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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23 : 일제강점기 68 (1930~40년대초의 민족통일 전선운동 2)

 

 

한국의 역사 1,023 : 일제강점기 68 (1930~40년대초의 민족통일 전선운동 2)

 

 

           

 

 

 

일제의 민족말살정책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화정책과 병행하여 일제는 무력 탄압을 강화하면서 우리민족을 일본국민으로 동화시키기 위해 민족말살정책을 추진하였다. 한국인의 독립정신을 무너뜨리지 않고는 그들의 병참기지화정책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3.1운동 이후 실시해오던 기만적인 문화통치의 탈을 벗어 던지고 노골적인 파시즘이 시작된 것이다.

 

파쇼체제의 강화는 군사력과 경찰력의 증강에서 시작되었다. 1931년 만주침략 이후 종래의 2개사단이던 병력을 3개사단으로 증강하고, 그 후 계속 군대를 증파하여 1941년에는 3만 5천여 명,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약 23만 명의 군대가 주둔하였다. 한편 경찰관서의 경찰요원도 대폭 늘어나 1923년에 2만여 명이던 경찰관이 1941년에는 3만 5천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특히 정규경찰 이외에 비밀고등경찰, 헌병, 스파이 그리고 경찰 보조기관인 '경방단' 등을 두어 우리민족 말살 정책을 수행하면서 물샐틈 없는 감시망을 구축하였다. 철저한 정보망이 거미줄처럼 짜여졌고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검거.투옥.학살당하였다.

 

1937년에는 '조선중앙정보위원회'를 두어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1938년에는 '조선방공협회'를 조직하여 공산주의자 박멸에 나섰으며, 같은 해 사상전향자들의 단체인 '시국대응전선 사상보국연맹'을 조직하여 항일인사들 탄압에 앞장서게 강요했다. 태평양전쟁을 준비할 무렵에는 사상보국연맹을 확대하여 '대화숙(1941.1)'을 전국각지에 설치하고 이른바 사상범으로 지목된 인사들의 전향을 강요했다. 1939년에 조직된 '문인협회'도 친일단체의 하나였다.

 

일제는 전시체제를 빙자해 일반 주민생활도 철저히 통제했다. 중일전쟁 이후 주민생활통제의 중심기구로 1938년 8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을 총독부 보익기관으로 설치하였는데, 이 단체는 도에서 말단 리까지 전국의 지방조직을 망라하여 그 밑에 10호 단위의 '애국반'이라는 것을 두어 정기적으로 반상회를 열어 총독부 시책을 따르도록 강요하였다. 이 연맹은 각직장단위로도 조직되었다. 일제는 1940년 10월 위 연맹을 '국민총력 조선연맹'으로 개편하고 총독이 총재로 취임하여 관의 통제를 한층 강화하였다.

 

전국민을 물샐틈 없는 파쇼체제로 묶어 놓은 일제는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말살하여 완전히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한 이른바 '황국신민화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우선 1938년부터 모든 주민들에게 '황국신민서사'라는 것을 일본어로 외우게 했는데, '우리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이다.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폐하에게 충의를 다한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서 천황의 궁성을 향해 절을 하도록 강요하기도 하였다(동방요배).

 

또한 학교교육과 관공서에서 무리말 사용이 금지되고 일본어를 국어로 부르게 하고, 일본어만을 사용하게 하였다(1938). 일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1939년부터 우리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게하는 이른바 '창씨개명'을 단행하였다. 성과 이름은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가족 및 친지의 결속과 자존심을 심어 주는 중요한 수단이었으나, 이를 일본이름으로 바꾸지 않으면 학교입학이나 공문서발급이 금지되고, 식량과 물자의 배급에서 제외되었으며 우편물도 전달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부득이 창씨개명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전국민의 약 14%는 끝까지 이를 거부하는 기개를 보여 주었다.

 

일본은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근원적으로 말살하기 위해 일본인과 한국인이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는 이른바 '일선동조론'을 강조했다. 이 주장은 이미 1880년대부터 나오기 시작하였는데 침략전쟁 이후로는 '일선일체' 및 '동조동근론'으로 바꾸어, 두 나라는 주민을 민족도 하나이고 국민도 하나라는 일체감을 심어주려 하였다. 1936년 새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 총독이 이러한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인의 조상신인 천조대신을 신앙하는 신도를 국가종교로 승격시켰는데, 일본천황의 조상신을 한국인의 조상신으로 떠받들도록 강요하였다. 이를 위해 서울의 남산신궁을 비롯하여 각 학교와 면마다 신사를 세우고, 각 가정에서도 일본시조신의 신주를 걸어 놓고 예배하도록 강요하였다. 말과 이름을 빼앗기고 종교마저 자유롭지 못하게 된 한국인은 신사참배에도 거부반응를 보였는데. 평양의 기독교학교인 숭실학교와 숭의여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폐쇄되는 비운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일본은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는데 광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인을 전쟁터로 몰아 넣어 일본을 위해 싸우게 하였다. 처음에는 군대보충을 위해 '지원병제도(1938')를 실시하였으나, 뒤에는 '징병제도(1943)'로 바꾸어 패전할 때까지 약 20만 명의 청년을 징집했으며, '학도지원병제도(1943)'를 실시하여 약 4,500명의 학생을 전쟁터로 끌고 갔다.'

 

이밖에도 일본은 1939년부터 모집 형식으로, 1940년부터 알선 형식으로, 1944년부터는 징용 형식으로 일제말기까지 1백만 명이상의 한국인을 전쟁을 위한 노동자로 끌고 갔다. 이들은 탄광.비행장.군수공장.철도 등의 공사장에 군대식으로 편제되어 강제수용된 가운데 노예처럼 혹사당하였는데, 공사가 끝난 뒤에는 군대기밀을 지킨다는 이유로 무더기로 학살하기도 하였다. 특히 평양의 미림비행장, 쿠릴열도(사할린) 그리고 유구(오키나와)로 끌려간 노동자의 대부분이 무참하게 학살당하였는데, 그 수효는 7천 명이 넘었다.

 

그리고 근로동원이라 하여 어린 국민학생과 중학생들을 군사시설 공사에 끌어들이고, 여성들에 대해서도 '근로보국대'라는 이름으로 토목공사에 끌어들이고, '애국부인회'라는 어용단체를 만들어 충성을 강요했다. 그리고 전쟁의 막바지에는 악명높던 '여자정신근로령(1944.9)'이라는 것을 만들어 12세에서 40세까지의 배우자 없는 여성 20만 명을 강제동원했다. 이들은 일본과 조선내의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중 상당수 인원을 중국과 동남아지역의 전쟁터로 보내 군인 상대의 위안부가 되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들 중 살아 남은 상당 수 여성들은 해방 후에도 정신적.육체적으로 황폐화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누릴 수가 없었다.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언론.결사에 대한 탄압도 병행되었다. 당시 언론인 중에는 항일운동의 수단으로 언론활동을 전개한 이가 적지 않았으므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던 <조선중앙일보>가 1937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1940년에 차례로 폐간되는 비운을 맞이했다. 동시에 모든 집회와 결사를 허가제로 바꾸고 국내의 조직적인 민족해방운동이 원천봉쇄되었다.

 

일본이 침략전쟁과 그로 인한 한국인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으로 그 후유증은 해방 후 민족국가건설에 큰 장애요인으로 등장하였다. 더욱이 일본인은 한국인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서 이름 높은 지식인들을 회유, 혹은 협박하여 수많은 친일단체를 조직하고, 일본의 황국신민화정책과 침략전쟁을 동조.찬양하는 일에 앞장서게 하였다. 그리하여 교육.언론.문학.미술.음악.영화.종교 등 각 분야에서 명망 있는 일부 인사들에게 친일의 오점을 남기게 한 것은 경제적 침탈보다도 더 큰 고통과 상처를 우리민족에게 안겨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