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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28 : 일제강점기 73 (중일전쟁 뒤 일제정책과 민족해방운동 1)

 

 

한국의 역사 1,028 : 일제강점기 73 (중일전쟁 뒤 일제정책과 민족해방운동 1)

 

 

           

 

 

황국신민화 정책과 친일파 활동

  

 

황국신민화 정책

 

일제는 전시체제로 들어서면서 조선인을 황국신민으로 만들려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적극 펼쳤다. 일제는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고 민중생활을 통제하는 것만으로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에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뿌리 뽑아 식민지 노예로 만들려는 '네선융화', '내선일체'를 강조했다.

 

1931년 6월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군국주의자  우가키는 "일본이 침략전재을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것은 조선 2천만 민심의 향배에 달려있다"면서 '내선융화'를 내세웠다. 우가키 뒤를 이어 1936년 8월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전직 관동군사령관 미나미는 전임 총독의 내선융화 정책을 계승하여 "조선인과 일본인은 형태도 마음도 피도 살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일제는 1937년 "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입니다.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합니다" 등의 내용이 담긴 '황국신민서사'라는 충성맹세문을 만들어 조선인에게 외우게 했다. 또 일제는 전국의 모든 읍.면에 천황의 귀신을 모시는 신사를 만들어 조선인을 강제로 참배시킨 '신사참배', 나아가 일제는 1939년부터 일본인 조상과 같다는 '일선동조론'. 그리고 조선인의 고유한 성씨를 일본식 성씨로 바꾸도록 강요한 '창씨개명' 등을 강요하면서 조선말을 쓰지 못하게 하고 일본말만 쓰도록 했다.그래서 일제는 학교에서 조선어 시간을 점차 줄여 나가다가 1941년에 아예 없애버렸다.

 

1941년 일제는 황민화교육의 수단으로 황국신민학교라는 뜻의 국민학교제를 실시하고, "우리들은 일본의 어린이입니다. 하나님의 혈통을 받으신 천황폐하를 받들고 한없이 번영해 가는 일본에 태어난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담긴 수신(도덕) 교과서를 통해 어린 학생들을 황민으로 길들였다.

 

노동자에게도 황국신민화 정책을 적용하였다. 일제는 "근로를 통한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황국노동자를 양성한다"는 구실로 '연성소'를 설치했다. 주로 공장과 광산에 만든 연성소는 군대식 노동규울을 되풀이하여 노동을 통제할 뿐 아니라, "황국신민의 정신을 뼛속 깊이 스며들게 하는 "과정이었다. 연성소 노동자는 아침 6시에 일어나 각 반별로 궁성을 향해 인사하고, '황국신의 서사'를 제창한 뒤 하루를 시작했다. 일본어 강습을 하루 3시간씩 하는 공장도 있었으며, 작업이 끝난 뒤에도 강연회, 영화 등을 통해 황민화 교육이 이어졌다. 이처럼 조선노동자들은 연성소에서 군대식 편성과 규율에 따라 전시체제에 절대 복종하는 '노동하는 군임'으로 만들어졌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조선민중을 일상생활에서부터 통제할 목적으로 1938년 5월 '국가총동원법'을 조선에도 적용해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실시했다. 이어 7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을 만들었다. 이 연맹 산하조직인 지방연맹 밑에 10가구를 한 단위로 묶은 애국반을 조직하여 조선인의 일상생활까지도 감시.통제했다. 1942년 현재 448만여 명이나 되는 애국반은 때마다 '반상회'를 열어 일장기 걸기, 신사참배, 천황 궁성에 절하기, 일본어 쓰기, 방공방첩, 애국저축 등을 강요했다. 일제는 1940년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국민총력운동으로 바꾸고 1942년부터 전체주의.국가주의 아래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퍼뜨렸다.

 

일제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뿌리를 둔 내선일체에 저항하거나 방해가 되는 어떤 사상도 허용하지 않았다. 이미 1936년 12월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공포한 데 이어 1938년에는 사상전향자들을 모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으로 끌어들여 사상 탄압을 강화하고 친일세력을 넓혔다. 1941년에는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을 만들어 전향하지 않은 사상범뿐만 아니라 의심이 가는 사람을 마음대로 서대문형무소에 있는 예방구금소에 강제수용하기까지 했다. 

 

 

인력과 물자 수탈

 

일제는 1938년 5월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주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마음대로 동원했다. 만주사변 때부터 조선인에게 징집제를 실시해 모자라는 전쟁 인력을 채우려 한 일제는 1938년 지원병 형태로 조선청년을 전쟁터에 끌어들였다. 1943년에는 '학도지원병제'를 강행했고, 1944년에는 마침내 징병제를 실시하여 일제가 항복할 때까지 20만여 명에 달하는 청년을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내몰았다.

 

또 일제는 모집.징용.보국대.근로동원.정신대 때위의 간판을 내걸고 노동력을 강제로 수탈했다. 1939년에 실시한 '국민징용령'은 이를 법으로 뒷받침했다. 처음에는 모집하는 형식을 갖추었지만 전쟁 말기에는 강제로 끌고가 모자라는 노동력을 메웠다. 조선인들은 가족에게 연락조차 못하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끌려가는 일도 많았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은 1939년부터 45년 전쟁이 끈날 때까지 1백만 명이 훨씬 넘었다. 이들은 탄광, 광산, 토건공사장, 군수공장과 같은 곳에서 전쟁터 못지않은 조건에서 노예처럼 혹사당하면서 노동에 시달렸다. 또 중요 군사시설공사는 공사 후 모두 비밀을 지킨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을 모두 무차별 학살하기도 했다. 심지어 국민학생들까지 근로동원에 동원하여 노동력을 착취했다.

 

전쟁 막바지 단계였던 1944년 8월에는 '여자정신근무령'을 만들어 수십만 명의 조선 여성을 강제로 동원했다. 군수공장으로 보낸 경우도 있지만 일부는 군 위안소 위안부로 삼았다. 군 위안소는 1932년부터 1945년까지 생겨났으며 1937년부터 그 수가 크게 늘어났다. 조선 여성을 강제로 끌고 가거나 일본 가면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속였고 농촌은 나이든 노인들과 어린이들만 남아 모든 농사일을 감당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일제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그리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물자동원 계획을 세워 많은 지하자원을 약탈했으며, 조선민중에게 위문금품을 모집하고 국방헌금을 강요했다. 무기를 만들려고 고철, 동 제품이면 모조리 빼앗아 갔다. 학교 철문과 쇠난간을 뜯고 농기구와 가마솥까지 공출해가서 장갑차와 비행기, 함정으로 둔갑시켰다. 놋그릇, 수저, 제기, 교회종, 심지어 불상까지 빼앗아 대포와 총알을 만들었다. 또 일제는 전쟁에 필요한 식량을 확보하려고 쌀 증산계획을 세웠는데, 이를 위해 농업공동 작업2반을 만들어 여성과 어린 학생까지 강제 동원하여 징용과 징병으로 부족한 남성노동력을 메웠다. 또 조선총독부는 공출제도를 실시해서 농가마다 공출량을 할당하고 행정력과 경찰력을 동원하여 농민을 서로 감시하게 만들고, 농산물의 전체 생산량 가운데 40~60%를 강제로 빼앗아 갔다. 

 

 

친일파 활동

 

일제가 중일전쟁 뒤 전시체제로 들어서면서 황민화정책을 강화하자,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철저한 일본인화'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본 모습을 드러냈다.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이곳저곳에서 강연하면서 "일제가 침략전쟁을 일으킨 것은 장당하기 때문에 조선인들은 징병.징용에 기쁘게 참여해야 한다고 선전했다. 1930년대 초반까지 민족개량주의자들은 민족적인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시체제에 들어서자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일제의 대륙침략정책을 '조선민족의 살 길'로 여기고 "조선은 도저히 독립할 수 없으며 조선인은 일본을 맹주로 하는 '대동아공영권'에 참가하여 '이등국민'으로서 지위를 높이는 데 힘써야 한다"고 외쳐댔다. 또 일본군이 반드시 이겨야 한다거나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을 펴는 일이 우리 민족을 위한 길이라고 맞장구치면서, 자신들이 일본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시대와 대세에 순응하고 자신의 목숨과 부귀를 위해서는 민족도 양심도 져버리는 친일파들의 전형적인 행태를 자행하였다. 그때까지도 그들은 일제가 그렇게 빨리 연합군에 항복할 것으로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1938년 일제가 '조선지원병령'을 공포하고 조선 청년들을 일제의 총알받이로 내몰려할 때 친일파들은 "조선민족도 천황의 적자 노릇을 할" 기회를 얻었다고 대환영했다. 대표적인 친일 지식인이었던 이광수는 일본의 힘이 강할수록 조선은 독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힘! 오늘의 영광은 힘에 있다. ...... 평화의 힌 옷은 다 무엇이냐. 병대의 붉은 복장을 입고 몸과 마음을 다 무장하여라!" 하면서 전쟁을 찬양했다. 최남선은 "미.영 격멸의 용사로서 황군이 된 참 정신을" 떨치라고 조선 청년들에게 외쳤다(매일신보 1943.11.25일자). 이러한 지식인들의 친일행적은 일반 민중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 항일정신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불행한 일이었다.

 

징병.징용을 찬양하는 친일파의 연설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언론을 통해 선전되었다. <조선일보>는 "황국신민 된 자로 그 누가 감사치 아니하랴"(1938.6.15)고 했다. 이에 뒤질세라 <동아일보>도 "장래 국가의 군인으로서 최초의 선발을 당한 합격자도 마땅히 그 임무가 중차대함을 자각하고 그 본무를 다하도록 노력할 것"(1938.6.15)을 선전했다. 이들 친일신문은 중일전쟁이 터지자마자 일본군대를 '아군', '황군'이라 부르면서 국방헌금을 내라고 부추길 때, 김연수(경성방직).박흥식(화신백화점) 등 자본가들은 적잖은 국방헌금을 냈고 비행기도 헌납했다.

 

불교.기독교.천도교.유교. 천주교 등 종교게도 일본군을 위문하는 시국행사에 참여해 조선인들에게 대륙침략전쟁에 적극 참여할 것을 선전하는 데 앞장섰다. 불교계는 1937년 "조선불교를 대동단결시켜 국민정신 진흥운동에 앞장 세우자"는 취지로 모임을 갖고 일본군을 위문하는 등 시국행사에 참여했다. 천도교도 청년단이 앞장서서 시국행사에 참여하였으며, 유교계도 조선유림연합회를 결성한 뒤 '유도 황민화체제'를 갖추어 친일활동을 벌였다. 기독교계 가운데 안식교.감리교.천주교는 일찍부터 신사참배에 참여했고 몇몇 기독교인들만이 개인적으로 일제에 저항했을 뿐이다. 연히전문학교 교장 언더우드는 기독교계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일은 잘된 일'이라고 친일을 부추겼다. 종현(명동) 천주교 청년회가 호아군위문금을 모급한 것을 비롯하여 천주교 교단이 전시동원체제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교육계는 친일활동에 적극 참여했는데, 학생들의 의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던 이들의 친일행동은 사회적 파장이 컸다. 이화여전 교장은 1938년 이화여전과 이화보육학생 4백여 명을 동원하여 '애국여자단'을 조직하고 스스로 단장이 되었다. 또 강연회를 마치고 '장내 정리비'로 돈을 거둬 국방헌금을 냈으며 여러 곳에 글을 실어 친일활동을 했다. 여성계의 거두 김활란은 '징병제와 여성의 각오'라는 글로 징병.징용이 정당하다면서 강조했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장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막연하게 부러워하기도 했다. ...... 우리는 아름다운 웃음으로 내 아들이나 남편을 전장으로 보낼 각오를 가져야 한다. ...... 이제 우리에게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 김활란.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신시대> 1942.12 -

 

덕성여자실업학교장인 송금선은 "이제 어디를 가든지 정말로 황국신민이 완전히 되엇다. 자랑과 의무를 느낀다"고 하면서 "여학교의 생도들도 어디까지나 군국의 어머니로서 교육되어야 한다"고 했다 (<매일신보> 1942.5.10).

 

친일파들은 일본 정부에 직접 참여하거나 친일단체에 들어갔으며, 그렇지 않으면 개인으로 친일활동을 햇다. 이들은 국민정신총동원연맹.조선방공협회.녹기연맹.조선문인보국회.대의단.임전보국단과 같은 친일단체를 통해 황국신민화와 방공운동을 펼쳤으며, 일제침략정책을 적극 지원했다. 문학가들도 빼어난 문필로 친일활동을 했다. 이광수는 학생들에게 공부는 나중에 하고 고다로 전쟁에 참가해야 한다는 친일 시를 썼다. 주요한은 일제가 1943년 조선인 해군지원병제를 마련하자, 조선 사람은 "너도 나도 바다로 나가" 힘차게 전쟁을 치르야 한다는 등의 시를 썼다. 서정주는 또한 친일 문학잡지 편집일을 하면서 많은 친일 작품을 쏟아냈다. 모윤숙.노천명 등 이름을 날린 여류문인들도 이들에 뒤지지 않는 친일 활동을 했다.

 

일제의 징병.징용정책을 선전.미화했던 친일파는 당시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었다고 말한다. 같은 친일파라도 일본 사란도 놀랄 만큼 적극 친이로한 사람과 일제의 위협에 견디지 못하고마지못해 친일한 사람을 가려내야 한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이들은 징병.징용 등 선저노할동을 하면서 자신의 안위와 부귀를 얻었는지는 몰라도, 함부로 쓴 글과 마구 놀린 세 치 혀는 수많은 조선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또 적잖은 친일파가 사법, 군대, 경찰 등의 억압기구와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사회.문화.교육.종교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그물망처럼 뻗어있었던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이러한 친일파를 해방 후 철저하게 정리하지 못한 점으로 인해 정신적인 정체성 혼란 시대를 야기하고 말았다. 시대정신을 구가하는 지식인들이 사라지고 이념투쟁에 몰입하는 것도 이러한 친일행적에 대한 단호한 정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 후 조선.동아. 매일 등 언론기관은 물론 정치인, 문학가, 사회할동가, 종교계, 일본군과 경찰 출신 등 그들이 다시 버젓이 나타나 국민 앞에서 글과 세 치 혀로 사회여론을 조작하는 데 앞장섰고 주요 공직을 다시 차지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의 소설.시 등의 글이 교과서에 수록되었고 순수문학의 대표자로 인정받게 된 것이 아니러니 하다. 또 많은 친일파들이 정계에 진출함은 물론 군, 경찰 등에도 일본군, 경찰, 앞잡이, 밀정 등 친일파들이 대거 재등용됨으로써 친일파들이 몰락하지 않고 다시 살아났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그들의 만행이 드러날 가능성이 있는 독립투사들에 대해서는 비밀리에 제거작업을 실시함은 물론 독립투사와 그들 후손들이 배척되고 그들의 행적이 사라졌으며 그들 후손들조차 가난과 궁핍한 삶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정의롭지 못하고 불평등한 사회 정신과 시스템을 이루고 말았다는 점이다. 

 

독립투사와 그 후손들에게는 이 나라에서 최고의 대우와 삶을 보장해줌음 물론 그들의 후손들조차도 영원히 특별대접받는 사회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국가의 홀대로 그들 후손들이 대부분 하층민으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국민들은 이 나라의 정신적 수준을 인지하게 된다. 앞으로 국난에 처하게 될 경우 누구도 나라를 위해서 초개같이 목숨을 바칠 사람은 점차 사라질 것이라는 점이다. 국가를 위해 목숨바쳐 평생을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 했지만 나라가 그것을 알아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들의 엄청난 과오일 것이다. 종교계도 마찬가지로 친일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는 점이 새삼 놀랍다. 이러한 친일 행적에 대한 해방 정부가 단호한 조치, 즉 사법처리, 재산몰수, 활동제한/금지, 처벌 등이 이루어졌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버젓이 이 땅에서 고개를 처들고 교세 확산과 치부를 일삼고 있으며 도심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심지어 신도들을 배경으로 정치세력화 하여 종교적 사리시욕을 채우는 사회적 압력단체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처럼 친일 세력들이 남은 여생을 별 어려움 없이 활보하며 호의호식 하다가 재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사라져 갔다. 오늘날 친일파 재산분쟁은 바로 해방 후 단호한 친일파 처리를 하지 못한 이러한 과오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