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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27 : 일제강점기 72 (1930~40년대초의 민족통일 전선운동 6)

 

 

한국의 역사 1,027 : 일제강점기 72 (1930~40년대초의 민족통일 전선운동 6)

 

 

           

 

 

 

동북항일연군과 재만 조선인 조국광복회

 

민생단 사건으로 항일유격대가 엄청난 손실을 입고 있던 1933년~35년 사이 일제는 대토벌을 벌였다. 1933년 1차, 1934년 2차 토벌을 감행한 일제는 1934년 가을부터 1935년 초에 이르기까지 3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3차 토벌을 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5년 7월 코민테른 7차 대회는 파시즘에 대응하여 반파시즘 인민전선과 식민지에서 민족통일전선을 아우러야 한다는 방침을 내렸다. 이에 따라 중국공산당이 1935년 12월 만주에서 반제 단일전선에 대하여를 발표했는데, 이 방침은 조선혁명에 대해서도 새로운 입장을 제시했다. 

 

그것은 동북인민혁명군 2군을 중심으로 동북항일연군을 편성하고, 조선민족독립을 목표로 하는 항일민족통일전선당으로서 조선항일혁명단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동북항일연군은 동북인민혁명군과 여러 항일부대를 합친 부대였다.

 

동북항일연군은 1군에서 11군까지 편성되었다. 동북인민혁명군 2군은 동북항일연군 제2군으로 개편되었으며 그 밑에 3개의 사(師)와 교도대에 2천여 명의 대원을 두었다. 중국공산당은 '미혼진회의'에서 대부분 조선인으로 이루어진 3사(사장 김일성)에게 백두산 지구에 근거지를 두고 '국내로 진출'할 것과 '조국광복회'를 만들 임무를 맡겼다. 백두산 지역은 이제 만주 지역 조선인들의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동북항일연군 2군은 1937년 7월 남만의 동북인민혁명군 1군과 통합하여 동북항일연군 1로군으로 재편되었다. 조선인이 절반이 넘는 동북항일연군 제2군은 조선.중국의 국경 지대와 백두산 지역으로 진출하여 '조국광복회'를 만들 터전을 마련하였다.

 

1936년 5월 조직된 조국광복회는 조선민족을 총동원하여 반일민족통일전선을 실현함으로써 '조선의 독립적 인민정부를 실현할 것, 중국 땅에 사는 조선인의 진정한 자치를 실현할 것, 조선독립을 위해 싸울 수 있는 혁명군대를 조직할 것, 일본과 매국적인 친일분자의 모든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여 독립운동의 경비와 빈곤한 인민을 구제할 것, 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전취하고 모든 정치범을 석방할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10대 강령을 내세웠다.

 

동북항일연군 2군이 백두산 지구로 진출하여 유격근거지를 마련하자 조국광복회의 활동도 본격화되었다. 조국광복회는 조직을 확대하여 만주 장백현 일대와 국내의 함경도 북부, 평안도 북부, 그리고 흥남.함흥.원산 등지에 조직망을 갖추게 되었다. 국내로 파견된 조국광복회 정치공작원들은 1936년 함경도 갑산에서 박달.박금철 등이 조직한 '갑산공작위원회'와 손을 잡았다. 갑산공작위원회는 조국광복회의 노선을 받아들였고 1937년 2월 '한인민족해방동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국광복회는 만주 지역 민족주의 계열 무장단체였던 조선혁명군과 연합하려고 힘쓰는 한편, 개인 또는 단체를 구별하지 않고 반일에 동의하는 모든 계급과 계층을 포괄하려고 했다.

 

 

 

유격대의 국내 진공작전

 

항일유격대는 조국광복회 국내조직의 지원을 받아 여러 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펼쳤다. 그 가운데 1937년 6월에 일어난 '보천보 전투'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동북항일연군 2군 6사는 보천보와 무산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김일성이 지도한 6사 80여 명은 국경지대인 함경남도 해산 보천보로 통하는 도로와 통신선을 끓은 뒤 보천보를 점령하여 경찰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불태우고 돌아갔다. 유격대는 뒤쫓아오는 일제 토벌대를 장백현 간삼봉에서 다시 물리쳤다. 국내 신문에도 널리 실린 보천보 전투는 유격대원에게 자신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민족의 독립의지를 드높인 저항이었다.

 

보천보 전투에 놀란 일제는 조국광복회 조직을 샅샅이 찿아내어 1937년 10월부터 1938년까지 700명이 넘는 조선 활동가를 검거했다. 이 '혜산 사건'으로 조국광복회 장백현 조직과 국내 조직은 큰 타격을 입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일제는 1939년 말부터 1940년에 걸쳐 동계대토벌에 나섰다. 일제가 벌인 대토벌은 항일유격대에 큰 타격을 입혔다. 1938년 3만 명에 이르던 동북항일연군은 1940년에는 1,400여 명으로 크게 줄었다. 이에 대부대 활동이 어려워지자 유격대의 역량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1940년 8월 '소할바령회의'에서 앞으로 일제는 반드시 패망할 것이므로 유격대 역량을 지키고 정치.군사 간부를 기르려면 유격대 활동을 소부대 활동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앞서 1940년 1월 '하바로프스크 회의'는 동북항일연군을 소련으로 옮길 것을 논의했고 이에 따라 김일성을 포함하여 동북항일연군 잔여 병력은 소만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1942년 7월에 동북항일연군 '교도려'로 편제되었고, 교도려는 소련군 아래 있는 국제홍군 '제88특별여단'이 되었다.

 

교도려 조선인들은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소련이 태평양전쟁에 참가하기로 결정하고, 5월 독일이 항복하는 등 일제의 패망이 논앞에 다가오자 조선해방과 새로운 국가건설을 목표로 '조선공작단'을 결성했다. 이들은 소련이 1945년 8월 9일 대일선전포고를 발표하자 소련군과 함께 국내 진공작전에 참여했으며, 소련군이 만주에서 국내로 진격할 때 소련군과 함께 북한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