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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1,048 : 해방과 건국 8 (모스코바 삼상회의와 민중의 항쟁 4)

 

 

 

한국의 역사 1,048 : 해방과 건국 8 (모스코바 삼상회의와 민중의 항쟁 4)

 

 

 

              

 

 

 

 

모스코바 삼상회의와 민중의 항쟁 4

 

 

3. 민중의 생활과 민중항쟁

 

 

민중의 생활

 

일제가 물러나자 조선경제는 생산이 많이 줄고 물가가 오르는 등 커다란 혼란에 빠졌다. 조선경제를 지배해온 일본자본이 철수하고 기술마저 부족한 상태에서 공업생산량이 크게 줄었다. 여기에다 남북 단전은 생산 감소를 부채질했다.

 

공업생산량이 줄면서 대량 실업이 생기고 임금은 크게 떨어졌다. 1944년 남북노동자 수는 212만 명이었는데, 1946년 11월 남한 전체 실업자 수는 어림잡아 110만 명이나 되었다. 또 해방과 더불어 일제 시기 통제가격제도가 폐지되면서 노동자의 실질임금 수준도 눈에 띄게 떨어졌다. 실질임금은 1936년을 100으로 했을 때, 1945년 12월에는 37, 1946년 12월에는 42, 1947년 12월에는 30으로 떨어졌다. 실질임금이 떨어지는 가운데 물가는 오르고 식량파동이 겹치면서 노동자들의 생활은 크게 나빠졌다. 경성방직 노동자들은 "지옥 같은 기숙사, 썩은 호박죽, 최근에 영양 부족과 피로로 30명이 죽었고, 약 40%가 폐결핵 환자다. 이 여공들은 외출한 자유도 없고, 먼 곳에서 온 부모조차 면화할 수 없었다'고 외쳤다. 그만큼 노동자들은 열악한 조건에서 일해야 했다.

 

미군정이 실시한 미곡자유판매정책도 식량문제를 더욱 악화시켜 농민은 물론 모든 국민을 '굶주림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미국정책은 돈과 쌀을 가지고 있던 자본가와 지주, 그리고 중간 모리배만 살찌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군정은 자유판매제가 오히려 쌀파동만 가져오자 이제는 배급제로 바꿨다.  그리고 여기에 드는 미곡을 마련하려고 미곡공출제를 실시하여 농민에게서 쌀을 강제로 빼앗았다. 나아가 미군정은 일제 때에도 없었던 하곡공출제도를 실시하여 가난에 찌든 농민들이 '보릿고개'를 넘기는 유일한 수단인 곡식(보리)마저 거두어 갔다. 미군정은 하곡공출을 실시하면서 지주, 군정경찰, 관료로 구성된 탈취대를 만들어 쌀을 강제로 빼앗아 갔다.

 

조선민중은 해방을 맞이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좀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믿어지만 이러한 꿈은 얼마 가지 않아 사그라들고 말았다.

"우리 노동자들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고 몸서리치는 일제의 압박과 착취 속에서 죽음 같은 노동을 해 왔다.....해방을 맞아 우리는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그러나 다섯 달이 지난 오늘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직장은 문을 닫고 쌀과 나무는 금보다도 더 귀해지고 오직 굶주림에 울며 추위에 떨고 있다"                           -  노동자 기고, <직업과 쌀, 나무를 다오>, 해방일보. 1946.2.19. -

 

미군정의 잘못된 경제정책 때문에 민중의 생활은 급격히 악화되엇으며, 남한민중의 불만과 저항은 날로 높아 갔다.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

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좌우합작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미군정이 드러내놓고 좌익을 탄압하자 조공은 대중운동을 기반으로 미군정의 탄압에 실력으로 대응하는 '신전술'을 채택했다. '정당방위의 역공세'를 하겠다는 신전술은 미군정에 압력을 넣어 미소공위를 다시 여는 것이 목표였다. 조공이 미소의 협상을 통해 임시정부를 세우려는 옛 노선을 완전히 바꾼 것은 아니었다.

 

1946년 미군정의 민중탄압과 미;국정책에 항의하는 민중의 불만과 시위가 잇달아 일어났다. 이러한 남한민중과 미군정의 대립은 조공의 신전술의 영향을 받아 9월 총파업으로 발전했다. 9월 총파업은 서울 철도국 경성공장에서 불붙기 시작했다. 1946년 8월 20일 미군정청 운수부는 적자를 벗어나고 노동자 관리를 합리화하겠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25% 감원하고,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꾼다는 조치를 발표했다. 9월 13일 조선 철도노동조합은 미군정청의 조치에 맞서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에 9월 23일 부산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다음날 서울 철도국 노동자들도 파업에 참여했다. 이어 출판.교통.체신.식품.전기 등 전평에 속해 있던 산업별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30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다.

 

처음 파업이 일어났을 때 전평은 '점심 지급, 임금 인상, 일급제 폐지와 월급제 실시, 식량 배급' 등의 구호를 내걸었으나 나중에는 '정치범 석방', '테러행위 배격', '식민지교육 반대' 등의 정치적 요구도 내세웠다. 미군정은 이 파업을 "다른 나라들로 하여금 조선이 자치할 능력이 없다고 믿도록 할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곧바로 탄압했다. 미군정의 운수부장 고넬슨은 9월 총파업을 마치 전투에 돌입한 전쟁과 같았다고 회고하였다.

 

1946년 9월 30일 새벽, 미군정은 무장경찰 2천 명과 대한독립촉성회 청년회원 1천여 명을 동원하여 철도파업단을 강제해산시켰다. 사망자 3명, 중상자 수백 명, 1천 7백 명이 검거되었다. 9월 총파업은 조선공산당의 지도를 받고 있는 전평이 촉발시켰지만, 전평은 끝까지 계획적으로 파업을 조직하지는 못했다.

 

비록 미군정의 강력한 탄압으로 철도노조 파업은 무너졌지만 그것만으로 총파업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지방으로 번진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자주독립국가 수립에 대한 절망, 특히 식량난으로 더는 견딜 수 없는 처지에 몰린 농민들의 투쟁과 결합하면서 10월 인민항쟁으로 이어졌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역에서는 노동자 파업을 폭력으로 탄압하는 미군정에 맞서 가두시위가 있었는데 경찰은 시위군중에게 총을 쏘았다. 그러자 시위는 계속 퍼져 나가 많은 도시와 농촌에서 민중봉기로 발전했다. 부녀자들은 쌀을 요구하고, 노동자는 임금을 올려주고 쌀 배급을 늘려 달라 했다. 학생들은 경찰의 발포 금지와 무장해제, 애국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시위했다. 인민항쟁에서 민중이 군정 경찰.군정 관리.지주.경찰이나 관청 등을 주로 공격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해방된 뒤에도 식민지 관료나 친일파들이 미군정을 등에 업고 다시 나타나 민중을 억압하는 것에 대한 깊은 원한이 터진 것이었다.

 

20월 인민항쟁은 경북.경남.전라.충청.제주 등 남한의 주요 도시와 농촌으로까지 번져 경찰관서를 습격하는 등 60일 남짓 계속되었다. 그러나 1946년 11월 중순 미군과 경찰은 무력으로 이를 진압했다. 봉기에 참가한 사람은 100만 명이 넘었다. 그러나 10월 인민항쟁은 전국적인 계획이 없어 고립된 투쟁을 벌이다가 마침내 실패하고 말았다.

 

10월 인민항쟁을 계기로 미군정은 지방인민위원회를 거의 다 분쇄하는 한편, 사회주의세력을 더욱 탄압했다. 미군정이 사회주의세력의 모든 활동을 불법으로 규정하여 탄압하자 이들은 지하로 숨어 들었다. 미군정의 도움을 받아 반대세력을 물리친 우익은 이제 힘에서 좌익을 앞지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