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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25 : 일제강점기 70 (1930~40년대초의 민족통일 전선운동 4)

 

 

한국의 역사 1,025 : 일제강점기 70 (1930~40년대초의 민족통일 전선운동 4)

 

 

           

 

 

민족연합전선과 항일무장투쟁의 강화

 

1930~1945년 사이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은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표면적인 위축에도 불구하고 지하운동을 통한 좌우연합전선이 꾸준히 지속되어 마침내 1944년 8월 비밀결사인 '건국동맹'이 결성되었다. 신간회 이후 두 번째의 민족연합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조직한 건국동맹은 안재홍 등 민족주의 인사들도 참여하고, 하부에는 노동자.농민층까지 흡수하고 있었으며, 밖으로는 중국에서 할동하던 '화북조선독립동맹'(속칭 연안파)과도 연결하고 있어서 민족연합전선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일본의 갑작스런 패망이 왔을 때 즉각적으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정권을 인수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준비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국내에 비하여 일제의 탄압이 덜 심했던 중국지역에서는 파벌적 분열을 극복하려는 민족통일전선이 한층 활발하게 전개되엇으며, 군대를 조직하여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1931년 일본의 만주침략에 자극을 받은 중국내 독립운동 단체들은 1932년 상해에 모여 각 단체의 통일체로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1932.11.10)을 결성하고 민족 유일당을 건설할 것을 제창하였다. 여기에는 우파계열의 한국독립당(이동녕, 안창호,김두봉), 한국동지회(김규식)와 좌파계열의 조선의열단(김원봉), 조선혁명당(최동오) 등이 참가하였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를 고수하려는 일부 인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인사들이 결집하여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을 창건하였다. 단순한 여러 단체의 동맹이 아니라 단일정당을 형성한 것이다. 그리고 당의 노선으로서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받아들여 정치.경제.교육의 평등을 전제로 한 민주공화국의 건설을 내세웠다.

 

'민족혁명당'은 그 후 조소앙, 이청천, 최동오 등이 탈퇴하자 김원봉이 중심이 된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편되었으며(1937), 약화된 통일전선을 다시 강화하기 위해 '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김규광, 김창숙), '조선청년전위동맹'(최창익), '조선혁명자연맹'등의 단체들과 연결하여 1937년 12월 한구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다. 그리고 그 예하의 군대로서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김원봉의 의열단에서 시작하여 '민족혁명당'의 예하부대를 이루었던 조선혁명군들이 확대.개편된 것이었다. 이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군과 합세하여 중국 각 지역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한편, 중국 남방지역에서 근거를 두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3년 개조파와 창조파의 탈퇴로 그 활동이 크게 침체되어 있었으나,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김구의 지도 아래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적극적인 테러투쟁을 전개하면서 차츰 국내외 신망을 얻게 되었다. 한인애국단 단원인 이봉창이 도코에서 히로히토 천황을 공격하고(1932.1.8), 윤봉길이 상해 홍구공원에서 사라카와 대장 등을 살상(1932.4)한 사건이 그것이었다. 김구 이동녕 등 임시정부 고수파들은 임시정부의 기초적 정당으로서 '한국독립당'(1930)을 조직하고 우익노선을 견지해 갔는데, 1935년 7월에 통일전선정당으로서 '민족혁명당'이 조직되어 임시정부의 해체를 요구해 오자, 이에 불응하고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수용하는 새로운 정당으로서 '한국국민당'(1935.11)을 창립하였다. 그러나 중일전쟁을 계기로 민족협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좌익계열의 조선민족전선연맹과 제휴하여 '전국연합진선협회'를 성립시켰다(1939). 여기에는 7개 단체가 가담하였으나 그 중심 인물은 우익의 김구와 좌익의 김원봉이었다.

 

그 후 1940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기초정당을 '한국국민당'에서 '한국독립당'으로 확대 개편하였으며, 정강정책은 그대로 삼균주의를 채택하여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운 성격을 띠었다. 그리고 군사력의 필요에서 1940년 중경에서 '광복군'을 창립하고 김원봉이 이끄는 400여 명의 조선의용대가 1942년 5월 광복군에 편입되어 군사면에서도 좌우의 통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청천(일명 지청천)을 총사령, 이범석을 참모장으로 하는 광복군은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으면서 주로 선전.초모 활동을 벌이다가 1943년 영국과 군사협정을 맺고 일부 병력을 인도와 버마(미얀마) 전선에 참전시켰으며, 일부 병력은 미국 전략정보(OSS, CIA 전신)와 협력하면서 국내진공을 준비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항일투쟁이 격화됨에 따라 지도체제를 강화하여 1940년 헌법 개정을 통해 국무위원제(집단지도체제)를 주석중심제로 바꾸어 행정.군사를 총괄하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주석 김구의 영도력이 강화된 가운데 임시정부의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다.

 

중국 남부지역 독립운동의 주체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면, 만주지역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들도 1930년대에 들어와 좌우통일전선 조직으로서 1936년 조국광복회를 결성하였다. 오성륜, 엄수명, 이상준이 중심이 된 이 단체는 10대 강령을 발표하여 모든 계급이 일치단결하여 조국을 광복할 것을 선언하였으며, 중공군과 함께 '동북항일군'에 가담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벌이던 김일성 부대와 연결하여 1937년 압록강 연안의 '보천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후 일본 관동군의 공세가 심해지자 김일성부대는 1941년 세베리아지방으로 이동하여 소련군과 합세하여 정탐활동을 전개하다가 8.15를 맞이하엿다.

 

한편, 중국 화북지방에서 활약하던 독립운동가들은 1942년 민족통일전선으로서 '조선독립당(속칭 연안파)을 결성하고 그 휘하에 약 5백 명의 조선의용군을 거느리고 중공군과 연합하여 항일전쟁에 참가하였다. 그 중심 인물은 김두봉, 김무정, 박효삼, 최창익, 한빈 등으로서 중국에서 군관학교 혹은 대학을 다닌 고급지식인들이었다. 조선의용군은 특히 '호가장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해방 후에는 북한으로 들어가 인민군에 편입되었다. 이들은 모택동과 함께 연안지방에 본거지를 두었기 때문에 속칭 '연안파'라고도 한다.

 

일제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벌이면서 최후 발악적인 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시기에 중국과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크게 임시정부와 조선독립동맹, 그리고 조국광복회를 중심으로 통일전선을 구축하고 그 휘하에 만만치 않은 전투부대를 조직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한 것은 우리 스스로의 독립역량을 보여준 것이엇다.

 

또한 통일전선의 형성이 단순한 일시적인 연합으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에 사회주의를 가미한 건국방략을 수립한 것도 좌우인명의 대립을 새로운 차원으로 통합하려는 기도로서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었다.

 

즉, 정치제도에 있어서는 보통선거에 의한 민주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하고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내걸었으며, 사회적으로는 남녀평등과 국비의무교육을 채택하고, 경제적으로는 친일분자의 재산몰수와 토지 및 대생산기관의 국유화를 통한 소생산자의 보호를 목표로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건국방략은 좌우이념의 조정.통합이라는 차원을 넘어 고려.조선시대를 통해 면면히 이어온 개혁정신을 게승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 후 정치 상항은 민족운동의 본류를 이루고 있었던 이들 통일전선 인사들의 입지를 어렵게 만들었고, 미국과 소련이 선호하는 정치체제와 인물에 의해 두 개의 국가와 두 개의 건국방략으로 양극화되고 말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