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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24 : 일제강점기 69 (1930~40년대초의 민족통일 전선운동 3)

 

 

 

한국의 역사 1,024 : 일제강점기 69 (1930~40년대초의 민족통일 전선운동 3)

 

 

           

 

 

 

민족문화 수호운동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발악적으로 진행되던 1930~1940년대에 이에 대항하여 민족문화를 수호하고 이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려는 애국운동이 꾸준히 일어나고 있었다.

 

먼저, 민족주의 역사가들 사이에서 이른바 조선학운동이 전개되었다. 다산 정약용 서거 99주기를 맞이하는 1934년에 시작된 이 운동은 안재홍, 정인보, 문일평 등이 주동이 되어 과거 민족주의 역사학이 지나치게 국수적.낭만적이었음을 반성하고, 민족과 민중을 다같이 중요시하면서 우리 문화의 고유성과 세계성을 동시에 찿으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이들은 조선후기 실학을 주목하고 고대사뿐 아니라 조선시대를 발전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안재홍(1891~1965)은 신채호의 고대사 연구를 계승.발전시키고 고대국가의 사회발전단계를 해명하는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해방 후 <조선상고사감>(1947)이라는 단행본을 엮어냈고, 우리나라 전통철학을 정리하여 <불함철학대전>(1940)과 <조선찰학>(1944)을 저술하였다. 그는 자신의 학문에 기초하여 해방 후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라는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하고, 이에 의거하여 극좌와 극우를 배격하고 만민공생의 통합된 민족국가를 건설하려 하였다.

 

정인보(1893~1950)는 광개토대왕비문을 연구하여 일인의 잘못된 고대사 연구를 바로잡는 데 기여하였고, 조선시대 양명학과 우리나라의 5천년의 얼을 정리하여 민족정기를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한편 문일평(1888~1939)은 조선시대에 민중을 위해서 노력한 정치가들과 혁명가들을 드러내고 세종과 실학자들의 민족지향.민중지향.실용지향을 높이 평가하는 사론을 발표하여 일반국민의 역사의식을 계발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그는 국제관계에서 실리적 감각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이런 시각에서 <대미관계 50년사>라는 명저를 내기도 하였는데, 그의 저술은 <호암전집>(1939)으로 정리되어 출간되었다.

 

1930~40년대에는 유물사관을 도입하여 우리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나타났다. 이들은 농민과 노동자의 계급적 각성을 촉구하여 일제와 국내 지주.자본가들에 대항하려는 목적을 지녀 계급보다 민족을 윗자리에 두려는 민족주의 역사학과는 갈등을 일으켰다. 그러나 <조선사회경제사>(고대사, 1933)와 <조선봉건사회경제사>(고려시대, 1937)를 지은 백남운(1894~1979)은 정인보와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냈면서 토지제도사를 연구한 공로가 적지 않았다. 그는 좌익역사가 중에서 비교적 온건한인물로서, 해방 후에는 양심적 지주, 자본가들과 손잡고 새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연합성 신민주주의'를 제창하였다.

 

한편, 1934년에는 실천성이 강한 유물사관과 민족주의 역사학을 모두 거부하면서 순수학문으로서 역사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이 결집하여 진단학회를 창립하고 <진단학보>라는 학회지를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이병도, 이상백, 김상기 등의 와세다 출신 역사학자와 이윤재, 이희승 등 국어학자, 송석하, 손진태 등 민속학자들이 참여한 이 학회는 독립운동에 직접 기여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 문화사 연구의 지평을 열어 주었고, 역사학을 비롯하여 국학 전반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는 데 공헌하였다. 그리고 이 학회의 중심 인물은 해방 후 주요 대학의 교수로 취임하여 남한의 국학계를 이끌어가게 되었다.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은 문학인 중에도 일어났다. 이육사는 수십 회나 투옥되는 고난을 치르면서도 민족해방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청포도>(1940)를 노래하다가 옥사하였고, 시인 윤동주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이 살아기기 위하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읊으면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숨진 그의 유해는 고향인 만주 용정에 묻혔다.

 

 

                                  

                                                                      조선어학회 회원 기념사진(1935)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한 국어학자들의 노력도 치열하였다. 일제의 국어말살 운동에 저항하여 우리말을 지키려던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1942년 조선어사전 편찬을 진행하던 중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이중화, 장지영, 최현배, 이희승 등 수십 명이 투옥되고 이윤재, 한징 등이 옥사하였다. 이 사건을 '조선어학회 사건'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