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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1,021 : 일제강점기 66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4)

 

 

 

한국의 역사 1,021 : 일제강점기 66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4)

 

 

           

 

 

 

미국과 소련의 중국 지원 

미국의 지원

미 의회는 피트만 법을 통과시켜 중국의 은을 미국의 금과 바꾸는 것을 허용했다. 중국 국민당은 이 법을 통하여 필요한 군수물자를 살 수 있는 화폐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난징대학살이후 1940년 일본 제국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침략하고 나치 독일-이탈리아와 추축국 동맹을 맺자, 미국 의회에서 대일수출을 금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곤경에 빠진 일본 제국은 제재를 가한 미국, 영국, 네덜란드와 중화민국을 묶어 이른바 'ABCD 포위망'이라 칭하며 일종의 배후처럼 선전하였고, 이들 국가에 대해 맞선다는 구실을 내세워 이후 태평양 전쟁으로 전선을 확대했다.

 

 

소련의 지원

일본군이 화북 지방을 침략하자, 중국 정부와 소련 정부는 협상을 진행하여 8월 21일 난징에서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 이 협상에서 소련은 200대가 넘는 항공기와 화포, T-26전차 등 군사물자들을 중국에 원조하기로 하였다. 이어 소련은 1억 달러의 차관을 중국에 제공하고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였고, 소련에서 훈련된 의용 파일럿들도 극비리에 중일전쟁 전선에 투입되었다. 소련의 이러한 비밀 원조를 '제트 작전'이라고 한다.

 

 

전쟁 초기

1937년 7월 7일, 루거우 다리 사건을 빌미로 선전포고도 없이 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근대화된 산업력에 바탕을 둔 잘 훈련된 30만 명 이상의 정규군과 일본군 장교에 의해 지휘되는 만주국 출신 만주인 및 몽골(내몽고)인 부대 최소 15만 명, 그리고 약 200만 명에 가까운 예비군과 당시 세계 3위의 강력한 해군력과 육군항공대와 해군항공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중국 국민당은 숫적으로는 4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 병력이 있었으나, 현대식 무기로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춘 부대는 약 10여만 명인 장개석의 직속부대 뿐이었다. 나머지는 지방 군벌들 세력이 주축이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부패하고 무능했으며 변변한 장비조차 갖추지도 못하였다. 더구나 외부로부터의 원조로 보급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던 국민당군은 변변한 해군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항공력 역시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전쟁 초기에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했다. 7월 28일 중국 29군에 대해 총공격을 개시했고, 7월 30일에는 베이징, 톈진을 점령했다. 국민당 정부는 전략상 화북지역을 포기하고 주력군을 양자강 유역에 집중시켰다. 장개석은 8월 7일 국방회의에서 전면항전을 결의시켰고, 12일에는 육해공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8월 13일, 일본군이 중국 최대 항구 도시인 상하이에 상륙하여 공격을 시작함으로써 전쟁이 화북지역에서 화남지역으로 확대됐다.

 

이와 동시에 9월부터는 일본군이 화북 지방에서 남진을 개시하기 시작한다. 일본군의 화북 지역 공격은 순조로운 편이었으나, 산서 성 지역에서는 강한 저항을 받았다. 9월에 임표(林彪)가 이끄는 팔로군 115사단과 하룡(賀龍)이 지휘하는 120사단이 평형관에서 일본군 1개 여단을 매복공격해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는 팔로군이 대일본전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였고, 중국 공산당은 이 승리를 크게 선전했다. 9월 22일 중국 공산당이 '정성단결 일치항적 선언'을 발표하고 그 다음날인 23일 장개석이 이 선언을 받아들이는 담화를 발표함으로써 제2차 국공합작이 완성되었다.

 

10월에는 위입황의 지휘 아래 중앙군과 산서군이 일본군 제5사단에 맞서 격렬한 전투를 전개했다. 이 전투는 화북에서 치러진 초기의 전투 가운데 가장 격렬한 것이었다. 이때 팔로군도 유격부대로 나서서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비행장을 파괴함으로써 국공 양군의 협력이 이루어졌다. 이 전투로 일본군의 화북 지역 점령은 지지부진해졌고, 진격은 1개월 정도 지연됐다.

 

 

상하이 전투 & 삼광 작전

 

 

오송 전투에서 일본군.

 

 

 

 

오송 전투에서 일본군.

 

 

전쟁초기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 수뇌부들은 '2~3개월 정도면 중국대륙 전역을 점령해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고 8월에 상하이에 상륙해 공략을 시작했는데, 상하이에서의 중국군의 저항은 매우 격렬했다. 특히 '오송 상륙 전투'에서 일본군은 매우 큰 피해를 입었다. 이는 1930년대 초 중국내 독일 군사고문으로 파견된 팔켄하우젠 장군과 젝트 장군이 강력한 벙커밭을 조성하였고, 장개석의 직속군대 역시 독일식 장비를 갖추고 독일 군사고문의 조언대로 훈련 받으면서 육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이러한 벙커밭을 뚫기 위해 돌진하는 과정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또한 독일식으로 훈련받은 장개석의 직속군대의 정예 제88사단은 일본군의 지원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일본군 상륙부대를 상하이에 묶어 놓고, 매우 격렬하게 저항했다. 일본군은 3개월 동안의 전투끝에 지원부대가 증강되면서 11월 5일에 이르러 겨우 상하이를 점령하였다. 상하이 전투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고 전쟁이 장기화 되어가자, 일본군은 적개심에 불타 무고한 양민들을 잔인하게 죽이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일본군은 가는 곳마다 태우고, 빼앗고, 죽이는 이른바 '삼광작전'을 개시하면서 살육전이 일반화 되어 갔다. 1937년 12월, 상하이 교두보를 벗어난 일본군은 국민당 정부 수도 난징으로 향했다.

 

 

난징 대학살

 

 

 

1937년 12월 13일, 난징 성에 입성하는 일본군.

 

 

 

 

난징 외곽 양쯔강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한 일본군.

 

 

일본군이 난징으로 진격할 즈음, 중국 국민당 정부는 수도 난징을 버리고 충칭으로 옮긴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唐生智) 장군은 '결사항전'을 주장했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수도를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난징을 삼면에서 좁혀 들어오는 일본군의 포위 속에 국민당 주요관리와 부유층들은 재빨리 손을 써서 도시를 빠져나갔고, 중일전쟁 이전에 약 110만 명 육박했던 난징은 도시를 빠져 나가려는 시민들과 일본군을 피해 난징으로 들어오는 피난민 등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되었다. 난징성을 포위한 일본군은 중국군 사령관에게 투항을 권고하였으나, 난징성을 지키고 있던 탕셩즈 사령관 휘하의 중국군은 투항을 거부했다. 난징에 남아있던 중국군은 도시 밖 요충지를 포기하고 난징성 안에 머무르며 고립된 채 방어하겠다는 전략을 택했다.

 

12월 13일, 일본군은 난징성을 점령하고 성 안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난징성을 방어하고 있던 국민당 군대는 약 15만명이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저항해보지도 못하고 무참히 무너졌다. 이는 중국군의 흐트러진 군기와 지휘관들의 부재 및 무능함에서 비롯되었다. 중국군은 제대로 전투도 못해 본 채 혼란 속에서 성을 빠져나가기에 급급했다.

 

난징성이 함락되기 전날,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는 자신의 휘하 중국군부대와 난징 성에 고립된 시민들을 뒤로 한 채, 양쯔 강을 가장 먼저 건너 도망쳤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피난을 떠나지 못한 채 남아있던 약 60만명의 난징 시민들과 중국군인들은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1937년 12월 13일부터 약 6주 동안 일본군은 중국 민간인들과 군인들을 상대로 무차별적인 살육, 방화, 강간 등을 자행했다.

 

 

 

전쟁의 고착화와 전쟁의 확대

 

전쟁의 고착화

 

 

1938년, 태아장 전투에서 중국군. 이 전투에서 중국군이 개전초기 일본군을 처음으로 크게 무찔렀다.

 

 

1937년~1938년 사이 일본군은 중국의 여러 도시들에 대해 무자비한 폭격을 가했고, 중국의 주요 해안가 도시들을 점령하고자 전진에 전진을 거듭했다. 그러나, 일본군 수뇌부의 기대와 달리 전쟁 첫해의 성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일본군 수뇌부는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이 중국 내의 내분을 통합하기 전에 장개석의 직속부대를 분쇄하고 일본경제에 부담을 주기 전에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바랐으나, 중국이 시간을 벌기 위해 결정적 전투를 회피하는 등 지구전 전략을 나아갔기 때문에 일본은 장기전의 수렁에 빠졌다.

 

한편, 중국은 주요 항구도시 상하이와 수도 난징을 잃어 큰 타격을 입었으나, 중국군은 여전히 대부분의 항구와 4개의 대외 주요보급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하이퐁에서 쿤밍으로 이어지는 철도와 양곤과 라쉬오를 거쳐 쿤밍에 도달하는 철도 및 도로, 그리고 소련에 이르는 2개의 도로가 주요 보급로였다.

 

1938년 일본군의 주된 목표는 중국군의 주요보급로 차단이었다. 이를 위한 첫 번째 목표는 철도 요충지인 쉬저우 시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중국군의 저항은 완강했지만, 북쪽으로부터 두 갈래로 갈라져 공격해 들어온 일본군은 5월에 이르자 쉬저우 시를 거의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6월에는 한커우로 통하는 철도를 봉쇄하고자 정저우 시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군은 황하의 제방을 무너뜨려 주변 지역으로 강물을 범람시킴으로써 이 진격을 막았고,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퇴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일본군은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 임시수도인 한커우에 대한 공격을 더욱 강화하고, 8월에는 4만여 명 이상의 병력을 영국령 홍콩으로부터 약 32km 북쪽에 상륙시킴으로써 광동지역을 쉽게 점령했다. 이 때문에 한커우는 주요 보급로가 차단당하게 되었고, 장개석은 주요 시설들을 보다 내륙으로 이전하는 한편 수도를 충칭으로 옮겼다.

 

이렇게 되면서 1938년말까지 일본은 중국의 해안 주요도시들을 거의 장악했었으나, 그 지역 내에서 조차 계속 어려움에 부딪혔다. 점령지역 각지에서 게릴라의 활동은 나날이 격화되어 갔고, 일본의 비인도적인 통치와 점령지 주민들에 대한 갖가지 횡포 등으로 주민들의 적개심 또한 깊어만 갔다. 게다가 쉽게 항복할 것으로 생각했던 중국군은 저항을 계속하였고, 미국은 중국 국민당에 더 적극적으로 많은 원조를 제공함으로써 중국의 군사저항에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2년 만에 신속한 승리를 쟁취하고자 했던 당초의 의도가 좌절된 일본 제국은 1939년에 접어들면서 최소의 군사력으로 전략적 요충지를 점거하는 봉쇄전술로 전환하게 되었다. 즉, 일본군은 중국의 해안지대를 거의 점령한 점을 이용하여 중국의 보급로를 봉쇄시키는 이른바 '경제적 교살'로 전술을 바꾸었다. 그러나, 넓은 대륙을 바탕으로 한 중국군과 중국인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전쟁은 장기화 되고, 전선은 고착되어 갔다.

 

 

전쟁의 확대

 

1940년

1940년 이후 중국대륙은 일본군 점령지구, 충칭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당 정부의 직할지역, 옌안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당의 섬강녕변구 등 3개 지역으로 크게 나뉘었다.

 

전선이 고착되고 전쟁이 장기화되자, 마오쩌둥중국 공산당은 그 세력이 점점 커져갔다. 팔로군은 1940년 40만 명으로 불어났고, 신사군은 2만에서 10만으로 급증했다. 팔로군은 백단전투에서 일본군 2만5천여 명을 크게 무찌르는 등 성과를 보였다.

 

 

1941년 ~ 1943년

1941년 10월, 장개석의 국민당군과 마오쩌둥의 공산당 계열의 신사군 간에 환남전투가 일어났다. 장개석의 명령에 따라 북상하던 신사군의 일부가 국민당군에 의해 기습공격을 당한 이 사건에서 국민당과 공산당 양측은 7일 동안 밤낮으로 전투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신사군 9천여 명이 전사했고 1천여 명이 간신히 탈출했다. 환남전투로 공산군은 커다란 충격에 빠지게 된다.

 

1941년 12월 8일, 일본 제국 해군 연합 함대가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공격 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고, 제2차세계대전은 아시아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이를 계기로 중국 국민당 정부는 일본, 나치독일, 이탈리아왕국에 선전포고를 선언하였고, 국민당 정부는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장개석의 직속부대들을 버마전선으로 파견하여 영국군과 공동작전을 전개해 나갔다.

 

이어서 미국은 조지프 스틸웰을 군사고문관으로 중국에 파견하여 버마-인도전선을 지휘하였고, 미국은 중국 전선에 공군을 지원하여 중국 국민당 공군 소속으로 일본군과 싸워 제공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들 미 공군 의용대대는 플라잉 타이거즈라 불리며, 연합국이 일본군에 연패하던 태평양 전쟁 초기 수 개월동안 연합국 부대 중에서 유일하게 주목할만한 전과를 올림으로써 연합국의 사기를 크게 올렸다. 이들 플라잉 타이거즈 대대는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해체되었고, 이후 미 육군 제23전투기집단으로 대체되었다. 또한 1942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광복군이 대일 전선에 참전하면서 충칭, 상하이에서 공격을 개시하였고, 미얀마 전선에도 참전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국민당군의 전투력은 형편없었고, 지방 주둔 지역에는 국민당군이 민간인들의 식량이나 재산을 강제로 약탈하는 등의 범죄가 들끓었다. 게다가 국민당군은 강제징집을 위해 시골이나 농촌 등 마을에 습격하는 일이 잦았는데, 이 때문에 강제징집에 반발하는 주민들이 '자경단'을 조직하고 국민당군에 대항하는 등 민란이 일어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대표적인 사례가 1942년 감숙 성지역에 일어난 농민반란이다) 이러한 국민당군의 무능과 부패, 잦은 수탈은 중일전쟁 후 국공내전에서 민심이 장제스의 국민당이 아닌 마오쩌둥의 공산당 세력으로 돌아서는 원인이 되었다.

 

내부적으로도 국민당은 크게 흔들렸었다. 산시성 군벌 옌시산은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영역에 틀어박혀 단독으로 북평(北平, 베이징)의 일본군 사령부와 협상을 벌여 휴전상태를 유지하는데 급급했고, 국민당 임시 수도인 충칭을 중심으로 장제스쓰촨성윈난성 지역의 군벌들 사이의 알력 다툼도 극심했다.

 

 

대륙타통작전

 

 

1944년 이치고 작전 지도.

 

1944년 4월, 일본군이 전황을 타개하고자 중국 북부 점령지와 남부 하이난섬 일대의 상륙지점을 연결하는 대륙타통작전 '이치고 작전'을 개시하자, 중국군은 대패를 당하고 무려 30만명의 병력이 희생되었다. 이 역시, 국민당군의 열악한 장비와 허술한 전투력, 지휘관들의 부패와 무능이 원인이었다. 일본군이 계획한 '이치고 작전'이 성공을 거두면서 중국 국민당은 '붕괴론'의 위기에 까지 몰리게 되었다.

 

 

 

종전과 영향

 

종전

태평양 전쟁 초기 일본은 전선에서 승승장구했으나,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미국 해군의 강력한 반격에 직면했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 함대가 승리함으로써 전세는 역전되었고, 이어서 과달카날 전투에서 미군이 기세를 잡아 역공하게 된다.

 

미국 공군은 이미 중국 전선에서도 제공권을 잡아 일본 제국 군대와 일본열도를 폭격하여 강타했다.

 

1945년이 들어서면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졌다. 8월 6일에는 히로시마에,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곧이어 소련이 일본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8월 폭풍 작전'을 감행했다. 결국 8월 15일 일왕 히로히토는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9월 2일 미국 군함 미주리호에서 정식 항복문서가 조인됨으로써 태평양 전쟁은 물론 중일전쟁도 종전을 맞아 일본 제국의 침략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종전 후 & 영향

중일전쟁 기간 중, 중국대륙의 주요도시들은 일본 제국 군대에 의해 점령당하였고 수많은 중국인들이 희생되었다. 당시 정부군이었던 국민당군은 부패하고 무능했을 뿐만 아니라 군대편제 조직도 엉망이었다. 반면, 공산당은 일본군과 싸우면서 민심의 지지를 얻어갔고, 뒤로는 공산당 조직을 위한 힘을 비축했다. 중일전쟁 종전 후 평화를 바라던 중국인들의 열망에 따라 중국을 다시 내전상태로 빠뜨리지 않기 위해 국민당 정부와 중국 공산당 간의 회담이 열렸는데, 여기서 '쌍십협정'을 체결되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이 협정을 무시하고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였고, 국공내전이 재발발하게 되었다. 부패하고 무능한 국민당의 행태와 중일전쟁 때 일본 제국에 부역한 매국노 한간 처벌에 미온적이었던 국민당 정부의 행동 등에 등을 돌린 민심은 공산당을 지지하였고, 결국 민심을 잃은 국민당 정부는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에 패하여 1949년 12월 타이완(臺灣, 대만)으로 쫓겨났다.

 

중일전쟁은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1941년 발발한 태평양 전쟁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고 있으나, 일본 제국이 중국 대륙을 침략하지 않았다면 태평양 전쟁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역사에서 매우 큰 전환점이 된 중요한 전쟁 중 하나이다. 이 때문에 오늘날에는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폴란드 침공을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으로 보는 유럽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중일 전쟁을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으로 봐야한다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

 

 

연보

  • 노구교사건 - 1937년 7월 7일 일본군과 중국군 제29군의 교전. 중일전쟁 발발.
  • 광안문사건 - 1937년 7월 하순, 베이징성에서 중국군과 일본군의 교전.
  • 오송전투 - 1937년 8~9월, 상해상륙작전. 상륙과정에서 일본군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25만의 국민당군이 일본군에 참패.
  • 보정 전투 - 1937년 10월, 화북방면 중국군 14개 사단이 일본 북지나파견군 제5사단을 공격했으나 일본군 제20사단의 증원으로 퇴각.
  • 태원 전투 - 1937년 10월, 신생 8로군 3개 사(115사, 120사, 129사)의 연합공격으로 일본군 5사단에 심각한 피해를 입힘. 이 전투에서 등소평이 정치위원으로 맹활약.
  • 남경대학살 - 1937년 12월 13일~1938년 1월 말, 일본군이 국민당 수도 난징을 점령하고 6주간에 걸쳐서 중국인 30만 명 학살.
  • 태아장 전투 - 1938년 5월, 국민당군 제5전구군이 이종인의 지휘 하에 일본군 1만여 명 사살. 국민당군 최초의 승전보.
  • 서주 전투 (1938년) - 1938년 5월 10일, 일본군에 의해 점령.
  • 광주 전투 - 1938년 5월 10일, 일본 남지나파견군이 중국 남부 광동성의 광주를 점령.
  • 무한삼진 전투 - 1938년 10월 29일, 일본군이 무창과 한구를 점령.
  • 백단 대전 - 1940년 3~12월, 8로군 115개 단(연대)과 학생의용군이 산서성, 하북성의 일본군 근거지 공격. 8로군 2만2천 명 전사, 일본군도 큰 피해.
  • 환남사변 - 1941년 1월, 일본군을 치기 위해 이동 중이던 공산당 신4군이 국민당군의 포위공격을 받아 9천 명 전사. 군장 엽정은 생포, 부군장 항영 전사.
  • 둘리틀 공습 - 1942년 4월 18일, 둘리틀 중령의 폭격대가 중국 복건성, 절강성 일대에 불시착해 중국인들의 도움으로 퇴각. 일본군의 보복으로 중국인 25만 명 학살.
  • 태항산 전투 - 1942년 5~6월, 일본 북지나파견군의 본격적인 산서성, 섬서성 공략으로 태항산이 함락됨. 중국공산당과 8로군 지도부는 연안 일대로 퇴각. 이 전투에서 화북 조선의용군김무정이 활약.
  • 후카웅 전투 - 1943년 10월, 리처드 스틸웰 장군의 미군 레인저부대와 손입인 장군의 중국군 2개 사단이 버마 후카웅계곡에 진출해 일본군에 큰 손실을 입혔으나 버마로 이어지는 진격로를 확보하지는 못함.
  • 제1기 대륙타통작전 - 1944년 8월, 일본군이 설악 장군의 국민당군 제9전구 30만 명을 격퇴하고 형양, 계림 점령.
  • 제2기 대륙타통작전 - 1944년 11월, 일본군이 유주를 점령. 미국은 중국이 일제(日帝)에 완전 붕괴될 가능성까지 있다고 예상해 부통령 헨리 월레스, 참모총장 조지 마셜을 중국에 파견.
  • 1945년 8월 15일 - 히로히토 천황, 무조건 항복선언(일본 제국 패망).
  • 1945년 9월 2일 - 일제(日帝), 미국 군함 미주리호에서 항복문서에 조인(연합국에 정식 항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