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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1,044 : 해방과 건국 4 (미.소의 한반도 분할점령과 분단 2 )

 

 

 

한국의 역사 1,044 : 해방과 건국 4 (미.소의 한반도 분할점령과 분단 2 )

 

 

 

              

 

 

미.소의 한반도 분할점령과 분단 2

 

 

3. 소련의 한반도 정책

 

2차 세계대전 뒤 소련의 한반도 정책은 미국과 협조하여 한반도에 자기 나라에 우호적인 정부를 세운다는 것이 기본 방향이었다. 이는 미국의 '국제주의'와 비슷한 정책이었다. 따라서 미국과 소련은 전후 처리를 위한 회담에서 한반도를 20~30년동안 신탁통치한다는 구상에 합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의 한반도 정책이 미국의 정책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소련은 미국의 신탁통치안에 동의했으나, 식민지 자결권을 강조했다. 그래서 소련은 신탁통치보다는 독립이 더 낫다고 생각했으며,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하더라도 기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한반도가 소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후 한반도 처리 문제는 소련에게 중요한 관심사였다. 소련이 한반도 문제에 적극 개입하는 계기는 일본과 전쟁을 치르면서였다. 소련은 2차 세계대전 뒤 동북아에서 영향력을 확보하려고 사할린 열도와 쿠릴 열도를 넘겨받는다는 조건으로 참전했다.

 

소련은 1945년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에서 일본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소련군은 12일에는 웅기와 나남, 16일에는 청진, 22일에는 원산에 상륙하여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면서 남쪽으로 내려왔다. 소련군은 24일 평양에 들어왔고, 8월말에는 38선 이북 북한의 거의 모든 곳을 점령했다.

 

한반도에서 600마일 이상 떨어진 오키나와에 있던 미군은 소련군이 빠른 속도로 북한을 점령하자 당황했다. 미군은 불리한 상황을 만회하려고 8월 13일, 소련측에 미.소 두나라 군대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여 일본군을 무장해제하자고 제안했다. 미국이 걱정한 것과는 달리 소련은 아무런 의의도 제기하지 않고 38도선 분할점령안을 받아들였다. 소련이 이 같은 태도를 보인 까닭은 한반도를 혼자 점령할 때 생길 미국과 소련 사이의 긴장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련은 만주, 사할린, 쿠릴 열도를 주요한 전략 지역으로 판단했으며 한반도는 그 다음이었다. 소련은 유럽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도 반드시 미국과 협조해야 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한반도에서 미국과 갈등을 빗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소련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한반도에서 연합국 사이의 신탁통치를 거쳐 수립될 정부가 소련에 우호적이어야 된다는 막연한 인식만을 가지고 있었다.

 

 

4.소군정의 정책

 

소련은 북한에 들어와 군정을 실시했으나 여러 면에서 미군정과 다른 정책을 폈다. 소련군은 북한에 진주하면서 자생적으로 성립한 건준이나 인민위원회를 인정하고 북한 곳곳에 세워진 인민위원회에 차츰 행정권을 넘겨주기 시작했다. 도 차원에서 좌우연합으로 결성한 북한의 인민위원회는 소군정의 협력하면서 통치력을 유지했고 친일 청산도 빠르게 진행했다.

 

해방 뒤 북한에서는 이미 사회주의자들이 활발하게 정치활동을 하고 있었다. 국내에 있었던 사회주의자들은 건준 지부나 인민위원회에 참여했고 도 차원의 지방당도 건설했다. 평남에서는 현준혁.김용범 등을 중심으로 조공 평남지구위원회를 결성했으며, 함남에서는 정달한.오기섭 등이 그리고 원산에서는 이주하가 활동하고 잇었다.

 

초기 소군정에는 민족주의자들도 활동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정치세력으로는 평안남도에서 조만식이 주도하여 결성한 조선민주당(조민당)이 있었다. 조만식은 일제 식민지 시기 친일파로 변절하지 않은 민족자본가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었다. 이러한 민족주의세력은 소군정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면서 세력을 넓혀 가고 있었다.

 

대한정책의 기본 방침인 '스탈린 지령'(1945.9.20)에 따르면, 소련은 북한에서 비소비에트 정권과 반일적 민주정당 연합에 의한 민주주의 정권 수립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민당 등 민족주의자들의 활동을 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스코바 삼상회의 결정이 전해지고 조민당 등이 반탁운동을 벌이자 소련은 조만식의 조민당을 권력에서 배제했다.

 

소련군이 진주할 때 김일성 등 항일무장투쟁 세력도 함께 귀국하여 공산당 조직이 확대되었다. 1930년대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항일연군 안의 조선인무장투쟁 세력으로 활동하다가 1940년 8월 소련 영내 소련군 국제여단인 88연대 소속이었던 이들은 그 뒤 북한정권을 수립하는 데 핵심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미소가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기 때문에 서울의 중앙당은 북한의 공산당 조직을 지도하기 어려웠다. 이에 따라 북한에서는 1945년 10월 10일 '조선공산당 서북5도 당원 및 열성자 연합대회'를 열고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창설했다. 그러나 북조선 분국은 이름과 달리 서울에 있는 당 중앙의 지도를 받지 않고 소군정의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독자적으로 북한에서 혁명을 진행시켜 나갔다.

 

 

 

5.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 민주개혁

 

해방 뒤 북한에서도 남한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역마다 인민위원회를 만들어 활발하게 활동했다. 지방 인민위원회는 행정권을 장악하고 치안을 유지하며 공공기관과 산업시설을 인수하여 운영했다. 지방마다 인민위원회들이 체계적으로 조직되어 강화됨에 따라 1945년 11월 19일 북조선 행정 10국이 조직되었다. 행정 10국은 각 도를 연결하면서 경제.문화활동.보안사업을 조절하는 역활을 했다.

 

1946년 2월 8일 각 정당.사회단체 대표와 지역 인민위원회 대표가 모여 북조선임시인민민위원회를 결성했다. 이 조직은 통일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임시 중앙권력기관의 역활을 했으며, 위원장은 김일성, 부위원장은 김두봉이 맡았다. 임시인민위원회는 "북조선에서 반제.반봉건적 민주혁명을 완수하고 인민민주주의제도를 확립함으로써 북조선을 강력한 혁명적 민주기지로 만들" 목적으로 일련의 '민주개혁'을 실시했다.

 

북한은 모스코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고 있는 동안 민주개혁을 서둘러 단행했다. 북한은 미.소가 합의하여 임시정부를 세우기 힘들다고 여기고 북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필요한 물적 기초를 확립하려고 했다. 그것은 남한에 우파 정부가 들어설 것을 대비하여 북한만이라도 좌파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뜻이었다. 만약 미소가 합의하여 임시정부를 구성한다면, 임시정부에 참여할 좌익세력과 정치 기반을 확고히 하려는 뜻도 있었다. 좌익은 토지개혁과 주요 산업의 국유화가 큰 줄기였다. '민주개혁'을 통해 조선민주당 등 북한 우파정치세력의 기반을 제거함으로써 임시정부가 구성될 때 주도권을 잡으려고 했다.

 

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3월 5일, '북조선 토지개혁에 관한 법령'을 발표하여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북한에는 주민의 70%가 농민이었으며 농가 호수 가운데 4%인 지주들이 총경지면적의 58%를 차지하고 있었다. 농가 가운데 70%는 순소작농 또는 반소작농이었으며 자작농은 약 25%에 지나지 않았다. 토지개혁은 "토지를 밭갈이 하는 농민에게!"라는 구호를 내걸고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졌다. 군중을 동원하여 개혁의 열기를 드높인 다음 빈농을 중심으로 추진한 토지개혁은 20일 남짓한 짧은 기간에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토지개혁으로 지주계급은 완전히 사라졌고 부농층이 약화되었으며, 빈농과 중농이 농민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몰수한 토지는 총경지면적의 52%에 이르렀으며 지주 토지 가운데 80%를 몰수함으로써 봉건적 지주 조직관계가 사라지고 농민적 토지소유가 확립되었다.

 

토지개혁에 이어 1946년 6월에는 8시간 노동제를 규정한 '노동법령'이, 7월에는 '남녀평등권에 대한 법률'이 발표되었다. 또 '주요산업 국유화법령'을 공포하여 일본인과 민족반역자가 소유한 공장, 회사와 주요 산업을 국유화했다. 주요 산업의 국유화는 그 뒤 사회주의 경제 건설을 앞서 이끄는 부문이라는 점에서 토지개혁만큼 중요했다.

 

북한은 토지개혁과 주요 산업 국유화를 뼈대로 한 '민주개혁'을 완수하고 식민지 경제구조를 철폐하여 '민주기지'를 세우려 했다. 민주개혁은 소련이 점령한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먼저 북한에서 혁명을 완수하고 아직 해방되지 않은 곳은 나중에 해방시킨다는 '민주기지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북한은 친일파 청산과 민주개혁 과정에서 지주 등 우파세력이 월남하여 이들의 저항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월남한 북한 우파정치세력이 남한에서 강력한 반공세력을 형성하여 좌익 등 남한 혁명세력의 활동을 그만큼 어렵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