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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1,031 : 일제강점기 76 (태평양 전쟁과 일제의 패망 2)

 

 

 

 

한국의 역사 1,031 : 일제강점기 76 (태평양 전쟁과 일제의 패망 2)

 

           

 

 

 

 

둘리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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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리틀 공습
(태평양 전쟁의 일부)
공격 당일, 항공모함 호넷에서 이륙하는 둘리틀 폭격대
공격 당일, 항공모함 호넷에서 이륙하는 둘리틀 폭격대
날짜 1942년 4월 18일
장소 일본 본토
교전국
US Army Air Corps Hap Arnold Wings.svg
미국 육군 항공대
일본 제국
일본 제국
지휘관
제임스 해롤드 둘리틀 중령 -
병력
B-25 미첼 경폭격기 16기 -
피해 규모
전사 - 3명
포로 - 8명 (이중 4명이
포로수용소에서 사망)
대략 50여 명 사망,
400여 명 부상


둘리틀 공습( - 空襲, 영어: Doolittle Raid, 1942년 4월 18일)은 제임스 해롤드 둘리틀(James Harold Doolittle, 간단히 Jimmy Doolittle) 중령이 지휘하는 B-25 미첼 경폭격기 편대가 항공모함 USS CV-8 호넷을 출발하여 일본을 폭격한 사건이다.

 

지미 둘리틀 중령(당시 계급)의 지휘하에 도쿄, 요코하마, 요코스카, 가와사키, 나고야, 고베, 욧카이치, 와카야마, 오사카일본 각지를 B-25 미첼 폭격기 16대로 폭격하였다. 이 공습으로 사상자 363명, 가옥파괴 약 350동의 손해를 주었다.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불침의 하늘이라 호언장담하던 일본의 군부, 특히 일본 해군 상부에 준 충격은 엄청났고, 미국은 비록 일본에 큰 피해를 입히진 않았지만 이 사건은 미국인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이 둘리틀 공습을 토대로 그해 6월 초에 미일양국의 운명을 뒤바꾼, 진주만 공격 후 두 번째로 대규모 전투인 미드웨이 해전이 벌어지게 된다.

 

배경

일본 제국의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군은 일방적인 패퇴가 계속되었고, 1942년 2월 24일에 일어난 일본 해군 잠수함의 미국 본토의 캘리포니아 주 산타 바바라 엘우드의 정유소에 대한 포격은 미국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에 따라 사기를 높이는 방책으로서 미군은 일본의 수도 도쿄를 폭격할 계획을 세웠다.

 

미국 육군은 장거리 폭격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 행동 반경 내에 일본을 포함하는 기지는 없었고, 소련의 영토는 일소 중립 조약 때문에 폭격을 위한 기지 사용은 실시할 수 없었다. 또, 미국 해군항공모함 함재기는 항속 거리가 짧고, 폭격을 위해서는 항공모함을 일본 근해에 접근시킬 필요가 있었는데, 이것은 태평양 상에서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 가운데, 미국 해군의 잠수함 승무원이 "항속 거리가 긴 육군의 폭격기를 항공 모함으로부터 발진시키면 어떻겠는가"라고 루스벨트 대통령에 진언했다. 미군은 급히 B-25 폭격기를 항공모함의 짧은 비행 갑판으로부터 발진할 수 있도록 경량화를 도모했다.

 

육군 폭격기항공모함으로부터의 발진은 실전에서는 처음이며, 이 작전은 극비 사항으로 여겨졌다. 또, 폭격 이후 항공모함에 착함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열도를 횡단해 당시 일본군과 전쟁중이던 중국 동부로 중화민국군의 유도 신호 아래에서 착륙할 예정이었다. B-25를 탑재하는 항공 모함은 호넷 호였고, 엔터프라이즈 호가 호위를 맡아 뒤따르게 되었다.

 

 

경과

1942년 4월 1일, 16기의 B-25 미첼을 탑재한 항공모함 호넷 호 및 호위 순양함 3척, 구축함 3척은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했다. 도중에 엔터프라이즈와 순양함 2척, 구축함 4척이 합류해 일본으로 향했다. 공격 예정 전날인 4월 17일, 미해군 함선 레이더에 비친 국적 불명의 2척의 어선을 초계기로 확인 중에 일본군의 감시정이란 것이 확인되었다. 이들 중 1척은 경순양함 내슈빌 호의 포격으로 격침되었고(엔터프라이즈의 함재기의 공격도 받고 있었다), 승무원 14명 전원은 함정과 운명을 같이했다. 발진 예정 해역 앞의 예상 외의 원거리에서 일본군에게 발견되어, 폭격대는 예정보다 빨리 항공모함 호넷 호에서 발진했다. 덧붙여 내슈빌은 또 1척의 감시정을 격침했다.

 

지미 둘리틀 중령이 인솔하는 B-25 폭격기 16기는 도쿄 시, 가와사키 시, 요코스카 시, 나고야 시, 욧카이치 시, 고베 시를 폭격했다.

 

일본 측에는 50명의 사망자, 가옥 262호의 피해가 나왔다.

 

폭격기는 일본 열도를 횡단해, 중국 동부로 착륙했다(1기는 소련블라디보스토크에 착륙했고, 승무원은 억류되었다가 얄타밀약 성립후 석방됨). 승무원은 전사가 1명, 행방 불명이 2명, 포로가 8명으로, 나머지는 미국으로 귀환했다. 대본영은 이 피해를 "적기 9기를 격추했으며, 손해는 적다"고 포장해 발표했다. 그러나 폭격 당일의 날씨는 맑았으며, 추락한 항공기 등 시민에게서는 단 1기도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본영의 발표에 대해 "웃기지 마라. 황군은 아무것도 격추하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편, 일본군에 체포된 폭격기 승무원은 도시의 무차별 폭격을 실시한 혐의에 대해 포로가 아닌 전쟁범죄자로서 다루어져 조종사 2명과 사격수 1명이 처형되었으며, 5명은 징역을 살았다. 미국은 제네바 협약을 어긴 사형에 대해 "야만적인 만행"이라고 비판했으며, 20세기 폭스1944년에 선전 영화 《퍼플 하트》에서 이들을 다루었다.

 

 

영향

 

미드웨이 해전

이 공격을 보고받은 후에, 본토 방공을 맡고 있던 일본 육군해군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 함대 사령장관은 충격을 받았다. 진주만 공격에서 공격을 면한 미국항공모함 기동부대는 1942년 초반부터 이미 크고 작은 섬들에 대해 공격하고 있었지만, 이 본토 공습 이후 야마모토 장관이 일본 본토의 안전 확보를 위해 미군 항공모함 섬멸을 위한 교두보로 미드웨이 섬 공략 작전의 실행을 서둘렀다는 설도 있다.

 

 

중국 대륙 비행장의 파괴

일본 육군은 둘리틀 공습의 재발을 막기 위해 작전에 이용된 저장 성 이남의 중국군의 비행장을 이용할 수 없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 파견군에 명해 파괴 작전을 실시했다. 작전은 1942년 5월 중순부터 6월에 걸쳐 실시되어 동원 병력 약 18만, 비행기 3개 비행 전대에 의해 목적 비행장의 파괴와 같은 곳을 방어하는 구주퉁이 지휘하는 중국 제3전구군 34개 사단을 격퇴하는 것에 성공한다. 작전은 1942년 9월 30일에 종료되었다.

 

 

나리마스 비행장

둘리틀 공습은, 일본의 수도 방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었다. 동부 군사령관 나카무라 코타로 대장은, 육군 방공 학교 및 고사포 제 7 연대의 고사기관포를 황궁 주변에 배치해, 1942년 4월 20일에, 독립비행 제 47 중대를 방위 사령관의 지휘하에 두어 수도 방공을 맡겼다. 일본군에서는, 이를 위한 비행장으로서 나리마스 비행장을 건설했다.

 

 

의의

일본의 본토 타격은 13세기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의 실패 이후로 한 번도 직접 타격을 받은 적이 없다. (조선초 대마도 정벌을 당하였지만 일본 본토는 아니다.) 그러므로 이번 일본 본토 직접 타격은 의의가 크다 볼 수 있다.

 

 

에피소드

 

샹그릴라

둘리틀 공습의 성공은 곧바로 미국 본국에서도 선전되었지만, 작전의 내용은 함구되었다. 항공모함 호넷 호의 이름도 예외가 아니어서, 기자 회견에서 공습의 성공을 발표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기자단으로부터 「폭격기는 어디에서 발진했습니까?」라고 하는 질문에 대해, 「발진지는 샹그릴라」라고 대답했다. 샹그릴라는 당시의 소설로 영화화도 된 《없어진 지평선》에 나오는 히말라야 부근에 있는 가상의 지명인데, 그것을 모르는 기자는 「폭격기는 항공모함 샹그릴라로부터 발진」이라고 오역해 일부에서 잘못 보도되었다. 그런데 이 에피소드가 후일 정말로 이루어져 진짜로 항공모함 USS CV-38 샹그릴라(에섹스급 항공모함 중 1척)가 취역하였다.

 

 

 

 

 

 

산호해 해전

 

산호해 해전
(태평양 전쟁의 일부)
1942년 5월 8일, 일본 항공기들의 공격을 받은 지 몇시간 뒤, 미 해군 정규항모 렉싱턴이 폭발로 불타고 있다.
1942년 5월 8일, 일본 항공기들의 공격을 받은 지 몇시간 뒤, 미 해군 정규항모 렉싱턴이 폭발로 불타고 있다.
날짜 1942년 5월 4일~5월 8일
장소 태평양 산호해
결과 일본군 전술적 승리, 미군 전략적 승리
교전국
US Naval Jack 48 stars.svg
미국

Naval Ensign of Australia.svg
호주


Naval Ensign of Japan.svg
일본 제국
지휘관

US Naval Jack 48 stars.svg 프랭크 잭 플레처
Naval Ensign of Australia.svg 존 그레이스

US Naval Jack 48 stars.svg 토머스 C. 킹케이드
US Naval Jack 48 stars.svg 어브리 피치

Naval Ensign of Japan.svg 이노우에 시게요시
Naval Ensign of Japan.svg 다카기 다케오
Naval Ensign of Japan.svg 시마 기요히데
Naval Ensign of Japan.svg 가지오카 사다미치
Naval Ensign of Japan.svg 마루모 구니노리
Naval Ensign of Japan.svg 고토 아리토모
Naval Ensign of Japan.svg 하라 주이치
병력
제17 기동부대 및 정규항모 2척, 순양함 9척, 구축함 13척, 급유함 2척, 수상기모함 1척, 항공기 128대 제5 항공전대, 제6 항공전대 및 정규항모 2척, 경항모 1척, 순양함 9척, 구축함 15척, 기뢰제거함 5척, 기뢰부설함 2척, 기관총보트 3척, 급유함 1척, 수상기모함 1척, 수송함 12척, 항공기 127대
피해 규모
정규항모 1척 침몰, 1척 대파, 구축함 1척 침몰, 급유함 1척 침몰, 항공기 69대 파괴, 656명 전사 경항모 1척 침몰, 정규항모 1척 대파, 1척 소파, 구축함 1척 대파, 수송선 1척 침몰, 항공기 92대 파괴, 966명 전사


 

산호해 해전 (The Battle Of The Coral Sea), 1942년 5월 4일부터 8일까지 치러진 이 전투는 2차세계대전 태평양 전쟁의 메이저 전투중 하나로, 일본제국해군과 미국,호주 연합해군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산호해 해전은 양측 항공모함이 서로를 발견하면서 시작되었고, 그 직후 서로를 향해 직접적인 공격을 가했다.

 

거함거포 시대에서 항공모합에서 발진한 항공기에 의해 적 함선이 보이지 않는 거리에서 서로의 함선을 공격하여 침몰시키는 항공전 시대가 도래한 해전이기도 하다. 일본은 세력을 확장하고 남태평양으로 진출하여 방어권역을 확장하며 나중에는 오르스레일리아까지 석권하려는 전략적인 계산아래 주요 전략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상륙부대를 상륙시키기 위해 산호해 지역으로 진출하였고 미국은 일본의 암호문을 해독하면서 산호해로 진출할 것을 미리 알고 일본함대를격멸하기 위해 기동부대를 구성하여 파견하였던 작전이었다.

 

남태평양에서 일본제국의 방어를 강화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일본군은 뉴기니의 수도 포트 모레스비, 그리고 남동 솔로몬 제도의 툴라기를 소유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한 작전명은 'MO작전'으로 불린다. 그래서 일본연합함대의 정규항공모함 2척, 경항공모함 1척이 침공대를 지원하기 위해 남하하였다. 이 함대의 총책임자는 이노우에 시게요시 제독이었다. 미국은 암호해독을 통해 일본군의 계획을 알아냈고 2척의 정규항모와 미국-호주 순양함대를 파견하였다. 이 함대의 총책임자는 프랑크 플레쳐 제독이었다.

 

5월 3-4일에, 일본군은 성공적으로 툴라기를 침공,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몇몇 전함이 미국 정규항모 요크타운의 항공공격을 받아 침몰하거나 손상되었다. 미국 항공모함이 근처에 있음을 알아차린 일본함대는 연합군의 함대를 수색, 격멸하기 위해 산호해로 진입하였다.

 

5월 7일, 양측 함대는 이틀간 계속해서 서로의 공격기를 주고받으며 격렬하게 싸웠다. 첫날, 미국은 일본의 경항공모함 쇼호를 침몰시키는 성과를 거두었고, 일본은 이에반해 미국 구축함 한 척을 침몰시키고 급유함 한 척을 대파하여, 첫날은 미국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그러나 다음날, 일본이 미국 정규항모 렉싱턴을 대파하여 스스로 침몰하게 했으며, 다른 정규항모 요크타운도 대파시킨데 반해, 미국은 일본의 정규항모 쇼가쿠를 대파, 정규항모 즈이가쿠를 소파하는데 그쳐 미국이 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 과정에서 양측은 엄청난 항공기 피해를 입었으며, 양측 함대 모두 물러났다. 공중엄호력이 약해진 것을 우려한 이노우에 제독은 포트 모레스비 침공군을 물렸으며, 후일을 기약하였다.

 

일본군은 경항공모함 1척 침몰, 정규항공모함 1척 대파, 정규항공모함 1척 소파의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미국-호주 연합군은 정규항공모함 1척 침몰, 정규항공모함 1척 대파당했다. 가장 비싸고 진수시간이 오래 걸리는 정규항모가 침몰하였으므로 피해상황만 놓고 보면 일본의 승리였다. 하지만, 이후의 전쟁전개상황을 고려해 보았을때 역사가들은 이 전투를 미국의 승리로 판단한다. 그 이유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항공모함 쇼가쿠와 즈이가쿠이다. 쇼가쿠는 대파당했고, 즈이가쿠는 항공기의 손실이 막심하였으나 일본의 산업능력으로는 정비와 보충이 늦었다. 결국 이 두 항공모함은 이후 미드웨이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였으며, 그에 따라 미국은 미드웨이에서 일본을 이길 수 있었다.

 

미드웨이에서 일본은 완전히 허를 찔렸으나, 쇼가쿠와 즈이가쿠가 포함되어 있었다면 모든 전략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이를 뒤집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판단이다. 물론, 미국 역시도 이 전투에서 정규항모 렉싱턴을 잃고 요크타운도 큰 손상을 입었지만, 엄청난 수리신공을 발휘하여 요크타운을 끝내 미드웨이 전장에 참가시켰기 때문에, 산호해 해전은 일본이 전술적으로는 승리하였으나 전략적으로는 미국이 이겼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미드웨이에서 패한 일본은 다시 포트 모레스비를 공격하지 못했으며, 연합군은 이후 과달카날 전투, 뉴기니 전투에서 큰 이점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남태평양에서의 일본의 방어는 무너졌고, 2차 세계대전 일본의 항복에 크게 기여하였다.


 

 

배경

 

일본제국의 확장

1941년 12월 7일, 일본제국은 항공모함 6척을 동원하여 미국령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했다. 이 공격으로 미국 태평양 함대의 대부분의 전함이 침몰하거나 크게 손상되었으며,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 수뇌부는 미국 함대를 무력화하고, 동남아시아의 풍부한 자원을 장악하며, 그들의 넓은 제국을 방어하기 위한 거점을 소유하고자 했다.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함과 동시에, 말레이반도 역시 침공하였으며, 이곳을 점거중이던 영연방,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도 이를 방어하기 위해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동맹을 결성하였다. 일본 연합함대는 1941년 11월 1일부로 1호작전을 발령하였는데, 이것의 최종 목표는 영연방과 미국을,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필리핀에서 쫓아내고, 그곳에서 쏟아지는 풍부한 자원을 손에 넣어, 경제적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1942년 초 몇 달동안, 말레이를 포함하여 일본은 지속적인 동남아 침공을 가했고, 필리핀, 타이, 싱가포르, 네덜란드령 동인도, 웨이크섬, 뉴브리튼, 길벗제도를 몽땅 손에 넣었다. 연합군의 중추인 미국의 태평양 함대가 반신불수가 되었으므로 일본은 큰 어려움 없이 이곳의 연합군을 축출하며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일본은 그들이 점령한 땅에 강력한 요새와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연합군의 어떠한 반격도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전쟁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해군 지휘부는 일본 남태평양 세력에 위협이 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 북쪽을 침공할 것을 건의하였다. 하지만 일본육군은 중일전쟁에만 막대한 병력을 투입하고 있었으므로,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침공할 여유는 없다며 이 건의를 거절하였다. 게다가, 일본 남태평양은 대부분 일본해군 4함대 관할이었는데, 4함대를 통솔하는 이노우에 시게요시 중장은 오스트레일리아를 점령하는 것보단, 남동 솔로몬 제도의 툴라기와, 뉴기니의 수도 포트 모레스비(북부 오스트레일리아를 비행거리 내에 둘 수 있는)를 점령하는 쪽을 제안하였다. 이노우에는 툴라기와 포트 모레스비를 장악하면 일본함대의 주력이 정박중인 뉴브리튼의 라바울 섬 방비를 더욱 굳건히 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일본해군은 육군의 도움이 없으면 오스트레일리아 점령이 불가능했고, 일본육군 또한 툴라기와 포트 모레스비 정도면 많은 육군이 필요하지 않을 거라 보아, 양측 모두 이노우에의 중재안을 받아들였다. 이제 이 지역은 뉴칼레도니아, 피지, 사모아를 점령하는 전초기지가 되고, 그렇게 되면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간의 보급선을 끊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1942년 4월, 일본 해군과 육군은 툴라기와 포트 모레스비 점령작전을 구체적으로 입안하고, MO작전으로 명명한다. 이 작전에서는 5월 10일까지 포트 모레스비를 침공,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전 5월 2-3일에 툴라기를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고, 해군은 이곳에 수상기 기지를 건설하여, 남태평양의 미군 활동을 감시하고 정찰하는데 이용하고자 하였다. MO작전이 끝날 경우, 해군은 RY작전을 발령하여 나우루, 오션제도를 5월 15일까지 점령하고, RY작전까지 성공적으로 끝나면, FS작전을 발령하여 피지, 사모아, 뉴칼레도니아를 점령할 생각이었다. 3월에 이미 연합군의 항공모함이 뉴기니의 라-사라무아 지역을 침공하는 일본함대를 공격하여 피해를 입혔기 때문에, 이노우에는 또다시 연합군이 항공모함을 보낼 것을 염려하여 일본 연합함대의 항공모함 3척을 보내어 MO작전의 항공엄호를 하도록 하였다. 특히, 이노우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타운스빌과 쿡타운의 연합군 폭격기들을 가장 우려하였다. 이들은 라바울과 라-사라무아를 사정거리 내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연합함대의 총책임자인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은, 진주만 기습 때 미국 항공모함을 놓쳤던 것을 매우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MO작전을 통해, 6월에는 미국 항공모함을 전장에 끌어낼 수 있기를 바랐다. MO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하와이를 공격하는 제스처를 취하면, 미국의 항공모함은 더이상 숨을 곳이 없었다. 미국이 진주만에서 대부분의 전함을 잃었으므로, 아직은 일본이 해군력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는 하와이 근처 미드웨이를 낙점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미국의 남은 항공모함들을 전부 격멸하기만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야마모토는 MO작전의 성공을 지원하기 위해, 2척의 정규항모, 1척의 경항모, 1 순양함대, 2 구축함대등 상당한 규모의 함대를 파견하고, 이노우에 시게요시를 MO작전의 지휘자로 임명하였다.

 

 

연합군측의 대응

일본군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사실 미국해군은 해군통신부의 통신보안부서는 몇 년전부터 이미 일본군의 암호와 코드를 해독하는데 성공한 상태였다. 1942년 3월, 연합군측은 일본군 통신의 반절 가까이를 차지하는 JN-25B 암호의 15%를 해독할 수 있었다. 4월이 지날 때에는 85%를 해독할 수가 있게 되었다.

 

1942년 3월, 연합군은 일본측 통신을 가로채어, 처음으로 MO작전의 존재를 눈치챈다. 4월 5일, 연합군은 일본 항공모함과 전함들을 이노우에의 영역으로 보내는 메시지를 가로챌 수 있었다. 4월 13일, 연합군은 이노우에에게 보내는 메시지도 해독한다. 제 5 항공전대에는 정규항모 즈이가쿠와 쇼가쿠가 편성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연합군은 MO작전의 타겟이 포트 모레스비라는 것을 알아낸다.

 

한편, 태평양 기동함대의 새 제독으로 임명된 체스터 니미츠 대장과 그의 참모들은 해독된 일본측 메시지에 대해 논의하였고, 일본의 남서태평양 첫 목표지가 포트 모레스비일 것 같다는데 의견이 일치하였다. 연합군측은 포트 모레스비를 반격의 중요거점으로 여기고 있었다. 니미츠의 참모부는 일본의 MO작전이 또한, 항공모함들을 동원하여 미군의 기지인 사모아와 수바 또한 공습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니미츠 제독은 어네스트 킹(미 해군 총사령관)에게 건의하여, 태평양에서 미군의 가용한 항공모함 모두를 (당시 4척) 산호해에 투입하여 일본의 야욕을 저지하겠다고 허락을 받았다. 4월 27일까지, 미군의 암호해독반은 MO작전과 RY작전의 더 구체적인 사항과 목표를 알아내었다.

 

4월 29일에, 드디어 니미츠는 그의 항공모함 4척 모두에게 명령을 내려 산호해로 향하는 전함들을 보호토록 하였다. 플레쳐 미 해군소장이 이끄는, 정규항모 요크타운이 포함된 미 17기동함대는, 순양함 3척과 구축함 4척의 호위를 받았고, 보급대로는 급유함 2척과 구축함 2척이 뒤따랐다. 17기동함대는 4월 27일 통아타부 본진을 떠나, 산호해로 향하였다. 어브레이 피치 미 해군소장이 이끄는, 정규항모 렉싱턴이 포함된 미 11기동함대는, 순양함 2척과 구축함 5척의 호위를 받았고, 피지와 뉴칼레도니아 사이를 항해하고 있었다. 윌리엄 허지 미 해군중장이 이끄는, 정규항모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이 포함된 미 16기동함대는, 둘리틀 특공대를 도쿄에 발진시키고 이제 막 진주만에 돌아온 상태였으므로, 산호해의 전투에는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니미츠 제독은 그동안 플레처를 남태평양 함대 관할로 맡겼다. 사실, 산호해 영역은 미 육군을 이끄는 맥아더의 관할이었지만, 이 전투에서 플레처와 헐지는 상부보고시, 맥아더가 아닌 니미츠에게 직접적으로 보고를 올렸다.

 

한편, 일본측도 미 16기동함대가 진주만에 도착했다는 통신을 가로채는데 성공하였다. 그래서 한 척을 제외한 미국의 항공모함이 전부 진주만에 있다고 생각하였고, 나머지 한 척의 항공모함의 정확한 위치도 알 수 없었으므로, 미국의 항공모함이 일본의 MO작전에 적절히 반응할거라고 생각하지 못하였다.

 

 

전투

 

전초전

4월 하순 동안, 일본의 잠수함 RO-33과 RO-34는 상륙침공하기로 계획된 장소들을 정찰중이었다. 이 잠수함들은 로젤제도와 조마드 해협, 포트 모레스비로 가는 길 등을 탐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연합군 배를 발견하지 못하고, 4월 23일과 24일 각기 라바울에 귀항하였다.

 

일본의 포트 모레스비 침공대는, 코소 아베 일 해군소장의 지휘를 받았으며, 일본육군의 남태평양군 소속 5천명의 병력과 일본해군 육전대 5백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을 호송하는 함대는 사다미치 카치오카 일 해군소장이 이끄는 경항모 1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6척의 함대였다. 아베의 상륙함대는 5월 4일 라바울을 출발하여 다음날 카치오카의 호위함대와 합류하였다. 그리고 천천히 8노트의 속도로 조마드 해협을 지나 뉴기니 남쪽을 돌아 5월 10일 포트 모레스비로 도착할 예정이었다. 포트 모레스비의 연합군 수비대는 5,333명으로, 숫자만 놓고보면 방어에 충분하였으나, 그중 반절은 제대로 훈련받은적이 없고 무장도 빈약했다.

 

일본의 툴라기 침공대는, 키요히데 시마 일 해군소장의 지휘를 받았으며, 일본해군 육전대 4백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상륙함대는 기뢰부설함 2척, 구축함 2척, 기뢰제거함 6척이 포함되어 있었다. 툴라기 상륙을 지원하는 함대는 아리토모 고토 일 해군소장이 이끄는 경항모 1척(쇼호), 중순양함 4척, 구축함 1척의 함대였다. 나중에 여기에 쿠니노리 마루모 일 해군소장이 이끄는 경순양함 2척, 수상기모함 1척(카와카마 마루), 기관총보트 3척도 합류한다. 툴라기가 5월 3일 혹은 4일 함락되면, 이 호위함대들은 전부 포트 모레스비 공략을 지원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노우에 일 해군중장은 중순양함 가시마에 탑승하여, MO작전을 총지휘하였다.

 

고토의 함대는 4월 28일 트럭 섬을 떠나, 부겐빌과 초이설 사이의 솔로몬 해역을 가로질러 뉴조지아 부근에 잠시 정박하였다. 마루모의 지원함대는 4월 29일 뉴아일랜드를 떠나 산타 이사벨 제도의 천선만으로 향했다. 툴라기 침공을 지원할 수상기 기지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시마의 육전대는 4월 30일 라바울에서 출발하였다.

 

정규항모 즈이가쿠와 쇼가쿠가 포함된 제 5항공전대는, 중순양함 2척, 구축함 6척의 호위를 받으며 5월 1일 트럭을 떠났다. 제 5항공전대는 일 해군중장 타케오 다카기의 지휘를 받았다. 다카기는 중순양함 묘고를 기함으로 하였으며, 하라 주이치 일 해군소장이 즈이가쿠를 타고 항공대를 지휘하였다. 제 5항공전대는 솔로몬제도의 동쪽을 타고 내려와 과달카날 남쪽의 산호해 해역으로 진입하였다. 산호해 해역에 진입하면, 제 5항공전대는 일본의 상륙침공대에 공중엄호를 제공하고, 포트 모레스비의 연합군 항공력을 괴멸시키며, 동시에 산호해 해역으로 진입하는 연합군 세력은 즉시 격퇴하는 임무를 맡았다.

 

산호해로 향하는 도중, 다카기는 9대의 제로기를 라바울로 보냈다. 하지만 기상조건이 좋지 않아 제로기들이 귀환해야만 했고, 그중 1기는 바다에 추락하였다. 다카기는 한번 더 제로기를 보냈으나 또다시 실패하였고, MO작전의 시간기한을 맞추기 위해 제로기를 라바울에 보내는 것을 포기하고 솔로몬 제도에서 함대 급유를 받도록 지시했다.

 

혹시나 접근할지 모를 연합군 함대의 조기경보를 제공하기 위해, 일본은 잠수함 4척을 보내어 과달카날 남서쪽 520마일 해상에서 감시임무를 맡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작 연합군측 플레쳐의 함대는 잠수함들이 감시위치에 도달하기 전에 과달카날을 이미 빠져나갔으므로, 일본은 플레쳐의 함대가 오는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정찰을 위해 추가파견했던 잠수함 I-21은, 미 정규항모 요크타운이 보낸 항공기에 의해 공격을 받기까지 하였으나, 일단 잠수함은 피해를 받지 않았고, 그 항공기가 육지기지에서 보낸 것으로 착각하여, 이 상황에서도 일본은 미국함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결국 일본 잠수함들은 몽땅 정찰업무에 투입되었으나 아무도 미 함대를 발견하지 못하였고, 결과적으로는 전투에 어떠한 잠수함도 참가하지 못했다.

 

5월 1일 아침, 미 17 기동함대와 11기동함대는 뉴칼레도니아 남서쪽 350마일 해역에서 합류하였다. 플레쳐는 11기동함대는 급유함 티피카노에서, 17기동함대는 급유함 네오쇼에서 급유를 받도록 하였다. 17기동함대는 다음날까지 급유가 완료되었으나, 11기동함대는 5월 4일에야 급유를 마칠 수 있었다.

 

 

툴라기

5월 3일 아침, 시마의 함대가 툴라기에 도착했고 곧 섬을 점령하기 위해 육전대를 상륙시키기 시작했다. 툴라기는 무방비 상태였다. 오스트레일리아 특전사로 구성된 소수의 수비대와 오스트레일리아 정찰기 몇 대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상륙한 일본군은 즉시 이 섬에 수상기 기지와 통신센터를 건설하였다. 경항모 쇼호에서 날아온 전투기들이 오전동안 이곳을 엄호해 주었다. 그동안 고토의 함대는 급유를 받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 급유가 끝나면 포트 모레스비의 상륙작전을 엄호하도록 되어 있었다.

 

5월 3일 17:00, 플레쳐는 일본군의 함대가 툴라기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11기동함대는 급유를 계속 받고 있어야 했고, 17기동함대는 무선침묵 때문에 통신을 할 수가 없었다. 17기동함대는 다음날 아침 툴라기의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과달카날로 출발하였다.

 

5월 4일, 17기동함대는 과달카날 남쪽 120마일 해상에서 총 60대의 항공기를 3번에 걸쳐 순차적으로 발진시켰다. 공격목표는 툴라기의 시마 함대였다. 요크타운에서 날아오른 항공기들은 시마의 함대를 기습하는데 성공했고, 구축함 기쿠주키와 3척의 기뢰제거함을 침몰시켰고 4척의 다른 함정에도 크고작은 피해를 입혔다. 미국은 이 과정에서 1대의 급강하폭격기와 2대의 전투기를 잃었지만, 조종사들은 모두 무사히 구조되었다. 공격을 나간 항공기들이 무사히 귀환하자, 17기동함대는 신속히 남쪽을 통해 전장을 이탈하였다. 항공기들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그러나 일본군은 수상기 기지 건설을 계속하였고, 5월 6일부터는 이 기지에서 수상기들이 정찰임무를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항공전대를 지휘하는 다카기가 연합군의 습격소식을 전해들은 당시에는 그의 함대가 툴라기 북쪽 350마일에서 급유를 받는 중이었다. 다카기는 즉시 급유를 중단하고 남동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연합군 함대가 솔로몬제도 동쪽에 있다고 예상하고, 정찰기들을 그곳으로 파견했다. 물론 연합군 함대는 이곳으로 가지 않았기 때문에, 정찰기들은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공중정찰과 결단

5월 5일 8:16분, 17기동함대와 11기동함대, 그리고 44기동함대는 과달카날 남쪽 370마일 지점에서 합류하였다. 이때, 요크타운 소속 와일드캣 전투기 4대가 일본정찰기를 발견하고 격추시켰다. 이 정찰기는 격추되기 전 본진에 적기 출현보고를 하지 못하였으나, 이 정찰기가 돌아오지 않자 다카기는 연합군 항공모함이 그 부근에 있을 것임을 짐작하게 되었다.

 

한편 진주만으로부터 플레쳐에게 일본군의 포트 모레스비 상륙이 5월 10일에 있을 것이며, 일본 항공모함이 이들의 상륙을 엄호할 것이라는 정보가 제공되었다. 이 정보를 들은 플레쳐는 17기동함대에 재급유를 받을 것을 지시하고 재급유가 끝나는 5월 6일에 루이지애드로 출발하여 5월 7일에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이 와중에, 다카기의 항공전대는 솔로몬 제도 동쪽을 남하하고 있었다. 그러다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산 크리스토발의 남쪽을 지나 5월 6일에는 산호해 해역으로 진입하였다. 다카기는 툴라기 서쪽 210마일 지점에 이르자, 함대에 재급유를 받을 것을 지시하고 다음날 있을지도 모를 전투를 준비하였다.

 

5월 6일, 플레쳐는 11 기동함대와 44 기동함대를 17기동함대로 통합시켰다. 그리고 일본군 항공모함이 아직 부겐빌 북쪽 부근에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재급유를 계속하였다. 일본군의 함대가 정찰범위를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연합군의 정찰기는 하루종일 정찰을 했지만 일본군의 배 한척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반면 10:00시에, 툴라기의 수상기 기지에서 발진한 일본군 정찰기가 17기동함대를 발견하였고, 이를 긴급히 수뇌부에 알렸다. 다카기는 10:50분에 이 보고를 받았다. 이때 그의 함대의 위치는 플레쳐보다 350마일 북쪽에 있었다. 일본군 항공기들의 최대항속거리에 거의 딱 맞는 거리였다. 보고에 의하면 17기동함대는 남쪽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카기는 두 함대의 거리가 점점 멀어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게다가 플레쳐의 함대는 구름이 잔뜩 낀 곳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항공기들을 발진시켜도 연합군 함대를 발견하지 못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다카기는 하라 소장으로 하여금 2대의 항공모함에 2척의 구축함을 딸려보내서, 내일 여명에 미국함대를 공격할 만큼 거리를 좁히게 하고 나머지 함대는 계속 급유를 받게 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에 기지를 두고있던 미국의 B-17 폭격기들은 포트 모레스비를 향해 다가오는 고토의 전함들을 공격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맥아더의 사령부는 플레쳐에게 무전을 보내 일본군 상륙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렸다. 맥아더의 정찰기는 17기동함대의 북서쪽 489마일 지점에서 일본해군의 경항모 쇼호를 발견했고, 이에따라 플레쳐는 여기에 일본군 항공모함들이 몽땅 다 있을거라는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18:00시에, 17기동함대는 마침내 급유를 마쳤고, 급유함 네오쇼는 구축함 심즈의 호위를 딸려보내 떼어졌다. 연료를 모두 채운 17기동함대는 북서쪽의 로젤제도로 향했다. 그러나 20:00에, 적의 항공모함 2대가 70마일 부근에 있다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일본측도 마찬가지) 20:00시에, 일본의 하라 함대는 다카기 함대와 합류하기 위해 방향을 반대쪽으로 틀었다.

 

5월 6일에서 7일로 넘어가는 밤에, 상륙함 카와카미 마루는 데보인 섬에 수상기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함대항공전, 첫째날

 

아침 공격

5월 7일 아침 6 :25분. 17기동함대는 로젤제도 남쪽 132마일 해상에 있었다. 플레쳐는 순양함과 구축함을 일부 보내어 조마드 해협을 봉쇄토록 하였다. 플레쳐는 이 순양함과 구축함들에게 공중엄호를 제공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하였다. 플레쳐의 항공모함은 일본 항공모함과 직접 싸워야 했기 때문에 엄호를 제공할 여유가 없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나중에 그의 항공모함이 일본 항공기의 공격을 방어하기 어렵게 하는 원인이 된다. 플레쳐는 자신의 항공모함이 위험해지게 될 것도 예상을 했으나, 일본군 상륙함이 포트 모레스비로 도달하지 못하게 저지하기 위해서는 조마드 해협을 반드시 봉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플레쳐는 다카기의 항공모함이 어딘지 정확히 모르지만 자신의 북쪽에 있을거란 정도는 예상하였다. 그래서 요크타운에서 차출한 10기의 급강하 폭격기(돈틀레스) 를 보내어 6 :19분부터 정찰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다카기는 북쪽이 아니라 동쪽 350마일 해상에 있었다. 다카기는 12기의 함상폭격기(97식)를 6 :00시에 출발시켜 17기동함대를 찾도록 했다. 하지만 일본측도 미국함대가 자신들의 남쪽에 있을거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서쪽이 아닌 남쪽으로 정찰기들을 보냈다. 결국 양측의 정찰은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한편, 고토도 순양함 2척에서 각기 수상기 2기씩을 차출하여 남동쪽을 정찰하게 하였다. 데보인 섬에서 완성시킨 수상기 기지에서도 몇기의 수상기가 날아올랐다.

 

7:22분에 쇼가쿠에서 출발한 다카기의 정찰기가 미국의 함대를 보고해왔다. 또다른 정찰기도 이 함대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7:45분, 정찰기는 "항공모함 1척, 순양함 1척, 구축함 3척"이라고 보고해왔다. 다른 정찰기도 다시 이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항공모함이 아니라 급유를 마치고 내려가던 급유함 네오쇼였다. (플레쳐가 딸려보낸 심즈도 같이 있었다). 일본 수뇌부는 드디어 미국 항공모함을 발견했다고 생각하고 환희에 젖었다. 하라와 다카기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쇼가쿠와 즈이가쿠로부터 즉시 78대의 항공기를 출격시켰다. 18대의 제로 전투기, 36대의 99식 급강하폭격기, 24대의 뇌격기였다.

 

그러나 8:20분, 후루카타에서 보낸 수상정찰기 중 1기가 플레쳐의 진짜 항공모함을 발견했고, 이를 긴급히 라바울의 본부로 송신했다. 그러나 이미 항공모함을 발견했다고 생각하고 항공기를 보낸 다카기는 이를 지나쳐 버렸다. 8:30분에는 기누가사의 수상정찰기가 앞선 보고를 확인시켜 주었다. 그제서야 다카기와 하라는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이미 보낸건 어쩔수 없다고 생각하고 최초의 보고가 진짜 항공모함이기를 바라며, 항공기들을 귀환시키지 않았다. 믿고싶은대로 믿어야 할 상황이었다. 혹은 재수가 좋으면, 연합군 항공모함이 두 그룹을 나뉘어 작전하고 있는 것일수도 있었다.

 

한편 8:15분, 연합군의 항공모함 요크타운에서 발진한 돈틀레스 폭격기의 파일럿이, 고토의 함대를 발견하였다. 그는 이 함대가 원하던 목표물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나 실수로 "항공모함 2척, 중순양함 2척"으로 잘못 보고하였다. 플레쳐는 이 보고를 받고 그 역시도 기뻐하며 즉시 93대의 항공기를 출격시켰다. 요크타운과 렉싱턴으로부터 18대의 와일드캣 전투기, 53대의 돈틀레스 급강하 폭격기, 22대의 데버스테이터 뇌격기였다.

 

10:19분, 연합군 정찰기의 파일럿은 귀환했는데, 그제서야 자신의 보고가 잘못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사실 그는 순양함 2척과 구축함 4척으로 보고한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잘못된 식별이긴 했다. 실제로는 경항모 쇼호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보다 약간 전, 10:12분에 이미 다른 정찰기로부터는 이상한 보고가 들어왔다. 좀전 항공모함 2척이라고 보고되었던 것과 비슷한 위치에서 "항공모함 1척, 상륙함 10척, 함종식별 어려운 전투함 16척"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던 것이다. 이것이 고토의 함대의 정확한 보고였다. 그러나 어쨌든 플레쳐는 이 보고를 받고 자신이 일본 주력함대의 정확한 몸통을 찾아 전투기들을 파견했다고 확신하였다. 그리고 이미 보낸 전투기들을 나중에 보고가 들어온 쪽으로 목적지를 변경시켰다.

 

9:15분, 다카기가 파견한 공격기들이 목표지점에 다다랐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연합군의 항공모함이 아닌 구축함 심즈와 급유함 네오쇼였다. 공격기들은 그것들을 내버려두고 근처에 어딘가 있을 항공모함을 정신없이 찾아다녔다. 하지만 한시간이 지나서도 연합군의 항공모함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공격기들은 정찰기가 급유함을 항공모함으로 착각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카기에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크게 실망한 다카기는 심즈와 네오쇼를 격침시키고 빨리 귀환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4대의 함상폭격기가 심즈와 네오쇼를 공격하였고, 나머지 항공기들은 급히 항공모함으로 돌아갔다.

 

4대의 폭격기의 공격을 받은 네오쇼와 심즈는 힘없이 가라앉는다. 4방의 폭탄을 맞은 심즈는 두동강이 나서 가라앉았다. 7방의 폭탄을 맞은 네오쇼는 이곳저곳이 만신창이가 되어 동력을 잃고 표류하다 가라앉았다. 동력을 잃기 전 네오쇼는 플레쳐에게 무전으로 대규모 일본 항공기들의 공격을 받았다고 보고하였다. 하지만 긴박한 틈에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리는데는 실패하였다.

 

한편 10:40분, 고토의 함대에 다다른 미국 항공기들도 맹공을 퍼붓기 시작하였다. 경항모 쇼호는 6대의 제로 전투기, 2대의 96식 전투기가 공중엄호 중이었다. 쇼호의 나머지 전투기는 갑판 아래 출격대기중이었다. 그리고 고토의 순양함들이 항공모함 주변을 다이아몬드 진형으로 호위하고 있었다.

 

렉싱턴에서 출발한 공격기들이 먼저 달려들었다. 이들은 대공방어망을 뚫고 쇼호를 집중공격, 2방의 450KG 폭탄과 5발의 어뢰를 명중시켰다. 쇼호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11:00분, 요크타운에서 출발한 공격기들이 쇼호의 숨통을 끊기 위해 공격을 가했다. 무려 11방의 450KG 폭탄과 2발의 어뢰를 추가로 얻어맞은 쇼호는 끝내 침몰하였다. 고토는 북쪽으로 함대를 퇴각시켰고, 이후 구축함 사자나미를 보내어 생존자들을 구조하였다. 834명의 항공모함 승무원 중 203명만이 구조되었다. 일본군은 쇼호를 방어하는 과정에서 3대의 돈틀레스 폭격기를 격추시켰으나, 쇼호 안에 대기중이던 18대의 전투기를 잃었다. 그러나 공중엄호 중이던 전투기 3대만은 살아서 데보인 기지로 귀환하였다. 미국은 원했던 2대의 정규항모를 침몰시키지는 못했으나, 꿩대신 닭처럼 경항모 쇼호를 침몰시키면서 출격한 보람은 있었다.

 

 

오후 작전

쇼호를 침몰시킨 미국 항공기들은 득의양양하게 귀환하여 13:38분 착함을 완료하였다. 14:20분에, 미국 항공기들은 포트 모레스비의 고토 침공함대를 재공격하기 위해, 재무장을 받았다. 하지만, 플레쳐는 아직 일본의 2척의 항공모함의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했으므로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본부로부터 제공받은 정보에는, 어쩌면 일본의 항공모함이 2척이 아니라 4척일 수도 있다는 내용도 있었기 때문에 그는 더욱더 불안했다. 플레쳐는 항공기들을 출격시켰을 때 일본의 항공모함들을 방어할 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오늘은 더이상 공격기들은 출격시키지 말고, 마침 짙은 구름이 위에 있었으므로 초계기들을 올려보내어 함대방어에 신경을 썼다.

 

한편, 이노우에는 쇼호의 격침을 보고받고 크게 분노하였다. 이노우에는 일시적으로 포트 모레스비 상륙작전을 중단시키고, 다카기에게 미국 항공모함이 근처에 있으니 어떻게든 박살내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미국의 B-17기 8대가 상륙함대를 발견하고 폭탄을 떨어뜨렸으나 명중시키지 못하였다. 고토는 상륙함대를 로젤 제도로 이동시켜 밤사이에 있을지 모를 야간전투에 대비하였다.

 

12:40분, 일본이 건설한 데보인 기지의 수상기들이 데보인에서 90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크레이스의 함대를 발견하고 보고해왔다. 13:15분에는 라바울의 정찰기도 크레이스의 함대를 발견하고 보고해 왔으나, 2척의 항공모함이 있다고 잘못 보고를 올렸다. 실제로 크레이스에게는 항공모함이 없었다. 이 보고를 받았을 때 네오쇼를 공격했던 공격기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다카기는 일단 과감하게 빈 항공모함들을 이끌고 연합군 함대가 발견되었다는 지점으로 이동했다. 그동안 플레쳐가 이끄는 진짜 미국의 항공모함들은 일본의 공격반경을 벗어나 버렸다.

 

이노우에는 라바울의 육상기지에도 명령을 내려 크레이스의 함대를 격멸시키도록 하였다. 육상기지에서는 12대의 뇌격기, 19대의 96식 육상폭격기가 출동하였다. 14:30분에, 이들은 크레이스의 함대를 찾아내 공격하였다. 공격이 끝나고 귀환하면서, 일본 공격기들은 전함 캘리포니아를 침몰시키고 또다른 전함 1척과 순양함 1척을 대파하였다고 보고하였으나, 실제로는 크레이스의 함대는 손상이 없었고 오히려 크레이스 함대의 대공포화에 일본 공격기 4대가 격추되었다. 이와중에 미국의 B-17 폭격기가 크레이스 함대를 일본함대로 오인하고 폭격을 가했으나 다행히 빗나갔다.

 

 

 

결과

 

양측 함대는 이틀간 계속해서 서로의 공격기를 주고받으며 격렬하게 싸웠다. 첫날, 미국은 일본의 경항공모함 쇼호를 침몰시키는 성과를 거두었고, 일본은 이에반해 구축함 한 척을 침몰시키고 급유함 한척을 대파하여, 첫날은 미국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그러나 다음날, 일본이 미국 정규항모 렉싱턴을 대파하여 스스로 침몰하게 했으며, 다른 정규항모 요크타운도 대파시킨데 반해, 미국은 일본의 정규항모 쇼가쿠를 대파, 정규항모 즈이가쿠를 소파하는데 그쳐 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 과정에서 양측은 엄청난 항공기 피해를 입었으며, 양측 함대 모두 물러났다. 공중엄호력이 약해진 것을 우려한 이노우에 제독은 포트 모레스비 침공군을 물렸으며, 후일을 기약하였다.

 

일본군은 경항공모함 1척 침몰, 정규항공모함 1척 대파, 정규항공모함 1척 소파의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미국-호주 연합군은 정규항공모함 1척 침몰, 정규항공모함 1척 대파당했다. 가장 비싸고 진수시간이 오래 걸리는 정규항모가 침몰하였으므로 피해상황만 놓고 보면 일본의 승리였다. 하지만, 이후의 전쟁전개상황을 고려해 보았을때 역사가들은 이 전투를 미국의 승리로 판단한다. 그 이유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항공모함 쇼가쿠와 즈이가쿠이다. 쇼가쿠는 대파당했고, 즈이가쿠는 항공기의 손실이 막심하였으나 일본의 산업력으로는 보충이 늦었다. 결국 이 두 항공모함은 이후 미드웨이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였으며, 그에 따라 미국은 미드웨이에서 일본을 이길 수 있었다.

 

미드웨이에서 일본은 완전히 허를 찔렸으나, 쇼가쿠와 즈이가쿠가 포함되어 있었다면 모든 전략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이를 뒤집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판단이다. 물론, 미국 역시도 이 전투에서 정규항모 렉싱턴을 잃고 요크타운도 큰 손상을 입었지만, 엄청난 수리신공을 발휘하여 요크타운을 끝내 미드웨이 전장에 참가시켰기 때문에, 산호해 해전은 일본이 전술적으로는 승리하였으나 전략적으로는 미국이 이겼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미드웨이에서 패한 일본은 다시 포트 모레스비를 공격하지 못했으며, 연합군은 이후 과달카날 전투, 뉴기니 전투에서 큰 이점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남태평양에서의 일본의 방어는 무너졌고, 2차 세계대전 일본의 항복에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