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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1,050 : 해방과 건국 10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한국의 역사 1,050 : 해방과 건국 10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1948)

 

 

1. 대한민국 수립

 

1948년은 1천년 간 통일된 국가를 이어온 우리 민족이 다시금 남북국시대로 되돌아간 비극의 해였다. 이 해 8월 15일 38선 이남에는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9월 9일 39선 이북에서는 '조선민주주이 인민공화국'이 수립된 것이다.

 

1948년 5얼 10일 남한에서의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좌익은 격렬한 선거반대투쟁을 벌이고 김구, 김규식 등이 이끄는 중도우파에서는 선거불참을 선언하였다. 북한은 선거에 대한 보복으로 전기공급을 중단하여 공장의 조업이 중단되는 등 단전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 선거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서구식 보통선거로서 21세 이상의 모든 국민에게 동등한 투표권이 주어졌다.

 

 

 

▲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제 모양을 갖춘 국가로 새로 태어난 날이다.

 

5.10선거로 선출된 제헌국회 의원 198명은 대한제국과 임시정부시절부터 써오던 '대한제국'을 국호로 결정하고, 7월 17일 헌법을 제정하였다. 이 헌법에 의하면 대한민국은 역사적으로 3.1정신을 계승하는 민주국가로서 정부조직은 대통령중심제를 골간으로 하되,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하는 내각제 요소를 담고 있었다. 국회는 단원제로 하였으며, 국회에서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임시정부 요인이던 이시영을 각각 선출하였다. 국회의장에는 역시 임시정부 요인이던 신익희가 선출되었다. 이승만은 청산리전투의 주역이자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이범석을 국무총리에 임명하여 내각을 구성하였다. 대법원장에는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했던 한민당 출신의 김병로가 임명되었다.

 

한편, 5.10선거에 참여한 한민당은 내각조직 과정에서 야당으로 밀려났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이 선포되고, 옛 총독부 건물을 정부청사로 사용하여 '중앙청'이라고 불렀다. 이 해 12월 12일 유엔은 대한민국을 한반도에서 선거에 의해 이루어진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고, 그 후 소련과 그 동앵국가들을 제외한,  미국 및 자유진영 50여개국이 개별적인 승인을 받았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자유진영 국가의 일원이 되었다.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

 

이승만(李承晩, 1875년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은 대한민국전 대통령이다. 처음 이름은 승룡(承龍), 다른 이름은 일수(一秀), 우남(雩南), 본관은 전주이다. 황해남도 평산군 출신이다.

 

 

이승만(李承晩)
대한민국 제 1, 2, 3 대 대통령 이승만
대한민국 제 1, 2, 3 대 대통령 이승만
대한민국 대한민국제1·2·3대 대통령
임기 1948년 7월 24일 ~ 1960년 4월 26일
부통령 이시영 (1948 ~ 1951)
김성수 (1951 ~ 1952)
함태영 (1952 ~ 1956)
장면 (1956 ~ 1960)
이기붕 (1960)
총리 이범석 (1948 ~ 1950)
장면 (1950 ~ 1952)
장택상 (1952)
백두진 (1952 ~ 1954)
변영태 (1954)
후임: 윤보선(제4대)

대한제국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1대 대통령
임기 1919년 9월 1일 ~ 1925년 3월 21일(탄핵 후 면직)
국무총리 이승만
이동녕
이동휘
이동녕(대리)
신규식
노백린
김구(대리)
이동녕
박은식
후임: 박은식(제2대)

대한제국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21,22대 주석
임기 1947년 3월 3일 ~ 1948년 7월 22일
전임: 김구(제20대)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출생일 1875년 3월 26일(1875-03-26)
출생지 조선 조선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
사망일 1965년 7월 19일 (90세)
한국 표준시 19시 35분
사망지 미국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 마우레타니아 요양원
매장지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2동 국립서울현충원
정당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자유당
별명 호 우남(雩南), 처음 이름 승룡(承龍), 다른 이름 일수(一秀), 별칭 이박사(李博士)
종교 감리교
배우자 박씨(이혼), 프란체스카 도너
자녀 아들 이봉수
양자 이강석, 이인수
부모 아버지 이경선, 어머니 김해 김씨
서명 Syngman Rhee Signature.svg
웹사이트 http://www.syngmanrhee.or.kr/

 

대한제국 시대에는 협성회 회보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 등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였다. 대한제국 말기 밀사로 도미하였다가 실패했다고 알려져 왔으나, 최근 당시 이승만은 대한제국 정부나 황제의 대리인이 아니라 일진회의 대리인이라고 자칭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이후 하와이에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라섰을 때 그는 국내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하였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나 국제 연맹에 위임통치를 건의 한 것을 계기로,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파면되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부터 1925년 3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1933년 3월 6일의 제25회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무임소 국무위원에 보궐 당선되었다. 이후 1933년 11월에 다시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되고 1934년 4월 2일에는 임정 외교위원에 선임되었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스위스 등을 상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1945년 12월부터는 김구·조소앙·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였으며 정부수립 방법으로는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지지,추진하였다. 대한민국 초대 대한민국의 국회의장, 대한민국초대·2·3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1952년사사오입 개헌 으로 1960년 4대 정·부통령 선거에 연임하였다. 그러나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일어난 4·19 혁명 직후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 하야하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평가와 비판

해방정국에서의 이승만의 주장이 한국의 분단을 고착화시켰다는 주장과 공산주의에 맞서서 반공국가를 건설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긍정적 평가

허정은 흔히 선생님을 독재자라고도 하지만 미국에서 수학하신 선생은 독재자는커녕 분명한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였다. 오히려 우유부단한 면까지 없잖아 있었다. 또한 허정은 그가 3.15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점을 두고 '그는 민의를 존중하는 정치인이었다.'고 평하였다.

애국자라는 시각

장면은 '그 분의 애국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고 하였다. 일평생 독립운동에 바친 공적이 이를 말하고도 남는다. 특히 대외적으로 철석 같은 반공 태세, 의연한 대일본 태도, 과감한 반공 포로 석방 등은 이승만 박사의 용단이 아니고는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독립 주권 의식의 철저한 시범도 경복할 만큼 위대했다'는 것이다.

 

허정은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4.19의 노도가 장안을 휩쓸었을 때 비로소 민의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한 그는 '부정을 보고서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것이라며 깨끗이 권부에서 물러났다.'며 '젊은 학생들의 애국 기상을 가상히 여기고 국민이 원한다면 사퇴하겠다면서 자진해서 대통령직을 내던지고 하야함은 이승만이 아니고서는 하지 못할 결단이었다.'고 평하였다. 허정은 또 '우리는 그의 마지막 모슴만을 보고 그의 전부를 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한반도 전체의 적화를 막은 그의 슬기와 용단 만으로도 우남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 커다란 공적을 남긴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극작가 신봉승은 '오직 조국의 자주 독립만을 위해 헌신하였다.'는 평을 내렸다.

 

이승만은 전형적인 조선의 선비사상과 미국의 감리교사상이 혼합된 인물로서 평생을 매우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았다는 평가가 있다. 이와 관련된 후문으로 인권운동가 박소영은 그가 하와이 망명생활 도중 임영신에게 청혼하였으나 거절당했다는 후문이 있는 것뿐, 그의 뒷얘기는 깔끔했다는 예를 제시했다.

긍정적 평가

1970년대부터 윤치영, 박용만 등에 의해 이승만 재평가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특히 윤치영제1공화국 기간 중의 부패와 선거 관련 문제는 이승만과는 무관하다고 확신했다. '얼마간의 무리도 따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50년대 들어 저질러진 그러한 행태들은 자유당 정권의 부패한 세력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다. 가령 이기붕, 박마리아 같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유지시키고 심지어는 대권을 생각해서 저지른 짓들입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1970년대부터 이승만이 독재자라는 주장은 낭설이며 우의마의라는 단어의 어원을 설명, 이승만이 3선으로 퇴진하려 했으나, 이승만을 등에 업고 권력을 행사하려는 자유당 측근들의 간계로 관제 3선 출마 시위가 있었고, 이승만은 속은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역설했다. 1979년 이후부터는 공공연히 이승만의 3선 퇴진설과 우의마의라는 단어의 어원을 역설하며 학생 운동권의 이승만 독재자설에 반론을 제기했다.

 

1991년한국논단과의 인터뷰에서 윤치영은 '우리는 거시적인 차원에서 이박사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분은 평생을 독립투쟁에 몸바쳐 온 분이고, 민주주의를 가장 신봉하는 인물이었다.'라고 평하였다.

 

2001년 이후 결성된 뉴라이트 계열은 이승만을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건국대통령', '국부'로 재평가, 상정하자는 의견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명박 정부에서는 국가적 차원으로 이승만 정부의 건국을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한바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이승만 박사는 국민학교 의무교육 실시했다는 점에 있어서 한국 근현대 교육사에 획을 긋는 자취를 남겼다는 주장이 있다.

 

박용만은 이승만과 김구는 민족의 쌍벽이었고 민족진영 인사들은 두 영도자를 모시고 반석위에 놓인 것과 같은 안도감과 신뢰감을 가지고 무조건 두 분이 영도하는 대로 마음놓고 따랐던 것이다. 라고 평가하였다.

 

2대 국무총리와 4대 부통령을 지낸 장면은 '이 박사 밑에 국무 총리로서 1년 가까이 지낸 내가 본  그분은 장점도 많고 단점도 많았다. 그분의 애국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일평생 독립 운동에 바친 공적이 이를 말하고도 남는다. 특히 대외적으로 철석 같은 반공 태세, 의연한 대일(對日) 태도, 과감한 반공 포로 석방 등은 이 박사의 용단이 아니고는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독립 주권 의식의 철저한 시범도 경복할 만큼 위대했다.' 고 평가하였다.

 

13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은 그를 당시 가장 현실적인 지도자였다. 대한민국의 건국의 주역이되 4사 5입 개헌 시기부터 잘못되기 시작했다고 평가하였다. 한편 김영삼은 또 '이 박사가 너무 노인이었고 기억력이 약했던 것 같다.' '밑에 사람들이 보좌를 잘 못했고 이기붕이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이었는데도 대통령 욕심이 있었다' 고 평가하였다.

토지개혁

1950년 3월에 개정되어 공포된 농지개혁법안.

 

농지개혁법을 시행했다. 이승만의 승인 하에 농지개혁을 주도한 사람은 당시 농림부 장관이었고 이승만의 진보당 사건 조작으로 사형당한 조봉암이다. 1948년 8월 이승만은 농림부 장관 조봉암의 건의와 설득을 받아들여 농지개혁을 승인한다. 농지개혁으로 왕조시대 이후 대지주에게 집중된 농토를 실제 농민에게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인천의 지역 유지이며 인천시 의회 제1대 의장인 이명호는 조봉암의 농지개혁에 반발하였으면서도 이승만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참았다고 한다. 이명호의 다섯째 딸 이양숙의 증언에 의하면 이명호는 토지개혁으로 그 많은 땅을 빼앗겼으면서도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고. 워낙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했는데, 그 이승만 대통령이 장관으로 임명한 조봉암이 나서서 한 일이니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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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개혁으로 인한 효과는 남다른 것이었다. 비록 일부에서는 '실패한 토지개혁'으로 폄하하는 의견도 있으나, 정설로는 '토지개혁을 통해 주인의식이 생긴 농민들이 많아져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 박헌영 등이 주장하던 100만 봉기설이 무용지물이 됐다는 것이다.

시대적 제약

전북대 신방학과 교수 강준만은 '이승만의 시계는 구한말에 멈춰져 있었다. (많은 부정적평가와 긍정적평가를 이루면서도) 이승만은 평생을 복고적 투쟁을 위해 바친 인물이었다.'고 했다. 강준만은 또 '이 점을 무시한 채, 오늘날의 잣대로 이승만을 평가하는 것은 이승만에 대한 불필요한 악의적 해석만을 낳을 뿐이다' 라고 평가하였다.

부정적 평가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1949년 반민특위 습격사건에 최종적 결정 승인과 지시를 내린것으로 알려져있으며, 친일 경찰, 군인, 관료 출신들을 '반공투사'라 칭송하면서 대거 등용했다는 점과, 한국 전쟁 시기에 대통령으로서의 평판을 실추시킨 행동들과 책임들, 토지개혁과 귀속재산처리 문제에 소극적인 태도로 나아갔다는점, 이후 자유당과 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 인의 장막에 가려져 있었던 점, 집권욕, 고집 등에 대한 비판들이 있다.

 

허정은 '다만 처음 환국했을 때처럼 한 정당의 지도자가 아니라, 국민의 입장에 선 초당적 지도자로서 아직도 미숙한 한국의 정당들을 공평한 입장에서 육성하여 정권의 평화로운 교체를 위한 기반을 확립하지 못한 점과 정권을 인계함으로서 훌륭한 민주적 전통을 확립하지 못한 점만은 그의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위임통치 청원 사건에 대한 비판

1919년에는 미국윌슨 대통령에게 국제연맹의 감시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청원서를 올리고 후에 다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신채호, 신성모임시정부의 무장투장파와 갈등하였고, 박은식 일파의 공격을 받았다. 결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까지 가게 되었다. 이때 임정에서 이승만의 편을 들던 인물은 내무부총장 김구, 의정원 의장 최창식(崔昌植) 등 소수였다.

 

이때, 단재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 라고 성토를 했었다. 거기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임하면서도 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상하이에서는 활동이 거의없어 1925년에 탄핵을 당하게 된다.

 

조소앙은 이승만에게 쿠테타를 종용하는 편지까지 보내기도 했다.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을 탄핵하자 이승만은 미국내 재미 한인 교포들에게 임시정부로의 송금을 중단하게 하였다.

 

이승만의 반대파들이 국민대표자 회의 소집을 요구하며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임정의 해산과 재창조 등을 주장하는 창조파, 개조파 등으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 내에서의 이승만의 위치가 자연스럽게 다시 복권될 수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1932년 11월에는 33년에 열리는 스위스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의 전권대사로 파견되었고, 1934년 국무위원회 회의에서는 신익희·조소앙 등과 함께 임시정부 외교위원의 한 사람으로 신임되었다.

자만심이 강하고 독선적인 인물이었다는 주장

측근이었던 허정에 의하면 자신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였으며, 한국인 중에 자신과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봤다고 한다. 누구든지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따르기만 하면 그는 그 사람을 동지로 간주하였으며, 그 외의 사람은 모두 그의 적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허정은 '그가 대단히 성격이 급하고 남들과 쉽게 싸웠으며 주요 정치문제에 대하여 대단히 완고했다'고 평하였다.

 

초기에 그의 신임을 받기도 했던 장면에 의하면 '그분의 성격 소치인지 자존심이 너무 지나쳐 ‘나’ 이외에는 이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 안중에 보이지 않는 양 정치 면에 나타난 그분의 개성은 독재의 전형적인 감을 주었다. 정적을 용서 않고 때로는 고도의 술책과 잔인성을 주저 않고 드러냈다.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도 비위에 안 맞으면 공포 안하기가 일쑤이며, 그의 유시나 담화가 법률 이상의 위력을 휘둘렀다. 구속된 국회 의원에 대한 석방 결의도 아랑곳없고, 헌법 기관인 참의원, 헌법 위원회, 탄핵 재판소 등도 필요 없다고 구성해 주지 않았다. 장기 집권을 위하여 때로는 비민주적인 방법의 정치 파동도 일으킨 사실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는 바다.'라고 비판하였다.

 

해방 직후 조선체육회를 이끌던 여운형은 이승만이 귀국한 후 서울운동장에서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했다. 그때 몽양은 비록 노선은 다르지만 이승만이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수십년을 일하다 돌아왔으므로 일장기가 아닌 태극기를 가슴에 단 우리 청년들이 대회장에 위풍당당하게 걸어들어오는 것을 보면 얼마나 감격할까 하는 생각에서 이승만을 개회식에 초대했다고 한다. 여운형에 의하면 이승만은 윤치영과 함께 와서 내빈석에 자리를 잡았는데 식이 시작되어도 각도 청년들이 줄을 지어 씩씩하게 입장하자 몽양은 이박사가 얼마나 흐뭇해할까 하고 감격을 나누기 위해 그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청년들을 보지도 않고 수행한 윤치영과 귓속말로 정치 이야기만 하더니 "일이 있어 그만 가봐야겠다"며 곧 퇴장해버리고 말더라는 것이다. 정치적 노선은 다르지만 인간적인 입장에서 그를 초청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여운형은 인간적으로 섭섭했다면서 자기가 이박사에게 가장 실망을 느낀 때가 바로 그때였다고 했다.

친일 경찰의 활용

제주4.3사건, 여순사건, 반민특위 습격사건, 장면 부통령 암살사건등의 배후에는 친일 경찰이 있었다고 한다. 노덕술, 이구범, 최운하 등은 일제 강점기부터 고문을 잘해서 출세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반공'을 이용해 국민들에게 공포를 심었다. 당시에는 친일행위 청산을 주장하면 빨갱이로 몰리기 쉬웠다고 한다. 이승만도 친일파청산 주장은 공산당의 연관성이 긴밀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제노사이드 범죄

제주4.3사건, 여순사건 진압 과정에서 벌어진 대규모 양민학살과 한국전쟁 중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사건대한민국 국군에 의해 벌어진 제노사이드에 대통령 이승만의 책임이 제기된다.

동상 건립

4.19혁명이후 대한민국에는 이승만의 동상이 없었다. 한국자유총연맹은 이승만의 동상 건립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다. 2011년 8월 25일 이승만 동상이 서울특별시 장충동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자유총연맹 정문 앞 인도에서 사월혁명회·한국전쟁유족회 등 단체들은 동상 제막식 반대 집회를 열었다.

동시대 인물간 비교평가

이승만과 김구의 비교

이승만과 김구 모두 구한말에 과거에 응시해 낙방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낙방 후 이승만은 개신교, 김구동학과 인연을 맺었다. 이승만은 친미국 노선으로 갔고, 김구는 친중국 노선으로 갔다. 훗날 국민당 장개석의 중화민국은 국공내전에서 패퇴하여 몰락한 반면, 미국의 세계적 패권은 더욱 강화되어 갔다. 미국은 비교적 다원체제 였던 만큼 이승만과 미국의 갈등은 미국의 어느 한 부분과의 갈등이었을 뿐, 큰 흐름은 친미노선을 선택한 이승만에게 유리하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세우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향후 12년간 통치하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부인 프란체스카여사와 함께 수시로 경마장에 들렀다. 경마가 있는 날이면 3층 귀빈실은 항상 북적거렸다. 마사회에서는 이들을 극진히 예우했으며, 예정에 없던 상장이나 상배를 마련하여 레이스를 하기도 했다. 한편 김구도 경마장을 즐겨 찾았는데, 1946년 모친 곽낙원여사의 시신을 중국에서 운구하여 정릉뒷편으로 이장할 때 기마단이 운구를 호송했기 때문이다. 운구 호송을 고마워한 김구는 계속 경마장을 찾았다고 하며, 이승만과 김구가 자주 찾는 것에서 '이승만상', '김구상'이 유래했다고 한다.

 

김구는 이승만과 서로 매우 친분이 두터웠다. 공석에서도 김구는 이승만한테 '형님'이라는 소리했을 정도로 사이가 매우 좋았다. 그러나 김구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었을 때 이승만이 도움을 거절한 일로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어 법정에 증인 자격으로 서게 된 김구는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이승만은 철저한 외교론주의자였기 때문에 정치인 암살,테러등 매우 부정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는 방관하면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크게 분노하였다.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김구의 항의로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그 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로 이승만과의 결별을 결심했다.

윤경빈에 의하면 훗날 '단독 정부 수립 운동'이냐 '남북 통일 정부 운동'이냐 노선을 두면서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승만과 서재필과의 비교

서재필은 대를 잇는다는 개념 자체를 무책임한 발상이라고 극도로 혐오하였다. 서재필은 문중에서 서재필이 아들이 없음을 염려하여 양자를 세우려고 계획하였을 때 이 소식을 듣고, "쓸데없는 일들이오. 나에게는 사랑하는 딸이 둘이나 살아 있소. 이제 새삼스럽게 양자를 세운다니 생각해보고 싶지도 않소이다."하고 거절해버렸다. 이어서 "이런 생각은 모두 고루한 동양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오. 이러한 구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민주사상을 길러가는 것이 우리나라가 빨리 독립할 수 있는 길이오."라며 "부지런히 일이나 하고 착실하게 살기 위한 새로운 힘을 연구하시오."라고 덧붙였다. 서재필은 후사가 끊어진다는 동양적인 사고방식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서구적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문중에서는 서재필이 아들이 없어 후사가 끊어짐을 안타까이 생각하고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그것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서재필의 이와 같은 사상은 그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지극히 단순한 사람임을 말해 주었다. 그는 이미 가족관념을 청산한 인물이었다.

 

서재필은 서울의 친척집에도 다니지 않고 공무가 끝나면 조선호텔에서 혼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가 귀국하자 서씨문중에서는 들끓기 시작하였다. 서재필은 이러한 소란을 몹시 싫어하였다.

 

서재필은 한국인가족관념을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가족주의가 바로 끼리끼리 해먹는 패거리주의를 만드는 원인이며 이방인을 배척하는 근간이라 생각하고 끔찍히 여겼다. 서재필은 지나친 형식 위주의 완고한 족벌의식은 조국의 민주화에 적지 않은 방해가 될 뿐이라고 했다. 서재필의 이러한 풍모를 두고 그의 둘째딸인 뮤리엘이 후에 지적하여 말하기를 '파파는 심플맨이에요.'라고 하였다. 훗날 송건호는 서재필이 형식과 금전과 동양적인 가족 관념을 청산한 크나큰 인물이었다 라고 칭송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서재필은 탈조선화 된 인간이라 하였다.

 

이승만은 자신에게 아들이 없는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성재 이시영의 장례식 때 신익희가 장례위원장이었다. 이시영의 장례식에 참석한 이승만은 빈소를 찾아 분향하고 상제에게 조의를 표한 후 돌아서다가 두 손자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신익희에게 "그래도 성재장은 이런 고몰고몰한 손자들이 있었구려"라고 하였다.

 

신익희나 그의 비서 신창현에 의하면 이승만은 이시영의 손자들을 보더니 '눈귀에 다시 눈물이 지적지적하였다' 했다. 나중에 신익희는 비서이자 종손인 신창현에게 "그 어른 오랜 미국 생활로 아예 우리나라의 대를 잇는다던가 하는 종법 관념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을 줄 알아쓴데, 자기가 아들도 없고 손자조차 없음을 마음속 깊이 한으로 품고 계신 것이 역력히 보이더라."라고 했다. 신익희는 이승만이 후사가 없음을 한으로 여겼다고 술회하였다.

이승만에 대한 타인의 평가

1920년대부터 1960년 망명 전까지 가까이에 있었던 허정에 의하면 대단히 두뇌가 명석한 인물이라 평가하였다.

 

전북대학교 신방학과 교수 강준만에 의하면 '이승만은 비난과 독설에 매우 능숙했다' 한다. 이승만의 미국인 고문 로버트 올리버가 언젠가 이승만에게 그런 문제점을 제시했더니 이승만은 "나도 알고 있소. 나는 평생을 선동가로 살아 왔으니까 그렇게 할 도리밖에 없었던 것이오"라고 답했다.

 

장택상은 이승만의 결점으로 "이승만에게 결점이 있다면 그것은 먼저 행동하고 나중에 생각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승만에 대한 허정의 평가

허정은 이승만이 사리에 옳은 말이라면, 누구의 말이라도 수용하는 담박한 면이 있었다고 하였다. '내가 아는 우남은 유순한 호호야(好好爺)였다. 그는 기분이 좋을 때면 봄바람같이 부드러운 마음씨였고, 자신보다 20~30세 어린 연하자들에게도 반드시 공대를 하며, 사람의 방문을 받을 때엔 꼭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였다.

 

또한 이승만은 평소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다 하여 인사를 받거나, 함부로 반말을 하지 않고 공대, 존재를 하고 맞인사를 했다 한다. 허정은 부정이나 거짓을 보면 육친이라도 용서함이 없는 반면 옳은 일, 곧은 말이면 삼척동자의 말이라도 곧이 듣는 성미였다. 또한 부드럽고 자애롭고 유머 센스가 풍부한 사람이면서도 한번 화를 내면 호랑이처럼 무섭기도 했다.고 했다. 조크를 잘 하기로도 으뜸이었다. 장관을 해임할 때는 그만 두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한다. 허정은 직접 담화를 쓰지 않고 장관을 해임할 때도 '그 동안 수고했으니 잠시 좀 나가서 쉬게' 하는 식으로 얘기하는 바람에 여러 사람이 어리둥절할 때가 있었다. 진언을 받으면 즉시 메모하고 유익한 일이면 미루지 않고 결단으로 실천하였다. 반면 누가 나쁜 짓을 했다는 보고나 참소를 들으면 사실여부 불문곡직하고 목부터 베어놓고 연후에 진부를 가려내는 수가 적지 않았다.고도 했다.

유머 연발과 농담

이승만의 측근이자 중학교 재학때 기독교청년회 영어학원에서 배웠던 허정은 이승만이 농담도 잘 하고, 장난도 잘 쳤으며 성격이 유머러스했다고 한다.

 

허정에 의하면 '그는 근엄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매우 유머러스한 성품이어서 학관에서는 재치 넘치는 농담으로 학생들을 잘 웃겼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기분이 좋을 때의 일이고 화가 나면 아무도 당해내지 못했다.'며 '기분이 좋을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성격이 되어 유머를 연발했다.'고 한다.

고집스러운 성격과 가부장적 태도

허정은 이승만이 독립운동하기 전부터 고집스러운 태도와 가부장적인 면모를 보였다고 하였다. 일단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어서 고집을 부리고 화를 내면 자기 뜻을 조금이라도 굽히거나 남의 사정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는 가부장적 카리스마의 일면이 엿보였던 것이다. 허정은 이승만의 고집스러운 성격이 장점과 단점, 업적과 불행을 동시에 안겨주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의 유명한 고집, 이때는 확신이요 신념이었지만, 그의 고집은 우리 역사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해방 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고집한 것이며, 반공포로 석방, 일본에 대한 완강한 반대 등은 그의 고집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고집의 나쁜 일면은 그에게 말년의 불운을 안겨주었다. 그가 자유당에 카리스마적 인물로 군림하지 않고, 진정한 민주 정당으로 육성하려는 배려를 아끼지 않고, 또한 합헌적인 정권 교체를 통해 평화로운 정권 교체의 선례를 남겨놓았더라면, 그는 아직도 국부(國父)로서 추앙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통일은 내손으로 라는 결코 나무랄 수 없는 그의 고집이 결국 슬픈 결말을 초래한 것이다. 허정에 의하면 평소의 이승만은 농담도 잘하고, 장난도 잘 치고, 유머도 잘 했지만 한편으로는 고집스러운 성격과 가부장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장면과 조병옥에 대한 이승만의 평가

이승만은 자신이 대통령직을 내놓을 경우, 자신 대신 대통령이 될 인물로 장면조병옥을 꼽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 두 사람의 도덕성과 능력, 그리고 애국심(특히 미국에 대한 독립적인 자세)을 의심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는 나라를 맡기느니 차라리 야유를 더 받더라도 스스로가 좀 더 오래 집권하면서 나라를 보위하고 그 기반을 다지는 것이 대한민국을 위해 낫다고 판단했다 한다.

기타 사항

어학 능력

그는 역대 정치인 중 영어를 가장 능통하게 구사한 인물이었다. 그는 영어를 제1언어처럼 사용하였다.

 

그는 약간의 독일어도 구사할 수 있었다. 부부 간에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오스트리아의 언어인 독일어도 어느 정도 익혔다고 한다.

권위주의적인 태도

1947년 가을 당시 돈암장 신문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친이승만 신문이었던 민중일보의 사장이자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회장인 윤보선의 요청으로 서정주가 이승만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무슨 자료를 찾아오라고 프란체스카에게 시켰다는데 조그마하고 가냘프고 유순한 부인은 묵묵히 명령대로 나가 꽤 오랜 뒤에 돌아와서 그게 어디에 있는지 아무리 찾아봐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일은 어느 집에서나 가끔 있는 일로 자세히 오래 찾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다음에 와서 가져가겠다 하고, 여기를 뜨려 했다. 그러자 이 박사는 침대에서 허리를 반만 일으키고는 들어와 서 있는 프란체스카 부인을 화난 눈으로 바라보며 영어로 "겟 아웃!"하고 크게 소리치고는 나보고 거기 앉으라고 했다. 나는 그의 부인이 마치 꾸지람 들은 어린애처럼 풀이 죽어 주춤주춤 물러나가는 것을 보았다.

서정주

소설가 미당 서정주는 우여곡절 끝에 이승만의 전기를 완성했다. 그래서 1949년 10월 삼팔사에서 이승만 박사전이라는 제목의 책이 나왔다. 그러나 이 책은 나오자마자 발매 금지 처분을 당했고, 내무부 치안국이 압수 명령을 내려 서점에 깔린 책들은 다 몰수되었다. 이승만은 대변인 김광섭에게 자신의 아버지 이름 밑에 경칭을 안 붙인 것을 문제삼았다. "서정주는 그래 얼마만큼이나 되는 시인인가?"하는 질문에 김광섭이 좋은 시인이라고 대답하자, 이승만은 이렇게 비판하며 말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저의 집 어른도 못 모시어 봤나?" 강준만에 의하면 서정주가 어른을 모셔 보지 못해 경칭을 생략하지는 않았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조지 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박사로서 서양 물을 40년 넘게 먹은 이승만이 서양의 전기에선 경칭을 쓰지 않는다는 것쯤은 이해할 것이라고 믿은 것뿐이었다. 서정주는 이승만이 오히려 정반대로 40년 넘게 외국을 떠돌아야 했기에 조선, 그것도 구한말 조선의 전통에 대한 집착이 더욱 강렬했다는 것을 이해하긴 어려웠을 것이라는 평을 내렸다.

개신교 보급

대학교수이자 역사학자인 이주영은 그를 윤치호와 함께 지난 1세기 동안 한국의 역사에서 개신교와 문명 개화의 연결 고리가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 대표적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다. 이주영은 이승만에 대해서 “이승만 전 대통령은 통치 기간에 모두 135명의 장관과 장관급 부서장을 임명했는데, 그 가운데 기독교인은 절반에 가까운 47.7%였다. 그리고 군대와 감옥에 기독교를 보급하기 위해 군목제도와 형목제도를 도입했다”고 말했다. 또 사회 전반의 미성숙으로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개인의 평등을 전제로 하는 자유선거제도의 확립에도 많은 노력을 쏟았다고 덧붙였다.

 

 

핵력 공학과 개발 추

1958년 이승만은 에너지를 발전을 위해 핵력이 필요하다는 전문가의 조언을 듣고 핵력 공학과 개발을 추진한다. 그러나 핵력 공학과 개발 시도는 2년 만에 1960년 4.19 혁명으로 권좌에서 축출당하고 만다. 절반도 시공되지 못했던 핵력 공학과 개발 계획은 그대로 백지화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하지만 휴전 이후 미국은 북방한계선을 그어 이승만의 북진을 막았다. 이승만은 미국의 개입없이 북진하려면 핵폭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많은 학생들을 유럽으로 유학보냈다. 하지만 일부 학생들은 이승만의 의도를 알고 독일 등에 망명하는 경우가 있었다.

미국의 이승만 제거 시도

한국 전쟁 이후 이승만이 반휴전 태도를 고수하자 미국 정부는 이승만을 제거하고 유엔군사령부 주도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에버레디 작전'(Operation Everready)을 수립했다.

 

1952년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하고 새로운 지도자를 수립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이승만 정부의 전복을 후원할 경우 전쟁 수행에 대한 정당성이 훼손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미국은 이 계획을 실행할 수는 없었다. 마땅한 대안자를 찾지 못하던 미국은 이승만을 유지하되 그의 주변 측근들 중 강경파를 숙청하는 방안을 추진하였다.

 

미국 정부는 이승만의 제거가 더 큰 혼란을 부를 수 있으며, 한국민의 민족 감정을 자극할 수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미국은 그 계획을 완전히 폐기하지는 않았다. 그 후에도 이승만이 계속 미국의 정책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일 때마다, 미국은 이승만의 제거를 고려했다. 4·19 혁명 당시 이승만의 퇴진에 대해 윤치영은 '미국 사람들이 앞장서서 한 짓이나 다름이 없다.'라고 증언하였다.

 

1950년대 말에 있어서는 한때 장면을 대안으로 세웠으나 실패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자유당 내 온건파인 이기붕 등을 통한 자연스러운 세대교체를 추진하려 하기도 했다.

정파,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

이승만은 정당 정치 자체를 파벌싸움이나 일으키는 갈등의 요인으로 해석하였다. 이승만은 정당정치를 조선시대 당파 싸움 개념의 연장선으로 이해하였다. 이승만은 한민당의 영수가 되어달라는 허정의 주장에 대해 '나는 일당 일파의 영수가 아니라 온 국민의 벗이 되고 싶다.' '지금 내가 할 일은 민족을 단합시켜 한 뜻을 갖고 일하게 하는 것이오. 지금 내가 한 정당에 소속한다면, 반드시 이루어야 할 전민족의 단합이라는 더 큰 일을 버리는 것이오.'라고 답했다. 허정은 이러한 정책을 높이 평했다. 반면 이승만의 정당정치 혐오를 두고 신익희윤보선 등은 비판을 가하게 된다.

 

1949년 2월 민주국민당 창당 사실을 이승만에게 알리기 위해 신익희김성수경무대를 방문했다. 그런데 신익희는 이승만이 창당에 대한 비판을 늘어놓자 이를 불쾌히 여긴다. 면담은 오래 걸렸고 그 날 오후에 나왔다. 나온 후 김성수는 차에 오르자 마자 벌레 씹은 우거지상을 하고 말이 없었다. 신익희는 "정당은 무엇 때문에 조직하는 건데 이 어른 정당을 조직했다고 인사온 사람보고 정권에는 도전하지 말라니..... 모든 것을 혼자서 도맡아서 두고두고 하시겠다는 말씀이야. 우리들을 아간지(兒看之), 어린아이 보듯 하시는 말씀이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신익희에 의하면 김성수 역시 정당 정치를 비판하는 그의 태도에 불쾌감을 드러냈다 한다.

 

윤보선은 이승만의 정당정치를 두고 민주주의 정당 정치를 부인하는 행위라며 비판한다. 윤보선은 '그이는 흉중에 무슨 생각을 품었던지 정당정치의 부당성을 주장해 오다가 6.25 사변 후 갑작스레 자유당을 만들어 정당정치를 표방하였다는 것은 우리나라 의회 정치사상 본궤도를 찾은 셈이 되었다 고 주장하였다. 한편 2대 대통령 때부터 이승만은 민심이 이반되어 권위가 날로 퇴색되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국민 대다수를 점유하는 농민, 노동자, 근로 대중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신당을 조직하겠으며 직선제 개헌을 하겠다."라고 하였다.

 

이승만이 자유당을 창당한 것을 두고도 반응은 엇갈렸다. 나중에 이승만이 친위 정당인 자유당을 결성한 것을 두고 윤보선은 당연한 정치태도라는 입장을 보인 반면 신익희는 국회의원들이 간접선거로 하면 당선이 어려우니까 재선을 위해 수를 쓴 것으로 해석하였다. 허정은 귀국 초기의 입장처럼 중립적인 시각을 보이라며 촉구하기까지 했다.

만사에 직접 개입, 결재

이원순은 이승만이 사소한 것까지 관여, 간섭하면서도 일면 사소한 것은 대강 넘겼다고 했다. 그는 정사의 세부에까지만 관여하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행정부의 자세한 사무에는 초연하였고, 원칙상 기본적이고, 전체적인 정책에 주의를 집중하도록 하였다.

 

신익희 역시 이승만이 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간섭해야만 직성이 풀린다고 증언하였다. 신익희는 취임 초 그를 찾아가 그가 시시콜콜 간섭, 개입하는 것을 염려하여 "국무총리 이하 각 부 장관만 학식과 능력, 그리고 덕망 있는 사람으로 골라서 맡기시고, 그 아래는 그 사람들로 하여금 골라서 임용하도록 권리와 책임을 주십시오. 우남장께서는 이열 한 부의 장관과 네 처장만 딱 거머쥐셔서 번적 들며 줄줄이 따라 올라오고, 내려 놓으면 모두가 내려 앉습니다. 라며 각 해당부서 소관 업무나 인사권한은 장관, 차관선에서 해결하라고 충고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내가 직접 보지 않으면 다른 짓을 할지도 모른다며 응수하였다. 이승만은 "믿을 사람이 누구란 말이오"하고는 국회의장실 한 구석에 앉아 있던 여자 사무원을 가리키며 "저기 앉아 있는 사환들 까지도 내가 일일이 간섭해야 해요. 그래야 모든 일이 제대로 됩니다."라고 하였다.

 

허정은 이승만이 소인배들의 농간 외에도 그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또하나의 요인이 있었다. 그것은 좋게 말하면 사명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집념 또는 아집이었다. 허정에 의하면 '우남은 자기 손으로, 그리고 자기만이 한국을 훌륭한 민주국가로 키울 수 있고 분단된 조국을 통일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것은 스스로 설정한 정치적 목표였고 스스로 내세운 사명이었다. 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될 때까지 이 사명을 수행하는 길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에 대한 국민의 절대적 신뢰를 의심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는 국민의 이러한 신뢰는 그의 정치적 사명에 대한 국민의 정치적 동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라고 보기도 했다. 만사에 일일이 개입하는 업무 스타일을 그의 최측근 이외의 부하직원들은 피곤하게 여겼고, 이기붕 일파와 자유당은 이승만에게 소와 말까지 동원해가며 국민이 재출마를 희망한다(우의마의)며 그를 속이기도 했다.

 

군 견제 정책

한국 전쟁 이후 급격하게 성장한 국군 세력을 이승만은 경계했다.

 

1954년 5월 정일권 참모총장이 그와 친밀한 사이에 있던 공국진을 육군 헌병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군내 부패의 척결과 수사기관 사이의 갈등 해결 등을 주요 과제로 지시 했다. 공국진은 이 과제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직무한계를 자의로 무시하는 김창룡 특무대장과 잦은 갈등을 빚게 되었고, 김창룡은 이 과정에서 공국진이 탄피를 일본에 밀수출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씌워 해임을 기도했다. 소위 경무대 유시를 근거로 하는 김창룡의 공세 앞에 정일권 참모총장도 역부족으로 그가 임명한 헌병사령관의 해임을 명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후 공국진이 강문봉이 군단장으로 있는 2군의 참모장으로 발령되는 것도 김창룡의 방해로 무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김창룡은 참모총장 정일권의 명령을 정면으로 무시하고 공국진의 보좌관을 체포, 연행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김창룡의 월권행위에 분노한 정일권과 강문봉은 1955년 10월 진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에게 직접 찾아가 김창룡의 전근 내지는 유학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들의 건의를 수용하지 않음으로써 김창룡에 대한 신뢰를 재확인하였다. 김창룡은 정일권과 강문봉의 비리에 대한 집중 수사로 이에 대응하였고, 이는 정일권과 강문봉의 김창룡 암살음모와 교사 라는 극단적인 대응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이승만은 김창룡에게 정일권의 비리를 수사하게 했고, 정일권에게는 역으로 김창룡의 비리를 수사하라는 밀지를 내렸다는 것이다.

 

군인들의 쿠데타 기도를 두려워하던 이승만은 국군 내 일본군 파벌, 만주군 파벌, 광복군 파벌 간의 헤게모니 쟁탈 갈등을 알고도 묵인했다.

1940년대의 설문조사

1957년도 1,000환에서의 이승만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驅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9%가 이승만을 지목하였다. 그 뒤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 때는 1957명 중 431명이 이승만을 선택하여 1위로 집계되었다.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176표를 얻어 2위였다. 1946년 7월 조선 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1961표로 전체의 29%를 확보했다 한다. 1947년 1월, 이승만 지지단체인 '한국애국부인회'가 이승만과 여운형 두 사람에 대한 모의투표를 실시했는데, 여기서 결과는 1000표(이승만) 대 900표(여운형)로 근소한 차이를 나타냈다.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1024표로 1위를 하였다.

 

 

 

 

논란과 의혹

 

독재자가 아니라는 견해

그가 독재자라는 견해에 대해 독재자는 아니라는 설이 있다. 그에 의하면 이승만은 권위주의적이고 독선적이기는 했지만 독재자는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 근거로 4.19에 대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났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허정은 이승만의 성격을 알기에 그가 독재자가 되려고 마음먹었다면 얼마나 잔인하고 혹독하게 탄압했을 지 모른다고 했다. 허정은 '우남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만일 그가 스스로 독재자의 길을 택했다면 얼마나 철저했을 것인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허정에 의하면 '우리가 독재라고 부르는 그의 행동이 얼마나 엉성하고, 어설프고, 불철저했던가. 만일 그가 스스로 독재자가 되려고 결심했다면 그는 이렇게 불철저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리라고 믿는다. 독재자는 우남과는 다른 유형임을 이제 국민들은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심신이 쇠약한 노령에 이르러 행정수반으로서의 과오와 실정을 저지른 바 없지 않았지만 그가 평소에 쌓은 공적과 대비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윤치영은 이승만이 평소 '부정과 부패를 싫어하고 자유민주주의적 공명선거를 믿고 있었다며 이승만 몰래 자유당 측근들이 부정을 저지른 사실이 사후에 다른 사람에 의해 보고되자 깜짝 놀라, 그렇다면 학생과 국민이 일어선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며 자진해서 하야한 이박사 였다고 주장했다. 윤치영은 진상이 드러나자 '드디어 이승만은 4월 27일 행동으로 당신의 뜻을 보여주었다.'라며 이승만이 독재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원순은 '학생들의 의거가 한창일 때 그는 대통령 직위를 미련 없이 버렸다. 이런 것을 보면 그는 별로 명예욕이 강한 인물은 아닌 것 같이도 생각된다. 라고 평하였다.

 

 

독립운동 할 때의 마인드

이승만이 독립운동 할 때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했다는 시각도 있다. 신익희는 이승만이 독립운동 할 당시의 주먹구구식 계산으로 정치를 한다고 했다. 1948년 7월 20일 초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었다.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 직후 처음 방문한 신익희는 "우남께서는 을미사변, 을사늑약, 경술합방을 겪으시면서 해내, 해외에서 영토토 국민도 없이 유한한 몇몇 독립운동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하시느라 어렵고 위험한 형극의 길을 50여 기나긴 성상을 걷다가 반쪽일 망정 영토, 국민, 주권의 세 요소를 갖춘완전한 독립국가의 대통령이 되셨으니 그 감개무량함이 남달리 여타유별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천만 가지 모두가 청황이 부접하고요, 얼얼이 미정한 때에 깊은 근심과 짙은 걱정이 전보다 몇 배 더하실 것입니다. 하와이에서, 상해에서, 미 본토에서 독립운동하시던 그 때와는 판이하게 아주 다릅니다."라며 "국무총리 이하 각 부 장관만 학식과 능력, 그리고 덕망 있는 사람으로 골라서 맡기시고, 그 아래는 그 사람들로 하여금 골라서 임용하도록 권리와 책임을 주십시오. 우남장께서는 이열 한 부의 장관과 네 처장만 딱 거머쥐셔서 번적 들며 줄줄이 따라 올라오고, 내려 놓으면 모두가 내려 앉습니다. 이렇게 하셔야지 만일 그렇지 않고 만기(萬機)를 일일이 친자(親自) 총괄하시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아무리 기억력 좋고 영리한 사람이라도 사람의 능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더구나 우남장께서는 지금 나이가 연만하신 터수에 어려우시니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라고 진언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조용하게 듣고 있던 이승만은 신익희의 건의가 끝나자 벌떡 일어서 방안을 빙빙 돌면서 손을 입에 갖다 대고는 훅훅 불면서 "안 돼요, 믿을 사람이 누구란 말이오"하고는 국회의장실 한 구석에 앉아 있던 여자 사무원을 가리키며 "저기 앉아 있는 사환들 까지도 내가 일일이 간섭해야 해요. 그래야 모든 일이 제대로 됩니다. 해공은 모르시는 말씀이야."라고 하였다. 신익희는 "우남 대통령 저 어른 큰일났다. 아직도 하와이의 사탕수수 밭에서 노무자로 이민간 무식한 교포들과 비서 몇 사람 데리고 일하시던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시니, 앞으로 정형(情形)은 어려워 질 것 같구나"라고 하였다. 신익희는 그가 독립운동 할 당시의 마인드를 버리지 못했다고 하였다.

 

 

측근들의 부패와 오도

측근들이 그의 눈과 귀를 가렸다는 설도 있다. 이승만이 돈암장, 이화장에 있을 때부터 비서관이며 그의 비서실장을 지낸 윤치영이기붕의 수하들이 눈과 귀를 가리고 이박사를 속였다고 진술했다. 윤치영은 '가슴아픈 것은 면종복배판 측근들에 대한 이박사의 심정이었다.'는 것이다.

 

윤치영은 내무장관 최인규와 자유당 간부들이 부정선거를 획책했다고 하였다. 윤치영에 의하면 '선거전이 종반으로 접어들면서 내무장관 최인규가 진두지휘하는 행정부의 부정선거 음모는 자유당 수뇌들과 미리 짜여진 각본에 따라 실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행정관서와 경찰이 청중을 강제동원하는 전국 유세가 2월 27일 대구에 이르러 수성천변에는 역사상 초유의 군중이 자유당 집계로도 30만에 달하였다.'며 1960년 2월 28일 대구 시내에는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을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장면 후보의 집회를 방해할 목적으로 등교케 했다. '최인규가 각급 행정관서와 경찰, 그리고 지방선거관리위원회에 내린 비밀지령은 이기붕 후보를 필사적으로 당선시키려고 무리를 담고 있었다'며 윤치영은 '이러한 부정선거운동의 양상을 보며 더군다나 장막에 둘러싸여 아무것도 모른 채 당신의 평소의 소신과 철학대로 민주주의적인 절차가 잘 진행되고 있으려니 하고 믿고 있을 이승만 박사의 처지가 가엾고 통분할 노릇이었다.'고 했다. 윤치영은 노쇠한 이승만 대통령의 여생을 점치던 정상배와 협잡꾼들과 같은 기회주의자마저 끼어들어 벌써부터 논공행상에 여념이 없는 작태들을 노정시키고 있었다 허정 역시 이승만이 소인배들의 농간에 희생되었다 고 하였다.

 

장면은 이승만 측근들이 장기집권을 위해 부정부패를 저질렀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장기집권은 이승만의 뜻이 아니라 그 부하들의 농간이었다는 것이다. '그 분을 장기집권 시키기 위한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중석불 사건, 원면 사건, 연계 자금 사건, 산업 금융 채권 사건 등 추잡한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 국민의 불신을 사게 되었다 는 것이다.

 

한편 이승만은 인의 장막에 가려져 있음을 은연중에 인식했다고 한다. 윤치영에 의하면 1958년 이승만을 찾아갔을 때 '당신의 불편한 심정을 토로하는 가운데 뭔가를 암시하는 듯 '철창에 갇힌 호랑이'에 비유해서 혼잣말처럼 독백하시던 일로 미루어 나로서는 여러 가지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며 이승만이 뒤늦게 자신이 부하들의 농간에 놀아남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이승만 우상화 논란

49년 3월 26일 중앙청 광장에서 이승만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9시에 기념식이 열렸고 집집마다 태극기를 걸었다. 54년 9월 18일 교통부 광장에서 '철도창설 55주년 기념 이승만 대통령 흉상 제막식'이 열렸다. 56년 3월 31일 서울 탑골 공원에 이승만 동상이 설치되었다. 이승만의 80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24m 높이의 동상이 제작되었다. 56년 8월 15일 이 동상의 제막식에서 이승만에 대한 만세 삼창이 이루어지고 서울 하늘에서는 축하 불꽃 놀이가 벌어졌다. 하지만 이 동상은 4.19혁명 이후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철거되었다. 59년 10월 이승만의 얼굴을 넣은 100환 동전 등 이승만을 소재로한 화폐 8종이 발행되었다. 서울 뚝섬의 '우남송덕관', '우민회관', '우남정'등 이승만의 호 '우남'이 들어가는 건물이 건축되었다. 부산 용두산 공원은 '우남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중앙대 도서관도 '우남도서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승만 하야 이후 이러한 기념물,건물등은 철거되거나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0년 한기총 나라사랑운동본부은 서울 연지동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이승만 건국대통령 동상 건립 소위원회’ 출범 기자회견을 갖고 “자유민주주의공화국의 정체성을 세우고 미국과 손잡고 태평양 기독교문화권을 형성한 우남에 대해 올바로 평가하고 그의 업적을 기념하는 사업을 펼치는 게 당연하다”고 밝혔다. 운동본부는 성명을 통해 대한민국 건국 정신과 정통성 회복을 위해 이 대통령 기념사업과 동상 건립, 건국기념일 제정에 정부가 앞장서 줄 것을 촉구했다. 아울러 한국교회에는 동상 건립 모금운동과 서명운동에 적극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미국의 이승만 제거 음모설

3.15 부정선거 자체를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한 미국의 계략이라는 주장도 있다. 윤치영은 이박사의 빛나는 독립투쟁의 업적을 이 기회에 일거에 실추시키고 어부지리를 얻으려 하고 있다는 모측의 계획된 공작 이라고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윤치영미 국무성의 음모가 개입되어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3.15 부정선거 규탄 데모로부터 변질되어 이승만 박사를 기꺼이 하야하도록 만든 일관된 계략이 있었다 고 의혹을 제기하였다. 윤치영은 '미 국무성의 이승만 제거작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나 안다고 해도 지금에 와서 그 진상을 자세히 밝힌다는 것은 쉽고도 어려운 일이 아닌가 싶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윤치영은 1950년대부터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하려고 공작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국민회 자금 유용 의혹

박용만과의 갈등 중 하와이 대한인 국민회 활동에서 자금을 유용했다는 의혹을 끊임없이 받기도 했다.

 

이승만은 하와이에 온 초기부터 하와이 실력자이면서 군사양성에 열중하는 박용만을 맹렬하게 비난했고, 박용만 반대세력을 규합했다. 이승만은 대한인 국민회의 운영권 곧 회비관리권을 움켜쥐려고 온갖 공작을 벌였으나 쉽게 실현되지 않았다. 박용만은 다른 농장으로 군영을 옮겨가면서 군사훈련을 거듭했으나 두 사람의 대립은 그칠 줄 몰랐다.

 

1910년대 중반 무렵 일제는 밀정을 통해 박용만의 군사훈련 사실을 캐냈다. 주미 일본 대사관에서는 미 국무장관에게 이를 항의했고 국무장관은 하와이 총독에게 그 실정을 알아보게 했다. 1918년 박용만이 살인미수 혐의로 재판을 받자,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증언을 했다.

그는 미국 영토에 조선국민군단을 설립하고 배일활동을 하면서 일본군함 출운호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 이는 미국과 일본 사이에 중대사건을 일으켜 평화를 방해하려는 짓이다.

박용만은 온갖 음모에 시달리면서 주도권을 잃어갔다. 이승만은 자금횡령 혐의로 대한인 국민회 간부들을 고소했고, 국민회 간부들은 법정에서 고통을 받아야 했다. 서로 벌인 소송사건이 열 차례나 있었다. 국민회와 이승만파(동지회)가 서로 테러를 가하기도 하고 국민회 대포회의때 총격이 가해지는 일도 벌어졌다. 이런 분쟁 속에서 마침내 국민회 주도권이 이승만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분쟁이 야기되는 속에서도 독립기부금은 잘 걷혀 1915년 1,523달러에서 해마다 늘어나 1918년도에는 3,775달러를 기록했다.

 

대한인 국민회 계열 재미 한국인들은 이승만을 두고 '협잡배'라 매도했고 돈을 너무 밝힌다고 비난을 가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이승만과 국민회가 독립자금 문제로 분란을 겪어 끊임없이 의혹을 받고 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족되자 국내외에 걸쳐 많은 독립자금이 들어왔는데, 1919년 미주의 국민회에서 임시정부에 송금한 내역을 보면 공식적으로 36,000달러였다고 한다. 다음 해 이승만도 많은 돈을 가지고 상하이로 왔는데, 1920년도에는 미주에서 200만 달러를 모금했는데, 이는 오늘날 가치로 보면 2억 달러가 된다.

 

이승만이 구미위원부를 발족한 뒤, 미주 동포들이 낸 독립자금은 구미위원부에서만 사용하고 임시정부로 보내주지 않았다. 그리고 독립자금 모금을 두고 다시 주도권 분쟁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박용만, 안창호 계열의 비판

박용만 계열 인사들은 이승만이 교포사회에서 잔악한 위험인물" 이라는걸 서슴없이 증언하고 있다.

 

'재미한인 50년사'를 저술한 김원용에 의하면 '이승만은 미주 한인사회에서 파쟁과 모함과 비난과 재판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마침내 대한인 국민회와 별도로 자기를 지지하는 '동지회'라는 단체를 따로 조직해서 국민회와 적대관계를 지속하여 한인사회를 분열시켰다.'고 비판하였다.

 

1983년부터 하와이 이민 1세대 중 장금환의 딸 로베르타 장은 지금 살고 있는 하와이 이민 1세대를 상대로 인터뷰를 하였는데, 하와이 이민 1세대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승만을 부정적 시각으로 증오하는 사람들과 긍정적으로 보는사람들 등등 각각 서로 반반씩 존재했었다. 이승만에 부정적 시각가진 이들은 대한인 국민회 철폐한것과, 자신의 부모를 죽이려고 든 기억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여성 편력

독립협회 활동과 수감, 미국 활동 등으로 아내와 친밀감을 가질 사이가 없었던 그는, 첫 아들인 이태산(이봉수)이 사망하면서 아내 박씨와 이혼하게 된다. 박씨부인과 이혼 후 오랫동안 혼자 살았으며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1930년 미국 워싱턴에서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겸 교육자인 임영신에게 청혼을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931년 이승만은 자신의 측근이며 임영신의 기전학교 은사인 이순길을 통해 임영신에게 청혼할 뜻을 밝혔으나 거절당하였다. 아내가 될 것인가 동지로 남을 것인가를 고민하던 임영신은 단독으로 이승만을 만나 거절하였다.

 

"아마 이 밤이 박사님을 뵈옵는 마지막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는 그날까지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 생각입니다...(이하 생략)...저는 이미 독립운동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앞으로 선생님 곁을 떠나서나, 선생님 곁에 있을 때나 언제든지 동지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이승만은 실망하였으나 임영신을 측근으로서 신뢰하였고, 임영신은 그의 가깝고 충실한 측근이 되었으며 자신의 호를 이승만의 이름에서 따 승당(承堂)이라 짓기도 했다.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은 홀로 귀국했다. 33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이 박사는 돈암장에 거주했다. 이때 윤치영의 부인 이은혜대한여자국민당의 당수였던 임영신 등이 돈암장을 자주 드나들며 그를 도왔다. 당시 이 박사는 71세, 임씨는 47세였는데, 두 사람이 불륜관계라는 소문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고, 이 소문은 이 박사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미국 캘리포니아대에 유학 중이던 임씨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확대 재생산됐다. 남편에게서 한국에 들어오라는 전갈이 있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프란체스카 도너에게 먼저 날아든 소식은 이 박사와 임씨의 관계에 대한 낯 뜨거운 소문이었다. 소식을 접한 그는 대로(大怒)했고 한국행을 서둘렀다. 귀국 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남편과 임씨를 떼놓은 것이었다. 이승만이 돈암장에서 이주한 후 마포장에 머무를 무렵, 김구 외에 임영신윤치영만이 마포장을 통제받지 않고 출입하였다. 이때 이승만이 임영신과 동침한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프란체스카 도너임영신마포장에 출입금지 시켰다.

 

 

김구의 이승만 암살 미수 의혹

장덕수 사건 이후 사이가 틀어진 김구가 이승만의 암살을 시도하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안두희 공판기에 의하면 김학규는 홍종만을 통해 안두희를 알게 되었다고 하며 김학규와 만나기 전부터 홍종만을 통하여 한독당에 입당할 것을 이야기하여 3, 4월경에 입당 절차를 밟았으며, 비서를 통하여 당원증을 내주게 했다고 하며 안두희가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한 일은 없다고 한다. 김학규는 안두희와 만났을 적마다 대한민국에 대한 불평을 말하였으며, 때때로는 듣기에도 위험한 이야기까지 하고, 또 김구 자신의 증명서까지 얻어달라고 말하여 왔다며 김학규는 그 후로 홍종만을 통해 찾아주지 말기를 요구하며 김구의 암살 약 1달 전부터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다고 말했다. 또한 김학규한국독립당에서 비밀당원증이란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진술과는 달리 김구가 경교장에서 암살되던 날 김학규경교장에 모인 한 측근에게 혈서를 하나 보여주었다.

 

사건 직후 경교장에서 보좌진을 부른 김학규는 자신이 소지하던 손수건 두 장 크기의 하얀 천을 한장 보였다. 천에는 "나는 미국제국주의의 주구 이승만을 타도한다"는 혈서가 쓰여 있었다. 보좌진들이 누가 쓴 것이냐 라고 붇자 김학규는 "안두희가 백범 선생 앞에서 쓴 것"이라며 믿었던 안두희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사실을 분해하며 부르르 떨었다.

 

이 사건 직후 김학규안두희의 혈서를 그대로 불에 태웠다. 그러나 김학규안두희김구에게 소개해서 이승만 암살을 도우려 했다는 정보는 이미 유출된 뒤였다.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비고
제1대 총선 국회의원
(동대문구)
1대 무소속 - - - 국회의원당선무.png 단독후보
제1대 대통령 선거 대통령 1대 대한독립
촉성국민회
91.8% 180표 1위 대한민국 제 1대 대통령 당선 간선
제2대 대통령 선거 대통령 2대 자유당 74.6% 5,238,769표 1위 대한민국 제 2대 대통령 당선 발췌개헌
제3대 대통령 선거 대통령 3대 자유당 70.0% 5,046,437표 1위 대한민국 제 3대 대통령 당선 유효투표율 53.8%
제4대 대통령 선거 대통령 4대 자유당 100% 9,633,376표 1위 대한민국 제 4대 대통령 당선 단독후보

 

 

 

이승만 내각 구성원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부통령 이시영(李始榮) 국회의장 신익희(申翼熙) 대법원장 김병로(金炳魯) 국무총리 이범석(李範奭) 외무장관 장택상(張澤相) 내무장관 윤치영(尹致暎) 재무장관 김도연(金度演) 법부장관 이인(李仁) 국방장관 이범석(李範奭)겸임 문교장관 안호상(安浩相) 농림장관 조봉암(曺奉岩) 상공장관 임영신(任永信) 사회장관 전진한(錢鎭漢) 교통장관 민희식(閔熙植) 체신장관 윤석구(尹錫龜) 무임소 장관 이청천(李靑天) 무임소장관 이윤영(李允榮) 국회부의장 김동원(金東元) 국회부의장 김약수(金若水)

 

 

수상 경력

  • 1947년 2월 미육해군연합협회 감사장
  • 1947년 2월 미육해군연합협회 금(金) 명예훈장
  • 1949년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
  • 1953년 1월 18일 미국 법률자문협의회 명예회원
  • 1954년 8월 뉴욕 시에서 수여한 공중봉사 공로 표창장
  • 1954년 8월 미국 뉴욕 시 공중봉사 공로 표창메달
  • 1954년 워싱턴 시 도착 기념 환영의 열쇠
  • 1955년 3월 21일 미국 금영자유훈장

 

 

학력

1908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유럽 역사"로 석사 학위를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는 영세중립론(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 배재학당 (졸업)
  • 조지워싱턴대학교 영어영문학과 (학사)
  •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 (석사)
  •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 국제정치학과 (박사)

 

명예 박사 학위

  • 1949년 7월 15일 서울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
  • 1954년 7월 30일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
  • 1954년 8월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
  • 1958년 11월 베트남 사이공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

 

 

가족 관계

본부인 박씨에게서 얻은 아들 이봉수를 잃은 뒤,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을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이강석이 사망한 뒤 대원군의 5대손인 이청이 양자 후보로 낙전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왕정복고를 연상시킨다"며 양자 입적을 중지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부인 박씨는 그가 미국으로 떠난 뒤 고아원에서 아들 하나를 양자로 들여 은수(恩秀)라고 하였다. 그러나 1949년까지도 은수가 호적상 그의 양자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뒤 이승만의 양자는 같은 항렬의 친족인 이승용의 아들 이인수를 양자로 들이게 됐다.

  • 고조부 : 이최권(李最權, 1756년 ~ 1808년, 진사)
  • 증조부 : 이황(李璜, 1784년 ~ 1845년)
  • 증조모 : 남양홍씨, 현감 홍치복(洪致復)의 딸
  • 할아버지 : 이창록(李昌祿, 1811년 ~ 1862년)
  • 할머니 : 밀양박씨(1817년 ~ 1849년) - 박동욱(朴東郁)의 딸
    • 고모 : 전주이씨
    • 고모부 : 김재석(金載錫, 본관은 김해)
    • 고모 : 전주이씨
    • 고모부 : 한필수(韓必洙, 본관은 청주)
    • 고모 : 전주이씨
    • 고모부 : 오인모(吳仁模, 본관은 해주)
  • 할머니 : 고령신씨(高靈申氏), 신흥우에 의하면 고령신씨가 이승만의 아버지 이경선의 생모라 한다.
  • 할머니(계모) : 제주고씨(1833년 ~ ?) - 통정대부 고인관(高仁寬)의 딸
  • 아버지 : 이경선(李敬善) (1839년 ~ 1913년 12월 5일)
  • 어머니 : 김해김씨(1833년 ~ 1916년)
    • 형 : 2명 요절
    • 누이 : 이태명, 황해도 해주의 우씨에게 출가
    • 매부 : 우태명(禹泰命, 본관은 단양)
      • 외조카 : 우종구
        • 진외종손 : 우제하(禹濟夏, 1922년 ~ 1972년 12월 27일)
        • 진외종손부 : 김옥연(金玉蓮, 1922년 ~ )
          • 증외종증손 : 우삼식(禹三植, 1948년 ~ )
    • 누이 : 전주이씨, 황해도 연백의 심씨에게 출가
    • 매부 : 심원붕(沈遠鵬, 본관은 청송)
  • 배우자 : 박씨(朴氏, 박승선(朴承善)), 1891년 결혼, 그 뒤 이혼) 1875년 ~ ?
    • 아들 : 이봉수(李鳳秀), 다른 이름은 태산(泰山) (1896년 ~ 1906년 2월 26일 미국 필라델피아)
    • 양자 : 이은수(李恩秀, 1925년 ~ ?) - 1949년 파양
  • 배우자 : 프란체스카 도너 (1900년 ~ 1992년 3월 19일, 한국명 이부란)
    • 양자 : 이강석 - 파양
    • 양자 : 이인수(李仁秀, 1931년 ~ ) (양자)
      • 자부 : 조혜자(曺惠子, 1942년 ~ )
        • 손자 : 이병구(李丙久, 1969년 ~ )
        • 손자 : 이병조(李丙朝, 1971년 ~ )
    • 아들 : 이강석(양자)
  • 외조부 : 김창은(金昌殷, 본관은 김해)
  • 진외증조부 : 박동욱(朴東郁, 본관은 밀양)
  • 장인 : 박춘겸(朴春兼), 본부인 박승선의 친정아버지
  • 장인 : 루돌프 도너 - 프란체스카 도너의 친정아버지
  • 장모 : 프란체스카 게르바르트 - 프란체스카 도너의 친정어머니

 

 

저서

신체시 효시는 이승만의 '고목가'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승만이 1896년 《협성회보(協成會報)》에 <고목가(枯木歌)>라는 신체시를 발표하였다는 설이다.

또한 이승만은 옥중에서 쓴 독립정신(옥중기)와 일본의 침략 야욕을 폭로한 일본 내막기 등을 썼다. 그밖에 시집도 냈는데 옥중에서 쓴 시들의 모음집인 체역집 등이 있다. 체역집이라는 시집은 그가 고종 황제의 수구정책을 비판한 혐의 등으로 1899년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체포, 구금돼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에서 옥살이를 할 때 지은 한시(漢詩)들을 모은 것이다.

  • 《영한사전》
  • 《청일전기》
  • 《독립정신》
  • Korean Mission to the Conference on the Limitation of Armament〉(군축 회담에서 한국의 역할), Washington, D.C., 1921-1922. (1922)
  • 《일본 내막기》(1941)
  • 《건국과 이상》
  • 《일본 그 가면의 실체》
  • 《일민주의 개설》(이승만, 일민주의보급회, 1949)

 

 

시집

  • 《이승만 한시선》
  • 《체역집》

 

작품

  • 친필 민영환 묘비
  • 친필 헐버트 묘비명
  • 화천댐 파로호 비석

 

취향

그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금욕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굉장희 대단한 미식가였고, 독서가였고, 재담을 즐기고 낚시, 테니스, 정원 손질, 개를 데리고 산책하기, 서도 등을 즐겼다. 그는많은 책을 독서하기를 좋아했다.

 

시 짓기도 좋아해서 애국충정에 넘치는 한시를 많이 지었다. 또 한시들 중에는 소, 벼룩, 모기, 빈대, 쥐, 파리, 누에 등을 주제로 하여 읊은 것들도 있다.[159]

 

 

기타

양녕대군의 다섯째 서자인 장평도정 가문에서도 이승만은 한참 방계에 속하였다. 14대조 부림령 이순(1489 - 1540) 역시 장평도정의 적자가 아니라 서자였고, 12대조 이충의는 셋째 아들, 11대조 전풍군 이원약이 둘째 아들이었으며, 6대조 이징하는 둘째 아들, 5대조 이환은 셋째 아들이었다.

 

서재필배재학당독립협회, 협성회를 통해 이승만을 지도하였으나 해방정국에서 그는 이승만의 정적으로 변신했다. 이상재는 독립협회와 YMCA에서 그의 활동을 도왔고, 옥중에 있을 때는 이승만이 준 성경을 보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상재는 이승만이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는 이승만의 미국 유학비와 생활비를 지원, 후원하였다.

 

가난한 한인 고학생들이 찾아오면 찾아가서 끼니와 차비와 숙박비도 지불해주었고, 학생들의 학비까지 직접 건네주기도 했다.

1957년 3월 21일 82회 생일을 맞아 우남장학회를 발족하였다. 또한 열녀상(賞)을 부활시켜서 매년 열녀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1958년 11월 5일에는 베트남을 방문, 베트남전 참전 의사를 발표했다. 파병은 1964년에 가서야 첫 파병군이 지원된다.

 

 

 

2.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

 

북한의 건국과정은 남한과는 다른 모습으로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미군이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기 이전인 8월 9일 소련군은 이미 두만강을 건너 북한에 진주하였고, 8월 24일 평양에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사령관은 치스차코프였다. 그러나 소련군은 군정을 통한 직접통치를 피하고, 각 지방별로 좌우합작의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자치를 하게 함으로써 간접통치방식을 썼다. 이미 인공이 대부분 주도적인 세력을 장악한 상태로 형식적인 좌우합작의 모양새를 띤 것이다.

 

그러나 9월 중순 소련군의 감독하에 조선공작단을 지휘하던 김일성(당시 34세)을 비롯한 항일 빨치산세력 약 200여 명이 들어오면서 소련군을 등에 업고 국내좌익을 누르고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평양의 주민들은 30대 초반의 젊은 김일성을 보고 놀랐지만 그는 빠른 속도로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1945년 10월 중순에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조직되어 김일성이 책임비서로 선출되고, 11월 중순에는 '북조선 5도행정국'이 설치되어 기초적인 행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어 1946년 4월 중순에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북조선공산당'으로 개칭하여 서울에 본부를 둔 '조선공산당'의 영향권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같이 김일성의 주도권 장악이 빠른 속도로 진행된 것은 소련군의 지원이 있을 데다가, 기독교가 많은 우파세력이 계속적으로 남한으로 내려와 저항세력이 미약하였고, 김일성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서 수적으로 우세했던 '조선독립연맹'(속칭 연안파)과  그 산하군대인 '조선의용군'이 무장해제를 당한 가운데 1946년 뒤늦게 귀국하여 주도권을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멀리 중국 서쪽 연안지방에서 독립을 맞이한 데다가, 중국 공산당과 가까워서 소련의 신임을 받지 못하였다.

 

이밖에 소련파 공산주의자가 해방 후 북한에 들어왔으나, 토착적 기반이 약하여 큰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였고 북한지역의 우파지도자는 조만식이었으나 신탁통치를 반대하다가 반동으로 규탄받아 제거되었으며, 농민중심의 천도교 청우당(1946.2.8)이 있었지만 큰 힘을 발휘하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좌익이 우세한 와중에도 1945년 11월 함흥과 신의주 등지에서 반공학생들의 궐기가 있었으나 무자비한 탄아븡로 실패한 것은 기억해둘 만하다.

 

북한은 1946년에 들어서자 재빠르게 개혁사업을 전개하였다. 이 해 2월에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하여 인민민주주의 독재정권을 세우고, 이른바 반제반봉건 민주혁명을 실행에 옮겼다. 민주혁명의 중심사업은 토지개혁과 주요산업 국유화였다.

 

1946년 3월에 단행된 토지개혁은 4%의 지주가 전체농지의 58%를 소유하고, 소작농이 전체농민의 73%를 차지하고 있던 북한의 농촌경제를 개조하기 위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졌다. 토지개혁의 결과 지주들은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었으나, 소작빈농이 하층 중농의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토지개혁에서 혜택을 입은 이들이 공산당에 대거 입당하여 처음에 4천 5백여 명의 당원으로 출발한 공산당원이 토지개혁 직후에는 27만 명으로 늘어났다.

 

한편 1946년 8월에 단행된 중요산업의 국유화는 일본인 혹은 민족반역자가 소유하던 기업소, 광산, 산림, 어장, 발전소. 철도, 운수, 체신, 은행, 상업, 문화관계산업 등을 국유화시킨 것으로 이는 전체산업의 90%를 차지했다. 나머지 소규모의 개인 수공업과 상업은 자유로운 소유와 기업활동이 하용되었다. 그 결과 국영기업이 전체 기업의 72.4%를 차지하게 되었고 개인기업은 23.2%로 줄어들었다.

 

 토지개혁과 중요산업국유화는 노동자, 농민에게 한동안 유리한 경제환경을 만들어 주었고 농업 및 공업생산력을 높이는데 기여하였으며, 공산당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그러나 다른 사회주의에 비해 지나치게 급속한 사회개혁은 민족반역자뿐 아니라 양심적인 지주, 자본가, 종교인, 지식인들에게도 큰 타격을 주어 이들은 38선을 넘어 대거 남한으로 넘어왔다.

 

그리하여 1947년말에 이미 월남인이 80만을 넘었으며, 그 뒤 한국전쟁중에 월남한 수를 합하면 월남민의 총수는 200만을 넘어섰다. 개혁의 피해자들이 고향을 떠난 것은 역으로 북한의 개혁을 한층 용이하게 만들었다. 그 반면 남한사회는 월남민들로 인구가 증가하여 실업자가 증가하였고 이들이 남한의 반공세력으로 굳게 뭉쳐 반공정책을 강화하는 데 한 요인이 되었다.

 

북한은 '민주개혁'을 하는 이유로서 이른바 '민주기지론'을 들고 나왔다. 즉 북한에 튼튼한 민주기지를 쌓고 이를 바탕으로 남한을 해방하여 통일로 밀고 가겠다는 전략이었다. 북한은 '민주개혁'에 병행하여 공산당을 보다 대ㅔ중적인 조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1946년 8월 '북조선공산당'과 연안파의 김두봉이 주축이 된 '북조선신민당'을 통합하여 '북조선노동당'(약칭 북로당)을 창당하였다. 이 해 11월 남한에서도 박헌영을 중심으로 하여 공산당과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이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약칭 남로당)이 창설되었는데, 남북노동당의 당원수가 거의 1백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북한은 이보다 앞서 7월에 '북조선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였는데, 이 또한 '일체의 애국적 민족역량을 결집'하여 인민민주주의 독재로 나가기 위한 전략을 담고 있었다.

 

1946년에 이미 경제개혁을 통해 지지기반을 확대한 북한은 1947년 2월에 최고행정기관으로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수립하고, 1948년 2월 8일 '인민군'을 창설하였다. 이제 남은 일은 선거를 통해 의회를 구성하고 정부를 선포하는 일이었다. 이 해 5월 10일 남한에서 단독선거가 실시되고, 8월 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북한은 8월 25일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하고, 9월 8일에 헌법(인민민주주의 헌법)을 통과시켰으며,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국기와 국가를 독자적으로 제정하였으며, 수도는 서울로 하고, 평양을 임시수도로 정하였다.

 

북한정권은 지역정권이 아니라 남북한을 망라하는 대표국가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1948년 6월 하순에서 7월 초순에 걸쳐 남한의 '제정당사회단체' 대표 1천여 명을 월북시켜 해주에서 '제2차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를 열어 최고인민회의를 창설할 것을 결의하고, 360명의 남한 대의원을 212명의 북한 대의원과 함께 최고인믾뢰의에 참여시켰다.

 

소련은 1948년 10월에 북한정권을 승인한 후 12월에 군대를 철수했다. 1949년 6월에는 북로당과 남로당이 합당하여 '조선노동당'을 결성하고 남한 좌익의 대부분이 북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또 같은 시기에 통일기구로서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을 결성하였다. 이리하여 해방 후 3년간 민족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분단국가의 비극적인 역사가 시작되었다. 북한 우익은 남한으로, 남한 좌익은 북한으로 월북하여 스스로 선택한 국가건설에 협조하였다. 이 부자연스런 국토분단과 민족분열은 우리민족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기보다는 일제가 터를 다지고, 미국과 소련이 각자 자기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갈라놓은 비극이었다.

 

 

 

김일성, 그는 누구인가?

 

김일성(金日成, 1912년 4월 15일 ~ 1994년 7월 8일)(본명 김성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군인이다. 만주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조선혁명군, 반일인민유격대(그 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 등을 조직했다고 선전된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북조선로동당의 지도자로 활동하였고, 남북로동당 통합 이후 조선로동당의 위원장이 되었다.

김일성
Kim Il Sung Portrait-2.jpg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제1·2·3·4·5대 국가주석
임기 1972년 12월 15일 ~ 1994년 7월 8일
국가 부주석 최용건(1972 - 1976), 강량욱(1972 - 1977)
박성철(1977 -1981), 강량욱(1977 - 1981), 김일
(1977 - 1981)
강량욱(1981 - 1983), 박성철
(1981 - 1984)
리종옥(1984 - 1998), 박성철(1984 - 1997)
총리 김일 (1972 ~ 1976)
박성철 (1976 ~ 1977)
리종옥 (1977 ~ 1982)
리종옥 (1982 ~ 1984)
강성산(1984 ~ 1986)
리근모(李根模) (1986 ~ 1988)
연형묵(1988 ~ 1992)
강성산(姜成山) (1992 ~ 1998)

출생일 1912년 4월 15일
출생지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평양부
사망일 1994년 7월 8일 (82세)
사망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묘향산
거주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정당 조선공산당, 북조선로동당 조선로동당
학력 만주 지린 성 화성의숙 군사학교 중퇴
배우자 김정숙, 김성애
자녀 아들 김정일, 김만일, 김평일, 김영일, 김현, 딸 김경숙, 김경희, 김경진
부모 아버지 김형직, 어머니 강반석
서명 Kim Il Sung Signature.svg
김일성
1912년 4월 15일 ~ 1994년 7월 8일
태어난 곳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평양 만경대
죽은 곳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묘향산
복무 소련 소련
복무 기간 1940년 ~ 1945년 10월 14일
최종 계급 CCCP army Rank kapitan infobox.svg소비에트 연방 붉은 군대 육군 대장
근무 소비에트 연방 붉은 군대
지휘 소비에트 연방 붉은 군대 극동군 제88국제여단
주요 참전 만주 항일 투쟁
기타 이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수상(1948~1972), 국가 주석(1972~)
김일성 (본명 김성주)
1912년 4월 15일 ~ 1994년 7월 8일
태어난 곳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평양 만경대
죽은 곳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묘향산
복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복무 기간 1948년 ~ 1994년 7월 8일
최종 계급 Generalissimo rank insignia (North Korea).svg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원수
근무 조선인민군
지휘 한국 전쟁
주요 참전 한국 전쟁
기타 이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수상(1948~1972), 국가 주석(1972~)

 

1948년 9월부터 1972년 12월까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내각 수상을 지냈고 1972년 이후에는 헌법(이른바 사회주의 헌법)을 바꾸고 국가주석직을 신설하여 1972년 12월 15일부터 1990년까지 1대 국가주석직을 지냈으며. 1990년 5월 24일 국가주석에 재선되어 1994년 7월 8일까지 2대 국가주석직을 지냈다.

미군정이승만정부의 학정으로 남한(대한민국)에서 전쟁동조세력이 발호할 거라는 판단착오와 군사력의 우월성을 기반으로 한국 전쟁을 일으켰으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인민군을 지휘하였다. 한국 전쟁의 책임자 중의 한사람이었으나 휴전 후에는 박헌영 등 남로당과 국내파 계열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정적을 숙청하였으며 1958년에는 무력으로 최고인민회의를 점령, 김두봉, 김원봉 등 중국 계열 모두 숙청하고 권력기반을 강화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전쟁을 발발하게 한 장본인 중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최근까지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 왔다. 1972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고 1990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재선되었으나 1993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직은 아들 김정일에게 넘겼다. 1994년 절대권력의 상징이었던 그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인 김정일이 모든 권력을 승계하였다. 그는 1998년에 개정된 사회주의헌법에서 정한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원래 이름은 김성주(金成柱 또는 金聖柱)였으나, 항일 무장 투쟁을 하면서 김일성으로 개명 하였다. 노동력 총동원(천리마 운동)으로 한국 전쟁 이후 피폐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를 복구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휴전 직후 그는 주체이념을 기조로 한 주체사상을 발표하였는데, 1980년대한민국의 일부 운동권에서는 그의 주체사상 노선을 받아들인 그룹도 있었다. 한편 소련군 행적, 한국 전쟁 장본인 의혹, 반정부 인사 및 정적 숙청, 인권 탄압 등에 대한 비판을 받아왔으며, 독립운동 여부에 대해서는 과장하지 않는 수준에서 인정하는 측과 불인정한 시각이 양립하고 있다. 기독교 가계 출신인 그는 원래 기독교 신자였으나 공산주의자가 되면서 무신론자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주석 추대 이후

 

헌법개정과 주석 취임 (1970 ~ 1972)

 

주석 취임 초기

 

 

김일성의 초상화.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통해 자주,자립 노선을 택하게 되었다. 1970년 에 진행된 조선로동당 제5차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에 재선출되었다. 1971년 8월 6일 캄보디아의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를 환영하는 평양 대규모 집회에서 "우리는 언제든지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을 포함한 남조선의 전(全) 정당, 사회단체, 개별인사들과 만날 용의가 있다."라고 천명하였다.

 

1972년 5월에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을 발표하였다.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 성명을 통해 남북 문제를 논의하였으며, 1972년 헌법 개정으로 국가 권력 구조를 국가주석 중심 체제로 바꾼 다음 12월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했다.

 

박정희 정권 붕괴 이후에도 껄끄러운 관계 가운데 대한민국에서 수해가 발생하자 김일성은 구호물자와 쌀을 지원하기도 했다. 1984년 수해 당시에는 쌀 5만 석(약 7800t), 옷감 50만m, 시멘트 10만t의 대규모 수해 구호물자를 대한민국에 지원하였고, 전두환은 이를 수용하였다.

 

 

대한민국과의 통일 교섭

닉슨독트린이후 찾아온 미·소 간의 데탕트는 한반도에도 영향을 끼쳤다. 1972년 5월 이후락은 평양의 김일성 집무실에서 한 시간 남짓 비밀회담을 갖는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1968년 김신조 일당의 1·21 사건과 관련,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단히 미안한 사건이다. 그때 나도 몰랐다. 우리 내부의 좌경 맹동분자들이 한 짓이다. 보위부 참모장, 정찰국장 다 철직(撤織)시켰다[55]고 주장했다. 또 6·25 얘기가 나오자 “과거는 과거고…. 다시는 남침 않겠다”는 취지로 말하기도 했다.

 

국가주석 취임 직후 평화통일론을 다시 선언하고, 박정희에게 박성철 등을 파견하였다. 그의 평화통일 제안을 전면 거부하던 이승만, 장면, 윤보선 등과는 달리 박정희가 협상 제안을 일부 수용함에 따라 매년 판문점에서 남북고위급 회담 및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하였다.

 

7.4 남북공동성명의 발표에 일부 지식인들은 환영하였으며, 이후 남한측에서 제의한 주기적인 이산가족 상봉을 승인하기도 했다. 1972년 여름 부산강원도 영월에서 수해가 발생하자 김일성은 특별히 구호물자로 쌀 3만석과 약간의 옷감을 보내왔고, 박정희 정권은 이를 받았다. 그러나 박정희는 남한 내부의 민주화 요구, 미국의 인권 문제 제기와 미군철수론, 영국과 프랑스의 유신체제에 대한 반감, 박정희의 핵개발에 대한 외교적 마찰 등의 문제에 시달리면서 남북교섭은 별 진전을 못보고 흐지부지 되었다.

 

 

권력기반 강화 (1972 ~ 1980)

1960년대 말부터 추진하던 박정희의 핵개발 추진에 자극을 받은 김일성은 군비를 증강, 본격 핵미사일 개발 사업을 추진한다. 72년 12월 15일에 채택된 새로운 사회주의헌법에 따라 그는 국가수반인 공화국 국가주석국방위원회 위원장(겸임)에 취임하였다. 그와 동시에 매년 남북대화를 진행하였다.

 

김일성은 국가주석 취임 직후 평화통일론을 주창하고 남한의 대통령 박정희에게 박성철 등을 사절로 파송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군비를 증강하고 핵미사일 개발 사업을 추진하였다. 박정희 정권 역시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하려던 카터 정부가 등장하자 군비를 증강하고 자체적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죽자 김일성은 조문단 파견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남한에서의 권력이양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고 1212 군사반란으로 신군부가 집권하자 김일성은 남조선에서 쿠데타를 일어났으니 인민무력부는 신호만 떨어지면 즉각 출동할 수 있도록 24시간 가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남한의 신군부는 이를 남침책동으로 규정했다. 당시 미국은 12.12 사태 직후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50% 정도로 판단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도 했다. 1980년 10월에 있은 당 제6차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재선되었다.

 

 

1980년 ~ 1988년

 

1984년 동독을 방문한 김일성

 

 

1984년 6월 1일 동독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와 공개 기자회견중인 김일성

 

 

1984년 6월 1일 동독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와 공개 기자회견중인 김일성

 

1980년 5월 동유럽 순방을 떠났으며, 5월 26일 치우셰스크의 초청을 받아 루마니아를 공식 방문했다.

1980년 이후 남북평화통일에 대한 방안 모색을 내각과 인민위원회에 지시했고, 1980년 10월 공식 성명을 통해 대한민국에 남북통일 방안으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안〉을 제안했다. 대한민국전두환 대통령은 집권 초기 정권 안정을 위해 1982년 북한과 ‘잠정협정’을 맺고 비정치적, 비군사적 교류부터 점진적으로 하자는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을 제의했다.

1984년 9월초 남쪽에 발생한 홍수로 전국에서 190여명이 생명을 잃고 재산피해도 1천300억원이 넘는 수재가 발생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9월8일 조선적십자회 이름으로 통지문을 보내 쌀 5만석(7천200t), 천 50만m, 시멘트 10만t, 의약품을 지원했다. 식량지원 이후 남북 양측은 적십자회담 본회담을 가진 데 이어 1985년에는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을 실현시켰고 남북간 최초의 경제회담도 시작했다. 1985년 전두환 대통령은 김일성에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했고, 김일성 역시 같은해 허담 비밀특사를 서울에 특파해 전두환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논의를 타진했다.

1987년 6월 6월 항쟁이 발생하자 그는 '온 민족이 남조선인민들의 통일애국투쟁을 적극 지지성원'하도록 지시하였다. 6월 항쟁으로 대한민국에서 군사정권이 붕괴되고 1988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서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올림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참석 여부 논란이 있었다.

 

 

남측 인사들과의 교섭 (1988 ~ 1990)

 1988년 8월 대한민국평민당 소속 국회의원 서경원이 비밀리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 2박 3일간 국가주석 김일성 및 부총리 허담 등과 회담하고 남하하였다. 홀로 방북해 김일성을 면담한 서경원은 대한민국 안기부로부터 간첩으로 몰리기도 했다. 남한에서는 박철언을 비밀리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파견하였다. 박철언은 그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서 1988년 11월 방북 당시 김일성을 면담하지 못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는 책에서 '사전에 남북 핫라인을 통해 비밀스러운 방북 사실을 북측에 알렸는데, 미국의 도청 가능성을 우려해 ‘대북 밀사’란 직접적인 말을 쓰지 못해 미스커뮤니케이션이 있었다.' 김일성 주석은 지방출장을 갔었고, 면담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989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남북정치협상을 제의하며 남쪽의 각 정당 당수와 사회단체 대표, 추기경 김수환, 민중·노동운동백기완, 목사 문익환평양으로 초청했다. 3월 25일 목사 문익환이 방북, 그와 두 차례 회담을 하고 4월 10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6월 21일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임수경일본 도쿄를 거쳐서 방북, 그와 면담하였다. 그러나 문익환과 임수경은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방북한 것이었기에,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노태우는 방북하였거나 협상에 참가한 문익환, 임수경 등을 체포, 구속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말기

국가주석 5선 (1990 ~ 1994)

김일성은 1990년 5월 24일 최고인민회의로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주석에 재선출되었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에도 재추대되었다. 동시에 최고인민회의로부터 의회의장격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수위(首位)에 추대되었다. 1992년 4월 13일 인민군 대원수 칭호를 받았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및 소련, 중국의 정치인들로부터 회고록 집필 제의가 들어왔다. 김일성은 처음에 사양했으나 그 후 마음을 바꿔 회고록 발간을 추진한다. 회고록 편집과 외교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하여, 1992년에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가 출판되어 나온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김일성은 공산주의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고, 자신이 죽기 전에 남한과의 통일이 이루어지도록 협상 추진을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부에서는 공산권 국가 붕괴의 파급효과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위기를 타개하려 했다.

 

 

개혁 개방 정책

1990년대 초부터 김일성은 무역시장을 활성화하려 하였다. 김일성은 중국과의 교역을 대폭 확대시켜켰으며, 미국, 일본, 프랑스, 영국 등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통상, 교역을 시도하였다. 1992년무렵부터는 미국일본의 영화와 음악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소개되기도 했다.

 

1992년 개방 의사를 공식 표명하고 미국, 유럽 등과 적극적인 외교협상을 추진한다. 나진,선봉에 무역지구를 열어 일본, 미국과의 무역을 허용하였고, 신의주를 통해 중국몽골, 중앙아시아와의 무역을 공식 허용하였다. 1993년에는 사회주의 헌법의 국가주석의 국방위원장 겸임조항 삭제를 지시하고, 국방위원장직을 김정일에게 이양하였다. 1993년 4월에 평화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의 10대강령을 제시하였다. 이후 김일성은 남한김영삼과 회동을 약속하였다. 한편 1990년대 초반 그는 노벨 평화상의 예비 후보로도 언급되기도 했다.

 

 

말년

그는 건강과 무병장수에 신경을 많이 써서, 젊은이들의 피를 뽑아서 자신의 피와 교체시키기도 하고, 불로장생약의 개발을 지시하기도 하였으나, 담배를 끊으라는 등의 주치의 등의 조언을 무시하여 건강을 점차 잃어갔다.  1994년 초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기도 했고, 심근경색 및 목뒤의 물혹이 심해져서 입원하기도 했다. 김영삼과의 회담은 1994년 초로 예정하였으나 김일성의 병세로 무기한 연기되었다. 1994년 6월 평양에서 전 미국 대통령 카터의 방문을 받고, 핵문제와 관련한 조미협상을 진행하였다.

1994년 7월묘향산으로 휴양을 다녀왔다.

 

미국의 전 대통령 카터를 면담할 때 남북정상회담을 제안, 회담 준비가 진행되던 가운데 7월 8일 새벽 2시에 평양 집무실에서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사망하기 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부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이 '유언'은 유훈 통치라는 이름으로 지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체제 및 대한민국의 대북정책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의 공식 사망 장소는 평양 주석집무실이지만, 묘향산 향산초대소에서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이 설이 제기된 배경에는 김일성이 요양을 하려 향산초대소에 머물다가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에 그 이후로 그의 아들 김정일이 향산초대소를 가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남북정상회담 성사 직전의 상황과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하여 김정일에 의한 암살 내지는 사망 방관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아직도 그의 죽음은 여러 가지 이야기와 함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대남정책문제로 아들인 김정일과 갈등이 빚어서 그 스트레스로 사망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65] 그는 오전 6시부터 저녁 10시까지 16시간 이상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타고난 체력과 정신력으로 장시간 정무를 강행하였으나, 70대 이후 부터는 체력의 한계를 불러와 감기와 당뇨와 목 뒤의 물혹, 피부병 등의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고, 만년에는 간혹 졸도하기도 했다.

 

조선중앙방송평양방송 등 주요언론들은 9일 정오 특별방송을 통해 김 주석이 “심장혈관과 동 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아오던 중 겹쌓이는 정신적 과로로 94년 7월 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 했고 심장쇼크가 합병되었으며 모든 치료를 다했으나 심장쇼크가 악화돼 7월 8일 새벽 2시에 사망했다”고 보도했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아나운서들은 김일성의 사망 당시 울먹이는 목소리로 "김일성 동지께서 뜻하지 않게 서거하신 것은 우리 당과 혁명의 최대의 손실이며 온민족의 가장 큰 슬픔"이라 표현하였다.

 

 

사후

김일성 광장
평양 김일성 종합 경기장
평양 김일성 종합 경기장

 

 

1994년 7월 8일부터 7월 17일까지 애도기간이 있었고, 7월 19일 국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김일성 사망 다음날인 9일 방송을 통해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이 김일성동상에 호상(護喪)을 선다는 소식이 보도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각 도, 시, 군들에서 간부들과 대학생들, 보위부와 안전부까지 동원되어 김일성동상 호상사업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당국은 처음에 ‘10일장’을 결정했으나, 3일을 연장해 결국 7월 20일에야 장례가 치러졌다. 각급 조직별로, 가족별로 생화를 준비해 김일성 동상을 찾아 애도를 표했으며, 동상이 없는 시골 에서는 김일성연구실에 있는 초상 앞에서라도 애도를 표시했다.

 

1994년 7월 20일 김정일은 금수산의사당에 안치된 김일성의 시신을 실은 영구차가 평양 시내를 한바퀴 돌고 다시 의사당에 안치하도록 조치했다. 이날 아침 평양시민들은 김일성의 영구차를 보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모여들었다. 영구차가 지날 때마다 길가에 늘어선 군중들은 꿇어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수령님, 수령님’하면서 통곡했다. 지방 주민들도 조직적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TV시청을 통한 장례식에 참여하였다.

 

 

추모 행사

만수산기념궁전

 

김일성이 사망한 뒤 평양에서는 대규모 추모 행사가 벌어진다. 이 추모 행사는 5년과 10년을 번갈아가며 진행되며,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김일성의 사망을 애도하기 위해 1997년평양 모란봉구역에 대형 추모탑을 세워놓고, 지방 도시에 1개씩 세웠다. 그리고 김일성이 태어난 날을 '태양절'이라고 부르도록 했으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강령을 통하여 "김일성 주석이 탄생한 1912년 4월 15일부터 '주체연호'를 사용한다."라고 했다.

 

 

 

김일성 동상

 

김일성이 생전에 말하기를 "만약 내가 죽는다면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묻히기를 간절히 바란다."라고 하였으나, 그의 유언과는 반대로 돌아갔다. 김일성의 주검은 방부 처리가 되어 금수산기념궁전에 있는 유리관에 안치되어 있다.

 

 

성격

김일성은 시와 노래를 좋아해서, 그가 지은 노래와 시가 몇 십 편에 이른다. 가장 유명한 노래는 "조선의 노래"이다. 이 노래는 일제 강점기동북인민혁명군이 부르던 것을 1993년보천보전자악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수 전혜영이 다시 복원했다. 그가 좋아하는 노래는 "사향가"와 "자장가"이다. 사향가는 내용이 고향에 대해 묘사한 것으로서, 그의 외조모인 이보익의 애창가였다. 김정일도 어린 시절에 그녀가 부르는 사향가를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또 자연을 노래한 시는 《묘향산 가을날에》라는 시가 있는데, 이 시의 내용은 평안북도 묘향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 이 시의 내용은 국제친선전람관에 내부에 전시했다. 그리고 김정일의 50돌의 생일을 맞이하여 "백두광명성찬가"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이 시는 한문으로 지어졌고, 량강도 삼지연군화강암 비석에 새겨져 있다.

 

또한 그는 서예 활동에 대해서 적극 참여하였는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공건물에는 김일성의 친필이 있는 간판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김일성의 친필비는 황해북도 개성시에 있으며, 주민들이 살고 있는 주택에도 현판을 제작해서 나누어 주기도 했다. 김일성의 친필이 걸려 있는 건물로는 "대동강려관"과 "김형직사범대학", 그리고 조선의 종합대학중의 하나인 "김책공업종합대학" 등이 있다.

 

특히 김일성은 평소 집무실에서 틈틈이 책을 읽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는 대한민국에서 발간된 책까지도 읽었다고 한다. 1989년 대한민국의 소설가 황석영문익환 목사 일행과 방북했을 때, 김일성은 황석영이 쓴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면서 한동안 그와 책 내용을 두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었다. 김일성 주석이 좋아했던 책은 역사책과 문학책이다.

 

 

주석 재임기간 중

외교 관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루마니아와 짐바브웨 등의 일부 유럽과 아프리카 국가들과 돈독한 우호관계를 형성했다. 특히 김일성은 루마니아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짐바브웨로버트 무가베등과 의형제를 맺었으며 이렇게 맺어진 의형제들 중에 큰형이 되었다. 미국과의 관계는 한국전쟁 이후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는 국의 지도자들과도 회담을 하였고, 1992년부터는 개방정책을 추진하였다.

 

상훈

  • 1953년 7월 2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화국 영웅' 칭호 수여
  • 1953년 7월 2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훈장 제1급
  • '공화국 영웅' 칭호 3번 수상, '공화국 3중 영웅'

 

주요 저서

로작 김일성 선집 홍보 포스터

저서, 로작, 주요 로작이라고도 부른다.

  • 《김일성선집》 (1953년) - 상·하권
  • 《김일성저작집》 (1962년) - 전 3권
  • 《진보적민주주의에 대하여》
  • 《김일성저작선집》(1971년)
  • 《세기와 더불어》(1994년) - 전8권
  • 《김일성전집》(2012년) - 전 100권

 

논란과 의혹

김일성 진위 논쟁

미 군정은 김일성의 본명이 김성주이며,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으로 명성을 얻은 `김일성' 행세를 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 자료에 따르면 김성주가 1929∼1930년 만주와 조선 국경에서 활동하던 실제 김일성의 유격부대에 합류했으며, 실제 김일성이 55∼60세에 숨지자 명령 때문인지 자발적이었는지는 몰라도 자신을 `유명한 전사(戰士.김일성)'로 가장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또 다른 주장은 오영진(吳泳鎭)의 《하나의 증언》, 이명영(李明英)의 《진위 김일성 열전》, 허동찬의 《김일성 평전》, 임은의 《북조선왕조성립비사》 등에 나타나 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해방직후 집회현장에 나타난 김성주가 너무 젊어서 평양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하며, 김일성 가짜설의 주요 근거로 내세운다. 또한 숙청당한 박금철의 증언과 남로당 출신 탈북자들의 증언을 인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북의 김일성이 가짜라는 설을 유포한 사람들은 친일파나 일제의 고등계 형사 출신, 또는 한민당과 같은 우익단체의 간부들이다. 이들은 분단상황에서 이북의 김일성이 식민지 시기의 말기에 민족적 항일영웅으로 존경을 받은 김일성이라면 지극히 곤란한 위치에 처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한홍구에 의하면 특히 가짜 김일성 설의 고전적 문헌인 이북의 <김일성 위조사>나 오영진의 <하나의 증언>이 한국전쟁 시기에 제작, 배포되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홍구는 '가짜 김일성 설'의 유포에 기여한 사람이 박정희라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가짜 김일성 설'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950년대에 이미 널리 퍼졌지만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좀더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전파되었다. 이승만의 경우 반민특위를 물리적으로 와해시키고 수많은 친일파를 등용하여 자신의 권력기반으로 삼았지만, 어느 누구도 이승만 본인을 친일파로 보지는 않았다. 는 것이다. 이어 한홍구는 "그러나 5·16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박정희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3등으로 졸업하고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라는 일본이름을 갖고 관동군 중위로 복무하다가 해방을 맞은 박정희로서는 분단상황에서 이북과의 정통성 경쟁이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는 것이다.

 

성공회대 한홍구 대학교수는 '이젠 '가짜 김일성 설'의 망령을 떨쳐버리고, 어떻게 김일성이 실제보다 부풀려져 영웅으로 부상했으며,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치는 무엇인지 자리매김해야 할 때'라고 평하였다. ‘가짜 김일성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책에 《만주국군》이란 것이 있다. 이 책에는 1937년 11월 김일성의 목을 베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책을 조금 더 넘겨보면 죽은 줄 알았던 김일성이 다시 나타나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니 전에 목을 벤 사람은 김씨 성을 가진 유격대 지도자일 뿐, 김일성은 건재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런 식으로 김일성이 가짜라는 주장은 너무나 허점이 많기 때문에 여기서 일일이 반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홍구에 의하면 문제는 학문적인 관점에서 볼 때 황당하기 짝이 없는 가짜설 이라는 것이다.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은 1945년 10월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에 나타난 김일성이 34살로 너무나 젊었다는 데서 비롯되었고, 당시 평양공설운동장에 모인 군중이 김일성이 백발을 휘날리는 노장군이라고 생각했을 수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미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겨울의 만주에서 전개된 항일유격전쟁은 백마를 탄 노장군이 나오는 세계는 아니었다.'라고 반박하였다.

 

반면 김성주가 항일운동을 한 김일성이 맞다고 주장하는 서대숙(徐大肅) 등의 말에 따르면,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 직후 현상금이 1만 엔으로 오른 일(항일 단체의 위원장급의 현상금이 3천 엔이었다.), 그밖에 항일 활동으로 소련으로부터 적기(赤旗) 훈장을 받은 일 등을 근거로 부정한다. 그만한 활동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처우를 받았다고 근거로 보며, 소련 정부가 아직 새파란 나이의 젊은 김성주에게 훈장을 줄 정도면 그것은 소련도 인정할 만큼 그의 활동이 대단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3차 조선공산당 대표였던 김철수(金綴洙)는 김일성이 가짜였다면 독촉(獨促) 회의 당시 내각 구성을 숙의하는 과정에서 그토록 어린 김일성을 군사위원장으로 천거할 수 있었겠느냐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반문했다.

 

 

미화 논란

문인들은 김일성 찬양에 앞장섰다. 김일성은 46년 위대한 우리나라의 태양으로 예찬되었으며, 김일성을 우리 민족의 양심이고 의지이며 우리 민족의 신념이며 희망으로서, 우리 민족의 샛별로 묘사한 조기천의 약3천여 행의 장편 서사시 백두산은 47년 북조선 예술축전에서 1등상을 받고 각 학교의 교과교재로 채택, 사용되었다.신형기는 김일성의 과거의 영웅적 풍모를 알리는 일화와 기사, 그리고 문학작품들은 특별한 기획이나 지도의 결과가 아닐 수도 있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김일성 항일운동 미화 논란

김일성의 항일운동 경력에 대해서는 이견의 소지가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식 기록에는 김일성은 비교적 혁혁한 성과를 올린 항일 운동가로 기록되어 있으나, 지도자의 능력이나 생애를 과대 평가하는 북한 공산주의 체제의 특성상 김일성의 항일 운동이 조작되고 과장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가짜 김일성설이다. 하지만 가짜 김일성설을 지지하지 않는 측에서도, 김일성의 항일 운동이 과장되고 조작되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항일을 한 것이 아니라 소련과 일본의 전쟁을 소련군에 참여하여 활동한 것이므로 항일운동이라고 볼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 보천보 전투 또한 마찬가지로 실제로 죽은 사람은 등에 업혀가던 순사의 딸 한명 뿐이며, 파출소를 습격해 무기를 노획한 정도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특히 대한민국의 우익 성향의 문서나 관변문헌과 북한 문헌들의 김일성 활동 서술은 대조적으로, 이는 북한의 문헌들이 그의 활동을 사실 이상으로 미화시키려 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경제정책 실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1960년대까지 대한민국의 두 배 이상 경제력을 유지해왔으나, 이는 소련의 무상 지원 13억 루블 등,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 및 중화인민공화국의 막대한 지원 덕분이었다. 1970년대 이후로는 소련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이 어려워졌다.

 

국제환경의 변화도 경제건설의 집중도를 떨어뜨리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김일성은 1950년대 중반의 중,소 분쟁 이후 1960년대 들어 대한민국에서 한일국교가 수립되자 '미국 제국주의, 소련 수정주의, 중국 교조주의, 일본 군국주의에 포위되었다.'고 인식하면서 '자립경제노선'을 더욱 강조했다. 여기에 줄곧 국민총생산 20~30%에 이르는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며 '4대 군사노선'을 강조했다.

 

1970년대,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명기한 《사회주의헌법》을 발표한다. 주체사상이 사상변화를 추동할 여지를 극도로 좁히게 만들어 민주화운동과 시민의식을 크게 저하시키는 역할을 했고, 이어 생산력 저하 문제를 극도로 심화시켰다. 이 시기 김일성은 '사상사업'을 강조해 국유화 중심으로 운영하였고, 시장,개인영농이나 상공업의 자율성을 전면 부정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김일성이 사망할 무렵 최악에 이르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외국의 무상 식량지원 없이는 버틸 수 없게 만든 '외세 의존적 지도자'로 비판받았다.

 

 

기타

배움의 천리길

김일성의 생가, 만경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그의 '배움의 천리길'을 기념하는데, 이는 그가 1921년 만주 바다오거우에서 칠골로 유학한 일이라는 설과 1925년 칠골에서 만주로 건너간 일이라는 설이 있다. 생전에 70여개 국가와 국제기구들로부터 180여개의 최고훈장과 메달, 30여개도시의 명예시민칭호, 20여개의 이름있는 다른 나라 대학으로부터 명예교수, 명예박사칭호, 169개 나라 당 및 국가, 정부수반들과 진보인사들로부터 16만 5,920 여점의 선물을 받았다.

 

 

종교

김일성은 초기에 부모와 목사 집안이었던 외가의 영향으로 개신교 장로교 예배당에 다녔다. 그의 양친이 장로교 신자였고 외조부 강돈욱과 외삼촌 강진석, 외삼종조부 강량욱은 모두 장로교 목사였다. 유년기에 장로교 신자 생활을 했다는 의견이 있으나 청년기에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하면서 무신론자가 되었다. 이후 김일성이 신앙활동을 했다거나 신앙적이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신체적 특징

김일성의 목 뒤에는 야구공과 동일한 크기의 혹이 나 있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과의사들은 김일성의 혹을 제거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김일성이 나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김일성의 이름으로 수여되는 상훈

  • 김일성상
  • 김일성훈장
  • 김일성청년영예상
  • 김일성소년영예상
  • 조국통일상

 

 

 

평가와 비판

 

긍정적 평가

그는 항일 독립 운동에도 참가했고 알려지는데, 1937년보천보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비롯해서, 일제 강점기 동안 동북인민혁명군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한홍구는 '이젠 '가짜 김일성 설'의 망령을 떨쳐버리고, 어떻게 김일성이 실제보다 부풀려져 영웅으로 부상했으며,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치는 무엇인지 자리매김해야 할 때'라고 주장하였다.

 

 

경제 성장과 산업시설 육성

김일성은 북한의 경제발전을 위해 산업화와 공업화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된 정책들을 입안했다. 1956년남포시에 있는 제철공장 방문한 뒤 천리마운동을 실시하였다. 천리마운동 기간에는 공업 현대화가 진행되고 남포항과 평양역 같은 산업교통시설이 복원되었다. 그리고 지방 여러 곳에 발전소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1990년대에 들어서자, 중화인민공화국과는 달리, 발전된 공업국가에서 생활수준이 낙후된 농업 국가가 되었다.

 

 

항일 독립 운동 공적

그는 또한 항일운동을 했다. 1937년보천보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비롯해서, 일제 시대 동안 동북인민혁명군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그에 대한 비판이 존재하는 가운데, 그가 일으킨 보천보 전투에 대한 평가를 다시 내리고 있다.

 

대한민국반공 체제 하에서는 보통 김일성은 독립운동가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1985년, 1986년경 이후 대한민국의 일부 역사학계 및 학생운동권 계열 등에서는 김일성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독재를 한 것과, 한국 전쟁의 주요 가담자라는 것과는 별개로 일제 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은 인정해야 된다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부정적 평가

그는 박헌영과 더불어 한국 전쟁의 최고 주범이다. 또한 김일성은 인권을 말살하는 스탈린주의를 엄격하게 고수했고, 황장엽의 인간중심 철학에 기초해 제시된 주체사상을 통치이데올로기화 하면서 독재이데올로기로 변질시켰다. .[82] 여기에 더해, 정적 탄압과 독재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한국 전쟁 이후 권력 강화 및 집권을 위해 연안파, 조선 국내파, 중국파를 비롯한 다수의 공산주의, 사회주의자들을 대량숙청하는 등 정치탄압을 가하였다.

 

 

정적 탄압 및 일당독재화

김일성은 최초에는 명망높은 공산주의자인 최용건을 앞세워서 독재를 실시했으며 이 과정에서 한국 전쟁에 대한 패전의 책임을 물어 연안파, 조선 국내파, 중국파를 비롯한 다수의 공산주의, 사회주의자들을 대량숙청했다. 또한 정치지도원을 적극 활용하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감시했으며 자신의 아들인 김정일을 후계자로 삼아 공산주의와는 동떨어진 세습체제를 구축한 것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경제 파탄

김일성은 경제적으로 공업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농산물의 값이 폭등하고, 계단식 논밭을 무리하게 개간하여 산림을 파괴시켜 그로 인해 식량생산의 자급률이 떨어지는 등 농업의 쇠퇴를 야기했다. 게다가 경제개발에는 점점 신경을 쓰지 않게 되고 오직 자신의 우상화에만 전력투구했기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는 1970년대 후반부터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였으며 2000년대 이후에는 거의 국가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1980년대에는 국채를 대량 발행하고 외국에 엄청난 빚을 졌는데 이 때문에 북한의 경제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게다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 부채를 갚을 티끌만큼의 노력도 하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통일이 되면 대한민국이 이 부채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 다음은 북한이 각국에 진 부채이다.

 

 

국가 액수(단위:달러)
중국 69억 8천만
러시아 11억
일본 4억
스웨덴 3억 3천만
이란 3억
독일 3억
프랑스 2억 8천만
태국 2억 6천만
오스트리아 2억 1천만
시리아 1억 4천만
스위스 1억
대만 8천 6백만

 

 

 

친일파 중용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성립하면서 친일파들을 일부 등용했다.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는 독립운동가를 색출하던 일제의 헌병 보조원 출신이였으며 조일명 문화선전성 부상은 친일 사상교양단체였던 '대화숙' 출신으로 학도병 지원 유세를 주도했으며 군사분야를 담당한 김정제 보위성 부상은 양주군수를 지내는 동안 일제에 협력했다. 군부도 마찬가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공군사령관 이활과 인민군 9사단장 허민국, 인민군 기술부사단장 강치우 등은 나고야 항공학교 출신이다. 나고야 항공학교는 가미가제 폭격요원을 양성하는 학교였다.

 

 

연보

  • 1919년 팔도구 소학교에 입학
  • 1923년 3월 외척이 교사로 있는 칠골창덕소학교로 전학
  • 1925년 만주 푸쑹 소학교로 전학, 졸업, 길림성 유원중학교로 진학
  • 1926년 6월 5일 아버지 김형직 사망.
  • 1926년 10월 17일 공산주의 소년단체 ㅌ.ㄷ(타도제국주의동맹)의 조직에 가담
  • 1929년 유원중학교 3학년 재학 중, 불순사상 혐의로 중국 군벌에 체포
  • 1929년 가을, 수감 중 유원중학교에서 퇴학당함, 화성의숙에 입학
  • 1930년 5월초 출옥
  • 1930년 6월 30일 카룬회의를 주관하고 조선혁명군을 조직
  • 1931년 화성의숙 졸업, 조선공산청년회에 가입
  • 1932년 4월 25일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 그 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
  • 1934년 가을 동북인민혁명군 제3단으로 배속되어 동북인민혁명군 제3단 정치위원에 임명
  • 1936년 3월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정치위원회 위원
  • 1936년 7월 동북항일연군이 편제개편 이후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으로 배속, 제1로군 6사단장이 되다.
  • 1936년 5월 항일 통합조직 조국광복회 결성에 참여
  • 1936년 함경남도에서 보천보 전투를 지휘, 일본군과 경찰관서를 습격.
  • 1940년 3월 25일 허룽현 훙치허에서 훙치허 전투를 지휘. 일본인 백여 명을 사살하고, 30여 명을 생포했으며, 탄약과 양곡을 전리품으로 획득하였다.
  • 1940년 소비에트 연방 하바로프스크로 떠나 소련군에 입대, 소련군 특무공작요원으로 훈련을 받고 소련군 장교로 임관(소련 인민군 육군 소위)
  • 소련군 대위로 소비에트 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에 배속되어 5년간 복무, 군사교육과 훈련 이수
  • 1945년 8월초 동북항일연군교도려 내에 있던 조선인들은 '조선공작단' 결성에 참여
  • 1945년 8월말 소련군 소좌로 진급, 귀국
  • 1945년 9월 22일 평양에 도착
  • 1945년 10월 소련군 소좌에서 예편
  • 1945년 10월 8일~10월 9일 김일성은 38도선 개성에서 박헌영과 회담하여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를 협의하였다. 그러나 38도선 이북에도 당본부를 설치한다는 그의 주장에 박헌영은 거절하고 분국 형식으로 당을 조직하게 됐다.
  • 1945년 10월 10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중앙조직위원회를 조직
  • 1945년 10월 13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조직, 조공 북조선분국 집행위원에 선출(당수는 김용범)
  • 1945년 11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장악, 12월 김용범을 몰아내고 책임비서가 되다.
  • 1945년 12월 18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제2대 책임비서로 선출
  • 1946년 2월 8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위원장
  • 1946년 2월 15일 민족주의민주전선 북조선지부 위원장
  • 1946년 3월 1일 평양에서 3·1절 27돐 기념회를 주관하다가 백의사 단원이 던진 폭탄을 피해 단상에서 뛰어 내림. 이때 그를 감싼 소련군 중위 노비첸코는 오른 팔을 잃었다.
  • 1946년 3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북조선공산당으로 개명하고 당수에 취임. 3월북조선공산당을 다시 북조선로동당으로 당명을 바꿈
  • 1946년 6월 14일 민주주의민족전선 북조선지부 산하정당 소집, 임시정부 수립 계획을 논의
  •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 창건, 최고인민회의 조직, 대의원의 한사람에 선출됨
  • 1948년 3월 김구의 남북협상 제안에 수용
  • 1948년 4월 평양직할시에서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주관
  • 1948년 9월 황해남도 해주군에서 제2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주관
  •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초대 총리에 선출
  • 1949년 6월 30일 통합 조선로동당 위원장
  •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발발
  • 1950년 7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취임
  • 1953년 2월 8일 인민군 창건 5주년에 공화국 최초의 조선인민군 원수로 추대
  • 1953년 박헌영을 실각, 남로당 출신들을 처형함
  • 1956년 7월 19일 박헌영을 처형함
  • 1958년 3월 무력으로 최고인민회의 장악,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을 강제 해임, 실각시킴
  • 1958년 11월 김원봉을 숙청, 처형함
  • 1960년 3월 마산에서의 시위를 보고 이승만의 퇴진을 예견함
  • 1970년 조선로동당 제5차 전당대회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에 재선출
  • 1972년 남북고위급회담박정희에게 제안, 사절단 교환후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
  • 1972년 5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 발표
  • 1972년 10월 국가 주석 취임, 동시에 국방위원회 초대 위원장에 선출
  •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로 다시 재선
  • 1983년 국채 대량 발행
  • 1989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남북정치협상을 제의, 남쪽의 각 정당 당수와 사회단체 대표, 추기경 김수환, 민중·노동운동가 백기완, 목사 문익환 등을 평양으로 초청
  • 1989년 3월 25일 목사 문익환이 방북, 그와 두 차례 회담을 하고 4월 10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 1989년 6월 21일 한국외국어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임수경이 일본 도쿄를 거쳐서 방북, 면담
  • 1990년 5월 24일 최고인민회의로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주석에 재선출되고, 국방위원회로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에도 재추대되었다. 동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수위(首位)에 추대
  • 1992년 4월 13일 조선인민군 대원수로 진급
  • 1993년 2월 대한민국 대통령 김영삼에게 방북을 제의
  • 1994년 7월초 묘향산으로 휴양을 다녀왔다.
  • 1994년 7월 8일 사망

 

 

가족과 친척

 
 
 
 
 
 
김형직
金亨稷
1894 - 1926
 
 
 
강반석
康盤石
1892 - 1932
 
 
 
 
 
 
 
 
 
 
 
 
 
 
 
 
 
 
 
 
 
 
 
 
 
 
 
 
 
 
 
 
 
 
 
 
 
 
 
 
 
 
 
 
 
 
 
 
 
 
 
 
 
 
 
 
 
 
 
 
 
 
 
 
 
 
 
 
김정숙
金正淑
1917 - 1949
 
 
 
김일성
金日成
1912 - 1994
 
 
 
 
 
 
 
 
 
 
 
 
 
 
 
김성애
金聖愛
1928 - ?
김영주
金英柱
1920 -
 
 
 
 
 
 
 
 
 
 
 
 
 
 
 
 
 
 
 
 
 
 
 
 
 
 
 
 
 
 
 
 
 
 
 
 
 
 
 
 
 
 
 
 
 
 
 
 
 
 
 
 
 
 
 
 
 
 
 
 
 
 
 
 
성혜림
成蕙琳
1937 - 2002
 
 
 
김정일
金正日
1941 - 2011
 
 
 
고영희
高英姬
1952 - 2004
 
김경희
金敬姬
1946 -
 
장성택
張成澤
1946 - 2013
 
김평일
金平日
1954 -
 
 
 
 
 
 
 
 
 
 
 
 
 
 
 
 
 
 
 
 
 
 
 
 
 
 
 
 
 
 
 
 
 
 
 
 
 
 
 
 
 
 
 
 
 
 
 
 
 
 
 
 
 
 
 
 
 
 
 
김남
金正男
1971 -
 
김정철
金正哲
1981 -
 
김정은
金正恩
1984 -
 
 
 
리설주
李雪主
1989 -
 
김여정
金汝貞
1987 -
 
 
 
 
 
 
 
 
 
 
 
 
 
 
 
 
 
 
 
 
 
 
 
 
 
김한솔
金-
1994 -
 
 
 
 
 
 
 
 
김주애
金?
2013 -

 

김일성은 김정숙에게서 정일, 만일, 경희의 2남 1녀를, 김성애에게서는 평일, 영일, 경숙, 경진의 2남 2녀를 각각 두었다. 그 밖에 주석궁의 안마사 또는 간호사 출신인 성명불상의 제갈씨에게서 서자 김현을 두었다.

 

 
 
 
 
 
 
김형직
金亨稷
1894 - 1926
 
 
 
 
 
 
 
 
 
강반석
康盤石
1892 - 1932
 
 
 
 
 
 
 
 
 
 
 
 
 
 
 
 
 
 
 
 
 
 
 
 
 
 
 
 
 
 
 
 
 
 
 
 
 
 
 
 
 
 
 
 
 
 
 
 
 
 
 
 
 
 
 
 
 
 
 
 
 
 
 
 
 
 
 
 
 
 
 
 
김정숙
金正淑
1917 - 1949
 
 
 
김일성
金日成
1912 - 1994
 
 
 
김성애
金聖愛
1928 - ?
 
 
 
 
 
 
 
 
 
 
제갈○○
諸葛氏
 ? - ?
 
 
 
 
 
 
 
 
 
 
 
 
 
 
 
 
 
 
 
 
 
 
 
 
 
 
 
 
 
 
 
 
 
 
 
 
 
 
 
 
 
 
 
 
 
 
 
 
 
 
 
 
 
 
 
 
 
 
 
 
 
 
 
 
 
 
 
 
 
 
 
 
김정일
金正日
1941 - 2011
 
김만일金萬日
1944 - 1947
 
김경희
金敬姬
1946 -
 
김경숙
金敬淑
1951 -
 
김경진
金經進
1952 -
 
김평일
金平日
1954 -
 
김영일
金英日
1955 - 2000
 
김현
金現
1971 - 2001

  • 고조부 : 김송령 (金松齡, 1810년 12월 1일 ~ 1899년 3월 12일)
  • 고조모 : 나현직 (1811년 3월 4일 ~ 1897년 1월 23일)
  • 증조부 : 김응우(金膺禹, 1845년 4월 8일 ~ 1930년 2월 10일)
  • 증조모 : 이씨(李氏)
  • 조부 : 김보현(金輔鉉, 1871년 음력 8월 19일 ~ 1955년 양력 9월 2일)
  • 조모 : 리보익(李寶益, 1876년 5월 31일 ~ 1959년 10월 18일)
    • 숙부 : 김형록(金亨禄)
    • 숙부 : 김형권(金亨權, 1905년 11월 4일 ~ 1936년 1월 12일)
    • 고모 : 김구일녀(金九日女)
    • 고모 : 김형실(金亨實)
    • 고모 : 김형복(金亨福)
  • 부 : 김형직(金亨稷, 1894년 양력 7월 10일 ~ 1926년 양력 6월 5일)
  • 모 : 강반석(康盤石, 1892년 음력 4월 11일 ~ 1932년 양력 7월 31일)
    • 동생 : 김철주(金哲柱, 1916년 6월 12일 ~ 1935년 6월 14일)
    • 동생 : 김영주(金英柱, 1920년 - )(일본제국 육군관동군의 통역관)
  • 아내 : 김정숙(金正淑, 1917년 12월 24일 ~ 1949년 9월 22일, 항일유격대원·공산주의 운동가)
    • 장남 :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 1942년 2월 16일 ~ 2011년 12월 17일)
    • 며느리: 홍일천(洪一茜)
      • 손녀 : 김혜경(金惠敬, 1968년 ~ )
    • 며느리: 성혜림(成蕙琳)
      • 손자 : 김정남
      • 손자며느리 : 신정희
        • 증손 : 김금솔(1999년 ~ )
      • 손자며느리 : 이혜경
        • 증손 : 김한솔(1995년 ~ )
        • 증손녀 : 김솔희(1999년 ~)
      • 손자며느리 : 서영라
      • 손자며느리 : 장길선
        • 증손 : 김이순
    • 며느리: 김영숙(金英淑)
      • 손녀 : 김설송(金雪松)
      • 손녀 : 김춘송(金春松)
    • 며느리: 고영희(高英姬)
      • 손자 : 김정철
      • 손자 : 김정은
      • 손자며느리 : 리설주
        • 증손 : 김주애
      • 손녀 : 김여정(金汝貞)
    • 며느리: 김옥(金玉)
    • 차남 : 김슈라(본명, 김만일. 어려서 사망)
    • 장녀 : 김경희(당 중앙위원, 경공업부장 역임, 1946년 2월 6일)
    • 사위 : 장성택(張聖澤, 정치인·국방위원, 1946년 5월 30일 ~ 2013년 12월 12일)
      • 외손녀 : 장금송(1977년 ~ 2006년)
  • 아내 : 김성애(金聖愛, 1928년 ~ )
    • 차녀 : 김경숙(1951년 ~ )
    • 삼남 : 김평일(金平日, 1954년 ~ )
    • 자부 : 김순금
      • 손자 : 김은송
      • 손자 : 김인강
    • 사남 : 김영일(1955년 ~ )
    • 삼녀 : 김경진
    • 사위 : 김광섭 주 오스트리아 북한대사 역임
  • 아내 : 제갈씨, 주석궁의 안마사
    • 오남 : 김현(1971년 ~ 2001년, 김정일에 의해 처형당함)
  • 아내 : 김송죽
    • 사녀 : 이름 불명
    • 관련 인물
      • 사촌 형제 : 김창주(金昌柱, 정무원 부총리 역임)
      • 고종사촌 : 김정숙 : 정무원 총리 허담의 처
      • 고종사촌 : 김신숙 : 최고인민회의 위원 양형섭의 처
  • 외조부 : 강돈욱(康敦煜, 1871년 ~ 1943년), 목사
    • 외숙부 : 강진석(康晋錫), 목사
  • 외삼종조부 : 강량욱(康良煜, 1904년 12월 7일 ~ 1983년 1월 9일)
  • 기타 : 김용순(김정숙의 남동생)
  • 기타 : 김달현, 외조카사위
  • 기타 : 강성산 인척
  • 처남 : 김기준, 김정숙의 형제
  • 처남 : 김기송
  • 처제 : 김영숙, 김정숙의 여동생
  • 기타 : 이한영, 인척

 

 

일화

김일성 장례에 당시 전체 인민들이 총동원해 매일 생화를 들고 동상을 찾으려니 북한에 꽃이란 꽃은 전부 절판되는 진풍경을 보이기도 했다. 김일성 사망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김일성, 김정일 생일날 김일성 동상이나 초상화 앞에 꽃다발을 갖다 놓는 관례가 있었다. 이 시기를 이용해 한시적으로 꽃장사에 나서는 주민들이 있었는데, 김일성 장례기간 동안 이 사람들이 엄청나게 돈을 벌었다는 것이다.

 

평소 북한 돈 5원밖에 하지 않던 생화 한송이는 김일성 장례기간 동안 50원까지 뛰어 올랐다. 그것도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그러자 일시적으로 종이로 만든 조화가 김일성 동상앞에 놓여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