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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20 : 일제강점기 65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3)

 

 

 

한국의 역사 1,020 : 일제강점기 65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3)

 

 

           

 

 

 

 

중일전쟁

 

중일 전쟁(中日戰爭)은 1937년 7월 7일 일본중국 침략으로 시작되어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중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중국 항일 전쟁(중국어 간체: 中国抗日战争, 정체: 中國抗日戰爭, 병음: Zhōngguó Kàngrì Zhànzhēng), 일본에서는 일중 전쟁(일본어: 日中戦争 (にっちゅうせんそう))혹은 지나 사변, 서양에서는 제2차 중일 전쟁(Second Sino-Japanese War)이라고 부른다. 중일 전쟁은 20세기 아시아에서의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다.

 

1931년 이후로 두 나라 사이에 간헐적으로 교전이 있었으나, 전면전은 1937년 이후로 시작되었으며, 일본의 연합국에 대한 항복과 함께 1945년 9월 2일 종료되었다. 전쟁은 수십 년간 계속되어 온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의 결과였으며, 원료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을 정치·군사적으로 지배하려는 속셈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의 민족주의와 민족자결주의는 전쟁을 중국의 승리로 이끌었다. 1937년 이전에는 양쪽이 다양한 이유로 소규모, 국지적 전투를 벌였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은 만주 사변을 일으켰고, 그 연장에서 일어난 1937년루거우 다리 사건(盧溝橋事件, 노구교 사건)으로 두 나라 간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1937년부터 1941년까지의 기간에는 중국이 단독으로 일본에 맞섰으나, 진주만 공격 후 중일 전쟁은 더 큰 규모의 제2차 세계 대전에 포함되었다. 이후 일본군의 전력은 급속히 쇠퇴했고 1944년 즈음에 일본은 이른바 '대륙타통작전'을 개시하면서 반격을 꾀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1945년 8월 15일 일왕 히로히토연합군에게 발표한 무조건 투항 선언과 같은 해 9월 2일 연합국에 대한 일본의 항복 문서 조인식을 끝으로 중일전쟁 역시 종결되었다.

 

 

 

 

중일 전쟁
中日 戰爭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1940년의 일본 제국의 확장
1940년의 일본 제국의 확장
날짜 1937년 7월 7일 - 1945년 9월 2일
장소 만주, 중국 본토, 외몽고, 버마, 인도차이나
이유 일본의 동아시아의 침략 야욕
결과 중국의 승리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
일본은 만주, 타이완 섬, 펑후 제도를 중국에 반환함
교전국
중화민국 중화민국
미국 미국
소비에트 연방 소비에트 연방

일본 제국 일본 제국

만주국 만주국
몽강국 몽강국
왕징웨이 정권 왕징웨이 정권

지휘관
중화민국 장제스(장개석)
중화민국 허잉친(하응흠)
중화민국 천청(진성)
중화민국 옌시산(염석산)
중화민국 펑위샹(풍옥상)
중화민국 리쭝런(이종인)
중화민국 슈에위에
중화민국 바이시(백숭희)
중화민국 탕은백
중화민국 마오쩌둥(모택동)
중화민국 저우언라이(주은래)
중화민국 주더(주덕)
중화민국 펑더화이(팽덕회)
미국 조지프 스틸웰
미국 클레어 첸노트
미국 앨버트 웨더마이어
일본 제국 히로히토(유인)
일본 제국 도조 히데키(동조영기)
일본 제국 고노에 후미마로
일본 제국 간인노미야 고히토
일본 제국 마쓰이 이와네
일본 제국 스기야마 하지메
일본 제국 하타 슌로쿠
일본 제국 니시오 도시조
일본 제국 오카무라 야스지
일본 제국 우메즈 요시지로
만주국 아이신교로 푸이(박의)
만주국 장징휘
병력
5,600,000여 명
미 항공기 900대
(1942-1945)
3,900,000여 명
부역자 900,000여 명
피해 규모
1,320,000여 명 전사
1,797,000여 명 부상
공산당원 500,000명 사상
민간인 17,000,000명 사망
480,000여 명 전사
1,172,200여 명 부상
430,000여 명 병사
총합계 ~210만명 사상


 

 

 

배경

 

일본의 상황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 대전(~1918년)이 발발하자 일본 제국영일 동맹을 이유로 연합국에 가담하여 참전했다. 그 진의는 동아시아 지역에 있어서의 일본의 지위를 더 높이고 국제적인 발언권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일본은 독일선전포고하고, 독일령이었던 중국 산둥반도의 교주만과 독일령 남양군도를 점령하였다. 산둥 반도를 점령하고 나서, 일본은 중국에 대해 만주와 산동반도 등에 대한 일본의 이권을 반영구화하고, 남만주내몽골 일부를 일본에 조차하는 것을 요지로 하는 등 21가지 특혜조건을 요구(1915년 1월)하였고, 중국의 위안스카이 정부는 이를 수용(5월)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5·4 운동(1919년)과 같은 격렬한 배일(排日) 여론에 밀려 실패하였다. 이 21개조에 대한 처리는 중국의 민중이 위안스카이에게서 이탈하는 계기가 된다. (→21개조 요구) 일본이 이와 같이 아시아의 독보적 강대국으로 인식되면서 급부상하게 되는데, 이 무렵 일본 제국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로 경제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1920년대 말에 경제 대공황을 맞게 되면서 경제적 불황으로 인해 극우 군부세력들이 암살 및 쿠테타를 일으키게 되었고, 일본의 민간 의회 정부는 전복되었다. 이어 일본은 경제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식민지를 더욱 확보하고자 침략 전쟁의 길을 걷게 된다. 자원이 풍부한 만주 지역을 얻으려 전쟁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만주군벌 장쭤린 폭사 사건 등을 조작하였고, 만주침략에 반대하였던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수상을 암살하는데 이어 1931년 선전 포고도 없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만주사변으로 만주 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한 일본 제국은 만주국이라는 괴뢰 정부를 세웠다. 이어, 경제 대공황을 극복하고자 '일-만 블록경제'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지만, 성과가 없었다.

 

한편, 국제연맹은 '만주를 불법 침략, 점령한 일본 제국의 만주지역 철수'를 결의하자, 일본은 1933년 3월 국제 연맹에서 탈퇴하였다.

 

 

중국의 상황

1919년 5.4 운동 이후 중국에서는 민족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광둥지방에서는 국민당(1919년 10월 10일)과 공산당(1920년 8월)이 창당되고 1924년부터 여러 지역에 널리 퍼진 군벌을 타도하기 위해 '국민 혁명', '제1차 국공 합작'(~1927년)이 전개되었다.

 

국민당의 당수 쑨원이 사망(1925년)한 이후, 국민당 당수가 된 장제스쑨원의 정신을 이어받아 북벌운동을 전개하여 강력히 추진하였다. 장제스은 북벌운동으로 북양군벌세력들을 몰아내고 사실상 중국을 장악하게 되었고, 1927년부터는 공산당 토벌에 나섰다.(제1차 국공내전 1927~36년) 그러나 1931년 만주 사변을 시작으로 일본 제국의 침략이 본격화 되면서 중국 공산당을 토벌하는 데 차질이 생긴 장제스은 군벌 세력들과 연합하게 된다.

 

 

만주사변

 .

 

 

1931년. 일본군의 센양 점령.

 

 

중국에 대한 일본 제국의 21개조 요구안에 대해 중국은 그 조약의 폐기 또는 무효를 주장하고, 국권 회복 운동을 펼쳐 나갔다. 특히 만주에서는 일본 제국의 후원을 받았던 봉천파 친일 군벌 장쭤린1928년 일본군에 의해 열차안에서 폭사당한 후,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은 반일 운동측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장쉐량은 국민당의 장제스과 손을 잡았는데, 당시 일본 제국은 대륙에서 완전한 식민지를 얻는 한편 소련과의 전쟁을 대비하는 근거지로 삼기 위해 만주 지배를 획책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은 봉천 교외 유조구에서 남만주 철도를 폭파해놓고, 이것을 '중국군의 행동'이라 몰아붙여 이를 구실삼아 만주를 침략한다. 그 다음날 일본군은 봉천,장춘,잉커우(營口, 영구)를 점령한 데 이어 21일에는 길림까지 진격했다. 이때 일본군의 병력은 1만 4천 명에 불과했다.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도 압록강을 넘어 북진했다.

 

한편, 이무렵 장제스의 난징 국민정부는 제3차 공산군 토벌작전에 나선 상태여서 군대를 북상시킬 수 없었으므로 일본과 전쟁을 회피하고자 했다. 당시 베이징에서 신병치료를 하고 있던 장쉐량장제스의 밀령에 따라 전보로 전군에 무저항 철수를 명령했다.(이때 장학량 휘하의 중국군 병력은 약 22만 명이었다.) 일본군은 1932년 2월 만주 전역을 거의 점령했다. 일본의 만주침략에 중국은 즉각 무력으로 대응하기보다는 '무저항'정책을 택하면서 외교적인 수단으로 만주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장제스국제연맹이 일본을 제재해주기를 희망하여 만주 문제를 국제연맹에 제소했다. 9월 30일 국제연맹은 일본군의 철수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나 일본은 이에 따르지 않았다.

 

이듬해, 일본 제국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수반으로 만주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웠다. 이로써 만주는 일본 제국의 자원 공급지이자 경제시장, 군사 기지 역할 등을 하게 되었고, 일본인들은 만주를 발판으로 적극적으로 중국대륙을 넘보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는 소규모 전투가 몇 차례 있었으나, 1933년 5월 25일 난징 국민정부가 일본 제국에 정전을 요청했고, 5월 31일 톈진의 외항인 탕구(塘沽, 당고)에서 중국이 크게 양보한 내용으로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이 정전협정에는 일본군이 만주국 안으로 철수하고 만리장성 이남에 비무장지대를 둔다는 조항이 들어갔다. 이는 곧 만주국이 중국에서 분리되는 것을 난징 국민정부가 인정한 셈이었다. 그러나, 광대한 만주 땅의 구석구석에까지 일본의 지배력이 미칠 수는 없었으므로 만주에서는 동북항일연군을 비롯한 여러 갈래의 항일 무장활동이 계속됐다.

 

 

국공내전

중국 공산당 홍군의 장정 경로.

 

 

1931년 난창 지역에 중국 공산당 임시정부가 수립된 직후부터 공산당의 세력이 넓혀지는 것을 우려한 국민당은 무려 5번이나 공산당 지구를 포위하고 토벌전을 펴나갔다. 제1회 토벌은 1930년, 2회와 3회는 1931년, 4회는 1932년 6월에 이루어졌으나 모두 국민당의 참패로 끝났다. 그러던 중 1933년 10월에 100여만 명의 국민당 군대가 제5회 토벌을 시작했다. '공산당 토벌'을 4차례 실패를 겪은 장제스은 '군사 3할, 정치 7할'이라는 방침을 정했다. 이에 따라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는 농민을 홍군으로부터 떼어놓으면서 철저한 경제적 봉쇄작전을 폈고, 수천 개의 토치카를 만들어 공산당의 근거지인 난창을 압박했다.

 

이에 맞서 중국 공산당코민테른이 파견한 군사고문 리트로프(오토 브라운, 중국명 李德)의 지도 아래 정규군에 의한 정면대결 전술을 택했으나, 그 결과는 대실패였다. 홍군의 거점은 차례로 격파됐고, 1934년 3월 중국 공산당의 영역인 광창(廣昌)이 함락되었다. 광창이 함락됨으로써 공산당세력은 거의 회복불능 상태에 빠졌다. 이에 중국 공산당은 '강서 소비에트'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7월에 '북상항일선언'을 발표했다. 이어 1934년 10월에 홍군의 주력인 제1방면군(규모 10만 명)이 이른바 '대장정'에 나서면서 강서성의 근거지를 버리고 서쪽으로 탈주했다. 오랜 기간동안 국민당 군대의 공격을 피하면서 무려 9,600km라는 장정 끝에 1935년 10월에 섬서성 옌안에 다다랐을 때, 살아남은 공산군은 약 2만 명뿐이었다.

 

 

시안사건

만주의 근거지를 잃은 동북군의 실력자 장학량1936년 1월 말 자신이 경영하는 동북대(東北大) 학생들이 시안에 찾아와 보고하는 내용을 들은 뒤로 항일여론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태도를 보였다. 동북군 안에서도 '반공보다는 항일'을 주장하는 여론이 거세졌다. 1936년 11월 관동군내몽골을 독립시키기 위한 공작의 일환으로 수원사건으로 알려진 몽골인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장학량은 수원성을 지키던 중국군을 돕기 위해 자신의 부대를 이동시키는 것을 허가해줄 것을 장개석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이를 불허하고 오히려 '공산군 토벌'을 요구했다.

 

장개석섬서 성 북부 지역에 근거지를 마련한 중국 공산당에 대한 총공격에 나설 준비를 갖춘 뒤 12월 4일 시안에 도착했다. 시안에 도착한 장개석은 동북군의 장학량과 서북군의 양호성에게 '공산군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따르던가 아니면 동북군과 서북군을 각각 복건 성안휘 성으로 이동시키던가 양자택일을 하라고 압박했다. 장학량과 양호성으로서는 '일치항일' 여론이 동북군과 서북군 전체에 확산된 상황에서 공산당 토벌명령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뒤의 선택 역시 자신들이 거세된다는 것을 뜻했기 때문에, 결국 두 사람은 일종의 쿠테타인 병간(兵諫, 무력으로 통치권자를 위협하고 간함)을 결의하고 제6차 공산군 소탕전 명령이 발동된 12월 12일 새벽에 장학량장개석을 그의 숙소인 '화청지'에서 체포, 감금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12월 13일 장학량은 '일체의 내전 정지', '민중애국운동 개방', '손문의 유촉 준수', '구국회의 소집' 등 8가지 요구사항을 전국에 통전했다. 이와 동시에 장학량은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있는 보안(保安)으로 비행기를 보내 공산당 측 대표를 초청했다.

 

시안사건은 '내전 중지, 일치 항일'의 여론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었으나 중국의 최고지도자를 감금한 사건이었으므로 국내외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소련 신문들조차 이에 대해 "친일분자의 음모"이며 "반일세력의 단결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일본측 신문은 "장학량의 독립정부와 소련이 협정을 맺었다."고 보도했다. 일본 제국은 장개석이 제거되면 난징 정부를 친일파가 장악할 수 있게 하려고 획책했다.

 

난징 국민정부에서는 장개석의 생명과 안전을 무시하고서라도 장학량 세력을 토벌해야 한다는 견해와 평화적인 사태해결을 바라는 견해가 대립했다. 중국 공산당도 뜻밖의 사태에 당황했으며, 당내에서는 공개재판을 거쳐 장개석을 처형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마저 나왔다.

 

시안에서 장학량에 체포되어 감금된 장개석은 병간(兵諫)을 수용하기를 완강하게 거절했다. 12월 16일 난징 국민정부의 실권자 가운데 한명인 하응흠이 토벌군 총사령에 임명되고 '토벌령'이 내려짐으로써 새로운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마져 높아졌다. 국민당군은 장학량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섬서 성 동쪽의 동관(潼關)으로 진입하고 시안 근교를 폭격했다. 한편, 장학량의 동북군 소속 청년 장교들 사이에서는 '장개석을 처형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사태의 향방을 결정한 것은 '장개석은 석방돼야 하고, 중앙정부의 지도 아래 대일항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여론이었다. 대다수 중국인들은 시안사건으로 인해 내전이 일어나면 일본의 침략에 유리한 정세가 전개될 것이라고 우려했고, 장개석만이 전국의 무력을 통솔할 수 있으니 그를 죽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12월 18일 중국 공산당은 난징 정부의 실권이 하응흠에게 넘어간 것을 고려해 평화적인 문제해결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주은래, 섭검영, 진방헌 등 3명이 시안으로 갔다.

 

이로써 장학량,양호성,중국 공산당 대표와 난징 정부 사이에 교섭이 시작되었다. 장학량,양호성에 대해서는 장개석이 정식 교섭상대가 될 수 없는 자신의 부하로밖에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이 교섭은 실질적으로는 중국 공산당과 난징 국민정부 사이의 직접 교섭이었다. 협정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국민당과 국민정부를 개조해 친일파(한젠)를 구축하고 항일분자를 영입한다.
  2. 상하이의 애국영수와 일체의 정치범을 석방하면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한다.
  3. 공산당 토벌 정책을 정지하고 홍군과 연합해 항일한다.
  4. 각당,각파,각계,각군을 망라하는 구국회의를 소집해 항일구국의 방침을 결정한다.
  5. 중국의 항일에 동정하는 국가와 동맹관계를 수립한다.
  6. 섬서성에 들어와 있는 중앙군 부대를 동관에서 철퇴시키는 명령 등 서북의 군정은 장학량과 양호성에게 맡긴다.

이 협정은 장개석의 체면을 위해 공식 서명도 공개도 하지 않은 이른바 '인격담보'의 약속이었다. 장개석12월 25일 석방되어 시안을 떠나면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고 언명했다. 장학량은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군법회의에 회부되겠다면서 장개석과 동행했다. 시안사건을 계기로 이루어진 제2차 국공합작은 항일전선의 기반이 되었다.

 

1937년 2월 시안에서 첫 국공회담이 열렸다. 국공회담은 9월까지 장소를 바꿔가며 다섯 차례에 걸쳐 계속 됐다. 중국 국민당은 군의 통일, 정권의 통일, 적화(공산주의) 선전의 정지, 계급투쟁의 중지를 요구했다.

 

 

경과

 

루거우 다리(노구교) 사건

 

 

노구교 사건.

 

 

1937년 7월 7일, 루거우 다리 사건(노구교사건)에서 베이징 서쪽의 펑타이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과 중국군이 무력 충돌했다. 사건의 발단은 7월 7일 야간 전투훈련 중이던 일본군 1개 중대의 머리 위로 10여 발의 총탄이 날아온 직후 일본군 사병 한 명이 행방불명된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 사병은 용변 중이어서 20분 후에 대오에 복귀하였으나, 일본군은 "중국군측으로부터 사격을 받았다!","중국군이 일본 병사를 납치해갔다!"는 주장을 펼치며 이를 구실로 펑타이에 있는 보병연대 주력을 출동시켰다. 일본군은 7월 8일 아침부터 루거우 다리(盧溝橋, 노구교)를 수비하고 있던 중국 제29군을 공격하여 하루만에 다리를 점령하였고, 중국군은 융딩강 우안(右岸)으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일본군의 지시를 내린 자는 무다구치 렌야(牟田口廉也)였다. 이 사건은 뒷날 일본군이 조작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전투는 처음에 제한된 국지전에 불과했고 서둘러 제안된 교섭으로 양측은 7월 11일 협정을 맺고 이 사건을 덮어두기로 결정하여 사태를 되돌려놨지만, 전쟁발발의 구실을 찾던 일본군 상부는 이 사건을 전쟁의 명분 구실로 잡았다. 7월 11일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일본 본토에서 3개 사단, 만주에서 2개 여단, 조선에서 1개 사단을 각각 화북 지역에 보내 그 지역의 병력을 증강시키기로 결정했고, 일본은 중국 본토 침략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어 일본 참모본부는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낸다.'는 전략 아래 7월 28일 화북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을 개시함으로써 본격적인 중국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국공 합작

루거우 다리 사건이 일어날 무렵, 7월 8일 중국 공산당은 국공합작을 통한 항일 자위전쟁에 나서자고 주장했다. 한편, 중국 국민당장개석은 당시 여산에서 국방회의를 열었는데, 여기에는 중국 공산당 대표로 주은래도 참석했다. 이어 7월 17일 장개석은 "만일 정말로 피할 수 없는 최후의 갈림길에 이르렀다면 우리에게는 당연히 희생만 있을 뿐이며 항전이 있을 뿐이다."라는 내용의 이른바 '여산담화'를 발표했다.

 

7월 28일 중일간의 전면전이 발발함에 따라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 정부 휘하의 변구(邊區)정부로 격하되고 1937년 8월 7일 장개석은 국방회의에서 전면항전을 결의한다. 8월 12일에는 장개석이 육해공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중일전쟁의 사태가 급박해져가자, 장개석은 홍군의 병력 규모를 3개 사단 4만 5천명으로 하고 지휘체계와 관련해 국민정부가 각 사단에 연락참모를 파견하는 조건으로 홍군에 독자적인 지휘부(총지휘에는 주더, 부총지휘에는 팽덕회가 임명)를 설치한다는 데 동의했다. 이어 8월 22일 중국 공산군의 홍군(紅軍)이 국민 혁명군 제 8로군으로 개칭, 국민당 정부 군대로 합류하였다.

 

그러나, 제2차 국공합작 중에도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앙금과 갈등은 여전했기 때문에 이들은 서로 다투면서 각자 항일전쟁을 계속하게 된다. 국민당 정부군은 정면전장에서 지구전 형식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전개하였고, 공산군은 일본군 후방의 전장에서 유격전을 벌이면서 서로 다른 지역에서 일본과의 전투를 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