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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29 : 일제강점기 74 (중일전쟁 뒤 일제정책과 민족해방운동 2)

 

 

 

한국의 역사 1,029 : 일제강점기 74 (중일전쟁 뒤 일제정책과 민족해방운동 2)

 

 

 

 

           

 

 

중일전쟁 뒤 국내 민족해방운동 2

  

 

이어지는조직운동

 

1930년대 후반 민족해방운동 세력은 움츠러든 모습을 보였다. 1930년대 전반기 일어났던 혁명적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운동은 1930년대 후반에도 일부 지역에서 끈질기게 이어졌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많은 조직이 모습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신간회가 해소된 뒤 이렇다 할 조직 활동을 하지 못했던 안재홍.정인보 등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민족개량주의 세력에 맞서 '조선학운동'을 벌였지만, 노동자.농민에게 큰 공감을 얻지 못하고 '조선어학회 사건'을 끝으로 개별화되거나 은신하고 말았다. 이런 가운데 사회주의자들의 투쟁이 이어졌다.

 

독일.이탈리아.일본에서 파시즘이 위세를 떨치고 전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자, 1935년 7월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는 이전의 '계급 대 계급'노선을 바꾸어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내세웠다. '반파시즘 인민전선'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평화를 위한 투쟁'에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코민테른의 이러한 방침을 일제가 병참기지로 만들려 한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국내에서도 반제민족통일전선 움직임이 일부 나타나기도 했다.

 

1937~1938년 함경남도 원산을 중심으로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벌였던 이주하.김태범 등이 이끈 '원산그룹'은 여러 운동을 통일하면서 전국을 포섭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는 조선의 반일적 모든 요소를 규합하여 광범한 조선민족에 의한 민족해방전선 결성을 긴급한 임무로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8년 10월 관련자들이 검거될 때까지 전국을 아우르는 조직을 만들지는 못했다.

 

 '이재유 그룹'에서 활동했던 이관술.김삼룡.이현상 등이 박헌영을 지도자로 받아들여 '경성콤그룹'을 결성했다. 이들은 1938년 12월부터 1941년 12월까지 경상남.북도와 함경도 지방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하부단위에 노동자와 농민을 적잖이 참여시켰다. '경성콤그룹'은 인민전선부를 비롯한 노동조합부.가두부.학생주.출판부 등의 부서를 갖추고 전국 주요 산업중심지에 조직 책임자를 두었다. 그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산업별 조직 원칙에 따라 성과를 거두었다. 또 일제의 탄압과 회유 공작에도 굽히지 않고 오랫동안 투쟁했다. 이런 까닭에 경성콤그룹은 8.15 뒤 조선공산당을 앞장서 건설할 수 있었다.

 

그 밖에 서중석을 책임자로 하여 이정윤.김태준 등이 참여한 '공산주의자협의회'(1944)를 비롯한 크고 작은 공산주의자 그룹이 있었다. 공산주의자협의회는 건국동맹과 함께 군사위원회를 조직하여 전국 범위의 노농군을 편성하려고 전국을 8개 지구로 나누어 책임자를 파견하는 등 활동을 전개했다.

 

일제가 항복하기 1년 전인 1944년 8월에는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건국동맹'을 만들었다. 건국동맹은 10개 도에 책임자를 두어 지방조직을 갖추면서 반일세력을 모으려고 노력했다. 또 대중을 조직하는 데도 힘을 기울여 1944년 10월 경기도 용문산에서 농민동맹을 결성해 식량 공출.군수물자 수송.징용.징병 등을 방해하는 활동을 했다. 민족해방이 가까이 다가왔다고 확신한 건국동맹은 나라 안팎의 민족해방운동 세력과 힘을 합치려 했다. 건국동맹은 철도 파괴와 국내 무장봉기를 준비하려고 공산주의자협의회와 함께 군사위원회를 만들어 연안의 독립동맹과도 연계하려고 했다. 이들의 활동은 해방 뒤 건국준비위원회를 세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민중투쟁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노동자.농민을 비롯한 청년학생들은 끈질기게 대중투쟁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주로 군수산업 부문을 중심으로 파업투쟁을 벌이면서 침략전쟁에 날뛰는 일제를 괴롭혔다. 전쟁 동안에도 연평균 107건에 6천여 명 남짓한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다. 1943년 한 해 동안에만 성진공장 운반노동자 파업, 나진항만노동자 파업, 만포 수력발전소 노동자 파업 등이 있었으며, 흥남의 조선질소화학공장에 폭파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노동자들은 직접 파업을 벌이기도 했지만 전시산업의 생산을 흐트러뜨리는 태업.결근.공사 방해 등을 자주 일으켜 일제에 맞섯다. 또 일제가 징병과 징용으로 노동력을 강제 동원.수탈하는 정책을 펴자, 수많은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또는 개인으로 도망가는 등 비록 소극적이기는 했지만 일제의 정책을 방해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농민들은 일본인 농장을 중심으로 소작쟁의를 일으키고 강제 공출, 노동력 강제 동원, 군수작물 재배 강요, 강제 징발 등의 전시수탈 정책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농민들은 공출에 반발하여 곡물을 숨기거나 모아둔 농산물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이렇게 공출을 둘러싸고 마을마다 농민과 면서기, 경찰 사이에 충돌이 잦았다. 일제가 "실로 우려할 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하 것처럼, 농민들의 생존권 투쟁은 반일.반전의 성격을 띠었다.

 

이 밖에도 비록 소극적인 형태이기는 하지만 일제의 전시체제 정책에 맞서 반발하는 크고 작은 저항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징용.징병 대상자들은 집을 떠나거나 호적과 나이를 고쳐 징발되지 않으려 했다. 마지못해 전선으로 끌려간 조선 청년들 가운데 일부는 전쟁터를 도망쳐 항일무장 세력에 가담하기도 했으며, 부대 안에서 폭동을 일으키는 등 자신의 조건에 따라 갖가지 모습으로 저항했다.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노동자들도 파업투쟁, 태업, 시위 등을 벌이거나 도망쳤다. 이에 일제는 "내선일체론에 따라 온정을 베푼다면 쟁의가 다시 일어날 것"이라며 더욱 크게 탄압했다.

 

조선인들은 학교, 시장, 관공서, 교회 등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든 일제의 선전이 거짓임과 전쟁에서 패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제는 이들에게 '유언비어', '볼온언사', '반시국적 악질언동'과 같은 온갖 죄를 부쳐 처벌하기에 바빴다. 조선인들은 크고 작은 저항은 사상범 검거 상황에서도 잘 나타난다. 1935년 172건에 1,740명, 1936년 167건에 2,762명, 1937년 134건에 1,637명, 1938년 145건에 1,344명, 1939년 95건에 1,042명, 1940년 103건에 1,193명, 1941년 232건에 861명, 1942년 183건에 1,142명, 1943년 322건에 1.002명, 1944년 132건에 337명이었다. 8.15 해방이 되자 그때 감옥을 가득 메웠던 그 많은 정치범은 민족해방운동이 얼마나 끈질겼으며 일제가 얼마나 이들을 탄압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