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1,052 : 해방과 건국 12 (한국전쟁과 전후복구 1)

 

 

 

한국의 역사 1,052 : 해방과 건국 12 (한국전쟁과 전후복구 1)

 


폭파되는 흥남 부두
유엔군의 폭파 작전으로 짙은 화염에 휩싸인 흥남 부두. 유엔군은 흥남 철수 작전을 마치면서 부두를 폭파했다(1950년 12월 24일).

 

 

한국전쟁(6.25전쟁)과 전후복구(1950~1959) 1

 

 

1. 한국전쟁(6.25전쟁)

 

좌익과 좌우합작파의 반발 속에서 출범한 대한민국의 이승만정부는 경제난까지 겹쳐 국민의 신임을 크게 얻지 못하였다. 게다가 1948년의 제주 4.3사건 이후 군대반란까지 일어나고, 지리산, 오대산, 태백산 일대에서는 1950년 봄까지 좌익의 게릴라 활동으로 거의 내전상태나 다름없었다.

 

이승만정부는 군대와 경찰 그리고 월남민의 일부가 1946년 12월 조직한 서북청년회 등 극우 청년단체에 의존하여 정권을 유지하기에 급급하였고 국민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서 북쪽 김일성이 어떻게 전쟁준비를 하고 있는지조차도 모른체 허장성세만 내세우던 군대의 말만 믿고 허무맹랑하게도 북진통일이 제창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0년 5.30 총선거에서 이승만 지지세력은 국회의원 총 210명의 의석 중에서 겨우 30석을 차지하였는데 그쳤다. 그만큼 국민들의 신임을 잃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설상가상으로 선거전해인 1949년 6월 미군사고문단만 남겨 놓은채 미군이 철수하고, 당시 중국은 1949년 10월 장개석의 국민당이 모택동의 공산당에 패퇴하여 대만으로 쫓겨난 상태였으며 중국 본토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바로 이즈음,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은 1950년 1월 태평양지역의 방어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다고 선언하였다. 고난의 역사 속에 고통받으며 살아온 민족에게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주변 국제정세가 한국에게 지극히 불리하게만 돌아가고 있었다.

 

한편 남한의 이러한 어려운 상황과는 달리 북한은 정치적인 안정은 물론 체제를 공고히 하면서 국력이 급속히 성장하였고,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모택동이 김일성 정권을 강력하게 지원하였다. 북한은 이미 1946년 미소공동위가 결렬될 때부터 북한을 민주기지로 발전시켜 남한을 적화통일시키겠다는 전략을 수립하고 남한에서 빨치산투쟁이 격렬해지자 훈련된 게릴라들을 지리산, 오대산, 태백산, 제주도 등지에 비밀리에 직접 파견하여 투쟁을 지도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인민군 병력과 무기도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지원받아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소련은 비행기, 탱크 등 무기를 보내주었고 중국은 중공군에 참여했던 조선의용군 5만 명을 북한으로 보내 인민군에 편입시켜 주는 등 전쟁준비에 광분한 결과 북한은 남한보다 월등한 수준으로 전력이 향상되었다. 김일성은 남한내 혼란한 상황과 빨치산 활동, 남로당 투쟁 등 여러가지 상황을 판단한 결과 유리한 정세로 보아 남한을 무력으로 단기간에 충분히 점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국제정세도 북한에 유리한 국면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판단하였지만 결과론적으로는 남한적화를 실패함으로써 그것은 오판으로 귀결되었다.

 

전쟁준비를 완료한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약속받고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을 기하여 38선 전역에 걸쳐 포병의 공격준비사격을 시작으로 기습적인 남침을 개시했다. 병력과 화력, 장비면에서 월등하게 우세한 북한군은 사흘만에 한수이북의 국군을 대부분 무력화시킨 뒤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대교가 폭파되자 며칠 후 복구한 한강철교를 이용하여 한강을 건너 시흥, 수원방향으로 전차를 앞세우고 신속하게 진출하였다. 당시 맥아더가 븍거 날아와 노량진 한강 방어선을 시찰 한 다음 신속하게 급파한 오산의 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를 반나절만에 격파하고 일본에서 급거 투입된 딘소장의 미 24사단이 방어하던 대전 방어선을 야간 침투와 우회로 퇴로를 차단하는 등의 양익포위전술로 미24사단이 순식간에 붕괴되자 미군 방어선을 돌파하여 파죽지세로 공격기세를 유지하면서 두달 후에는 낙동강일대까지 진출하였다.

 

한국과 이미 상호방위원조협정을 맺고 있던 미국은 6월 26일 즉각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여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이 맥아더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을 조직하여 파견하였다. 낙동강 전선 왜관을 중심으로 포항까지 우측은 한국군이, 낙동강을 따라 남해안 진동까지는 미군이 맡아 방어전을 치루면서 다부동전투, 영천전투, 형산강전투, 낙동강 돌출부전투 등 악전고투를 전개하고 있었다. 한편 유엔군의 주력부대인 미군은 예비전력을 수습하여 적의 병참선을 차단하고 낙동강 전선에 밀집한 적 주력을 한번에 섬멸할 수 있는 상륙작전을 구상하여 오던 중 미합참 등이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의문시 하는 가운데 맥아더는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하여 경미한 적의 저항을 물리치고 상륙에 성공, 경인가도를 따라 서울 수복작전을 전개하는 한편 일부는 남쪽으로 내려가 수원비행장을 확보하고 북진하는 아군과 연결작전을 시도하였다.

 

이에 전세는 역전되어 적의 주보급로인 병참선이 차단되자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 주력은 일시에 공황상태에 빠지면서 무기와 장비를 버리고 지리멸렬되어 단위부대별로 일부는 빨치산과 합류하고 나머지 대부분 북상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유엔군은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고 국군 보병 제3사단 18연대가 10월 1일, 유엔군 미1기병사단은 9월 22일 왜관에서 진격하여 10월 9일 38선을 돌파하여 북진을 개시하였다.

 

38선 돌파는 맥아더와 미대통령 트루만과 갈등을 초래하였는데, 현상유지를 바라는 트루만 및 군부의 의견과 적 주력을 완전히 격멸하고 이참에 북한지역을 완전히 점령하는 것만이 전쟁의 최종 목표라고 주장하는 맥아더와 전략적인 갈등이었다. 그러나 트루만은 맥아더의 강력한 의지에 결국 동조하면서 세계 3차대전을 우려하였다.

 

유엔군과 국군은 초산까지 진출하여 압록강에 다다렀고 미해병 1사단은 동해안에 상륙하여 장진호까지 깊숙히 진출하였다. 이제 북진통일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였다.

 

한편 유엔군이 인천상륙잔전이 성공하여 낙동간 전선에서 북한군이 대부분 패주하자 김일성은 중국의 모택동에게 신속한 지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중국은 고심끝에 유엔군의 만주 진격을 우려하여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한 직후인 1950년 10월 하순부터 1백만명의 군대를 파견하기 시작하여 비밀리에 야음을 틈타 압록강을 건너 낭림산맥 일대로 침투시켰다. 그리고 압록강까지 진출한 유엔군을 우회하여 산악을 통해 유엔군 후방 깊숙히 침투하여 포위하기 시작하였다. 유엔군은 중공군의 침투를 미쳐 알지 못하였고 진군을 멈추고 위력수색을 전개하던 중 갑자기 나타난 중공군의 후방차단에 유엔군 부대들는 공황상태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국군과 유엔군 주력이 대부분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포위망 탈출을 시도하는 가운데 많은 포로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무기와 장비 대부분을 버리고 남쪽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미해병 1사단도 장진호까지 진출하였으나 중공군이 갑자기 측후방에 나타나 공격하는 바람에 진격이 정지되어 혹한과 보급로 절단 등 후방차단의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미해병1사단은 계곡상 단일 접근로인 후방 애로지점 도로가 중공군에 차단될 위험에 이르자 전멸될 지경에 다다렀다. 서부전선도 중공군의 집중적인 후방 차단 공격으로 유엔군은 무기와 장비를 버리고 패주하기 시작하였고 주력부대가 포위되어 섬멸되거나 흩어져 항복하는 사태가 줄을 이었다. 미해병 1사단도 강력한 항공기 지원에도 불구하고 날씨가 나쁜 날에는 중공군의 공격이 격심하였다. 또 야간공격을 위주로 하는 중공군에 심각한 피해를 당하였고 그런가운데 철수로상 애로를 돌파하면서 많은 병력과 장비를 버리고 악전고투를 겪으면서 철수작전을 감행하였다. 부상자는 항공기로 후송하였고 대부분의 장비와 물자는 버리고 적의 집요한 저항을 물리치면서 많은 피해를 입고 겨우 흥남으로 철수하여 피난민 10만며 명과 같이 항만을 폭파하고 부산으로 철수하였다.

 

결국 유엔군은 중공군에 밀려 비참한 철수작전을 전개하였고, 결국 1951년 1월 4일 서울이 다시 중공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지난번에 피난을 가지 못하고 인민군에게 고통받았던 서울 시민들이 이번에는 대대적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부산에는 가장 많은 피난민이 몰려들었고 정부 및 대학을 비롯한 주요 기관, 인사 등이 부산에 몰려들었다. 당시 부산은 갑자기 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혼란과 무질서로 생지옥을 방불케 했다. 피난민들은 먹고 잠잘 곳도 없었고 그래서 산비탈에 판자로 집을 겨우 지어 눈보라를 피하였다. 오늘날 부산에 산비탈에 있는 마을 중 남부민동이 대표적인 피난민 난민촌이었다. 눈보리치는 추운 겨울 피난민 행렬은 민족상잔의 비극을 한층 처절하게 만들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평택, 오산지방까지 밀리던 유엔군은 다시 총공세를 시도하여 지평리전투, 펀치볼전투, 철의 삼각지 탈환작전, 피의 능선전투, 983고지전투, 백마고지전투, 용문산전투, 가평전투, 현리전투 등을 치루면서 쌍방간에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다가 1951년 초여름, 전선은 오늘날의 휴전선 일대에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 무렵 미국의 비공식제의를 받아들인 소련이 유엔을 통해 휴전회담을 제의해 유엔군과 북한군 및 중공군 사이에 휴전회담이 진행되었다. 휴전회담은 2년여 계속되었으나 군사분게선 설정, 중립국 감시기구  구성, 포로교환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난항을 거듭하였으며, 그 사이 영역확보를 위한 전쟁은 계속되었고 쌍방간의 희생이 더욱 컸다. 1953년 6월 휴전협정이 성사될 즈음, 이승만정부는 북진통일을 맹렬히 주장하면서 반공성향이 있는 인민군 포로를 전격적으로 석방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장기화를 원하지 않던 는 미.소의 이해가 일치되어 마침내 7월 27일 휴전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한국은 이승만정부의 휴전반대로 인해 휴전회담 당사국으로 참여하지 않고 서명하지 못한채 휴전은 성립되었다.

 

휴전협정에는 유엔군을 대표하여 미국이, 공산측을 대표하여 북한과 중국이 서명하였으나, 한국정부는 서명하지 않았다. 휴전협정은 단순한 정전협정으로서 한반도의 평화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후 크고 작은 군사분쟁이 휴전선 일대에서 계속 일어났고, 그 때마다 판문점에서 유엔군을 대표한 미국과 북한 사이에 회담이 열렸다.

 

3년여에 걸친 6.25전쟁은 베트남전쟁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최대의 국제전쟁으로서 엄청난 피해를 쌍방에 안겨주었다. 쌍방의 인명피해만도 군대 약 240만 명에 달했고, 일반 국민의 사상자는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남북한의 산업시설, 주택, 학교 등이 거의 파괴되어 전국이 폐허로 변했다. 서울과 평양이 특히 집중적인 공습을  당해 처참한 도시로 변했다. 그러나 한국전쟁(6.25 전쟁)의 상처는 물질적인 면보다도 정신적인 면에서 더욱 심각한 후유증을 낳았다. 전쟁이 여러 차례 밀고 밀리는 과정에서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선량한 국민들이 이쪽 저쪽에서 강제로 협력하는 가운데 서로에게 부역자로 몰려 처참한 보복을 당하였고, 특히 북한은 남한의 점령지역에서 토지개혁을 단행하면서 소위 인민재판을 실시하여 무고한 지주, 지식인, 관료 등 주민을 반동으로 몰아 처형하였다. 이 때문에 동족 상호간에 원한과 불신의 벽이 높아졌고 통일의 가능성은 그만큼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