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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겨울 1 : 새해 아침에 ......1

 

 

 

강남의 겨울 1 :  새해 아침에 ......1

 

 

                                                                                  한강 고수부지 자전거 도로 전경

 

새해 새벽 잠수교에서 해돋이를 보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나섰다. 지난 31일밤에는 보신각 타종에 십만 인파가 몰렸다고 하고 밤하늘에는 불꽃 축제가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한강 고수부지에는 간혹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보이고 주차장에는 차량타고 새벽 해돋이를 보려나오는 사람이 보인다. 운동을 하는 사람도 보이고 예년에 비해 한강고수부지에 꽤 많은 사람이 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몇 년 전에는 한강에서 해돋이를 보러 나오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아마 동해안으로 가는 고속도로가 밤새 북새통을 이루었고 동해안 정동진을 비롯하여 해안가는 물론 북한산, 관악산, 도봉산, 청계산, 우면산 등 서울 주변 유명한 산에는 수많은 안파가 몰려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봄비는 곳에 꼭 가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들의 심리가 묘하다. 주변 모텔, 호텔이 동나고 음식점이 초만원을 이루고 가는 길은 주차장을 방불케하지만 그래도 참고 가서 해돋이를 보아야 하는 우리 국민들의 심성이다. 남이 가면 나도 가야하고 그래서 고생길을 마다하지 않는 수고를 스스로 자청하는 국민들이다.

 

 

 

 

                                                                                새해 새벽 한강 북안 한남동, 옥수동 방향

 

지난 세월의 어둠이 곳곳에 깊게 베인 한강 주변은 검푸른 강물과 암흑으로 천지가 조용하다. 강 건너 옥수동 방향 불빛이 반짝이고 강변 스카이 라인이 어둠이 묻혀 있다. 우리는 아직 어둠의 긴 터널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국민들이 살기는 팍팍하여도 전국 지자체 곳곳 사방에서 엄청난 예산을 들여가면서 각종 축제가 지난 가을철 내내 열렸다. 농산물 축제, 전어축제, 불꽃 축제도, 여의도 벗꽃놀이도, 열린음악회도, 명품 할인행사장 등 행사가 열리는 장소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그런 곳에 가지 못하면 따돌림을 당하고 주부들의 정보망에 참여하지 못하는 학부모나 주부는 주류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들이 몰려가는 장소는 밤을 세워서라도 찿아가는 강한 열정과 집착의 유전자가 우리들 몸 속에 용틀임 치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역사를 통해서 외모 위주의 인재등용, 자기과시, 동질감의 포장, 집단의식, 타민족에 대한 깊은 원한 등 우리 삶에서 비롯된 환경과 생활 습성으로 그것 것들이 몸에 베인 유전자이기도 하다.

 

 

                                                                             고수부지 자전거 전용도로

 

새벽이면 일어나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깊은 상념에 빠지기도 한다. 인터넷을 켜고 오늘의 날씨를 살피고 밖을 나가보고 추위 정도를 가늠해본다. 자전거를 탈 수 있을지 아니면 그냥 산책으로 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절차이다. 뉴스를 살피고 사설을 읽고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나서 준비를 한다. 손난로, 발난로를 준비하고 복장과 헬멧, 부착된 경광등을 살피고 보온커피통을 들고 자전거를 타고 새벽 운동을 나가곤 하는 것이 이제 습관이 된 듯하다. 이제 새벽은 나에게 가장 친숙하고 바쁜 시간이며 생활에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시간이 된지 벌써 꽤 오래 되었다.

 

새벽 운동을 선택한 것은 새벽형 인간이 되고자 함이었고 지난 세월 출세와 명예를 위해 고단한 삶에 시달려 오면서 망가진 몸과 정신을 회복한다는 차원에서 운동을 시작하였고 이는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새벽 운동을 하면서 건강도 많이 좋아졌고 생활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 그러니 새벽 운동을 시작한 것이 벌써 7~8년 이상 지난 것 같다.

 

새벽 자전거 타기를 선택한 것은 주간보다 비교적 차량 소통이 적고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또 도심의 새벽길은 현대 도시인들의 삶을 한 눈에 볼 수도 있다. 새벽길은 지난 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골목마다 도시인들이 버린 각종 쓰레기를 포함하여 다양한 군상들의 만남이 있기도 하다. 새벽길을 나서는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 가난한 서민들이 대부분인 것 같다.

 

밤새 술을 마시는 사람, 포장마차, 분식집, 술취한 사람들, 길바닥에 잠을 자는 사람, 새벽에 출근이나 퇴근하는 사람, 밤새 편의점에서 일하는 사람, 노숙자, 환경미화원, 신문배달원, 폐지 수집하는 노인, 폐지 수거 차량, 24시간 영업하는 마트.음식점.편의점.술집, 길바닥에 떨어뜨린 장갑을 포함하여 각종 소지품.음식물, 새벽길의 버스.택시와 운전.승객, 새벽 아파트 시장, 경비초소에서 잠을 설치는 경비원, 새벽 인력시장으로 가는 사람, 새벽 출근하는 건물 청소부 아줌마, 새벽 기도나온 교회.성당의 차량과 신자들,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빌딩 인분을 수거하는 인분차, 도로를 청소하는 청소차, 리야카로 동내를 돌아다니며 어물을 파는 아저씨 등등 이런 정경들이 새벽길의 모습이다. 고단한 삶의 역동성을 느낄 수 있으며 여명이 트고 아침이 밝아오면 하루가 시작된다.

 

새벽길은 자전거 타기에 주간에 비해 안전한 편이나 방심은 금물이다. 자전거를 탄 지 거의 4년이 다 되어가지만 어느 비 온 날 미끄러져 넘어진 것과 옴푹 패인 곳을 모르고 방향을 틀다가 넘어진 것 외에는 대인.대차량 사고는 한 번도 없었다. 새벽 자전거 타기도 양보와 방어 운행이 우선이다. 화장실은 동사무소, 교회, 성당, 공원, 공중화장실을 이용하고 커피 자판기도 지금은 대부분 철수하여 찿기도 힘들다. 특히 겨울철에는 실외 자판기는 대부분 가동을 중지하기에 실내 자판기가 있는 곳을 이용하면 좋으나 찿기 힘들다. 그래서 보온통을 가지고 다닌다.

 

방배역 근방을 지나다 보면 아침 출근길에도 스타벅스에 들러 비싼 커피를 들고 나오는 사람, 노트북을 열고 앉아 무언가 열심히 하는 사람, 무슨 상념에 점겨 눈을 지긋이 감고 앉아 있는 사람 등 요즘 젊은이들은 벌이가 어떠지는 몰라도 바로 자라면서 길들여진 생활 습관인 듯하다. 그래서 습관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몇 천원씩 하는 커피를 난 솔직히 손떨려서 사 먹지 못하는데, 난 구시대 사람인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벌이가 잘 되는 젊은이라면 몰라도 보온통에 커피를 넣어 다니면서 마셔도 될 것을...... 하면서 부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안타깝기도 하다. 맥도날드 가게에는 아침을 먹고 있는 젊은이들도 많이 본다. 나이든 중년도 드나들고 햄버그를 나도 좋아하지만 고 칼로리 음식을 저렇게 먹고 장차 건강이 어떻게 망가지는지나 알고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요즘 젊은이들이 비만이나 성인병이 많은 데 바로 저런 음식에서 온다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매일 코스를 달리하여 다니다 보면 서초동. 방배동, 반포동, 사당동 일대의 도로와 골목, 상가, 점포, 주인 얼굴까지 알게되고 주변 지리는 훤하게 익히게 된다. 또 가끔 언제 새벽에 열리는지를 알고 있는 아파트 새벽 시장에 들러 싱싱한 채소, 과일, 어물 등을 구입하고 필요한 생필품은 24시 마트에 들러 구입하여 자전거에 싣고 오기도 한다. 그래서 새벽 자전거 타기 운동은 나의 삶의 일부분이 되었다.

 

 

                                                                                밝아오는 고수부지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가다보면 반포동 세화여고 근방을 지나간다. 아침에 등교하는 여고생을 보면 대부분 비슷한 디자인과 재질의 짙은 갈색상의 비싼 패딩잠바를 입고 등교하는 모습을 보았다. 부모들의 수입이 다를 것인데 학생들은 다같이 비싼 패딩잠바를 입고 등교하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부모들이 패딩잠바를 조금이라도 싸게 사려다가 사기를 당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우리 민족은 서로 비교하는 심리가 매우 강한 민족이다. 오랫동안 강대국의 지배를 받았고 천민 생활을 오래한 탓에 무언가 자기과시에 매우 적극적이다. 양반 족보를 사고 양반 족보에 끼워넣고 양반 족보로 가짜로 족보를 만드는 등 상놈들이 양반이 되고 싶어 별의별 짓을 다했던 민족이다. 가문을 통째로 양반으로 등록한 경우도 많다. 또 양반 성씨를 도용하여 한 마을이 모두 같은 성씨로 바꾼 집성촌으로 변한 것이 대부분 조선 말 경이다.

 

우리는 너무나 억압받으며 살았고 가난하였고 너무나 없이 살아 왔기에 맺힌 한을 풀 길은 이렇게 해서라도 양반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머슴이 양반이 되고 촌놈이 갑자기 부자가 되면 통상 거드럼을 피우기 쉽다. 그것이 명문가의 후손처럼 겸손과 메너, 태도, 정제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이 아닌 갑작스런 출세에 졸부 근성이라는 것이다. 동남아를 돌아다니며 골프, 섹스 여행을 하는 한국인들이 부지기 수다. 물론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과거 일본 엔화가 강세일 때인 70년대 전후 당시 일본 남자들은 한국 기생관광이 매우 유행하였는데, 일주일 정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한국을 관광하면서 햔국 현지처를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부산 완월동 집창촌에는 일본인 현지처가 대부분이었다. 서울에도 이촌동.이태원 일대에 양공주를 포함하여 일본인 현지처들이 수두록하게 살았다고 한다. 사실인지 알 수는 없으나 비내리는 눅눅한 날이면 외로움을 참지 못한 한 젊은 여자가 우산을 쓰고 택시 기사를 유심히 살피며 지나가다가 젊은 택시 기사의 택시를 타고 무작정 교외로 나간다고 한다. 몇 시간 뒤 돌아온 기사는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수표를 만지막 거리며 즐거워 하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아마 지금쯤은 그녀들은 대부분 우리들 어머니.할머니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일들은 모두 그녀가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할 비밀일 것이다.

 

 

                                                                                   새벽 고수부지 주차장 모습

 

 

우리는 자신의 분수보다 남처럼 살지 못하면 뒤처친 삶을 사는 것 같고 불안하고 기분 나쁜 습성이 많은 민족이다. 조금이라도 자신들과 모습이나 모양, 색깔, 복장이 다르면 청소년들은 조롱하는 것이 사실이다. 농촌 아이는 읍내 아이에게, 덩치 작은 왜소한 놈은 덩치 큰 놈에게,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처럼 피부가 다르고 말씨가 다르면 조롱하고 따돌림을 당하는 게 우리 청소년들 세계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식이 조롱받지 않게 하기 위해 빚을 내서라도 비싼 패딩잠바를 사 입혀야 직성이 풀리고 안심이 되는 사회이다.

 

담임 선생들에게 주는 돈봉투가 유행하던 80~90년대 선생들은 그때부터 돈 맛을 알고서는 교육계는 사실 병들기 시작했다. 봉투를 주어야 학생을 관심을 갖고 관리해주는 스승, 그것은 이미 스승이 아니었다. 지금은 거의 공교육이 불능 상태에 빠져 버렸고 사교육이 공교육을 대신하고 있는 형편이다. 교육계는 밥그릇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입시정책이 시행착오를 무수히 반복하고 있으며 돈 맛을 알은 교육계는 납품, 공사, 임용 등에서 비리와 부패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전교조 분리 투쟁과 정치 세력화로 교육계가 방향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교권이 상실된 지는 오래고, 학생들 간에 학교폭력.성폭력이 난무하고, 스승이 제자, 학부모에게 폭력을 당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고교 평준화는 실패한 정책이 되었고 대학입시는 사람장사에 혈안이 되어 신입생, 편입생 모집에 혈안이 되어 장사하기에 바쁘다. 상아탑 이상은 사라지고 학문 연구가 아니라 취업에 매달려 5~6년 이상 대학에서 버티면서 스펙 쌓기에 여념이 없는 현실이다. 암기식 위주의 교육 시스템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창의성은 사라지고 교육개혁은 아득한 현실이다.    

 

 

                                                                                           반포대교 전경

 

해돋이를 보려는 심리는 무엇일까? 대부분 소원을 빈다고 한다. 새해 해돋이에서 비는 소원이 꼭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그래야만 안심이 되고 무언가 이루질 것 같은 무언의 위로와 희망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가 불안할수록, 경기가 나쁠수록, 정신이 빈곤할수록, 무언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미래 때문에, 승진, 취업, 합격, 건강, 자녀 등등 모두가 잘 되기를 바라는 심정일 것이다.

 

새해 아침에는 누구나 새로운 계획과 각오를 다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세운 계획이 한 달은 커녕 3일도 못가서 그만두고 만다. 갑작스런 생활 습성의 변화는 신체 리듬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피로가 깊어지고 몸이 아프고 몸쌀이 나거나 할 것이다. 그래서 동기부여가 필요하고 결단이 필요하다. 눈비가 내려도 비바람이 몰아쳐도 매일 반복해야 한다. 결단은 지향하는 목표를 세우고 처음부터 조금씩 꾸준히 할 수 있는 행동을 수립해야 한다.

 

처음부터 새벽 관악산을 오른다거나 북한산을 오른다는 것은 무리한 방법이다. 처음에는 가까운 마을을 돌다가 차츰 공원을 산책하고 우면산 하단부를 걷고 점차 정상 부근을 오르고 나중에는 정상을 올라가는 방법이다. 자전거도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장거리를 무리하게 타면 반드시 그만두게 된다. 처음에는 방배동-서초동 일대를 20~30분 정도 돌다가 차츰 주행거리를 멀리하면서 시간을 늘려가야 한다. 특히 아침 운동은 생활 리듬을 크게 변화시키기 때문에 출근을 하는 사람에게는 무리한 방법은 금물이다. 하루종일 사무실에서 하품하고 졸기 쉽다. 저녁마다 운동하는 것도 각종 모임, 회식 등으로 인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운동할 시간이 없다는 말은 핑계일 뿐이다. 새벽 시간은 그래도 구속받지 않는 가장 자유스런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일 조금씩 반복하다보면 습관적으로 일어나게 되고 행동이 반복되면 습관이 바뀌게 된다. 나쁜 습관보다 좋은 습관은 그 사람의 인생을 죄우한다. 새벽에 일어나기 싫어도 알람을 크게 켜두어 억지로라도 일어나고 일어나면 바로 세수를 하고 몸을 간단히 풀고 뜨거운 차를 한 잔 마시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보행을 하더라도 반사판, 경광등, 후라쉬, 아이젠 등은 항상 지참하는 것이 좋고, 여름이면 우산을 반드시 챙기는 것도 필요하다. 요즘처럼 추운 날씨에는 뜨거운 커피도 보온통에 넣고 가면 좋다.

 

그래서 좋은 습관이 몸에 베이면 사람은 태도가 달라진다. 비록 어려운 삶이지만 삶의 활력을 찿을 수 있고 조그만한 기대와 즐거움을 맛볼 수 있고 밥맛도 좋기 때문이다. 그것은 새벽 운동을 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대한 사고와 태도가 달라지고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긍정적인 자신감이 생긴다. 바로 이것이 습관이 바뀌면 생활 태도가 변화한다. 태도가 달라지면 인생이 달라진다. 긍정적인 사고와 아울러 건강도 되찿을 수 있고 생활에 활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해에는 어떤 종류이던지 아침 운동을 꼭 권하고 싶다.

 

 

                                                                             잠수교에서 바라본 잠실 방향

 

역사의 긴 숨결이 새벽 한강의 검푸른 물결에 어른거리며 불빛이 같이 춤추고 있는 듯하다. 한강은 우리 민족의 애환을 같이 겪은 강으로 옛 이름이 아리수다. 고구려와 백제가, 그리고 신라가 패권을 다투던 곳이 바로 이곳이며 백제의 온조가 창업한 곳이며 어머니 소서노가 아들 비류와 같이 도착한 곳도 비추홀(인천)이다. 어머니 소서노는 아들 온조가 자신들을 부르지 않자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하여 온조를 공격하다가 숨을 거둔 눈물어린 한강이다. 고구려 장수왕이 선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곳 한강을 건너 백제의 한성을 공격한 곳이기도 하고 이곳에서 백제의 개로왕이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광개토왕이 아리수를 통해 백제를 공격한 곳이기도 하고 신라가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군을 물리친 곳이기도 하다. 

 

신라가 통일을 이룬 후 이곳을 건너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기도 하였고 궁예와 왕건이 수도 없이 건너 다닌 곳이기도 하다. 견훤이 아들 신검의 반란으로 금산사에 유폐되어 있다가 탈출하여 바다를 통해 아리수를 거쳐 송악의 왕건에게 투항한 통로이기도 하다. 한 시대의 영웅 견훤은 후백제가 멸망하고 왕건이 고려 통일을 이루는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한맺힌 등창이 터져 가까운 산사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잠수교에서 바라본 한남대교 방향

 

고려는 무신정권 최우에 의해 강화도로 천도한 후에 대몽항쟁을 줄기차게 전개한 곳이며 몽고군이 아리수를 건너 고려 전역을 불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결국 80년 무신정권이 붕괴되고 원종이 몽고에 항복하면서 몽고 지배 100년 동안 고려는 철저한 몽고화가 이루어졌지만 몽고가 명나라에 쫓겨 북으로 도망치면서 고려는 몽고지배를 벗어날 수가 있었다.

 

고려는 자력으로 대몽항쟁을 벌였지만 100년 몽고 지배 동안 나라는 병들고 분열되어 갔다. 몽고 여자인 왕후와 권신들이 몽고를 등에 업고 고려 왕실과 조정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변발과 몽고풍의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였고 몽고말을 사용하면서 몽고인 행세를 하기도 했다. 최근 드라마 기황후에 나오는 것처럼 몽고는 고려 왕을 마음대로 바꾸고 복위시켰다. 만주에는 심양왕을 따로 두어 고려왕을 견제하기도 하였고 말을 듣지 않으면 군대를 보내 고려왕을 잡아 가기도 했다. 백성들은 몽고에 바치는 상납품에 의해 수탈이 극에 달하였고 노예처럼 살던 백성들이 도저히 참지 못하여 민란이 사방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오늘날이라고 달라질 것은 없는 듯하다. 강대국 다국적 기업에 의해 국부가 유출되고 기업이 사냥을 당하고 노후 무기를 사야하고 의심스런 쇠고기를 수입해야 하고 문호를 개방하자 지적재산권, 특허권을 빌미로 법정에서 패소하고 거액의 소송료를 물어주어야 하고 자동차 연비를 소비자에게 속였다고 엄청난 금액을 물어야 하고 전투기 도입에 기술이전은 커녕 일본에 비해 절대 불리한 계약조건을 수용해야 하는 나라, 미사일 사거리 연장 개발은 물론 핵연료 재처리, 무기수출 등을 철저하게 통제받는 나라, 이처럼 대한민국을 대미종속국으로 만드는 일에 앞장서는 오늘날 우리 정치.사회의 지도층 세태도 그 시대와 결코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잠수교에서 바라본 강남 방향

 

고려가 공민왕대에 재기의 용틀임을 쳤지만 공민왕의 개혁은 미완이 그치고 말았고 우왕대에 북벌을 강력하게 추진하려는 최영 세력에 의해 만주 출병이 결정되었고 위화도까지 진출했던 고려군이 사령관 이성계에 의해 회군하여 개경을 점령하여 쿠테타로 최영 세력이 제거되자 이성계는 정권을 잡고 허수아비 왕을 옹립하다가 고려 조정과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몰락시키고 이씨 조선을 창업했다. 이런 점에서 이씨 조선도 결코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도덕과 윤리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는 법, 성공한 쿠테타는 정의가 되는 역사의 이이러니이기도 하다.

 

조선은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추진하였다. 신진사대부들이 정치 전면에 나서면서 명나라에 사대하며 유교 문화가 활발하게 성장.확산되었다.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신권우위론을 주장하던 반대파를 모조리 숙청하고 등장한 태종은 강력한 카리스마 정치로 왕권을 공고히 하였고 세종대의 문화통치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권력에는 피도 눈물로 없는 법, 조카를 몰아내고 즉위한 세조는 평생을 고통속에서 살아가야 했고, 훈구세력들의 왕권 농단이 계속되다가 연산군대에 왕권이 다시 강화되는 듯 했으나 계속된 폭정으로 민심을 잃고 중종반정으로 폐위되고 말았다.

 

중종시대가 전개되면서 유교 문화가 꽃을 피우게 되었고 신진관료들이 정계에 등장하면서 훈구파와 계속된 권력투쟁은 여러 사화를 야기하였고 훈구 세력이 점차 세력을 잃게 되자 조정은 신진사대부들이 장악하게 된다. 선조대에는 이름있는 석학들이 많이 배출되어 유교 교리는 이이, 이황에 의해 최전성기를 구가하였고 조정의 권력을 잡기 위해 서로 학연.지연으로 파벌을 나누기 시작하면서 당론에 따라 국가대사를 결정하는 치열한 당파싸움질이 시작된다.

 

군대를 빠진 놈들이 권력을 잡고 군을 무시하고 깔보는 현실은 당시 조선의 군사력이 종잇장에 불과하였다는 사실과 다를 바가 없다. 왜군의 침공에 부산포, 동래가 무너지고, 대구가 스스로 붕괴되어 버렸고, 상주에서 이일의 패전, 천혜의 요새 문경 새제를 무방비로 내주고 충주 탄금대에 진을 친 신립은 기병 7천을 거느리고 일본군과 대적하였으나 수차례 무리한 기마공격으로 조선 최고의 장수 신립은 결국 7천 기병과 같이 전멸하고 말았다. 그후 조선 조정은 북으로 도망치기에 바빴고 전국은 왜군의 발발굽에 유린되고 말았다.

 

오늘날 항상 적의 도발을 외치면서도 막상 도발하면 터지고 깨지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제대로 대응한 번 하지 못하는 우리 군의 현실과 다를바가 없다. 지도층이나 국민들이 군을 기피하고 군을 무시하고 군을 깔보는 세태, 군 스스로도 개혁의 고비를 당기지 못하고 부패와 비리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별 네개 다섯개를 달아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정치군인들이 군의 최고 직위에 올라가는 것이 대부분이고 말잘듣고 고집과 지론이 없는 예스맨 군인만이 출세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실제 군 지휘권도 없으면서 무슨 장군인가? 특히 지금 군의 최상층부는 육사 37~40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돌아가신 박대통령 아들 지만군이 육사에 들어갈 때 많은 장군과 정치인들 자식들이 같이 들어갔다. 그후 박정권이 무너지고 신군부가 들어섰을 때는 육사가 기피 대상 1호였다. 그래서 지원자가 줄고 미달사태까지 벌어진 시기도 있었다. 그래서 능력이 미천하고 공부를 잘 못하던 무능한 학생들이 육사를 지원한 경우가 많았는데 그들이 지금 군의 최고층을 이루고 있다. 미안하지만 한마디로 지금 가장 무능한 육사 기수들이 군을 이끌고 있다는 말이다.   

 

 

                                                                                     잠수교 전경

 

임진왜란은 200여 년 평화기를 누리던 동북아와 조선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대사건이었다. 바람 앞의 등불처럼 꺼져가던 조선이 운좋게 명나라와 의병 충신.열사들에 의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망했어야 할 조선이 기사회생한 것이었다. 무능한 선조가 죽자 어린 적자 영창대군을 둔채 서자였던 광해군의 가까스런 즉위는 대북파로 하여금 무차별적인 정적 제거 작업으로 인해 폐륜군주로 낙인찍혀 인조반정으로 결국 광해군 정권이 무너지면서 광해군은 제주도로 유배되어 18년간 지내다가 한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병자호란은 인조 정권의 무능을 그대로 드러낸 치욕스런 전쟁이었다. 반정으로 즉위한 인조와 권신들의 무능으로 인해 이괄의 난이 발발하면서 서북 지방 정예군 1만 5천이 반란군에 가담하여 패퇴함으로써 방어선에 문제가 생기고 오합지졸로 편성한 남부지방 군사를 파견하였으나 청나라 팔기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청군이 파죽지세로 내려오자 급기야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는 40여 일을 버티다가 결국 삼전도에서 청군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겨우 왕권은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때부터 조선은 청나라 속국으로 사대하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지속된다.

 

 

                                                              잠수교에서 해돋이를 기다리는 사람들

 

효종의 불벌도 당시의 조선의 능력으로 청나라를 친다는 것은 꿈과 희망 사항에 불과하였다. 조선의 당시 국력과 군사력으로 청나라를 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삼번의 난을 진압할 정도로 군사적으로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을 즈음이었기 때문이다. 노론측은 중국 청나라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조용히 사는 길만이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장기간 누릴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한반도가 일본.미국.러시아도 아닌 중국을 섬김으로써 한반도가 정체를 유지하면서 국가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조선이 처음부터 그토록 중국에 사대한 것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고 문화적으로도 가까운 중국을 섬기는 사대주의 만이 약소국 조선이 생존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숙종대의 환국정치는 왕권을 어느 정도는 강화하였지만 영조대의 탕평책과 정조대의 개혁의지는 노론 세력의 반발로 미완에 그치고 말았다. 결국 외척 세력인 안동 김씨 가문에 의한 세도정치 60년을 지내면서 조선 왕실은 철저하게 무너졌고 나라는 한 가문의 탐욕으로 절단이 나버렸다. 그러자 마지막을 장식할 주인공들이 나타났으니 바로 흥선과 민비, 고종이었다.그들은 각자 자신이 맡은 역활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수행하였고 그 결과 나라는 총 한 방 쏴 보지 못하고 일제에게 합병 당하고 말았으니 이 무슨 얄굿은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우리 민족의 진정한 불행은 그때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엄청난 시련과 고통을 주고 있는 현실이다.

 

 

                                                                                   한강 물오리떼

 

 

블로그에 저작년 1월부터 시작한 조선의 역사가 종료되고 지금은 일제 강압통치 시대가 전개되고 있다. 어느듯 1930년대로 일제시대도 서서히 종국을 향해 가고 있다. 이틀에 한 번씩 올린 것이 70회가 되었으니 대략 5개월 정도가 걸린 셈이다. 일제강압사를 기술하면서 느끼는 점은 우리 민족은 나라를 잃어야 정신을 차리는 민족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었고 그래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도 파벌을 극복하지 못했고 분열과 갈등으로 통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가 힘들었다. 당시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세계는 사회주의가 확산되면서 독립군이나 임시정부는 사회주의자가 침투하여 서로 파가 갈리어 갈등의 골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회주의는 이미 일제시대부터 한반도에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미국의 자본주의는 우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회주의자들의 전략.전술은 그때나 지금이나 노동자.농민을 선동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전술이다. 그들은 항상 힘이 없는 약자인 노동자.농민들을 혁명적인 전사로 이용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상대보다 힘이 약할 때는 기존 세력과 합작하면서 뒤로는 노동자.농민을 결집.조직하여 혁명적인 전사로 육성하고 노동자.농민의 권익을 대변하며 활동노선을 지도해 주고 노동자들의 파업과 농민들의 소작쟁의를 일으키도록 부추기며 폭동을 유도하면서 그들이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선동하였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볼세비키 혁명도 맑스.레닌의 사상을 근간으로 프롤레타리아 천국인 이상국가를 만들겠다는 감언이설에 노동자.농민 그리고 군인들까지 폭동에 가담하여 제정 러시아를 전복하였다. 그러나 폭도는 폭도 이상이 되지 못한 것이 일당 독재의 공산당이 전권을 잡고 전재산을 국유화하고 집단농장을 만들고 주민들을 교화시켜 공산당에만 충성하도록 사상무장을 강화하면서 혁명전사를 육성했지만 일당독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들이 말하는 노동자.농민들이 천국처럼 살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천국은 결코 오지 않았고 상부 공산당 핵심 당원들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며 백성들을 폭압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린 것에 불과하였다. 청조말 중국의 홍수전이 일으킨 태평천국의 난도 마찬가지로 그가 그리스도교를 신봉하여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는 천국같은 나라를 만들겠다며 일으킨 반란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 거짓말인 것이 홍수전이 남경에서 민간인으로 구성된 정부군과 영.불연합군에게 마지막으로 붕괴될 때 수백명의 홍수전 애첩들이 궁궐 연못에 빠져 죽었던 것이다. 결국 반란군의 우두머리가 되는 순간 인간은 절대권력을 누리고 싶고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욕심이 앞서게 되어 있다. 그래서 홍수전의 말에 속아 애굿은 민중들만 수없이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인류사에 교황이 지배하던 시대나 그 어떤 시대도 천국같은 시대는 오지 않았고 인간의 탐욕과 부패로 결국은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갈등 문제로 불거졌던 제주해군기지, 밀양사태, 평택미군기지 사건, 한화 영도조선소, 용산 철거민 사건 등을 보면 대부분 사회주의 전술을 그대로 채택하고 있다. 약자를 지원하고 연대하여 파업투쟁을 벌이고 종교단체까지 가세하여 민중을 선동한다. 약자를 위한 투쟁이라지만 멀쩡하게 보상도 끝나고 동의도 받아낸 문제도 사회적 이유로 만들어 정권을 흔들기에 안간힘을 쏟고 있는 것이다. 이 나락 사회적인 갈등의 골이 깊어질수록 북한에게는 이로움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고 국민들의 단합과 결집을 흩어놓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이 진정 약자를 위한 연대투쟁이지는 몰라도 우리 사회가 호주나 뉴질랜드처럼 외딴 섬도 아닌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풍전등화의 현실이다. 정부의 불통과 무능도 문제지만 이러한 갈등 관계를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는 인재들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최근 철도파업 해결처럼 갈등 조정을 위해서는 정부와 정치권이 나서야 하고 대화와 협력이 어느때보다도 필요한 시점이다. 유능하고 우수한 공무원이 진정한 목민정신으로 시민을 위하는 나라가 될 때 우리의 미래는 서광이 비칠 것이다. 한 예로 최근 서울시 버스중앙차로제, 심야버스제를 고안하고 기획한 교통국 관련 공무원들의 노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수많은 대화와 설득, 그리고 KT를 통해 심야시간대 서울시 지역별 시민통화기록통계 수집 등 다양한 자료와 통계를 바탕으로 노선을 정하고 택시업계를 설득하는 등 밤을 새우는 작업으로 성공적인 현안을 제안하여 해결하는 우수한 공무원들이기 때문이다. 금년도 상복도 터졌다고 하니 그런 공무원들에게는 특진과 아울러 누구나 부러워 할 정도의 푸짐한 포상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 

 

 

 

                                                                      물오리떼가 다른 오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래서 역사를 기술하면서 선조들의 치열한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그들 또한 지금의 우리들과 다르지 않았고 그 시대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도 이해가 갔다.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과연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가져본다.

 

지금 우리 사회가 보수와 진보로 갈리어 갈등을 빚고 있듯이 조선 시대 사대부들도 그들 나름대로 대의명분을 내걸고 논쟁과 투쟁을 벌였고 그것에 목숨까지도 걸었다. 그러나 지난 조선 시대는 그래도 유교적인 사회정신과 시대정신이나마 살아 있었던 시대였다. 삼사 간언들뿐 아니라 지방관이나 유생들도 왕에게 수시로 상소를 올려 스스럼 없이 직언을 하였고 그것이 유교적 윤리.도덕에 어긋나면 목숨을 걸고 자신의 주장이 관철될 때까지 집단으로 한양으로 상경하여 며칠 몇 날이고 궐문밖에서 호소하며 밤을 지샜다. 그러면 왕이 나가서 달래고 설득하여 그들을 돌려 보내곤 하거나 그들의 요구에 따라 정책적인 수정도 하곤했다. 또 그 시대는 왕이 신하와 독대는 금물이었다. 그것은 은밀한 밀약이 안고 있는 단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정치권은 언로는 막혀 있고 은밀한 독대와 밀약으로 정치적 뒷거래가 난무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의 현실을 살펴볼 때,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새해 벽두부터 이렇게 생각하고 상념에 빠진채 떠오를 아침해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