부당했고 9월 15일 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1945년 10월 소련의 전략은 구체적으로 한반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즉, 조만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중앙행정기구를 수립했고, 서울과 북한의 토착 공산주의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38이북만을 담당하는 독자적 공산당을 조직했던 것이다.

 

  한편 남한에서는 10월 하순 미 국무성 극동부장 빈센트(J.C.Vincent)의 한반도 신탁통치구상 발표가 보도되자 모든 정치세력들이 거세게 반발하였다. 공산당까지 강력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11월초 이승만은 45개 정당들의 회의를 소집하여 신탁통치 반대, 한국의 즉각적인 독립을 요구하고 나섰고, 워싱턴으로부터 자세한 지침을 받지 못했던 하지는 개인적으로 신탁총치 실시에 반대의견을 피력했다.

 

  그해 12월 하순경에 있었던 모스코바 외상회담의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미국측은 4대강국이 선출한 고등행정관 통치하에 신탁통치를 제안했으나 소련은 미․소 양 점령군사령관들로 하여금 임시정부를 수립토록 주장, 관철하였다. 즉 전자가 집정관 통치하의 통일정권을 목표로 했던 반면, 후자는 미국과 소련에게 거부권을 부여해 실질적인 분단을 고착화 하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945년 8월의 해방은 우리 민족의 예상보다 빨리 닥쳤고 연합국들에 의해 피동적으로 주어졌던 것이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희열감에 빠져 그 의미를 곰곰이 따지지 않았고 단순히 미국과 소련의 군사적 점령을 짧은 기간으로 바아 카이로 회담의 약속대로 곧 자주독립정부가 수립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과는 독립을 고대하던 모든 한국인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리하여 1946년 초 전개되었던 반탁운동은 항일민족주의자들에게 제 2의 독립운동이었고, 지나간 3개월간 정치주도권을 잡았던 좌익을 제압하는 계지를 마련해 주었으며, 친일분자들에게는 애국․독립․반공의 미명하에 정치적 소생의 기회를 제공했다. 반면 원래 반탁노선을 표명했다가 소련의 지시로 찬탁운동을 전개해야 했던 좌파나 공산주의자들은 정치적 곤경에 빠졌다. 이로써 남한의 정치는 45년 가을 좌우익의 경쟁적 공존시기를 지나 극단적 대결로 치달았다.

 

  1945년 8월의 분단은 단순히 영토적․잠정적인 성격이었고, 이념적 갈등이 잠재되었던 것이나 1946년 초 신탁통치에 의한 분단은 적나라한 정신적․이념적 갈들이 표출되어 어떤 방식으로도 타협될 가능성이 없는 것이었다.

 

  모스크바 회담 이후 하지는 보다 더 우익세력을 자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는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인물은 모두 공산주의 동조자로 간주하고,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던 신탁통치 반대세력인 보수계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했다.

 

  자신들이 신탁통치를 제안해 놓고도 우익들로 하여금 소련을 공격하도록 방임, 은근히 조장까지 했던 미국이 이율배반적 행동에 실망했던 소련군정은 북한만의 단독정권 수립으로 방향을 전환했던 것이다. 이에 소군정은 인민위원회 대표들을 선출시켰고 친소적 인물들을 중요 행정직에 임명했다. 김일성이 임시인민위원회 의장으로 정치무대에 등장한 때가 이즈음이었다. 소련은 미국보다 한국의 정치․사회 문제를 이해하는 데 훨씬 진보적이었다.

 

  남한에서 미국의 점령정책은 북한에 대한 소련의 정책에 비하여 덜 조직적이며 소극적이었다. 소련의 챙창을 막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그 지령하에 움직였던 좌익의 정권탈취 위협이 하지의 행동을 지배했고, 그들이 획책했던 사회적․정치적 불안조성에 대항하여 법과 질서의 유지가 미군정의 최우선 과제였다. 그는 부족한 미군요원을 보조할 목적으로 일제하에서 경찰경험을 갖고있는 인물들을 간부로 경찰대를 조직했고, 이를 근간으로 경비대를 창설하자고 워싱턴에 상신했으며, 육군장관은 미 점령군의 증강이 필요없게 되는 이점이 있으므로 이를 승인했다. 그러나 국무성이 이와 같은 미군정의 조치는 대소련협상에 지장을 줄 것이라는 이유로 항의하여 한국 국방군의 결성은 공동위원회 토의 이후로 연기되었다. 그러자 하지는 앞으로 생겨날 한국군의 인력을 마련키 위해 한호상을 시켜 민족청년단 등 많은 준  군사단체를 조직하게 했는데, 그 결과 1946년 여름이 되면 좌우익계를 대표하는 청년단체들 간의 테러행위와 게릴라전이 벌어져 원래 의도했던 치안유지는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좌익세력만으로 임시정부를 구성한다는 것이 소련의 태도였고 이에 대해 미국은 언론의 자유를 앞세워 반탁 우익진영이 배제된 정부수립을 강력히 반대했다.

 

  소련은 신탁통치를 수행하는 과정을 이용하여 반소․반탁 정치지도자들의 권력장악을 분쇄하려 했고 미국은 남한에서 우익보수계 인사들을 임시정부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권력장악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양측은 각자의 주장을 고수했고 교착상태에 빠진 미소공동위원회는 무기휴회로 들어갔다.

 

  회의가 결렬된 후에도 소련은 1차 미소공위에서 자국의 구상대로 임시정부수립안이 합의될 것에 대비, 회의 개최 이전 박헌영과 김일성의 제안을 바탕으로 임시정부 내각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딜레마를 빠져나가기 위하여 미국은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지금까지 보수계만을 지지해 왔던 정책을 수정하여 온건우파 및 온건좌파를 중심으로 연합전선을 구축하도록 하지에게 지시했다.

 

  미국은 이와 같이 인내와 결의(patience with firmness) 정책을 고수하면 소련이 협상 테이블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사태는 예상을 빗나갔다. 박헌영이 이끄는 공산당은 1월초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아섬으로써 대중의 지지를 상실한 터에 미국의 ‘한국화’정책으로 미군정이 남한에서 공산당의 영향력을 완전히 제거할 것임을 깨달아 소련이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슈타코프는 “미군정과 반동파의 행등을 폭로하는 대중적인 시위와 항의를 조직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한편 2차에 걸쳐 일본돈 5백만 엔의 자금을 지원하였다. 그 결과 발생했던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폭동은 세부사항(좌파석방, 임금인상, 좌익신문복간 요구, 빨치산투쟁 등)에까지 소련이 지휘하고 조선공산당이 수행했던 사건들이었다. 이에 미군정은 강력히 폭동을 진압하는 한편 박헌영의 체포를 명령하고 우익 청년단체들이 좌익을 징벌하는 것을 묵인하였다. 이로써 좌우익청년들 간의 태러와 보복의 악순환이 거듭되었다.

 

 1946년 말이 되자 ‘인내와 결의’를 다짐했던 트루먼의 정책은 실패했음이 드러났다. 미군정은 김규식․여운형 온건좌우 합작그룹 강화에 실패했고, 공산당은 치안차원에서 탄압해버렸으므로 미국은 소련의 양보를 강요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했다.

 

 북한과 남한의 정치사정은 국무성의 전략이 점점 더 작용하기 힘들게 전개되었다. 북한의 임시위원회는 1946년 11월부터 1947년 3월 사이 항구적인 정부를 창설할 대의원 선거를 실시했고, 그 결과 인민위원대회가 소집되어 인민의회를 창설했으며, 국가의 입법․사법․행정기관을 탄생시켰다.

 

  또한 남한에서는 이승만이 이끄는 극우파들이 미군정의 신탁통치추진 반대운동, 단독정부 수립에 관한 요구의 강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군정초기부터 미군정은 극우보수파를 지원한 결과 3만 명에 달하는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은 좌파에 대한 테러를 계속했고 경찰은 이들의 행동을 건성으로 저지할 뿐이었다. 이승만은 한걸음 더 나아가 미군정이 한국의 독립을 지연시키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남한만의 단독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분리선거를 주장했다.


◎신탁통치 - 4대국 공동관리

  프랭클린 D.루스벨트 대통령이 이미 1943년 3월에 엔토니 이든 영국 외상에게 그가 구상하고 있던 한국의 국제신탁통치 문제에 대해서 거론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루스벨트의 이러한 구상은 테헤란과 얄타에서 조셉 스탈린의 비공식적인 승인을 얻은 뒤에 1947년 여름에 이르기까지 줄곧 미국의 대한정책의 골간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구상이. “적당한 시기에 한국은 자유롭고 독립되게 될 것이다”라는 카이로 선언에서 구체화되었던 것과 같이, 윌슨식의 이상주의의 산물이었으며, 동시에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을 반영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거의 주목을 받아오지 못했다. 미국은 중국, 소련, 영국의 이해관계를 고려해야만 하는 외교상의 필요성 때문에 루스벨트는 1943년 3월 27일에 “한국은 중국과 미국 이외에 1,2 개국이 더 참가하는 국제통치를 받을 수도 있다”는 점을 제안했다. 따라서 이 발언은 루스벨트의 이상주의와 권력정치 개념이 결합되어 나온 결과라고 볼 수 있는데, 전자는 뒤에 그가 카이로 선언에서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반영되어 있었고, 후자는 그가 제안한 4대국 공동관리에 반영되어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루스벨트는 결코 집단안전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을 확실하게 표명했던 헌신적인 국제주의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유엔을 지지하면서도 `4명의 경찰관‘이라는 개념을 거부하지 않았다“라는 베른슈타인의 결론에 동의 할 수 있다.

 

  한국의 국제관리와 관련된 미국의 역할에 대해서는 테헤란 회담이 끝난 뒤에 육군과 해군의 요청에 따라 국무성 안의 각국간 극동지역위원회가 작성한 연구보고서와 얕타 회담 직전에 대통령에게 제출하기 위해서 준비되었던 브리핑 문서 및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망한 뒤에 포츠담 회담을 위해서 준비되었던 몇몇 문서와 같은 다양한 자료들에게서 몇가지 사항만을 추론해 낼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문서들에는 서로 적대적이던 중국과 소련의 이해관계에 미국이 깊은 관심을 표명했던 점이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예를 들면 얄타 회담에 대비한 브리핑 문서는 중국과 소련 가운데의 어느 한 쪽이 일방적 행동을 취할 경우 “심각한 정치적 반발”이 초래 될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었으며, 테헤란 회담 뒤에 작성된 연구보고서는 “어떤 경우에든 미국 단독의 위임통치는 있을 수 없다”고 단언했었다. 일방적인 행동에 대한 이와 같은 반대가 미국이 루스벨트의 구상에서 제시한 것처럼 4대국의 한국 공동관리를 주장한 주요한 이유였다.

 

◎대륙적 가치의 모색


A. 미국의 입장 - 통일관리

 

  강대국들에 의한 일방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분할관리도 한국의 신탁통치구상과 양립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이 점은 대통령에게 제출된 브리핑 문서에 아주 명백하게 드러나 있는데, 그 문서는 “한국에서의 군사작전의 완료와 더불어 현실적으로 가능한 범위 안에서 주한점령군과 군정에 연합군 대표부가 설치되어야 한다는 점과, 그러한 군정은 전한국을 분할된 관할 구역들이 아닌 단일한 단위지역으로서 관리하게 되는 중앙집권적인 관리 원칙에 따라 조직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마찬가지로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에서 소집된 모스크바 3상회의에 “한국의 통일관리”라고 명명되어 제출된 미국쪽 제안도 신탁통치가 실시될 때까지의 과도기 동안의 임시조치로서 “한국의 국익과 관련된 모든 문제에서 공동보조를 취할 두명의 군사령관에게 예속되는 통일관리의 수립”을 촉구했다. 이에 따르면 한국은 피신탁국으로서 “1명의 고등판무관과 시정권을 가진 국가 각 1명의 대표로 구성되는 집행위원회”의 관리를 받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언명들은 그 당시 미국의 대한정책에서 분할 관리의 불승인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입증해 준다.


B. 소련의 입장 - 현상유지


  소련은 동북아시아에 조성된 거대한 힘의 공백상태를 어떠한 방식으로 처리하려고 했는가? 소련이 이에 관한 외교문서를 공개한 적이 없으므로 이 문제에 답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소련의 동유럽정책을 고래해 볼 때에 소련의 극동정책도 자국의 동부 국경선 주위에 자국의 안전에 기여할 정권들의 수립에 입각해 있었다는 것은 명확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은 만주와 더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 점은 소련의 극동지방 중심인 블라디보스톡이 한국의 국경에서 불과 70마일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또 블라디보스톡에 대한 해상공격이 있을 경우 군사기지로 사용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북한의 항구도시인 淸津과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추론의 이면에는 동북아시아에서도 “소련은 공간적 관점에서 안전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하는 가정이 깔려 있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만주와 한국이 소련의 “방어적 팽창”과 관련하여 그 목표물로 되는 것은 역사적으로 불가피했다. 왜냐하면 소련은 전통적인 유럽중심주의 전략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일본의 대륙침투 가능성에 대해 우려했었고, 그에 따라 만주와 한국을 일본의 대소공격의 교두보로 간주했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어떤 적대국이든 만주와 북한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 주요 목표였다.

 

  현상유지를 고집한 소련의 입장은 한국에 대한 소련의 실제적인 태도에서 추론될 수 있었다. 한반도 신탁통치에 대한 소련의 지지는 제2차 세계대전동안만이 아니라 그 뒤에도 계속적으로 표명되기는 하였으나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오히려 소련은 극동에서의 자국의 이해관계가 충분히 명료해짐에 따라 소련이 4분의 1의 권한밖에 갖지 못하는 통일관리와 신탁통치의 수용에 점차로 거부감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4. 미국과 소련의 주요 회담


◎카이로 회담

 

  카이로회담은 루스벨트가 중국을 강대국의 위치로 격상시켜 중국의 대일항전력을 진작시키는 동시에 전후 동아시아 세력관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즉 루스벨트는 민주적이고 친서방적인 안정된 중국이 건재해야만 일본이 항복한 이후에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전이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중국이 너무 약해져 전후 아시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면, 미국은 공산주의 저지라는 측면에서 너무 많은 책임을 떠맡게 되고, 그렇지 않으려면 일본을 패전 후에 또 다시 부활시켜 적절한 역할을 대행하게 해야만 했던 것은 분명하였다. 또한 전후 한국에서 국제신탁통치가 실시될 경우, 중국을 신탁통치국의 일원으로 포함시킨다면, 미국은 한반도문제 정책결정과정에서 통제가능한 동맹자를 확보하는 셈이 되어 결과적으로 수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카이로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전후 한국의 신탁통치에 중국을 참여시키기 위해 “중국은 한국과 만주의 재점령을 비롯한 광범위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을 대표한 장제스 총통은 즉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는 성명을 발표할 것을 주장하였다. 영국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한 적이 없었다. 1902년 이후 영국은 일본의 한반도 점령을 지지하여 왔으며, 회담 종료 후 발표될 선언문에 한국독립에 관한 성명이 포함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한국의 장래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으므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미국과 중국의 압력에 따라 한국문제에 관한 미국의 주도에 따르기로 동의하였다. 그러나 카이로 회담에 참가한 세 지도자는 한국인의 자치능력을 인정하지 않았고 `적당한 시기에‘ 라는 표현은 결국 루스벨트의 신탁통치구상의 간접적인 표현이었다. 루스벨트의 특별보좌관이던 홉킨스(H. Hopkins)가 1943년 11월 24일 작성한 초고에는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at the eirlist possible moment)라고 되어 있었으나, 영국과의 협의과정에서 다시 탁월한 문재(文才)를 지닌 처칠에 의해 이것이 좀더 세련된 용어인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로 최종적으로 마무리되었던 것이다. 결국 독립이 최고의 목표를 의미하는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가 독립 이전에 다른 조치가 있음을 내포하는 `적당한 시기에‘로 변경되었던 것이고, 이는 루스벨트가 평소 바라던 의도, 즉 신탁통치구상이 반영된 것으로서 어떠한 식민지국민도 후견기간(後見期間)이 없이는 자치능력을 가질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테헤란 회담


  루스벨트와 스탈린이 처음으로 대면한 것은 1943년 12월 테헤란 회담으로 처칠(Winston Churchill) 영국수상과의 3자 간에는 전후 러시아․폴란드․독일 간 국경선과 독일분할, 유엔 창설 등에 관한 대략적인 합의가 도출되었다. 이에 고무된 루스벨트는 스탈린을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지도자로 평가하고 자신의 대소련화합론의 가닥을 잡았다. 루스벨트의 대소련화합론은 기존의 대소련방어론이 제기했던 소련이라는 반자본주의․반자유민주주의 실체에 대한 부정, 문제회피, 타협은 아니었으나 일종의 우회전술, 또는 세계적 정치지도자로서 소련을 `다룰 수 있다‘는 자신감에 기초한 것이었다. 물론 그의 대소련구상은 유엔(UN)이라는 새로운 집단안전보장기구를 통한 전후 평화체제 구축의 일환이었다. 

 

 테헤란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극동 식민지지역의 국민들에게 자치능력을 교육시키는 문제에 대해 거론하면서 필리핀에서의 미국정책을 예로 들고, 한국은 완전한 독립을 수득하기 전에 약 40년간의 훈련기간을 거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였다. 스탈린은 카이로선언을 찬성하며, 한국은 독립되어야 한다고 부언하였다. 이에 따라 루스벨트는 테헤란을 떠날 때 이제 연합국들이 한국의 신탁통치안에 완전히 합의했다고 확신하면서 자신의 한국정책에 틀림없이 만족하고 있었다. 한편 테헤란에서 처칠 수상이 스탈린에게 부동항에 대해 질문하자 스탈린은 블라디보스토크가 부분적인 부동항이지만 일본이 지배하는 해협으로 봉쇄되어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에 대해 루스벨트는 다렌이 자유항으로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스탈린은 제정 러시아 때와 같이 일본이 지배하는 대한해협으로 통과하기 위하여 부산과 진해를 점령할 계획이 있으면서도 침묵을 지켰던 것이다.


◎얄타 회담


  1945년 2월에 있었던 얄타 협정은 소련군을 태평양전쟁에 개입시키기 위하여 지불한 대가라고 할 수 있다. 얄타 협정의 밀약사항에 나타난 것과 같이 소련은 1904년 이전에 만주에서 갖고 있던 권한을 모두 회복하였다. 극동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확장됨에 따라 한반도도 소련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러일전쟁 발발 전에 한반도는 러․일 간의 완충지대 였다는 사실이다. 1896년 체결된 로바노프-야마가타 협정(Lovanov Yamagata)에 의하여 39도선을 경계로 한국은 러․일의 공동보호하에 있었다.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은 소련의 대일 참전시기를 대독승리일(V. E. Day) 이후 3개월 이후라고 루스벨트에게 약속했고, 루스벨트는 스탈린의 참전 조건을 전부 받아들였다.

 

  1945년 2월 8일 얄타 회담 때 리바디야궁에서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한반도 문제를 토의하였다. 루스벨트는 한반도를 미․소․중 삼국대표로 구성된 신탁통치위원회 관리 아래 둘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 스탈린은 신탁통치기간이 짧을수록 좋다고 말하고 한반도에 외국군을 주둔시킬 것인가에 대해 질문했다. 루스벨트는 이에 대해 부정적인 답변을 하고 스탈린도 이에 동의하였다. 얄타 회담 때 스탈린에게 있어서는 동북아에서의 소련의 국가안보를 보장하는 것이 한반도의 신탁통치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 주소 미국대사였던 해리먼(Averill Harriman)에 의하면 스탈린은 한국신탁통치문제에 대해 냉담(Cool)했다고 한다. 또한 신탁통치 기간 중 한국에 외국군대의 주둔을 스탈린이 반대한 것은 그가 제2차 세계대전 후 한국에서 공산주의와 소련에 대해 상당한 대중적 지지가 있을 것을 기대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얄타 회담 동안 스탈린은 소련의 대일참전을 희망하고 있는 미․영의 추약한 점을 이용하여 소련이 원하는 것을 대부분 얻어냈다. 2월 8일 루스벨트와 스탈린이 회담할 때 스탈린은 한반도에 대해서 구속받을 공약을 회피하였다. 스탈린은 1944년 12월 해리먼 미국대사와의 회담에서 만주를 소련군이 공격할 때 나진(羅津)과 청진(淸津)이 소련군 작전선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통보하였다. 곧 대일전에 붉은 군대가 참전할 때 유리하도록 스탈린은 구속받을 공약을 회피하였다.


◎포츠담 회담


  미 국무성은 포츠담을 위한 준비서를 마련하였다. 카이로 선언만 기지고는 한반도에 위성국 정권을 수립하는 것을 막을 수 없으므로 `잠정적 국제행정기구‘(interim international supervisory administration)의 창설을 기약하는 미․영․소의 합의문제가 필요하다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측은 정작 포츠담 회담에서 식민지문제에 과민반응을 보였던 영국의 태도 때문에 이 안을 회의에 상정하지도 못했다. 포츠담 회담은 결국 모든 신탁통치에 관한 문제를 후일 외상회담(Council of Foreign Ministers)으로 미루어버렸다. 또한 포츠담 회담에서 트루먼이 한반도 신탁통치에 관한 소련의 의사타진을 거론치 않은 데에는 핵폭탄실험의 성공이라는 요소가 있었다 핵능력을 가지게 되었던 미국으로서는 소련의 태평양전쟁 참가가 더 이상 긴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의 요청이 없더라도 자국의 이익이 존재하는 한 소련이 대일전에 참가치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따라서 미국은 외교적 지연전술을 쓰는 한편, 소련의 참전 이전에 일본이 항복하게 되기를 고대하는 편이 유리하다는 생각에서 포츠담에서는 만주와 한국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핵폭탄이 사용되어 일본이 조기항복하게 된다면 소련이 참전의 기회를 잃은 상태에서 전쟁이 끝나게 되며 대소 흥정은 필요가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의 항복이 임박하자 소련은 얄타회담에서 양해된 참전 대가, 즉 사할린, 쿠릴 열도 그리고 만주에 대한 이권과 미국의 토의 지연정책으로 인해 생겨난 보너스, 즉 한반도에 있어서 패권확립의 기회를 위해 조속히 참전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소련은 만주에 관해 중국과의 협상이 타결된 후에 참전하겠다는 원래의 공언도 묵살한 채 얄타회담에서 양해되었던 대일 참전일(독일 항복일 이었던 5월 8일 이후 3개월 이후)이 되는 8월 9일 대일본 선전포고를 발표했고, 만주공격과 거의 동시에 나진(羅津)항에 대한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소련군의 재빠른 한반도 진입은 미국정부를 놀라게 만들었다.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38도선의 획정이었다.


◎38도선 확정


  미 군부는 아시아 대륙에 상륙하지 않고도 소련군 참전 이전에 일본을 패전시키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으로 미국은 8월 6일 원자탄을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미국의 전략을 감지한 소련축도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9일부터 만주와 북한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8월 9일 청진(淸津)과 나진(羅津)에서 소련군과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전개되었다. 8월 15일 경으로 예측되고 있던 소련군의 참전전에 종전시키려 한 트루먼의 정책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8월 10일 일본은 항복을 확정지었다. 38도선은 당초부터 민족분단선으로 그어진 것은 아니었다. 전승국 미․소 양군이 각기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무장해제할 구역을 획정하기 위해 미국이 일방적으로 긋고, 소련이 이에 동의함으로써 이루어진 하나의 경계선이었다. 전쟁중에 연합국들은 전쟁이 끝난 뒤 한반도에 대해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것에는 합의하였으나, 한반도를 몇 개 지역으로 분할해서 신탁통치하겠다는 내용은 물론 아니었다. 따라서 미․소 양군의 한반도 분할점령이 이후 한반도 분단의 한 가지 전제조건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38선의 획정과 분할점령 자체가 곧 한반도의 장기간 분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얄타회담에서 한반도 신탁통치에 합의할 때도 그랬지만 그후의 포츠담회담 때까지도, 연합국들은 일본의 항복과 더불어 미․소 양군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다는 계획을 구체적으로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바로 한반도로 진격하는데 미군은 아직 오끼나와에 있어서 일본의 큐슈나 조선의 제주도에 상륙할 형편이 못되는, 다시말하면 미군이 한반도에 먼저 상륙하여 소련이 한반도 전지역을 점령하는 것을 방지할 상황이 못되는, 그런 시점에 일본이 항복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미․소 양군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을 구역을 가르는 분계선으로서 38도선 같은 것이 미리 설정되거나 또 그 설정이 계획되지도 않았다. 38도선은 그후의 상황 변화, 즉 미군의 최전방부대가 아직 오끼나와에 있고 빠른 시일 안에 한반도에 상륙할 수 없는 상태에서 소련군이 대거 한반도로 진격하고, 일본이 소련군의 홋까이도 상륙을 막기 위해 재빨리 항복한 상황에서, 미국에 의해 급히 그어진 것이다.


◎모스크바 3상회의


  전쟁 중 얄타회담에서 최종적으로 한반도 신탁통치안에 합의했던 미․영․소 등 연합국은 그후에 일어난 한반도 상황, 즉 38도선 획정과 미․소 양군의 분할점령 상태를 기반으로 하여, 한반도문제를 포함한 세계대전 후의 제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모스크바 3상회의를 열었다.(1945. 12.16~26) 이 회의에서 제시된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안은 미국안과 소련안 두가지가 있었다.

 

  먼저 미국안을 보면 1인의 고등판무관과 미․영․중․소 4개 신탁통치국 대표로 구성되는 집행위원회가 조선인을 행정관․상담역․고문 등으로 사용하면서 조선이 독립할 때까지 행정․입법․사범적 통치권을 행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신탁통치 기간은 5년으로 하고 필요하면 5년을 더 연장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소련안은 장차 조선독립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민주적 조선 임시정부를 수립하되, 이를 위해 미․소 양군 대표로 공동위원회를 구성하며, 그 동동위원회가 조선의 민주적 정당․사회단체들과 협의해서 임시정부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임시정부가 5년간 4개 연합국의 감독을 받으면서 한반도 전체를 다스린다는 안이었다.

 

  미국안은 연합국 대표로 구성되는 집행위원회가 통치권을 가지는 데 비해, 소련안은 조선사람으로 구성되는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그 정부가 미․영․중 등 자본주의 3개국과 1개 사회주의 국가 소련을 합친 4개 연합국의 감독 혹은 후견을 받으면서, 5년간 한반도를 통치하는 것이었다. 3상회의에서는 결국 조선인이 임시정부를 구성하여 신탁통치를 받게 하는 소련안이 채택된다.


 

5. 통일민족국가 수립에 실패한 과정


  일본제국주의 패망 후 전승국간의 한반도문제 처리과정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은, 사실상의 최고 권위의 결정이었다. 그러한 회의에 좌우익을 막론하고 우리 민족의 어느 한 사람도, 대표는 고사하고 참관인 자격으로도 참석하지 못한 상태여서, 연합국들이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려버린 것이다. 우리 민족은 35년간 줄기차게 민족해방운동을 계속했으면서도, 해방 후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는 최고 권위의 국제회의에 민족구성원 중 한사람도 참가하지 못했으며, 때문에 그 내용조차 정확하게 전달 받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민족적 비극이 싹텄다고 할 수 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국내에 처음 전해진 것은 그해 12월 27일 이었다. 28일자 『동아일보』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국은 카이로선언에 따라 조선을 즉시 독립시키고, 그 정부 형태를 국민투표로 결정하자고 한 데 반해, 소련은 남북 두 지역을 통틀어서 한 나라가 신탁통치할 것을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전쟁이 끝난 뒤 조선에 신탁통치를 실시하자고 먼저 주장한 쪽은 미국이었고 영국과 소련이 이에 따랐다. 그리고 신탁통치 기간을 길게 잡은 쪽도 미국이었다. 그런데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국내에 처음 전달한 신문은,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이 반대한 것처럼 보도한 것이다. 다음해 (1946) 1월 하순, 신탁통치를 먼저 제안하고 그 기간을 길게 잡은 것이 미국이었음을 소련이 해명했고, 그것이 국내에 전해지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동아일보』의 당초 `오보‘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가진 두 가지 초점 중 하나만을 강조하는 결과가 되었다. 즉 남북 전체를 통치할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38도선을 해소한다는 점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5년간 연합국의 신탁통치를 받는다는 점만이 일반 국민들에게 부각된 것이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은, 첫째 한반도에 남북을 통일한 임시정부를 만들어서 38도선과 미․소 양군의 분할점령 상태를 해소하고, 둘째 수립되는 남북통일 임시정부가 미․영․중․소 등 연합국의 감독 과 원조 내지 후견을 받으면서, 5년간 한반도 전체 지역을 통치하다가, 총선거를 실시하여 국민의 지지를 가장 많이 받은 정치세력에게 정권을 넘겨줌으로써, 한반도에 완전한 독립국가가 수립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오보’는 소련이 주도적으로 한반도 전체를 신탁통치 하려는 것처럼 국민들이 인식하게 하여, 반소․반공 분위기가 높아지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오보‘ 때문에 3상회의 결정이 전해지자마자, 미․소 양군의 분할점령을 극복하고 남북 전체를 포괄하는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38선을 철폐하는 문제보다, 즉시 독립이 아니고 5년간 신탁통치를 받아야 하는 점이 더 크게 부각되고 강조되어, 반탁운동이 크게 일어나게 된 것이다.

  

  신탁통치 반대 분위기에 부딪친 미군정의 하지(J.R Hodge) 사령관은 기자회견을 하고 좌우익 정당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신탁통치가 원조와 협력을 의미하며, 38도선을 철폐하고 남북통일정부를 세우는 최선의 방법임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신탁통치 기간에도 통치권은 조선임시정부가 가진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신탁통치라는 용어 대신 원조․지원․자문 이라는 용어가 타당하다고 하였다. 또 미국정부도 남한의 미군정에 신탁통치의 참 뜻을 조선인들에게 설득하는 방안을 지시했다. 그 내용은, 신탁통치가 남북 두 지역을 즉시 통합하는 조치라는 점, 미소공동위원회가 조선 민주주의 단체들과의 협의를 통해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조속히 수립하는 방안이라는 점, 신탁통치 조건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앞으로 수립 될 조선임시정부와 협의하여 결정한다는 점, 신탁통치 기간은 길어도 5년이라는 점이었다.

 

  미국정부와 미군정 양쪽이 모두 처음에는 3상회의 결정이 남북 전체를 포괄하는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38도선을 철폐하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38도선을 없애고 5년간 신탁통치도 안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는가, 38도선을 없애기 위해 5년간 신탁통치를 받는 것이 옳은 일인가, 5년간의 신탁통치를 안 받으려 하다가 38도선이 그대로 민족분단선이 되게 할 것인가 등 몇가지의 엄중한 선택이 이 시기의 민족사회 앞에 놓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조선에 신탁통치를 실시하기 위한 남북통일 임시정부를 수립하고자 개최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1946.3.20)는, `공동성명 제5호‘를 발표했다(4.18). 그것은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할 정당․단체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수락한다는 선언서에 서명하는 정당․단체에 한정한다는 내용이었다. 다시말하면 미소공동위원회는 5년간의 신탁통치를 수락하는 정당․단체하고만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협의 하겠다는 것이었다.

 

  좌익세력은 3상회의 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한다고 하여 문제 될 것이 없었으나, 신탁통치를 반대한 우익세력들이 문제였다.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한다 해도 거기서 주도권을 쥘 수 있을지가 문제였지만, 신탁통치를 수락하지 않는 이상 공동위원회의 협의에도 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협의대상이 되지 못하면 임시정부에 참가할 길이 막히게 되는 것이다. `공동성명 제5호‘에 대한 우익세력의 대응을 세분하여 보도록 하겠다. 임정 우파 중심의 한국독립당은 선언서에 서명하는 일 자체가 신탁통치를 수락하는 것이라면서 서명을 거절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비해 한민당은 임시정부에 참가한 후 신탁통치를 반대한다는 방법을 택했고, 이승만은 찬․반탁을 막론하고 공동위원회의 협의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족혁명당계이면서도 임정에 남아있던 김규식은 `공동성명 제5호’를 지지한다고 하였다. 우익 쪽의 대응이 이렇게 나타나자 소련은, 반탁운동단체를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공동위원회에 초청하기를 거부했다. 미국은 반탁운동도 자유로운 의사표시의 한 방법인 만큼 참가를 봉쇄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반탁단체 초청 문제뿐만 아니라 초청단체 수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미국이 제출한 남쪽 20개 초청대상 단체에 대해 소련은 좌익단체의 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소속 정당․단체는 3개뿐인 반면, 우익단체 연합체인 `대한민국대표 민주의원‘ 소속 정당․단체는 17개나 되는데, 이들은 모두 3상회의 결정을 반대하는 정당․단체라는 점을 지적했다. 또 60만명의 회원을 가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30만명의 회원이 있는 조선부녀총동맹, 65만명의 회원을 가진 조선민주청년동맹, 회원3백만명의 전국농민조합총연맹과 같은 단체들이 빠졌다는 점도 지적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소련이 제출한 북쪽의 정당․단체에 우익단체가 포함되지 않았다고 대응했다. 그리고 소련이 빠졌다고 지적한 남쪽의 단체는 공산주의 극렬분자가 실제 수를 과장하여 주장하는 파괴적 폭력단체일 뿐이라고 맞섰다. 미국은 합의를 이루기 어려운 임시정부 수립 문제에 앞서 38도선 철폐 문제와 남북의 경제적 통일 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의했다. 이에 대해 소련이 38도선 문제는 장차 수립될 임시정부에서 다룰 문제이며, 경제문제는 3상회의의 결정사항이 아니라고 맞섬으로써, 결국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고 말았다.(1946.5.6)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우익세력 일부가 남한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펴 나갔다. 한편 미․소 양국이 제2차 공동위원회를 열기 위한 교섭을 벌이자, 우익진영은 다시 공동위원회 참가를 거부하면서 대대적인 반탁운동을 벌였다.

 

  그런 와중에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어(1947.5.21) 서울과 평양을 왕래하면서 어느정도 진전을 보이는 듯 했다. 그러나 소련이 공동위워노히 참가단체로 등록된 남쪽 425개 단체를 118개로 줄일 것을 요구하면서 다시 난관에 부딪혔다.

 

  공동위원회 참가를 신청한 정당․단체는 남쪽이 425개, 북쪽이 36개였는데, 이들 정당․단체에 등록된 회원총수가 약 7천만명이었다. 당시 남북 전체 인구의 두 배가 넘는 터무니없는 숫자였다.

 

  소련이 반탁운동 정당․단체와 회원 1만명 이하의 군소단체는 협의대상에서 제외할 것을 주장한 데 대해, 미국은 반탁운동 역시 `의사 표시의 자유‘라면서 소련의 제안에 반대하였다.

 

  미국은 정돈(停頓)상태에 빠진 미소공동위원회를 진전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미․영․중․소 4개국 회의를 요구하면서 보통선거에 의한 남북 각각의 입법기관 설치를 제의하였다. 그리고 그 대표들로 구성되는 통일 임시정부가 미․소 양군 철수 문제와 완전한 독립국가 수립문제를 4개국과 협의하게 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4개국 회의로 가져가는 것은 부당하며, 남북 별개의 입법기관을 구성하는 것은 남북의 분열을 조장하는 일이라 하여 거부하였다.

 

  이렇게 되자 미국은 소련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반도 문제를 자국 추종세력이 절대 우세한 유엔으로 이관했다. 이로써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고 말았다.(1947.10.21)


 

6.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과정


  미국은 1946년까지는 중국에서 국공합작 정책을 고수했고, 한반도에서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의한 대소련 협력노선에 따라 남북통일 임시정부 수립노선을 견지했다. 그러나 1947년 들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대소련 협력노선을 포기하고 봉쇄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도 종래의 중국 중심에서 일본 중심으로 바뀌면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확정되어 갔다.

 

  얄타회담에서 소련은 미국에 유럽에서 전쟁이 끝난 3개월 이내에 극동전쟁 즉 대일본전에 참가하기로 약속하면서, 미국으로부터 전쟁 후에 러일전쟁 때 극동지역에서 상실한 권리를 회복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지역으로 진격 할 때, 만주와 조선의 국경선을 폐쇄하여 만주의 일본군이 본국으로 귀환하는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조선의 주요 항구를 점령한다는 계획이 있었다. 소련군은 나진, 청진을 점령한 후 일본의 항복 발표 후에도 소련군 참모본부는 전투정지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따라서 일본과의 전투행위는 계속되었다. 한편 소련군 미점령지역에서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협력에 의한 조선인 자치조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소련군 당국은 `스탈린 지령‘을 시달하여 미군 진주에 앞서 각 지방에 인민위원회를 성립시켜 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남한에서는 이승만 정권이, 북한에서는 김일성 정권이 수립되어 우리나라의 분단을 가져오게 되었다.


 

3. 결론


  1945년부터 48년 사이의 이른바 `해방정국‘은 미․소 양군이 각기 남과 북으로 진주하여 직접으로든 간접으로든 군정을 펴나감으로써 남북 간의 대립구도를 원초적으로 형성한 시기이다. 남쪽에서는 미국이라는 외압력이, 북쪽에서는 소련이라는 외압력이 힘의 축을 주도하게 되었던 미소군정하에서는 내부로부터 왕성하게 제기되었던 갖가지의 건국구상과 그에 따르는 힘의 결집작용까지도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역학관계의 동태 속에서 각기 자국에 우호적․추수적(追隋的)인 정부의 수립을 선호하는 미국과 소련에 영합하는 방향에서 배타적으로 이원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이러한 상황이 한반도 위에서 동시에 충족되기 위해서는 이질적인 두가지의 체제가 동시에 수립되는 민족적 모순의 극대화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남북한에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하는 두 개의 정권이 수립되었고, 이에 따라 8․15 민족해방도 주관적으로는 민족 최대의 희생이 대가를 치른 `쟁취적 해방’이었지만 객관적으로는 연합국에 의하여 `주어진 해방‘으로 현실화되었다가 급기야는 분단체 연합국에 의하여 `부정된 해방’으로 변질되고 말았던 것이다.

 

  해방정국이 전개되고 있었던 당시는 우리 민족의 선택적 의지와는 상관없이 미국과 소련이 남과 북을 나누어 점령하고 있었던 때이며, 따라서 그러한 외세에 의한 힘의 작용이 우리 민족의 생존조건을 압도적으로 규정하게 되었던 때이다. 이 때문에 우선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 대해서 각기 어떠한 정책을 펴나갔는가 살펴보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결과 더불어 급격하고도 큰 폭으로 몰아닥친 사회․경제적 격변과 충격도 긴급한 민생문제의 해결, 나아가서는 한 시대를 새롭게 열기 위한 제도개혁의 성취여부와 깊이 상관되었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분석의 중요성 또한 과소평가할 수 없는 일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각기 남한과 북한에서의 점령외세의 대한반도정책, 사회․경제적 상황을 역사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종합적인 역사상을 구축하여야 하겠다.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의 근간은 신탁통치안(trusteeship)으로 루스벨트 대통령의 전쟁 이후 신세계질서 구상의 일환이었다. 이 정책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반영되었고, 집단안전보장의 개념이 포함되었으며 미국 중심적인 정치․경제체제 우월주의의 표현이었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그리고 전후에 있어서 한반도를 동유럽과 동일하게 국가 안보상 중요지역으로 보았다. 따라서 주축국으로부터 해방시킨 후 민족․공산 세력의 연합정권을 수립, 점차 공산당이 이끄는 사회주의 위성국으로 만든다는 적극적․혁명적인 정책을 구체적 행동계획으로 치밀하게 수립하여 소련군의 북한 진주와 함께 체계적으로 실천에 옮겼다. 때문에 소련의 대한반도 정책은 우리나라의 분단의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소련 역시 처음에 한국의 즉시독립을 주장하였다. 이미 한국사회를 장악하고 있던 것은 좌익이 주축이 된 인민위원회였고 민족주의세력도 힘이 있는 이들은 중도좌파에 속해있는 인물들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소련에 우호적인 정부가 수립되리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미 미소가 분할점령한 상태에서 미국이 그런것에 응할리가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외교적인 방법으로 자국의 이익을 실현하려했고 그런 상황에서 삼상회의가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미국은 미․영․중․소 주도의 신탁통치안을 실시한다는 것을 얻어내었다. 미국은 자본주의 진영대 공산주의 진영이 3대 1이라는 것을 높게 봤던 것이다. 반면 소련은 그것을 양보한 대신 한국임시정부의 참여를 확정지어 나름대로 이익을 챙겼다. 한국임시정부의 구성은 좌익이 강세일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삼상회의 결정은 양국의 이익이 교묘히 배합된 것이었다.

 

  신탁통치안을 처음 주장한 미국조차 어떤식으로 이루어질 것인가를 몰랐지만 어쨌든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의문은 통과되었다.

 

 결의문을 살펴보면 미소공위 설치, 국내 제 정치단체들과 협의, 임시정부수립, 임정참여하의 신탁통치방안 협의, 미소의 확정의 순서대로 진행될 것이었다. 즉 외국군에 의한 점령통치가 아니었던 것이다. 소련이 처음에 생각한 것처럼 미소의 후견하에 임시정부의 주도로 나라가 운영될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 찬탁반탁의 문제는 임시정부가 수립된 다음의 문제였는데 거센 반탁운동 속에서 이런 점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임시정부가 수립되면 어떤 형태로든지 일관성 있는 의견을 더욱 영향력있게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즉시 독립에의 강한 열망은 삼상회의 결의를 좀더 객관적으로 보기 힘들게 하였고 이를 악용하여 득세한 민족반역자들에의해 결국 폐기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미소가 너무도 불안정한 국내정세를 보고 결의 당시부터도 가변적이었던 신탁통치안을 계속 추진하기보다는 이미 확보한 자국의 세력을 더욱 공고히하는 것을 택한것은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탁치안의 지지목적도 결국은 자국에의 우호적 정부수립이었고 단정수립으로도 그 목적은 충분히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국내외정세에 따른 한반도 분단의 원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고 생각된다. 

 

1. 미대통령 루즈벨트의 이상주의, 국제주의와 식민지 독립 문제에 대한 연합국의 반발 : 신탁통치안으로 귀결

2. 미국의 한반도 지정학적.전략적 가치의 부정적인 인식 및 태평양 방어선에서 배제 : 필리핀-일본 얄도를 연한 방어선 설정

3. 소련의 남진야욕과 위성국화에 대한 미국의 위기 인식 부족 : 미군 피해 최소화를 위한 소련의 대일참전 적극적인 요구

4. 임시정부 및 미주 독립단체의 정통성 미흡 과 내부 분열상의 부정적인 인식 : 임정 불승인, 자치능력 전무, 신탁통치 불가피

5. 중국의 소극적인 한반도 정책 : 국공내전으로 한반도 친중정권 수립 국제정치적 여력 상실, 미국의 요구에 순응

6. 일본의 조기 항복 : 미군의 한반도 진주 지연 및 소련의 대일선전포고 및 신속한 만주, 북한 진주  --> 38도선 경계선 제안, 소련의 승인

7. 한반도(조선)를 일제의 일부로 인식 : 미국 정계 분위기

8. 좌파 세력의 국내확산 및 해방 정국 권력 장악

9. 체제와 사상이 다른 동맹국의 신탁통치안의 불안정성 미인식 

10.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군도 좌우익이 분열과 주도권 싸움으로 한민족 분열상 표출 : 자치능력 상실 인식 팽배 

 

 

즉 분단의 원인이 어느 한두가지 원인이 아니라 시대적으로 복합적이며 다양한 요인이 같이 작용하였고 한국인 스스로도 분단의 책임이 있다는 점을 부정하기 힘들다. 결국은 강대국의 세력확장 정책에 한반도가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는 결론이다. 이는 우리들이 힘이 너무나 미약하였고 내부적으로 갈등관계가 상존하였으며 좌익 세력의 확산 등으로 민족이 단결하지 못했고 자주적인 해방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 크림사태를 보듯이 강대국에 의한 팽창정책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행되고 있으며 관련돤 국가와 정권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 힘을 키우고 단결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한반도는 또다시 불행한 역사의 과오를 되풀이 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