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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1,041 : 해방과 건국 1 (해방과 통일정부 수립운동 1)

 

 

 

 

 

 

한국의 역사 1,041 : 해방과 건국 1 (해방과 통일정부 수립운동 1 )

 

 

 

              

 

 

 

해방과 통일정부 수립운동 1 

 

1. 8.15해방과 건국준비위원회

 

 

해방의 의미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하여 조선민중은 36년간 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나 꿈에 그리던 해방을 맞이했다. 끊어졌던 역사의 맥이 다시 이어지고, 수천년 간 축적된 문회민족의 잠재력이 다시금 화산처럼 분출되기 시작하였다.

 

이미 자주민주국가 건설을 위한 준비는 나라를 빼앗긴 그 순간부터 시작되어 망명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독립운동과 병행하여 해방 후의 건국강령까지 준비해 놓고 있었다. 비록 독립운동 단체들이 지리적으로 분산되고, 이념상으로 좌.우 갈등이 있었지만 일제 말기에는 좌우가 연합하는 추세가 나타나서 통일민족국가 수립이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전망이 보였다.

 

해방 뒤 조선은 무엇보다도 자주적 민족국가를 세우는 일이 급했다. 새로운 국가는 민족해방운동 세력을 중심으로 외세의 영향력을 극복하면서 민중의 뜻을 담아내는 참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했다.

 

또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는 일도 서둘러야 했다. 식민잔재를 청산하는 일은 자주적 민주국가의 기틀을 튼튼히 하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식민지 때 민족을 배반한 친일파를 처단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것은 민족정기를 되살려내는 일이고 나아가서는 민족을 통합하는 데도 반드시 필요했다.

 

또 일제 식민지배 아래서 왜곡된 경제를 바로잡아야 했고 그것은 민중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이고 자립경제의 기틀을 닦는 일이었다. 농업에서 조선의 경제발전을 기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은 반봉건적 토지소유였다. 해방 후 전체 농가 가운데 3%에 지나지 않은 지주층이 경작면적의 58%를 차지하면서 소작농민에게서 5~6할의 높은 소작료를 거둬들였다. 농민을 해방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키려면 이러한 반봉건적인 관계를 철폐해애 했다. 또 일제는 식민지 시기 조선 공업자본 가운데 90%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다. 공업에서도 이러한 식미지 구조를 청산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를 실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가 맞이한 해방은 우리의 주체적인 힘보다는 연합국의 승리에 따른 '주어진 해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해방과 함께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을 나누어 점령한 미국과 소련의 해방 정국의 주도권을 거머쥐게 되었다.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과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이 파시즘이라는 공통의 적에 대항하여 힘을 하쳤지만 대전이 끝난 뒤에는 서로 지배영역을 확보하기 위해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점차 서로 적대적인 관계로 변한 두 세력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것은 조선인들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해방 후의 이러한 국제정세는 우리민족의 자유스런 국가건설을 어렵게 만들어 갔다. 일본을 패망시키는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의 남북을 분할 점령하고 미국식 자본주의국가와 소련식 사회주의국가를 세우려고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유교의 오랜 전통속에서 서양 근대문명을 받아들인 대다수 국민들이 그리고 있던 현대국가는 미국식이나 소련과는 다른 모습의 국가였다. 그것은 자산가들이 주도하는 국가도 아니고, 무산자들이 주도하는 국가도 아닌 민민협동의 국가이며,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되 국가의 공권력을 매개로 한 공공성이 높은 문화국가였다. 

 

한국인의 평균적인 정서에 가장 가까운 정치단체로 해외에서는 중경에서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광복군을 투입해 전투에 참여한 김구의 임시정부가, 국내에서는 건국동맹이 있엇다. 특히 1944년 8월에 일본의 패망을 에견하고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중도 우파 인사와 온건좌파 인사들이 결집된 건국동맹은 8.15해방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위)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건국작업에 들어갔다.  

 

 

 

민중의 움직임

 

민중은 해방을 맞이하자 거리로 뛰쳐나와 해방의 감격을 마음껏 누렸다. 삼천리 방방곳곳에서 해방을 경축하는 집회가 열리고, 거리에는 해방의 기쁨을 알리는 벽보가 수없이 나붙었다. 집회가 끝나도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온 거리를 쏘다니며 만세를 불렀다.

 

해방되었다는 소식은 전국 곳곳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퍼져 나갔으며 그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해방이란 민족이 독립되었다는 것만이 아니라, 민중의 생존을 위협하던 공출과 징용 같은 것이 없어지는 것을 뜻했다. 민중은 자신들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벅찬 기대를 품고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이 되자 민중과 민족해방운동 세력은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활동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노력으로 모아졌다. 민중은 전국 곳곳에서 사회 혼란을 방지하고 새로운 세상의 기틀을 다지려고 여러 운동을 벌여 나갔다.

 

노동자들은 일제의 파괴행위를 막고 생산활동을 계속하려고 공장을 관리하는 자주관리운동을 벌였다. 용산공장, 조선피혁, 삼영 등 영등포 지역 공장 노동자들은 사택과 사무실에서 일제와 일제 자본가들을 상대로 금고와 창고 열쇄를 빼앗아 냈다. 또 조선인쇄주식회사 노동자들은 1945년 9월 11일, 일본인 지배인이 회사물품과 자본을 몰래 빼내려 하자 공장관리위원회를 조직하고 직장을 접수하는 투쟁을 벌였다.

 

화순탄광에서도 노동자들이 직장관리자치위원회를 만들어 탄광을 자주관리했다. 이때 직장관리위원회에 참여했던 한 노동자는 1989년 4월 그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해방이 되니 일본놈들 두말 못하고 쫓겨갔제. 압박받고 살다 우리 세상이 되니 만세도 부르고 좋아서 죽고 못살았구만. 서러움 그만 당하고 우리도 좀 살아 보자고 맘먹고 직장관리위원회를 바로 만들었제. 금께로 우리가 탄광 주인이 된 것이었구만. 방대한 운영체계를 이끌었던 일본인이 일순간에 없어지니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지만 곧 정상적으로 가동이 됐어. 실무 일을 거의 모두 한국 사람들이 해왔었기 때문에 금방 질서가 잡혀 오히려 일제 때보다 생산량이 더 늘어났어."

                         -<말>. 1989. 4월호-

 

 

농민들도 주로 일본인이 소유하던 토지를 접수하고 관리했다. 농민들은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소유한 농장에서 자치위원회를 만들어 토지를 관리했다. 일본인 지주가 소유한 토지에서도 일본인이 토지를 매매하는 것을 저지하고 자신들의 소유권을 확보하려 했다. 노동자와 농민들의 활동은 자신들의 생존권 보호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경제 기반을 마련하려는 뜻을 갖고 있었다.

 

 

 

 

2.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건국준비워원회

 

1945년 8월 일제 패망이 눈앞에 다가오자 조선총독부는 조선에 살고 있는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걱정했다. 이에 조선민중에게 신망을 얻고 있던 여운형을 만나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받으려고 교섭을 했다.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면서 건국동맹을 결성하여 해방 뒤를 준비해 온 여운형은 해방되기 전날 조건을 붙여 총독부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여운형이 제시한 조건은 모든 정치.경제범의 석방, 3개월분의 식량 확보, 조선인의 활동에 대한 불간섭 등이었다.

 

여운형은 곧 자신이 조직했던 건국동맹을 기반으로 8월 15일에 안재홍 등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결성한 데 이어 8월 25일에는 건준 강령을 발표했다. 해방과 환희의 감동 속에서 건준은 새 벙부 수립을 준비하는 기구로 인식되었다. 이때 발표한 건국강령은 다음 세가지이다.

 

<강령>

1. 우리는 완전한  독립 국가의 건설을 기함

2. 우리는 전민족의 정치적.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천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정권 수립을 기함

3. 우리는 임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여 대중 생활의 확보를 기함

 

건준은 여운형을 위원장, 안재홍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치안 회복과 질서 유지를 위해 지역별.직장별로 건국치안대에 약 2천 명의 청년과 학생이 참여했고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지방치안대를 조직하려고 지방으로 내려갔다. 중앙건국치안대는 지방치안대와 학도대.청년대.자위대.노동대 등의 활동을 지도했으며, 전국에 162개소의 지부를 두었다. 또 식량조사위원회도 건준과 긴밀한 관게를 맺고 식량조사와 대책을 맡았다. 건준은 중앙뿐 아니라 지방에도 조직을 확대하여, 8월 말에는 북쪽의 회령에서 남쪽의 제주도까지 145개의 건준이 설치되어 각 지방의 치안.행정권을 맡았다.

 

건준은 친일파와 부일협력자 등을 뺀 모든 정치세력이 참여한 민족연합전선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건준에는 민족주의자.사회주의자.언론인.지식인뿐만 아니라 지방유지와 지주까지 참여하고 있었다. 우익 성향을 지닌 인물까지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건준의 활동이 질서 유지 차원에서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건준은 이러한 내부 구성 때문에 정치적으로 통일하기 어려웠지만,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어 미군정이 들어서기 전까지 실질적인 행정기관의 역활을 할 수 있엇다.

 

그러나 처음 민족연합적인 성격을 띠었던 건준은 차츰 좌익세력이 주도권을 쥐면서 분열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파를 대표했던 안재홍은 건준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강화되자 건준을 탈퇴했다. 우파 정치세력이 탈락한 뒤에 건준은 사회주의 세력이 주도하여 인민공화국으로 전환된다. 

 

 

 

인민위원회

 

건준 지도부는 미군 진주가 눈앞에 닥치자 1945년 9월 6일 인민대표자 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 참여한 1,000명 남짓한 인민대표들은 이날 조선 왕실의 후에이며 독립협회에 참여하고 미국에서 박사학위까지 얻엇으며 상해임시정부의 대통령을 지낸 우파의 원로격인 아직 귀국하지 않은 70세의 이승만을 주석, 여운형을 부주석으로 하는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했다. 인공은 9월 14일 4개조의 정강을 발표했다.

 

1. 정치적.경제적으로 완전한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2. 제국주의와 봉건적 전재세력를 일소하고 전민족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잇는 진정한 민주주의에 충실하기를 기함

3. 노동자.농민과 기타 대중생활의 향상을 기함

4. 세계민주주의의 일우너으로 상호 제휴하여 세계평화의 확보를 기함

 

정강의 기본 내용은 대체로 건준의 활동 목표를 이어받은 것으로 "일본제국주의와 봉건적 전재를 일소한다"는 내용만 덧붙였다. 이를 위해 인공은 일제의 법률제도를 즉시 폐지, 일제와 반역자의 토지를 몰수와 무상분배, 독립국가 건설, 사회경제 개혁, 우방과의 협력, 노동자.농민계급 생활의 급진적 향상, 일제.봉건적 잔재 일소 등 27개 조항의 시정 방침을 중요한 정책으로 제시했다.

 

인공은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비상조치로 선포되었지만, 토지와 주요 산업의 국유화와 같은 일부 사회주의적 경제제도를 내세우기도 했다. 그리하여 지난날 친일 경력이 있거나 지주.자본가 등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으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받았다.

 

또한 69세의 항일투사로 국민의 신망이 높던 중격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이 참여하지 않은 점도 인공의 약점이었다.

 

1945년 9월 6일 중앙에서 인공이 선포되자 지방의 건준 지도부는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지방인민위원회는 10월 말까지 남한 8도와 13개 도시, 132개 군에 조직되었다. 인민위원회는 건준과 마찬가지로 친일파를 뺀 여러 계층이 참여한다는 민족통일전선 원칙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인민위원회의 정치적 견해는 주도세력에 따라 달랐다. 사회주의 세력이 주도한 곳, 민족주의 세력이 주도한 곳. 두 세력이 합작한 곳도 있었다. 인민위원회는 치안대와 청년대를 조직하여 지방의 치안 유지에 힘썼고, 일제가 남기고 간 재산을 관리했다. 특히 적산 관리와 운영은 인민위원회의 경제적 기초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중요했으며 또 친일파를 비롯한 지배세력이 다시 등장하는 것을 막는다는 뜻도 있었다. 대부분의 인민위원회는 조직부.선전부.치안대.식량부.재정부 등을 두었으며, 지역 특성에 다라 보건위생.귀환동포.소비문제.노동관계 등을 대루는 부서가 있었다.

 

인민위원회는 여러 계층의 대표자로 구성한 민중권력기구였으며 이미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박헌영이 장악하여 실제로는 좌익정부나 마찬가지였다. 인공은 친일 세력을 청산하고 민중에 뿌리를 둔 새 국가 건설을 지향했다.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으나 모든 인민위원회가 그들의 지도 아래 활동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인공이 선포되던 날 남한에 진주한 미군의 하지 중장을 사령관으로 하여 즉각 군정을 실시하였다. 미군정은 인민공화국을 철저하게 부정했다. 좌익이 건준을 인민공화국으로 개편한 것은 소련군이 북한에서 행정권을 조선인에게 넘겨주었듯이, 미군도 남한에서 행정권을 넘겨줄 것이라고 예상하고 이에 대비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좌익세력의 기반을 제거하려고 했던 미국은 좌익세력이 중심이 된 인공을 부인함으로써 결국 인공은 현실에서 실질적인 힘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미군정은 인공을 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친미적인 우익정부수립을 후원하기 위해 한국민주당(약칭 한민당) 인사들과 긴밀하게 접촉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민당은 중경의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려 한 반면, 미군정은 중국과 친밀하고 민족주의 성격을 지닌 임시정부를 인정하지도 않았으며 주석인 김구의 귀국도 개인자격으로만 허용하였다.

 

정부 수립이 난항을 겪고 있는 동안 서울에서는 수많은 정당이 결성되어 다양한 정치이념을 내걸고 활약하였다. 한민당(9.16)이 우파라면 그 반대편에 서 있던 극좌정당이 조선공산당(9.16)이었으며, 그 중간에 김구가 귀국하여 결성한 한국독립당, 안재홍이 주도한 중도우파의 국민당(9.24), 여운형이 주도한 중도좌파의 조선인민당(11.12) 등이 있었다. 특히 국민당은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정치이념을 내세워 좌우이념을 통합하고자 하였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좌우연합을 지향하는 중도파 정당이 많았고 지식인의 호응이 높아서 한국인의 표준적인 정서를 대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