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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1,043 : 해방과 건국 3 (미.소의 한반도 분할점령과 분단 1 )

 

 

 

한국의 역사 1,043 : 해방과 건국 3 (미.소의 한반도 분할점령과 분단 1 )

 

 

 

              

 

 

미.소의 한반도 분할점령과 분단 1

 

 

1. 미국의 한반도 정책

 

2차 세계대전은 파시즘 국가와 반파시즘 국가의 대결이었으나 미소를 중심으로 한 반파시즘 진영이 승리했다. 2차 세계대전 뒤 파시즘 세력이 몰락하면서 세계체제는 재편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자본주의 진영의 맹주로 성장한 미국은 전쟁이 끝난 뒤에 경제위기를 맞았다. 안으로는 전시경제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독점자본의 생산 기반이 흔들렸고, 밖으로는 구식민지 체제가 무너지고 민족해방운동이 고양되었으며, 동구를 중심으로 한 13개국이 자본주의 진영을 벗어나 사회주의 진영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미국 독점자본은 상품 시장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다.

 

이에 미국은 잃어버린 세계시장을 되찿고 식민지에서 해방된 신생국가에서 사회주의가 뿌리내리는 것을 막아 자본주의 질서 속으로 편입시키려 했다. 따라서 미국의 세계정책은 반공.반혁명을 통해 세계자본주의를 재편하는 길로 나아갔다.

 

미국의 이러한 정책은 전쟁 뒤 식민지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국제주의'로 나타났다. 식민지에서 혁명과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고 미국은 단독 식민통치보다 여러 나라가 신탁통치하는 방안을 선택했다. 이는 국제질서에서 미국이 경제.군사적인 주도권을 확보해야만 실현될 수 있는 구상이었다.

 

'국제주의'에 뿌리를 둔 신탁통치 구상이 한반도 전후 처리 과정에서 처음 나타난 것은 카이로회담(1943.11)이었다. 여기서 미국은 소련이 전쟁에 참가하도록 적극 유도했고 소련도 부동항을 확보하고 사할린 열도와 쿠릴 열도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대일전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또 소련은 루스벨트가 제안한 한국 신탁통치안도 동의했다. 이 회담에서 발표한 '카이로공동선언'은 루스벨트의 신탁통치안에 따라 한국을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킬 것이라고 하여 자주독립을 유보했다. 한국의 신탁통치안은 같은 해 11월 29일 '테헤란회담'에서 다시 논의 되었다. 여기서 루스벨트는 '한국인의 완전한 독립을 얻기 전에 약 40년 동안 수습기간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고 스탈린도 이에 찬성했다. 1945년 2월에 열린 '얄타회담'에서 루스벨트는 미.영.중.소가 20~30년 동안 한국을 신탁통치한다는 구상을 제시했으며, 스탈린도 동의했다. 이렇듯 미국은 '국제주의' 원칙 아래 소련의 협조를 받아 한반도 전역에 친미정부를 세우려 했다.

 

 

2. 미군정의 정책

 

미군은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했다. 바로 전날인 9월 7일 맥아더 태평양 방면 미 육군 총사령관은 포고문 제1호에서 "점령군에 대한 반항운동이나 질서를 교란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고 발표했다. 이 무렵 국내 정치는 식민지 시기 일제에 협력을 했던 우익보다는 좌익세력이 이끌고 있었다. 좌익세력은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으며 건국준비위원회를 인민공화국으로 바꾸고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남한 주둔 미군 사령관 하지가 남한에 군정 실시를 선포한 데 이어 1945년 10월 10일 아놀드 군정장관은 남한에는 '미군정이란 단 하나의 정부가 있을뿐'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곧 인공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을 뜻했다. 미국에 우호적인 정권을 한반도에 세우려 한 미군정은  인민공화국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귀화한 임시정부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또 전국 곳곳에서 만들어진 인민위원회와 치안대, 그리고 여러 대중 자치기구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미군정은 남한 혁명세력을 제거하고 남한 사회질서를 자신의 뜻에 맞게 만들려는 현상유지 정책을 펴 나갔다. 이를 위해 미군정은 자신의 지지 기반으로 보수세력이 모여 있던 한국민주당을 선택했다. 이리하여 일제 시대 친일행각 때문에 숨죽여 지내던 친일파가 다시 힘을 얻었다.

 

미군정은 일제의 식민지배에 협력했던 친일관료.식민경찰.일제군인 등 부일협력 세력을 군정청에 고용했다. 친미적이거나 영어를 활 줄 아는 지주 출신의 보수적인 인사들을 행정고문이나 군정관리로 들어앉혔다.. 일제에 협력한 경력을 가진 이들은 미군정의 보호를 받아 일제 밑에서 누려 온 기득권을 또다시 유지할 수 있었다. 단적으로 말하면 1946년 당시 미군정경찰의 경우 경위 이상 간부 82%가 일제경찰 출신이었다.

 

미군정은 일제 시기 치안유지법과 같은 악법들을 없애고 일부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문법과 보안법 등 일제가 만든 많은 악법을 그대로 이어받아 군정통치를 강화하는 데 이용했다.

 

미군정은 1945년 12월 6일 법령 제33호를 공포하고 조선에 있는 일본인 재산을 '적산'으로 규정하여 모두 군정청 소속으로 삼았다. 민중은 미군정이 일본인 재산을 적국의 재산인 '적산'으로 규정한 것에 거세게 반대했다. 민중은 일제의 재산이란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하면서 착취한 것이므로 우리 민족의 재산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 법령으로 해방 뒤 민중이 스스로 일제와 일본인을 상대로 벌였던 토지획득 투쟁과 공장관리운동이 불법화 되었다.

 

미군정은 토지정책과 귀속재산 불하과정을 통해서도 진보세력을 제거하고 친미 보수세력을 인정시키려 했다. 미군정은 1946년 3월 신한공사를 설치하여 일제 시기 농민수탈 기구인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소속되었던 토지를 관리했다. 신한공사는 남한 전체 농가 가운데 약 26%인 55만여 호의 소작 농가를 거느린 남한 최대 지주가 되었다. 신한공사가 관리하는 토지만해도 남한 전체경지면적 가운데 13.4%에 이러렀다. 미군정은 여기서 생산되는 13억원이 넘는 소작료를 군정 경비로 썼다.

 

그 뒤 미군정은 1948년 3월부터 신한공사가 관리하던 토지를 먼저 분배했다. 토지분배 방식은 농민이 요구하는 무상분배가 아니라 유상분배였다. 이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앞두고 5.10 선거를 원만히 치르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미군정은 1947년 7월 적산으로 빼앗은 재산도 일부 불하했다. 귀속재산을 일제시기 공장과 회사에 연고가 있는 한국인 간부나 관련 인사에게 나누어 주고 친미파를 키워 나갔다. 이렇듯 미군정은 처음부터 좌익과 민중을 중심으로 진행된 국가재건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일본의 식민통치에 협력했던 관료계층과 보수정치세력을 자신의 동맹자로 키워 나갔다. 이를 통해 남한에 자본주의체체를 세워 반공기지를 만들려고 했다. 결국 미군정은 8.15 해방 뒤 친일파를 청산하고 민족경제를 확립하여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던 우리 민족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말았다. 남한에서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자유당 정권이 아니라 미군정에 의해서였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