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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45 : 해방과 건국 5 (모스코바 삼상회의와 민중의 항쟁 1)

 

 

 

한국의 역사 1,045 : 해방과 건국 5 (모스코바 삼상회의와 민중의 항쟁 1)

 

 

 

              

 

 

모스코바 삼상회의와 민중의 항쟁 1

 

 

1. 모스코바 삼상회의와 좌우의 대립

 

모스코바 삼상회의

미.영.소 연합군은 1945년 12월 16일에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려고 모스코바에서 외상회담을 열었다. 미국은 한반도 전후 처리 방안으로 미.영.중.소 대표들이 사법.입법.행정 등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신탁통치를 실시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소련은 한국의 정당.사회단체와 협의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한 다음 이를 통해 4개국이 원조한다는 안을 내놓았다.

 

1945년 12월 27일 미.소는 두 가지 안을 절충.수정하여 모스코바 삼상화의 결정안을 확정했다. 모스코바 시간으로 12월 28일 아침 6시, 삼상회의 조약문이 발표되었다. 모스코바 결정안의 핵심은 조선을 독립국가로 만들려면 먼저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임시정부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돕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신탁통치는 새로 수립될 임시정부와 협력하여 최대 5년 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탁통치는 임시정부가 거부하면 실시하지 않을 수도 있는 조항이었다.

 

모스코바 결정안은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반씩 점령하고 있는 조건에서 두 나라가 합의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카이로회담에서 규정했던 '적당한 시기'를 '5년 이내'로 구체화시켜 미소가 합의했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따라서 처음에 태도 표명을 머뭇거리던 좌익은 1946년 1월 3일 모스코바 결정안 지지로 돌아섰다.

 

우익은 모스코바 결정안 소식이 전해지자 곧바로 반탁 견해를 보이면서 반대운동을 시사했다. 모스코바 삼상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한민당의 기관지라 할 수 있는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 27일자 머리기사에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정령"이라는 제목으로 모스코바 삼상회의의 한국 관련 내용을 처음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이것은 미소이 주장을 거꾸로 보도했을 뿐만 아니라 결정서 내용을 왜곡한 것이었다. 12월 16일부터 모스코바에서 열린 미.영.소 3개국의 외무장관 회의는 모스코바 협정을 맺고 27일 끝났다. 이때 <동아일보>는 회담 진행 중에 동경의 맥아더 사령부에서 미군을 상대로 발행하던 <태평양 성조기>라는 미국 신문을 인용하여 28일부터 30일까지 사흘 동안 잇달아 신탁통치 기사로 가득 메웠다.  심지어 <태평양 성조기> 신문에 실린 12월 27일자 기사를 인용.번역하면서 동아일보는  마치 워싱턴의 통신사로부터 수신한 것처럼 꾸몄다. 특히 30일자에는 '탁치 반대!! 독립 전취!!, 임정 지휘로 국민총동원위원회 설치', '최후의 1인까지 투쟁하자', '3천만이 살았느냐? 독립전선에 생혈을 뿌리자!'면서 반탁투쟁을 부추겼다.

 

모스코바 삼상회의 결정안 전문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미 남한에서는 반소 부위기가 팽배해졌고 우익은 모스코바 삼상회의에서 소련이 산탁통치안을 주장한 것은 조선을 소련의 연방으로 만들려는 속셈이라고 선전했다. 또 모스코바 결정을 지지하는 좌익은 조국을 소련에 팔아먹으려는 매국노라고 공격했다. 이것이 우익은 '모스코바 삼상회의 결정=신탁통치=소련의 적화야욕'이라고 선전하면서 좌익을 몰아붙였다. 미군정은 우익이 이끄는 반탁운동을 묵인하거나 후원했다. 이 과정에서 반탁대열에 적극 나선 부일협력세력들은 민족감정에 편승화여 하루아침에 애국자로 변신했다.

 

모스코바 결정안은 미.소가 합의한 구체적인 독립방안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조건 없이 곧바로 독립하기를 바라는 조선 민중의 정서에는 맞지 않았다. 일반 대중은 4개국 신탁통치는 한국이 제2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우리 민족이 자치능력이 없어서 신탁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것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따라서 '모스코바 결정안이 국제 정세에서 가장 합리적인 해결방안이다' 라는 좌익의 설명은 일반 대중을 설득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대중의 이런 정서를 이용하고 사실을 왜곡 보도하여 대중을 반소.반공의 소용돌이로 몰고갔다. 모스코바 삼상회의 내막을 알고 있던 미군정도 왜곡 보도를 내버려 둠으로써 사실 보도가 되었을 때 자신에게 돌아올 반탁운동의 화살을 소련에게 돌리는 정치적 효과를 거두었다.

 

 

 

국민회의와 민전의 결성

우익은 반탁운동을 벌여 가면서 세력을 넓혀 나갔다. 삼상회의 결정이 알려지자 김구의 임시정부 세력이 반탁운동에 앞장섰다. 1945년 12월 28일 임시정부 세력은 반탁 결의문을 채택하고,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의'를 결성했다. 국민총동원위원회의는 '찬탁=반역자'로 규정하면서 임시정부의 위상을 높이는 데 힘을 기울였다. 29일에는 우익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신탁관리 배격 각 정당 각 계층 대표회의'를 열고 '임시정부 봉대'를 주장했다. 서울 시내 경찰서장들도 반탁을 결의했다. 1946년 1월 4일 김구는 과도정권을 수립할 '비상정치회의'를 곧바로 소집할 것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미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있다는 구실로 비상정치회의 소집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다가 마침내 김구 세력과 힘을 합쳐 1946년 2월 17일 '비상국민회의'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김원봉, 성주식, 김성숙 등은 비상국민회의가 좌익과 논의하지 않고 우익세력만의 이해만을 앞세워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비상국민회의에서 탈퇴했다.

 

조공을 중심으로 한 좌익은 모스코바 결정안이 조선을 곧바로 독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5년 동안 신탁통치를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태도를 결정하는 데 머뭇거렸다. 그러나 조공은 모스코바 결정안의 핵심이 신탁통치가 아니라 '조선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1946년 2월 15일 모스코바 결정안을 지지하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그리고 임정의 진보좌파인 김성숙(해방동맹), 김원봉(민족혁명당) 등은 우익의 국민회의에 맞서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결성했다. 민전은 국제협력노선에 기초한 모스코바 결정안을 관철하여 조선이 자주독립을 실현하려고 했다. 민전은 곧 조직을 정비하고 모스코바 결정안의 내용을 대중에게 선전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모스코바 결정안을 계기로 좌익과 우익은 서로 국민회의와 민전으로 모여 반탁과 찬탁으로 나뉘어 대립하기 시작했다.

 

 

 

2. 미소공동위원회와 좌우합작운동

 

미소공동위원회

모스코바 결정안을 둘러싸고 좌.우익이 대립하는 가운데, 1946년 3월 20일 서울에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가 열렸다. 미소공위는 어느 정당과 단체를 회의에 참여시킬 것인가를 놓고 처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소련은 모스코바 결정안에 반대하는 정당.단체와는 협의를 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구실로 소련 측 주장에 반대했다.

 

협의대상 문제에서 비롯된 미.소의 의견 대립은 그 뒤 소련이 한발 양보하여 4월 18일 공동성명 5호를 발표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찿았다. 공동성명 5호는 "지금까지 반탁투쟁을 해 왔어도 삼상회의 결의에 지지를 표명하는 사인을 하면, 지난날의 반탁행위를 묻지 않고,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협의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내용이었다.

 

공동성명 5호의 타협안에도 불구하고 김구와 조소앙 등이 강하게 반발하자, 하지는 1946년 4월 27일 이 선언에 서명한다고 해서 그 정당이나 사회단체가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그 결과 우익의 각 정당 단체는 공동성명 5호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소련은 하지의 성명서가 공동성명 5호의 합의 내용에서 벗어난다고 문제 삼았고, 미국이 협의 대상으로 제시한 25개 정당.사회단체 가운데 좌익은 4개뿐인 것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했다. 끝내 미.소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5월 6일부터 휴회 상태에 들어가 격렬되고 말았다.

 

온 민족이 기대했던 미소공위가 협의 대상을 둘러싼 문제로 결렬된 것은 모스코바 결정안이 가진 한계 때문이었다. 미소는 모스코바 결정안을 통해 자기 나라에 우호적인 정부를 세운다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협상을 벌였다. 미소는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하면 타협하지 않으려 했다.

 

미소공위가 휴회되자 남한에서는 테러와 반소.반공 분위기가 높아졌고 지방을 돌고 있던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정읍 발언'을 통해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의 단정 발언에 좌익은 물론 한독당에서도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그해 말 이승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관리들과 만나면서 모스코바 결정안을 폐기하고 남한단독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했다.

 

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었기 때문에 미소가 타협하여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민전은 6.10 만세기념시민대회(1946.6.10), 삼상결정 1주년 기념대회(1946.12.27) 등에서 미소공위를 다시 열라고 요구하고 모스코바 결정안을 통한 통일국가 수립의 길을 계속주장했다.

 

그러나 미소공위 2차 회담이 1947년 5월 21일 덕수궁에서 열린긴 했지만, 협의대상의 좌우비율 문제를 합의하지 못하고 결렬되고 말았다.

 

 

 

좌우합작운동

모스크바 결정안을 둘러싸고 좌우대립이 계속되는 가운데 미군정은 1946년 4월부터 좌우합작을 구상했다. 미군정은 1946년 3월 '민주개혁'으로 북한에 사실상 사회주의적 정권이 들어선 것에 조급함을 느껴 남한에서 미국에 우호적인 정치세력을 확보함을 목적으로 좌우합작을 추진했다.

 

미군정은 조선공산당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좌우합작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미군정은 1946년 5월 19일 위조지폐를 만들었다는 '정판사 위조지페 사건'을 발표하면서 좌익세력을 본격적으로 탄압했다. 미군정의 탄압은 5월 18일 조공 본부 수색, 조공 기관지 <해압일보> 정간 처분, 7월 9일 전농 사무실 습격, 8월 16일 전평 서울 본부 급습, 9월 7일 박헌영.이강국.이주하 체포령, 같은 날 <조선인민보>, <중앙신문>, <현대일보>에 대한 정간 처분 등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조치들은 조공을 불법화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미군정은 조공 탄압과 함께 좌우합작을 명분으로 조공에서 중도좌파를 분리시키고, 중도좌파를 중도우파와 결합시켜 남한에서 안정적인 정치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이를 기초로 입법기구를 만들어 미소공위에서 미국의 입장을 강화하고, 단독정부를 세우는 기반으로 삼으려 했다.

 

한편 국내 정치세력이 좌우합작의 필요성을 느낀 것은 이미 1946년 1월 7일, '신탁통치' 문제를 앞에 두고 통합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조공, 인민당, 국민당, 한민당의 4당 대표가 '4당 코뮤니케'를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좌우합작 움직임은 미소공위를 둘러싸고 좌우대립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중도우파인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다시 일어났다. 좌우로 나뉘어 계속 대립하면 마침내 남북이 분단될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이 이 운동의 배경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좌우합작을 벌인 목표는 서로 달랐다. 여운형은 좌우합작을 통해 중단된 미소공위를 다시 열게 하고 그 과정에서 중도우파를 좌파로 끌어들인다는 생각이었다. 김규식은 중도좌파와 연대하여 미군정의 지지를 얻어 중도좌파 세력의 독자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좌우 양쪽에서 각각 5명의 대표를 뽑아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7월 초에서 10월 7일 사이에 좌우합작을 몇 차레 모색하였으나 신탁통치 문제, 토지와 주요 산업의 처리 문제, 친일파 처리 문제 등에서 서로 의견이 달라 끝내 결렬되고 말았다.

 

미군정은 자기들이 바라는 쪽으로 좌우합작을 이끌려고 뒤에서 조종했다. 미군정이 좌우합작을 지원한 것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입법의원)' 에 좌익을 참여시키려는 뜻이었다. 미군정은 친미세력의 기반을 마련하려고 과도입법기구인 '입법의원'을 구성하려고 했다. 선출 방식은 지역유지들을 통한 간접선거였다. 미군정은 이에 관한 법령을 1946년 8월 제정했다.

 

좌우합작위원회는 입법의원 구성에 참여함으로써 결국 성격이 변질되었다. 간접선거를 통한 선출된 의원 거의 우파들이었고, 합작운동보다는 남한단독정부 수립으로 기울었다. 입법의원은 1947년 1월 '신탁통치반대 긴급결의안'을 채택해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했다. 입법의원을 좌우합작에 활용하려던 좌우합작파는 오히려 그 터전을 잃고 물러나야 햇다.

 

1947년 6월 25일 미소공위 2차 회담이 열리자 좌우합작파는 '시국대책협의회'를 구성하는 등 안간힘을 썼지만 단정으로 흐르는 거센 물결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7월 19일 합작운동의 좌파 지도자인 여운형이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총격을 받아 숨졌다.

 

좌우 대결을 피하고 민족이 단결하여 통일임시정부를 세우려는 뜻에서 출발했던 좌우합작운동은 많은 한계가 있었다. 해방 정국에서 실질적인 힘을 갖고 있던 좌우합작운동은 많은 한계가 있었다. 해방 정국에서 실질적인 힘을 갖고 있던 조공과 이승만, 김구 세력을 뺀 좌우합작운동은 현실에서 성공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미군정은 명망가 출신의 중도 계열만을 대상으로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다. 이에 조공은 좌우합작운동을 미군정이 좌익분열정책을 펴는 것으로 규정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조공은 좌우합작 대신 1946년 8월부터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을 합작하는 데 힘을 쏟아 1946년 11월 23일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