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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겨울 4 : 설날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

 

 

강남의 겨울 4 : 설날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효령대군 청권사와 겨울 하늘

 

눈이 내리고 얼어붙고 미끄러운 길에 자전거타기는 잠정 중단하고 산책으로 대치했다. 비탈길 주민들은 미끄러지고 부딪치고 다치는 등 고통스런 나날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차량 접촉사고는 물론 넘어져 다친 사람도 부지기 수였다고 한다. 내 집앞의 눈을 쓸지 않는 우리들 스스로가 선택한 불행일지도 모른다.

 

우리집 골목길도 지난번에 염화칼슘과 빗자루 등을 준비하여 둔 관계로 새벽에 일어나 눈을 쓸고 염화칼슘을 뿌리는 등 약간 비탈길이지만 미끄럼을 방지할 수 있었다. 입주자들이 알지 모르겠지만 별도 돈을 거둔 것도 아니고 내가 약간의 투자로 준비한 것이기에 마음만이라도 알아주고 눈을 쓸지 않더라도 쓰레기 버리는 것만이라도 제대로 규정을 지켜 버려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아무때나 쓰레기를 버리고 폐기물을 버리는 등 쓰레기 배출 문제로 누군가 구청에 민원을 제기하여 구청직원이 나와서 3개동이 한 곳에 버리던 것을 이제는 동별로 각 동 앞에 버리도록 하였고 폐기물을 버리거나 지정된 날이 아닌 경우 구청에 신고하도록 하란다.

 

CCTV 설치를 부탁했더니 CCTV는 식별이 곤란하여 설치가 불가하고 신고하면 구청에서 직접 나와서 버린 사람을 찿아서 과태료를 물리겠다고 했다. 사실 생활쓰레기를 아무 때나 버리거나 음식물을 섞어 버리는 바람에 고양이들이 물어뜯어 골목길이 지저분해지는 것이 다반사이다. 그리고 신고하고 버려야 할 폐기물도 함부로 버리고 폐지 박스를 주워가는 사람이 쓰레기를 쏟아버리고 가져가는 경우도 있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함부로 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골목길은 쓰레기를 수거하가면 누군가 빗자루로 쓸지 않으면 지저분한 환경이 없어지지 않는 골목길이다. 분리수거, 배출날짜, 배출시간, 폐기물 종류, 음식물 쓰레기 분류 및 버리는 요령 등 제대로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먹고 살기 바쁜 서울에서 규정대로 꼭 지키면서 버릴 수는 없을 것이지만 ㅇ라면서도 몰래 버리는 몰염치한 주부, 아줌마들도 많다. 모두가 가난하고 못배운 탓이기에 욕심만 넘쳐나는 사람들이다. 골목길 한 번 쓸지 않는 사람들, 눈이 내리면 쓸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돈 벌기에 기진맥진하여 쓸 여력이 없는 사람들, 바로 이 땅을 사랑할 수 없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빗자루를 들 수 있는 것은 모든 권위에서 벗어나 자신을 내려놓은 마음자세로 용기와 자기수양이 필요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반포종합운동장 테니스장 전경

 

개인정보 유출 대란

 

결국 올 것이 오고 말았다. 방만하게 운영하던 카드사들의 나태와 횡포가 낳은 국민적 재앙이다.

 

KB국민카드ㆍNH농협카드ㆍ롯데카드 등 3개 카드회사에서 발생한 개인정보 유출 사고의 파장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이들 3개 카드에 결제 서비스를 제공하는 연계 은행 등 다른 업종의 금융회사들에서도 개인정보가 대량으로 유출됐다. 모두 더하면 사고 피해자 수가 경제활동인구의 70%나 되는 1700여만명에 이른다. 유출된 개인정보 내용도 결제계좌ㆍ전화번호ㆍ주소 등 최대 19가지나 된다고 한다.

당장은 스미싱ㆍ보이스피싱과 같은 금융사기와 신분위장 결제ㆍ인출에 의한 2차 피해를 막는 일이 시급하다. 카드회사를 비롯한 관련 금융회사들은 사고의 내용을 금융당국과 고객들에게 있는 그대로 알리고, 필요한 피해 방지대책 마련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개별적인 계좌 조회와 카드 재발급 요구에 신속하게 대응해 고객들의 불안을 가라앉히는 것도 중요하다. 피해가 발생할 경우에 대비해 구제나 배상의 구체적 범위와 절차를 마련하는 일도 중요하다.

유출된 개인정보가 시간을 두고 나중에 범죄 목적으로 악용될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한다. 이번 개인정보 유출은 전산보안 용역업체의 직원이 USB에 복사ㆍ저장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직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디지털 복제본이 제3자에게 전달돼 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이에 대해서는 검찰이 철저한 수사로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아울러 각 금융회사와 금융당국은 유출된 개인정보의 효력을 조속히 제거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특히 공인인증서 없이 신용카드 번호와 유효
기간만으로 결제가 되는 국내외 웹사이트에서 2차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여지없이 노출된 금융시스템 전반의 보안상 허점을 메울 대책이 필요하다. 이번 사고를 보면 우선 용역업체 직원에게 개인정보 접근을 무제한 허용한 카드회사의 허술한 보안체계가 눈에 띈다. 금융지주회사의 계열사 간 고객정보 무차별 공유를 방치하고 심지어 조장까지 한 금융당국의 안일한 감독태도도 문제다. 신용을 잃은 금융은 설 자리가 없다. 금융당국은 후방에 더 이상의 방어선은 없다는 각오로 금융보안 불안심리를 근본적으로 해소할 특단의 대책을 수립해 내놓아야 한다. 보안사고에 대한 최고경영자의 책임을 엄중하게 묻는 장치도 필요하다.

 

                                                                                지난 가을하늘

 

조류인플루엔자 전국 확산 우려

 

전북 고창과 부안에서 발생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가 야생 철새에 의해 유입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농림축산식품부는 AI 최초 발병지인 고창 오리농장 부근 동림저수지에서 떼죽음한 가창오리가 고창과 부안 농가에서 검출된 것과 같은 H5N8형 AI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을 확인했다고 어제 밝혔다. 철새가 감염원이라면 인위적 통제가 어렵고 그 이동 경로를 따라 AI가 전국으로 확산될 수 있는 만큼 더욱 큰일이 아닐 수 없다.

방역기관의 처절한 방역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류인플루엔자가 전국으로 확산될 기미를 보이고 있어 걱정이다. 집단적으로 이동하는 조류에 의해 병원균이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계속 북상하면서 확산되고 있다. 오리, 닭 사육 농장은 전전긍긍하고 있으며 확정된 지역에는 매몰처리에 밤낮을 가리지 못하고 있다. 방역 관계자들이 잠을 설치며 밥도 먹을 시간도 없이 고생하고 있지만 전국으로 확산되는 추세라 그런 노력도 허사로 돌아가고 있는 듯하다. 시민단체나 민간단체에서 그들을 위문하고 격려하는 모습은 볼 수가 없다.

 

어느날 갑자기 북쪽 하늘에서 날아와서 퍼뜨리는 병원균에 대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축산농가의 한숨을 보면 인간의 유약함을 여실히 보는 듯하다. 아마 곧 오리, 닭 파동이 이어질 것이다. 반면 돼지고기 등 다른 육류가 가격이 치솟고 날개돋치듯이 팔릴 것이다. 마지막 희망을 걸고 애써 거액을 들여 농장을 차리고 농촌에 안주하려던 사람들의 실망감을 누가 알리요마는 이런 사태는 앞으로도 언젠가 계속될 전망이다. 돼지파동, 수산물 파동, 소고기 파동 등을 겪는 현실에 불안한 축산농업의 미래가 어둡기만 하다. 이런 인간 사회의 모습이 해성충돌, 대지진, 빙하기 엄습 등 자연대재앙이 아니라 어쩌면 병원균으로 인해 순식간에 인류가 멸망할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해본다.

 

벙역당국의 노력에 격려와 찬사를 보내고 국민적인 뜨거운 성원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된다.  

 

 

                                                                                                 지난 여름 우면산

 

설날은 새해의 첫 날을 기리는 명절이다. 본래 설날은 조상 숭배와 효(孝)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먼저 간 조상신과 자손이 함께 하는 아주 신성한 시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설날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니는데, 곧 도시 생활과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오는 긴장감과 강박감에서 일시적으로나마 해방될 수 있는 즐거운 시기라는 의미도 함께 지니게 된 것이다.

설날은 세속의 시간에서 성스러운 시간으로 옮겨가는 교체기라고 할 수 있다. 즉 평소의 이기적인 세속 생활을 떠나서 조상과 함께 하며 정신적인 유대감을 굳힐 수 있는 성스러운 시간이 바로 설날인 것이다. 또한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서 국가 전체적으로 보더라도 설날은 아주 의미 있는 날이다.

국민 대부분이 고향을 찾아 떠나고, 같은 날 아침 차례를 올리고, 또 새옷을 즐겨 입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같은 한 민족이라는 일체감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볼 때도 설날이 가지는 의미, 즉 공동체의 결속을 강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단순한 명절 이상의 기능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여름 국립국악원

 

 

설날의 풍속으로는 차례, 세배, 설빔, 덕담, 문안비, 설그림, 복조리 걸기, 야광귀 쫓기, 청참, 윷놀이, 널뛰기, 머리카락 태우기 등 그 종류가 상당히 다양하다.  

 

집안에 따라 종교 가풍에 의해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설날 아침에는 전통적으로 차례를 지내고, 떡국을 먹는다. 차례에는 밥과 국 대신 떡국을 올리는데, 이는 설날에 떡국을 먹는 것이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확산되면서 우상숭배를 거부하면서 차례를 지내는 가정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또 화장 문화가 확산되면서 산소가 줄고 납골당, 풍장, 자연장 등 다양한 장례문화로 변화하고 있다. 

 

또 차례 자체도 이제 개혁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신주에 대한 숭배는 유교 사상의 조선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조상 숭배에 대한 개념과 분위기가 점차 달라지고 유교적 사회의 대가족 제도에서 핵가족 시대로 전이되면서 이제는 핵가족마저도 파괴되고 결혼의 어려움, 양육부담, 이혼의 증가 등으로 점차 독신자가 늘어나는 추세다.

 

치열한 경쟁사회, 양극화로 인한 부의 고착화, 경제적 결핍으로 가정의 붕괴, 독신자 증가 등으로 사회가 점차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설날의 민족 대이동이나 설날 고유의 풍습이 점차 퇴색되어 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종교가 민족의 전통을 갉아 먹고 변질되게 만드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다. 기독교나 천주교는 십자가나 십자가에 예수상을 걸어 놓고 기도를 한다. 마리아 상도 천주교회마다 만들어져 있고 들락거릴 때마다 신도들이 기도를 한다. 우상숭배는 그들이 스스로 자행하고 있으면서 조상의 신주에는 절을 하지 않는 편협한 종교가 우리 사회의 아름다운 조상 숭배의 미덕을 파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차례를 모두 지내면 아랫사람이 웃어른에 세배를 한다. 세배는 웃어른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건강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세배를 받은 웃어른들은 아랫사람에게 답례로 세뱃돈이나 덕담을 해주며, 세뱃돈은 대체로 아랫사람의 나이가 많거나 학교 졸업을 할 경우에 많이 준다.

 

 

 

                                                                          새해 아침 한강, 그리고 물오리떼

 

 

설날이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

 

이처럼 전통 설날이 점차 퇴색되어 가는 느낌이다. 장례문화도 점차 변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우리나라는 전국 산천에 묘지가 너무나 많아 국토를 온통 종기가 난 것처럼 만든 지금, 이제는 서서히 매장 문화가 화장 문화로 변해 가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납골당, 풍장, 자연장 등 자연을 보호하고 간소한 장례문화가 이제 우리 사회에 자리메김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래서 고향의 부모님을 찿아가고 조상의 산소를 찿아가는 풍습도 점차 사라질 전망이다.

 

그러나 사실, 귀성은 고향의 부모님과 조상의 산소를 찿아가 그동안 잊고 살아왔던 조상의 은혜와 자기 근원을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가 되어 왔다. 사람들은 평생을 두고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며 고향 근방에만 가도 공기가 훈훈하고 정겨움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자신이 자란 고향에 본능적인 향수이기 때문이다. 또 많은 사람이 죽은 후에는 고향땅에 묻히기를 대부분 원하게 마련이다.

 

그리움은 인간의 감성 중 가장 순수하고 고결한 심성으로 자신의 상실된 자아와 부도덕하고 오염되게 살아 온 자신의 현실에 대한 회의와 더불어 찿아온 자기반성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고향방문을 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도시의 삶에서 피폐해진 마음을 치유하고, 실추된 아버지의 권위를 회복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며, 자기 뿌리를 재인식할 수 있을 뿐만아니라, 객지생활의 외로움과 찌든 삶의 고달픔을 치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명절을 일년에 설날과 추석 평균 두 번씩 보내게 된다. 떨어져 살고있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동안의 안부를 묻고 삶에 대해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자신의 뿌리와 찌든 삶의 고달픔을 서로 공유할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뜻있는 명절을 보내면서 현대로 접어들면서 빠른 사회생활 패턴의 변화로 명절에 따른 여러가지 문제점이 우리들을 괴롭히고 있는데 그러한 문제점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명절이 다가오면 주부들의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바로 명절증후군인데, 주부들에게 있어서 명절은 음식만들기, 차례상 준비하고 차리기, 설거지 하기 등의 중노동 만이 기다리고 있는 결코 반갑지 않은 날일 뿐만아니라, 빠듯한 살림에 시댁식구들의 선물을 준비해야 하는 부담감. 여기에 친정까지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상황에 접하게 될 때면 없던 병도 생기기 마련이다. 주부들은 이번 명절에도 어김없이 남자들이 고스톱을 치는 사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부억에서 일거리에 치여 고달픈 명절을 보내야만 하기에 명절이 더더욱 두렵기만 하다. 어느덧 조상의 음덕을 기리고 가족간 우애와 공동체 의식을 확인케 하던 명절이 이젠 가족구성원 사이의 불만과 불화만을 조장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설날, 추석과 같은 명절에 일어나는 이른바 '민족 대이동'의 의미는 무엇일까? 회귀본능의 충족, 정(情)의 교류와 확인, 조상 은혜에 대한 감사, 결실에 대한 축하, 반복적·기계적 삶으로부터의 일탈, 타인지향적인 사고와 습성의 삶 등 여러 사회적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타인지향적인 사고와 습성의 삶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생각된다.

 

설날, 추석을 포함한 명절날 민족대이동은 우리민족의 오래된 전통은 아니다. 명절민족대이동은 약 50년 전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진행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고향을 찿아가던 그들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음이나 장애인이라는 불행을 자초하면서도 고향으로 달려가는 이면에는 타인지향적인 삶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부모에 대한 효도는 형식적이며 부차적인 문제인지도 모른다. 부모를 모시기는 켜녕, 가진것이 없으며 찬밥처럼 취급하거나 길바닥에 버리며, 필요시에는 불러다가 집을 보거나 애기 돌보기나 시키고, 전화는 켜녕 남은 재산이나 상속받으려고 알랑방귀나 뀌는 효도로 가면적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지난 시절 무능한 정치인들로 인하여 어렵고 힘들게 살아온 조상들은 한국전쟁 후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안감힘을 썼지만 아무런 희망도 대책도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무능한 정치지도자들이었다. 이조 500년 동안 무능한 왕들이 훈구대신들에 휘둘리면서 왕권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고, 조정과 사대부는 주자학의 공리공론에 빠져 형식과 위선으로 점철된 사회였다. 양반들만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철저한 계급사회를 만들어 착취하기를 수백년, 산업,상업,기술,노동 등 실용을 멀리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허례허식만 강조하였으니 나라는 멸망의 기운이 싹트고 있었다. 부패의 극을 달리던 껍데기 조선은 조일전쟁, 조청전쟁 등 두 번의 큰 전란으로 이미 조선은 망해야 했으나 일부 충신과 의병들의 항쟁으로 겨우 목숨이 연명된 나라였다. 그런후에도 조정의 임금과 권신들은 오로지 권력을 쟁탈하기 위해서 서로 죽고 죽이는 피튀기는 당파싸움만을 반복하였고, 말엽에는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외척들이 발흥하여 권력을 농단하였으며 극심한 부정부패로 탐관오리들은 백성들을 수탈하는데만 전념하다가 결국에는 나라가 일제에 망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

 

일제 36년간 이 땅의 백성들은 노예같은 삶을 살았으며 수많은 백성들이 희생되었고 이 땅에 남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일제는 조선민족을 말살하고 일본에 동화시키고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에 인력과 물자를 강제로 동원하기 위해서 갖가지 악랄한 방법을 동원하였다. 그 구체적인 방법과 친일파들의 활동을 보면 치가 떨릴 정도이다. 우리 민족을 일제에 동하시키고 젊은 남여를 전쟁터에 보내기 위해서 그들이 앞장서서 선전하고 홍보하면서 친일활동을 펼쳤다는 사실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았다. 해방 후 친일파에 대한 철저한 숙청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정의가 무엇인지 애국이 무엇인지 매국에 앞장섰던 그들이 다시 권력층에 등용되어 우리 사회는 정신적으로 이미 붕괴사태를 야기하고 말았다. 매국과 친일이 정의가 되었고 저항과 독립운동이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 교과서에 버젓이 실려 있는 친일파들의 글과 업적이 미화되었고 그들의 과거 행적을 감추고 파렴치하게 민족 앞에 다시 고개를 들고 활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는 근본적인 애국사상이 허물어져 버린 것이다.

 

아래는 일제의 조선민족말살정책과 수탈, 그리고 친일파들의 친일행적이다. 그들의 행적으로 보자.

 

 

 

                                                                  새해 해돋이

  

황국신민화 정책

 

일제는 전시체제로 들어서면서 조선인을 황국신민으로 만들려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적극 펼쳤다. 일제는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고 민중생활을 통제하는 것만으로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에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뿌리 뽑아 식민지 노예로 만들려는 '네선융화', '내선일체'를 강조했다.

 

1931년 6월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군국주의자  우가키는 "일본이 침략전재을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것은 조선 2천만 민심의 향배에 달려있다"면서 '내선융화'를 내세웠다. 우가키 뒤를 이어 1936년 8월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전직 관동군사령관 미나미는 전임 총독의 내선융화 정책을 계승하여 "조선인과 일본인은 형태도 마음도 피도 살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일제는 1937년 "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입니다.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합니다" 등의 내용이 담긴 '황국신민서사'라는 충성맹세문을 만들어 조선인에게 외우게 했다. 또 일제는 전국의 모든 읍.면에 천황의 귀신을 모시는 신사를 만들어 조선인을 강제로 참배시킨 '신사참배', 나아가 일제는 1939년부터 일본인 조상과 같다는 '일선동조론'. 그리고 조선인의 고유한 성씨를 일본식 성씨로 바꾸도록 강요한 '창씨개명' 등을 강요하면서 조선말을 쓰지 못하게 하고 일본말만 쓰도록 했다.그래서 일제는 학교에서 조선어 시간을 점차 줄여 나가다가 1941년에 아예 없애버렸다.

 

1941년 일제는 황민화교육의 수단으로 황국신민학교라는 뜻의 국민학교제를 실시하고, "우리들은 일본의 어린이입니다. 하나님의 혈통을 받으신 천황폐하를 받들고 한없이 번영해 가는 일본에 태어난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담긴 수신(도덕) 교과서를 통해 어린 학생들을 황민으로 길들였다.

 

노동자에게도 황국신민화 정책을 적용하였다. 일제는 "근로를 통한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황국노동자를 양성한다"는 구실로 '연성소'를 설치했다. 주로 공장과 광산에 만든 연성소는 군대식 노동규울을 되풀이하여 노동을 통제할 뿐 아니라, "황국신민의 정신을 뼛속 깊이 스며들게 하는 "과정이었다. 연성소 노동자는 아침 6시에 일어나 각 반별로 궁성을 향해 인사하고, '황국신의 서사'를 제창한 뒤 하루를 시작했다. 일본어 강습을 하루 3시간씩 하는 공장도 잇엇으며, 작업이 끝난 뒤에도 강연회, 영화 등을 통해 황민화 교육이 이어졌다. 이처럼 조선노동자들은 연성소에서 군대식 편성과 규율에 따라 전시체제에 절대 복종하는 '노동하는 군인'으로 만들어졌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조선민중을 일상생활에서부터 통제할 목적으로 1938년 5월 '국가총동원법'을 조선에도 적용해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실시했다. 이어 7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을 만들었다. 이 연맹 산하조직인 지방연맹 밑에 10가구를 한 단위로 묶은 애국반을 조직하여 조선인의 일상생활까지도 감시.통제했다. 1942년 현재 448만여 명이나 되는 애국반은 때마다 '반상회'를 열어 일장기 걸기, 신사참배, 천황 궁성에 절하기, 일본어 쓰기, 방공방첩, 애국저축 등을 강요했다. 일제는 1940년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국민총력운동으로 바꾸고 1942년부터 전체주의.국가주의 아래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퍼뜨렸다.

 

일제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뿌리를 둔 내선일체에 저항하거나 방해가 되는 어떤 사상도 허용하지 않았다. 이미 1936년 12월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공포한 데 이어 1938년에는 사상전향자들을 모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으로 끌어들여 사상 탄압을 강화하고 친일세력을 넓혔다. 1941년에는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을 만들어 전향하지 않은 사상범뿐만 아니라 의심이 가는 사람을 마음대로 서대문형무소에 있는 예방구금소에 강제수용하기까지 했다. 

 

 

 

 

 

 

인력과 물자 수탈

 

일제는 1938년 5월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주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마음대로 동원했다. 만주사변 때부터 조선인에게 징집제를 실시해 모자라는 전쟁 인력을 채우려 한 일제는 1938년 지원병 형태로 조선청년을 전쟁터에 끌어들였다. 1943년에는 '학도지원병제'를 강행했고, 1944년에는 마침내 징병제를 실시하여 일제가 항복할 때까지 20만여 명에 달하는 청년을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내몰았다.

 

또 일제는 모집.징용.보국대.근로동원.정신대 때위의 간판을 내걸고 노동력을 강제로 수탈했다. 1939년에 실시한 '국민징용령'은 이를 법으로 뒷받침했다. 처음에는 모집하는 형식을 갖추었지만 전쟁 말기에는 강제로 끌고가 모자라는 노동력을 메웠다. 조선인들은 가족에게 연락조차 못하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끌려가는 일도 많았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은 1939년부터 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1백만 명이 훨씬 넘었다. 이들은 탄광, 광산, 토건공사장, 군수공장과 같은 곳에서 전쟁터 못지않은 조건에서 노예처럼 혹사당하면서 노동에 시달렸다. 또 중요 군사시설공사는 공사 후 모두 비밀을 지킨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을 모두 무차별 학살하기도 했다. 심지어 국민학생들까지 근로동원에 동원하여 노동력을 착취했다.

 

전쟁 막바지 단계였던 1944년 8월에는 '여자정신근무령'을 만들어 수십만 명의 조선 여성을 강제로 동원했다. 군수공장으로 보낸 경우도 있지만 일부는 군 위안소 위안부로 삼았다. 군 위안소는 1932년부터 1945년까지 생겨났으며 1937년부터 그 수가 크게 늘어났다. 조선 여성을 강제로 끌고 가거나 일본 가면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속였고 농촌은 나이든 노인들과 어린이들만 남아 모든 농사일을 감당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일제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그리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물자동원 계획을 세워 많은 지하자원을 약탈했으며, 조선민중에게 위문금품을 모집하고 국방헌금을 강요했다. 무기를 만들려고 고철, 동 제품이면 모조리 빼앗아 갔다. 학교 철문과 쇠난간을 뜯고 농기구와 가마솥까지 공출해가서 장갑차와 비행기, 함정으로 둔갑시켰다. 놋그릇, 수저, 제기, 교회종, 심지어 불상까지 빼앗아 대포와 총알을 만들었다. 또 일제는 전쟁에 필요한 식량을 확보하려고 쌀 증산계획을 세웠는데, 이를 위해 농업공동 작업2반을 만들어 여성과 어린 학생까지 강제 동원하여 징용과 징병으로 부족한 남성노동력을 메웠다. 또 조선총독부는 공출제도를 실시해서 농가마다 공출량을 할당하고 행정력과 경찰력을 동원하여 농민을 서로 감시하게 만들고, 농산물의 전체 생산량 가운데 40~60%를 강제로 빼앗아 갔다. 

 

 

                                                                                        새벽 한강

 

 

친일파 친일활동

 

일제가 중일전쟁 뒤 전시체제로 들어서면서 황민화정책을 강화하자,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철저한 일본인화'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본 모습을 드러냈다.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이곳저곳에서 강연하면서 "일제가 침략전쟁을 일으킨 것은 정당하기 때문에 조선인들은 징병.징용에 기쁘게 참여해야 한다"고 선전했다. 1930년대 초반까지 민족개량주의자들은 민족적인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시체제에 들어서자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일제의 대륙침략정책을 '조선민족의 살 길'로 여기고 "조선은 도저히 독립할 수 없으며 조선인은 일본을 맹주로 하는 '대동아공영권'에 참가하여 '이등국민'으로서 지위를 높이는 데 힘써야 한다"고 외쳐댔다. 또 일본군이 반드시 이겨야 한다거나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을 펴는 일이 우리 민족을 위한 길이라고 맞장구치면서, 자신들이 일본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시대와 대세에 순응하고 자신의 목숨과 부귀를 위해서는 민족도 양심도 져버리는 친일파들의 전형적인 행태를 자행하였다. 그때까지도 그들은 일제가 그렇게 빨리 연합군에 항복할 것으로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1938년 일제가 '조선지원병령'을 공포하고 조선 청년들을 일제의 총알받이로 내몰려할 때 친일파들은 "조선민족도 천황의 적자 노릇을 할" 기회를 얻었다고 대환영했다. 대표적인 친일 지식인이었던 이광수는 일본의 힘이 강할수록 조선은 독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힘! 오늘의 영광은 힘에 있다. ...... 평화의 힌 옷은 다 무엇이냐. 병대의 붉은 복장을 입고 몸과 마음을 다 무장하여라!" 하면서 전쟁을 찬양했다. 최남선은 "미.영 격멸의 용사로서 황군이 된 참 정신을 떨치라"고 조선 청년들에게 외쳤다(매일신보 1943.11.25일자). 이러한 지식인들의 친일행적은 일반 민중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 항일정신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불행한 일이었다.

 

징병.징용을 찬양하는 친일파의 연설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언론을 통해 선전되었다. <조선일보>는 "황국신민 된 자로 그 누가 감사치 아니하랴"(1938.6.15)고 했다. 이에 뒤질세라 <동아일보>도 "장래 국가의 군인으로서 최초의 선발을 당한 합격자도 마땅히 그 임무가 중차대함을 자각하고 그 본무를 다하도록 노력"할 것(1938.6.15)을 선전했다. 이들 친일신문은 중일전쟁이 터지자마자 일본군대를 '아군', '황군'이라 부르면서 국방헌금을 내라고 부추길 때, 김연수(경성방직).박흥식(화신백화점) 등 자본가들은 적잖은 국방헌금을 냈고 비행기도 헌납했다.

 

불교.기독교.천도교.유교. 천주교 등 종교계도 일본군을 위문하는 시국행사에 참여해 조선인들에게 대륙침략전쟁에 적극 참여할 것을 선전하는 데 앞장섰다. 불교계는 1937년 "조선불교를 대동단결시켜 국민정신 진흥운동에 앞장 세우자"는 취지로 모임을 갖고 일본군을 위문하는 등 시국행사에 참여했다. 천도교도 청년단이 앞장서서 시국행사에 참여하였으며, 유교계도 조선유림연합회를 결성한 뒤 '유도 황민화체제'를 갖추어 친일활동을 벌였다. 기독교계 가운데 안식교.감리교.천주교는 일찍부터 신사참배에 참여했고 몇몇 기독교인들만이 개인적으로 일제에 저항했을 뿐이다. 연히전문학교 교장 언더우드는 기독교계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일은 잘된 일'이라고 친일을 부추겼다. 종현(명동) 천주교 청년회가 황군위문금을 모금한 것을 비롯하여 천주교 교단이 전시동원체제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교육계는 친일활동에 적극 참여했는데, 학생들의 의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던 이들의 친일행동은 사회적 파장이 컸다. 이화여전 교장은 1938년 이화여전과 이화보육학생 4백여 명을 동원하여 '애국여자단'을 조직하고 스스로 단장이 되었다. 또 강연회를 마치고 '장내 정리비'로 돈을 거둬 국방헌금을 냈으며 여러 곳에 글을 실어 친일활동을 했다. 여성계의 거두 김활란은 '징병제와 여성의 각오'라는 글로 징병.징용이 정당하다면서 강조했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장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막연하게 부러워하기도 했다. ...... 우리는 아름다운 웃음으로 내 아들이나 남편을 전장으로 보낼 각오를 가져야 한다. ...... 이제 우리에게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 김활란.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신시대> 1942.12 -

 

덕성여자실업학교장인 송금선은 "이제 어디를 가든지 정말로 황국신민이 완전히 되었다. 자랑과 의무를 느낀다"고 하면서 "여학교의 생도들도 어디까지나 군국의 어머니로서 교육되어야 한다"고 했다 (<매일신보> 1942.5.10).

 

 

 

                                                                                     KT 서초동 사옥

 

 

친일파들은 일본 정부에 직접 참여하거나 친일단체에 들어갔으며, 그렇지 않으면 개인으로 친일활동을 했다. 이들은 국민정신총동원연맹.조선방공협회.녹기연맹.조선문인보국회.대의단.임전보국단과 같은 친일단체를 통해 황국신민화와 방공운동을 펼쳤으며, 일제침략정책을 적극 지원했다. 문학가들도 빼어난 문필로 친일활동을 했다. 이광수는 학생들에게 "공부는 나중에 하고 곧바로 전쟁에 참가해야 한다"는 친일 시를 썼다. 주요한은 일제가 1943년 조선인 해군지원병제를 마련하자, 조선 사람은 "너도 나도 바다로 나가" 힘차게 전쟁을 치르야 한다는 등의 시를 썼다. 서정주는 또한 친일 문학잡지 편집일을 하면서 많은 친일 작품을 쏟아냈다. 모윤숙.노천명 등 이름을 날린 여류문인들도 이들에 뒤지지 않는 친일 활동을 했다.

 

일제의 징병.징용정책을 선전.미화했던 친일파는 당시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었다고 말한다. 같은 친일파라도 '일본 사람도 놀랄 만큼 적극 친일한 사람과 일제의 위협에 견디지 못하고 마지못해 친일한 사람을 가려내야 한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이들은 징병.징용 등 선전할동을 하면서 자신의 안위와 부귀를 얻었는지는 몰라도, 함부로 쓴 글과 마구 놀린 세 치 혀는 수많은 조선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또 적잖은 친일파가 사법, 군대, 경찰 등의 억압기구와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사회.문화.교육.종교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그물망처럼 뻗어있었던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가 이러한 언론, 지식인, 종교인 등 사회지도층 친일파를 해방 후 철저하게 정리하지 못한 점으로 인해 정신적인 정체성 혼란 시대를 야기하고 말았다. 시대정신을 구가하는 지식인들이 사라지고 이념투쟁에 몰입하는 것도 이러한 친일행적에 대한 단호한 정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 후 조선.동아. 매일 등 언론기관은 물론 정치인, 문학가, 사회할동가, 종교계, 일본군과 경찰 출신 등 그들이 다시 버젓이 나타나 국민 앞에서 글과 세 치 혀로 사회여론을 조작하는 데 앞장섰고 주요 공직을 다시 차지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의 소설.시 등의 글이 교과서에 수록되었고 순수문학의 대표자로 인정받게 된 것이 아니러니 하다. 또 많은 친일파들이 정계에 진출함은 물론 군, 경찰 등에도 일본군, 경찰, 앞잡이, 밀정 등 친일파들이 대거 재등용됨으로써 친일파들이 몰락하지 않고 다시 살아났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그들의 만행이 드러날 가능성이 있는 독립투사들에 대해서는 비밀리에 제거작업을 실시함은 물론 독립투사와 그들 후손들이 배척되고 그들의 행적이 사라졌으며 그들 후손들조차 가난과 궁핍한 삶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정의롭지 못하고 불평등한 사회 정신과 시스템을 이루고 말았다는 점이다. 

 

독립투사와 그 후손들에게는 이 나라에서 최고의 대우와 삶을 보장해줌은 물론 그들의 후손들조차도 영원히 특별대접받는 사회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국가의 홀대로 그들 후손들이 대부분 하층민으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나라의 정신적 수준을 인지하게 된다. 앞으로 만약 이 나라가 국난에 처하게 될 경우 그 누구도 나라를 위해서 초개같이 목숨을 바칠 사람은 점차 사라질 것이라는 점이다. 국가를 위해 목숨바쳐 평생을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 했지만 나라가 그것을 알아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들의 엄청난 과오일 것이다. 종교계도 마찬가지로 친일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는 점이 새삼 놀랍다. 이러한 친일 행적에 대한 해방 정부가 단호한 조치, 즉 사법처리, 재산몰수, 활동제한/금지, 처벌 등이 이루어졌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버젓이 이 땅에서 고개를 처들고 남은 여생을 별 어려움 없이 활보하며 재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사라져 갔다. 오늘날 친일파 재산분쟁은 바로 해방 후 단호한 친일파 처리를 하지 못한 이러한 과오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갑작스럽게 찿아온 해방과 남.북으로 분단된 반도는 강대국과 이념갈등으로 두동강나고 공산집단에 의한 한국전쟁의 발발은 또다시 민족간에 죽고 죽이는 불행을 자초하게 되었다. 전쟁간 수많은 국민들이 희생되었으며 전국토는 초토화 되고 말았다.

 

휴전 후 이승만정권은 장기집권과 권력욕에 눈이 멀어 국민들의 삶을 돌 볼 여유가 없었으며 국민들은 대부분 거지처럼 살면서 미국의 원조로 우유와 옥수수 가루로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면서 생명을 연명했으며 근본적인 가난을 벗어날 아무런 계기가 없었다. 아침,점심,저녁으로 수많은 거지들이 집집마다 동냥을 다니고 그들은 집도 없이 다리밑에 움막을 짖고 살았다.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풀뿌리에 나무껍질을 벗겨먹고 봄이면 보릿고개라 하여 대부분의 가정에 양식이 떨어져 부자들한테 곡식을 구걸하고 소작농으로 근근히 살아가면 다행이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이 불과 50년 전이다. 아마 지금의 배부른 젊은이들 자신의 조상이 어떠한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지금 이 이야기가 무슨소리인지 이해가 잘 안 갈 것이다. 과거의 역사를 제대로 모르니 미래의 역사인 앞날을 예측할 수도 없을 것이다.

 

                                                                               어느날 강남대로 전경

 

그러다가  5.16군사혁명정부가 들어서자 역사 이래 민중의 고통이 지속되어 온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경제개발을 시작하였고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여 차관을 얻고 월남전이 벌어지면서 맹호,청룡 등 국군이 파병되고 목숨을 담보로 한 전쟁터에서  자식이 보내온 월급은 단비같은 희망이 되었다. 전국 방방곳곳의 농촌지역에 현금이 수혈되었고 병사의 가족들은 그 돈으로 논.밭을 사서 가난을 조금씩 극복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건설노선 일대의 농촌지역 젊은이들은 공사현장에 투입되어 임금을 받게되자 현금을 만질 수 있는 돈벌이가 되었으며 돈맛을 본 젊은이들이 하나 둘 자신의 삶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래서 용기있는 젊은이들은 부모 몰래 하나 둘 미래가 없는 농촌을 떠나 돈을 벌기 위해 하나 둘씩 도시로 도망을 갔으며, 그들은 도시에서 막노동이나 점원으로, 또는 공장에 취업하여 공돌이,공순이가 되어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도 조금씩 돈을 벌기 시작했다. 몇 년이 지나서 명절이 되면 그들은 그동안 모은 돈으로 옷과 구두, 선물을 사들고 부모님과 형제들을 잊지 못해 다시 고향을 찿기 시작했다.

 

그들이 고향에 도착하면 마을 젊은이들이 감격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농촌에서는 구경도 하기 힘들었던 양복,양장, 멋진 구두에 말끔한 화장과 번듯한 옷차림을 하고 큰 선물꾸러미를 손에 들고 나타난 용기있는 젊은이들에게 혹 할 수 밖에 없었으며 고향에서 가난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었던 농촌 처녀,총각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명절내내 온 마을은 뒤집어졌다. 신화같은 성공스토리는 집집마다 마을마다 사방에 퍼져 나갔고 농촌 젊은 처녀, 총각들은 밤잠을 설쳤다. 그래서 명절이 끝나면 마을의 처녀 총각들이 몇 명씩 부모 몰래 봇짐을 싸서 그들과 같이 돈을 벌기 위해서 도시로 도망을 가는 탈농촌 행렬은 매년 증가하면서 계속되었다.

 

명절 귀향은 농촌을 떠났던 젊은이들에게는 성공의 자랑이며 남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위한 타인지향적인 유교관습의 결과였으며 허세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모은 돈으로 자가용을 타고 가족을 대리고 좋은 옷에 선물 꾸러미를 들고 고향을 방문하면 성공자로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그들은 모은 돈으로 고향 초가집을 개량하고 논과 밭을 사고 당당하게 자립할 수 있는 가정을 꾸렸다. 그래서 그때까지 부모님의 반대와 용기가 없어 농촌에 남아있던 처녀.총각들이 우매한 자신을 탓하면서 부모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도시로 떠났다. 점점 시간이 갈 수록 농촌은 노인들만 남거나 도시로 이사를 가면서 빈집들이 늘어났고 많은 학교의 분교들이 폐교되었다. 농촌은 젊은 노동력이 사라지자 점점 황폐화되기 시작했다.

 

그당시까지만 해도 보릿고개에 보리밥조차 먹기 힘들었던 농촌 사람들은 장이 서는 날에는 곡식, 떡, 닭, 강아지, 나물, 민물고기, 숯, 장작, 계란, 두부, 고철, 송아지, 채소, 과일, 나무, 계란, 강아지, 병아리, 약재 등을 내다 팔아 다른 생필품을 사오곤 했다. 다른 시골 장터를 찿아다니면서 물건을 팔기도 하였고 전문적으로 놋그릇, 장구, 징 ,괭가리, 제기,촟대, 등을 만들어 팔기도 하였다. 농사는 자신의 땅은 없으며 소작농들이 대부분인 농민들은 미래에 대한 아무런 희망은 없었다. 그러나 그런 희망없는 자신의 부모들이 살아온 것처럼 똑같이 살기를 싫어했던 용기있는 젊은이들은 돈을 벌어 금의환향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도시로 떠났던 많은 젊은이들이 명절이면 고향을 찿기 시작했던 것이 민족대이동으로 발전하였고 60-70년대 이후 우리 명절의 새로운 풍속도가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방식의 명절 보내기가 앞으로도 당분간은 계속될 수 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의 평소 삶의 방식에 있다. 우리는 외부지향적이며 타인지향적이기 때문에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들인 고향사람들에게 자신의 성공한(?)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심정으로 매번 불나비처럼 목숨을 걸고 고향을 찿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나 자신의 내면세계보다는 남들이 나를 얼마나 알아주고 어떻게 평가해 주느냐 하는 것에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는다. 그 의미와 보람은 정치.경제적인 실리를 가져다 주기 때문에 심리적인 것만은 아니다.

 

각종 연고 중에서 으뜸은 혈연이다. 우리만큼 피를 사랑하는 민족도 드물다. 그러나 실제는 5000년 역사를 통해 돌궐, 예맥, 몽고, 거란, 여진, 한족, 일본, 미국 등 잡종 피가 썩여 단일민족이라고 할 수가 없으며 양반도 상눔들이 돈주고 사거나 이름을 바꿔 대부분 양반인척 행세를 하고 있는 민족이다. 늦게 양반이 된 사람들은 지금도 가짜 족보를 자랑하며 가짜 조상을 자랑하고 유교의 예의범절을 찿는다.

 

 

                                                                                3대가 모여 만두를 빗고 있는 모습

 

 

명절의 고통은 혈연 집단 파워의 검증을 위해 치러야 할 최소한의 비용이다. 명절의 고통을 외치는 며느리들도 공리공론으로 일관된 과거제도의 병폐를 아직도 잊지못하고 자식 교육을 위해선 가족의 영광을 위한 열혈 전사(戰士)로 나서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은 과거와 사법고시를 통해 관직에 오르던 우리나라의 옛 출세 방식이었고 그러한 인재 발굴에는 가난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사회였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우리나라 개천은 다 썩었고 용은 커녕 미꾸라지도 나지 않는 사회다. 가진자들의 사교육 투자는 좋은 대학에 가는 지름길이며 강남 3구 출신들의 서울대 합격 비율을 보면 그 실제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지방대는 물론 서울 4년제 대학을 졸업해도 갈 곳이 없으며 취업도 쉽지 않다. 앞으로는 간판 제일주의가 사라질 것이며 개인의 능력과 창의력이 인정받는 사회, 출신과 혈연을 떠나 능력위주의 인재를 발굴하는 사회로 변할 것으로 기대해본다. 

 

고대 중국 전한의 무제가 오늘날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로 칭송받는 것은 비록 말년에 황후를 죽이고 자신의 아들까지 죽이는 폐륜을 저지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중국을 침범하여 수없이 약탈을 자행하던 북방의 흉노족 토벌하여 고비사막 이북으로 물러나게 함으로써 성공적인 업적을 이루어 국경을 만리나 넓혔고 복속하는 주변국 지배 인구도 증가하는 등 가장 강력한 중국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재를 등용함에 귀천을 가리지 않았는데 바로 노예 출신의 위청, 곽거병이란 두 장수를 기용하여 숙원이던 흉노토벌을 성공적으로 벌여 역사에 길이 남는 황제로 후세에 길이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강남대로 전경

 

우리 부모들은 자식 교육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삶의 의미와 보람마저 찾으려 든다. 자식을 둔 어머니들끼리 만나서 나누는 대화의 내용과 질은 명절 대화의 복사판이다. 모두 다 자식자랑, 돈자랑, 집자랑, 패물자랑, 남편자랑, 처가자랑으로 일관하고 피곤함과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그런 삶의 방식에서 이탈하면 죽는 줄 안다. 그러나 한편 명절로 인해 모인 가족간에 벌어지는 명절증후군, 혹독한 가사 부담, 재산상속문제, 이동의 부담감, 허례허식의 의미 상실, 비교하는 가족간의 생활수준 차이, 양극화 및 취업의 어려움, 결혼의 감소와 이혼의 증가 등으로 인한 갈등관계가 상존하는 한 대가족이 모이는 것 자체가 점처 배척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은 민족대이동의 물리적 근거는 서울이라는 비대해진 한국의 정치,경제,문화의 덩어리인 현 '서울공화국' 체제가 바로 그런 강한 성취욕구의 결실이다. 집단적 차원에선 개발독재 시절의 성취 욕구가 아직도 강하게 살아있는 것을 긍정할 수도 있겠지만, 평생직장의 상실과 평생 직업의 등장, 취업의 어려움, 결혼의 어려움과 이혼의 증가로 독신자층 확산, 자식과 부모들이 서로 부담과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분위기 등 사회적인 시스템의 변화로 인해 명절 민족대이동의 의미가 점차 퇴조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래서 이런 명절 민족대이동도 그리 오래갈 전망은 아닐 것 같다. 이동에 따른 리스크 부담이 크고, 농촌 부모들 세대가 물러감에 따른 고향방문 연고 및  의미 상실, 다문화/핵가족화 진전, 차례, 제사 등 형식적인 제례문화 퇴조, 그리고 장례문화의 변화에 따라 매장제도의 변화, 젊은층의 현실의식 등이 변화되면서  민족이동은 수 십년내에 점점 사라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