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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49 : 해방과 건국 9 (단정 반대투쟁과 분단국가의 수립)

 

 

한국의 역사 1,049 : 해방과 건국 9 (단정 반대투쟁과 분단국가의 수립)

 

 

 

              

 

 

단정 반대투쟁과 분단국가의 수립

 

 

1.분단의 진행과 민중투쟁

 

미국의 단정수립정책

세계 냉전체제는 이미 1947년 3월 대소봉쇄를 선언한 트루만독트린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미소 합의에 따른 미소공동위원회가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냉전 분위기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않았다.

 

1947년 5월 다시 열린 2차 미소공위가 1차 때와 마찬가지로 참여 대상 문제로 9월에 휴회되었다. 이에 미국은 한반도 남쪽만이라도 미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세우려고 했다. 미국의 남한단정수립정책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이미 남한을 점령할 때부터 남한단정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미소 합의로 정부를 수립한다는 모스코바 삼상회의 결정 때문에 이를 드러내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미국은 2차 미소공위가 휴회된 1947년 9월 17일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남겼다.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유엔에서 한반도 문제를 다룸으로써 자기 나라에서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는 것이었다. 미소 합의로 독립 국가를 세우려 했던 모스코바 삼상회의 결정은 결국 휴지가 되고 말았다.

 

유엔은 1947년 11월 14일 총회에서 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고 인구비례에 따른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한다고 결의했다. 선거를 감시하려고 미국이 지명한 7개국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유엔한위)를 만들었으나 우크라이나는 참가하지 않았다. 한국의 앞날을 결정짓는 유엔 토의 과정에서 한국대표는 미국의 반대로 참가 할 수 없었다. 이처럼 미국의 행동은 소련고 마찬가지로 친미정권 수립을 위해 한반도의 분단은 전혀 고려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1948년 1월 8일 유엔한위가 남한에 들어왔으나, 소련과 북한은 "미소 양군이 철수한 뒤에 자주적인 임시정부를 수립해야 한다" 면서 임시위원단이 북한에 들어오는 것을 거절했다.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할 수 없게 되자 미국은 다시 남한만의 선거를 실시하자는 안을 내놓아 1948년 2월 26일 유엔소총회에서 통과되었다. 선거 날짜는 5월 10일로 정해졌다.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실시된다는 소식은 해방 뒤 자주독립국가를 꿈꾸어 왔던 민중에게 날벼락이었다. 남조선노동당.근로인민당.청우당 등 중도 정당, 김규식의 민주자주연맹, 김구의 한독당 등 거의 모든 정치세력은 단독선거를 완강히 반대했다.

 

오직 이승만과 한민당 등 극우세력만 단독선거를 찬성하며 발벗고 나섰다. 이미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던 이승만은 1947년 7월 한국민족대표자대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남한단독정부 수립운동을 벌여 왔었다. 이승만은 친일파 지주세력인 한민당과 손을 잡고 선거를 차근차근 준비해 갔다. 이승만과 한민당이 세우려는 정부는 지주.자본가를 감싸는 반소.친미정권을 뜻했다. 미국은 이들의 단정 수립을 적극 후원했다.

 

 

 

단정수립 반대투쟁

남북한 총선거를 감시하려고 유엔한위가 입국하자 남로당은 단선단정 반대투젱에 나섰다. 남로당은 남북을 점령하고 있는 미소의 군대가 철수한 뒤 외세가 없는 상태에서 우리 힘으로 독립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했다.

 

남로당과 전평은 1948년 2월 7일 "남한단성을 꾀하는 유엔한위 반대, 단정단정 결사반대, 미소 양군 즉시 철수" 등을 내걸고 '2.7 구국투쟁'을 벌였다. 투쟁은 영등포 노동자들의 총파업에서 시작하여 농민.사무원.학생,시민 궐기로 이어졌다. 민중은 시위.집회.동맹휴학.봉화 투쟁.삐라발포 등의 방법으로 단선 반대투쟁을 벌였다. 147만여 명이 참가한 이 시위에서 57명이 사망하고 10,584명이 검거되었다. 2월 7일부터 10일까지의 집중적인 투쟁 후에도 단선 반대투쟁은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계획적.조직적으로 벌어졌다.

 

2.7 구국투쟁은 단정을 수립하려는 미국과 그 손발인 유엔한위를 직접적으로 겨냥한 반미투쟁이었다. 단정을 반대하는 민중의 투쟁은 제주에서 가장 치열하게 타올랐다. 제주도에선 1947년 3.1절 28주년 기념 제주도 대회에서 시위가 발생하자 경찰이 총을 쏘아 6명을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이듬해 4.3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1948년 4얼 3일 새벽 1시, 한라산의 크고 작은 봉우리마다 한꺼번에 오른 봉화를 신호로 자위대(무장 5백 명, 비무장 1천 명)는 도내 24개 지서 가운데 11개 경찰지서를 일제히 공격하였다. 이들은 제주도민을 탄압하던 서북청년단.대동청년단.독촉국민회 등 우익 청년단체도 공격했다. 제주도 민중이 거세게 투쟁을 벌이자 미군정과 우익 청년단체들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민중을 탄압하여 몇만 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4.3 제주항쟁'은 선거가 끝난 다음에도 계속 이어졌다. 오로지 제주도만 5.10 총선거를 못하게 한 곳이었고 1년이 지나서야 재선거를 치를 수 있었다.

 

한편 단정에 반대하던 여러 정치세력은 남북연석회의에모두 모였다. 김구, 김규식의 남북협상 제안에 북한은 남북의 여러 정치.사회단체를 포함한 연석회의를 제안하여 평양에 모였다. 1948년 4월 20일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남북 정당.사회단체 대표 연석회의가 시작되었다. 남한에서 41개 정당.사회단체 대표 396명이 참가하고, 북쪽에서 15개 정당.사회단체 대표 197명이 참가했다. 김구.김규식.조소앙.홍명희.김일성.박헌영 등 주요 정치지도자들을 비롯한 남북의 56개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 659명은 미국과 소련에게 군대를 곧바로 철수할 것을 요청했다. 또 이들은 단독 선거를 막으려고 투쟁할 것이며 설령 선거를 치른다 하더라도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

 

1948년 5월 5일 남한으로 돌아온 김구 일행은 남조선단선반대전국위원회를 결성하여 선거 거부운동을 펴는 한편 미군정 사령관 하지에게 미군 철수를 요구했다. 하지는 유엔 결의대로 정부 수립 뒤에 철수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5월 10일 총선거는 예정대로 실시되었다.

 

남한에서 5.10 총선거가 있고 나서 북한은 제2차 연석회의를 제안했다. 그러나 김구는 그 회의가 북한정권 수립을 도와주는 결과가 될 것이라며 응하지 않았고, 김규식도 참가하지 않았다.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평양에서 제2차 연석회의가 열렸지만 그때는 이미 죄우익의 연합은 의미가 없어진 뒤였다.

 

 

 

2. 분단국가의 수립

 

단독정부 수립    

극우세력을 뺀 모든 정당과 민중이 선거를 반대했는데도 미군정은 1948년 5.10 단독선거를 밀고 나갔다. 선거에는 이승만, 한민당 세력만이 참여했고 김구와 김규식은 참여하지 않았다. 경찰, 우익청년단과 공무원들은 선거를 성공시키려고 선거에는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쌀 배급표를 주지 않는다거나 빨갱이로 모는 등 온갖  방법으로 협박했다. 공정한 선거절차는 무시되었고 선거날 투표소 주변에는 국방경비대, 경찰, 우익청년단 등이 지키고 있었다.

 

5월 10일 단독선거로 만들어진 제헌국회는 무소속이 85석으로 가장 많았다. 이승만의 독촉국민회가 54석, 한민당이 29석, 대동청년당이 12석, 민족청년단이 6석을 차지했다. 제헌국회의원 대부분은 이승만, 한민당과 이들에게 우호적인 극우세력이었다. 좌익과 중도세력, 그리고 일부 우익세력은 선거를 거부했다. 그때 등록되어 있던 남한의 정당.사회단체 425개 가운데 선거에 참여한 것은 43개뿐이었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가 열려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7월 17일 헌법을 공포했다. 7월 20일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을 뽑아 8월 15일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통일된 정부가 아니라 반쪽만의 정부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전체 우익조차 포괄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통성을 갖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한편, '민주개혁'을 끝낸 북한은 1946년 11월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하고, 이듬해 2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로 개편했다. "조선에 민주주의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북조선인민정권의 최고기관"을 자처한 북조선인민위원회는 북한의 사회주의 개조 사업을 이끌었다. 이로써 북조선인민위원회는 형식적인 합법성을 가진 사실상의 북한 단독정부와 다름없었다.

 

이렇듯 북한은 1946년 2월 민주개혁을 실시한 뒤 "통일정권의 강력한 토대를 구축한다"며 중앙집권회를 강화했다. 북한은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1948년 8월 21일 해주에서 인민대표자회의를 열어 남한 측 대의원 360명과 북한 측 대의원 212명을 선출했다. 9월 2일 평양에서 최고인민회의를 열어 헌법을 제정하고 수상에 김일성, 부수상에 박헌영.홍명희.김책을 선출한 데 이어, 9일 마침내 북한의 단독정권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1945년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일제가 남기고 간 유산을 청산하고 반봉건적인 소작제도를 철폐하여 민중에 뿌리내린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투쟁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결국 남북한에 단독정부가 세워지고 말았다.

 

김구나 김규식 세력까지도 배제한 채 극우세력만이 참가한 단독정부는 부일협력자를 척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들을 감쌌고 농민들이 바라던 토지개혁을 반대하면서 지주의 이익만을 보장해 주었다. 미국은 남한에 친미.반소정권을 세우려고 극우세력을 적극 도와주었다. 남로당을 비롯한 사회주의 세력은 통일된 민족국가를 세우려고 민중과 손을 잡고 미국과 극우세력에 대항하였으나 미군정의 탄압으로 그 힘을 잃어 갔다.

 

남한에 단독정부가 들어선 것은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고 경제적 수탈 구조를 철폐하려는 민중의 과제가 실패로 돌아갔음을 뜻했다. 북한에서는 1946년 2월 임시위원회를 세운 뒤 토지개혁, 노동법 제정 등 '민주개혁'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친일파를 제거하고 봉건적 관계를 철폐하여 차츰 사회주의 사회로 나아가려 했다. 남북한에서 성격을 달리하는 체제가 성립하면서 이미 한국전쟁의 불씨가 잉태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