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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14 : 일제강점기 59 (일제의 전시체제와 식민지 지배정책 3)

 

 

한국의 역사 1,014 : 일제강점기 59 (일제의 전시체제와 식민지 지배정책 3)

 

 

           

 

 

 

일제의 식민지 경제정책의 변화와 민중의 생활 3

  

 

개량적 농민운동의 확산

 

민족개량주의자들이 합법적이고 개량적인 단체를 세우는 것을 도와 사회운동을 가로막는 안전판으로 활용했다. 지방자치제에 적극 호응해 온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일제의 농촌진흥운동에 발맞추어 농촌 계몽 운동에 적극 나섰다.

 

자치운동을 앞장서 이끌었던 최린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 신파는 1930년대 들어 천도교 청년당을 디딤돌로 삼아 조선농민사를 확대하여 농촌계몽.생활개선.소비조합운동을 벌이면서 농민들이 정치의식을 갖는 것을 막으려 했다. 조선농민사는 1933년 말 현재 143개 산하 조직과 4만 명 남짓한 조직원을 거느리고 있는 전국 규모의 농민단체로 성장했다. 그들은 일제가 폭압으로 수탈을 일삼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고 "도저히 이를 수 없는 정치적 주장보다 당면 이익 획득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조선농민사의 운동은 사회주의자가 이끌었던 혁명적 농민운동에서 농민을 떼어내 자신들의 영향권에 두려는 데 속셈이 있었다.

 

기독교 단체들도 농사강습회나 야간학습회를 열고 농사기술 개량. 생활 개선, 부업 장려 등을 지도했다. 이들은 토지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일이 아니라 농사 개량과 소작률을 조정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운동은 총독부가 벌였던 '자작농지 창설유지 사업'이나 '증견인물 양성' 정책과 비슷한 성격을 띠었다.

 

이 무렵 언론기관이 주도한 민족개량주의 운동은 농촌계몽운동으로 나타났다. <조선일보>가 벌인 '한글보급운동(1929~1934)과 <동아일보>가 벌인 '학생 브나로드운동(1931~1934)'이 그것인데, 이 가운데 '브나로드운동'이 규모가 컸다. <동아일보>는  '민중 속으로' 라는 뜻을 지닌 '브나로드운동'을 벌이면서 "힘써 배우자, 아는 것이 힘이다" 등의 구호를 내세웠다. 농민들이 열십히 배우고 절약한다면 잘 살 수 있으며 민족의 실력도 길러진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은 일제가 농촌진흥운동을 추진하면서 내세운 '자력갱생'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브나로드운동 지도부는 농민뿐만 아니라 비밀독서회 운동과 반제동맹 운동에 열심인 학생운동을 계몽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학생들은 "민중 속으로 가자" 라는 깃발을 내걸고 농촌으로 들어가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농촌계몽과 문맹퇴치운동을 하면서 개량주의자들의 의도를 벗어나기도 했다. 학생들은 문맹퇴치운동만 한 것이 아니라 농민들에게 현실인식과 민족의식을 불어넣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제는 1935년 무렵 이러한 개량적 운동마저도 불법이라면서 금지시켰다.

 

개량적인 운동마저도 금지되면서 민중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 가던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전시체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정책에 저항 없이 포섭되어 갔다. 

 

 

 

민중의 생활

 

일제는 경제공황으로 어려워진 일본의 독점자본이 조선에 진출하는 것을 돕고 조선을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만들려고 '농공병진' 정책을 추진했다. 조선 노동계급은 식민지 공업화정책에 따라 그 수가 빠르게 늘어났다. 공장노동자 수에 교통.통신.운수.임산.수산 분야의 노동자를 더한다면, 1940년대 노동자 수는 100만 명을 훨씬 넘어 200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인다.

 

1930~1945년 사이에 노동계급은 양에서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구성도 크게 바뀌었다. 1930년대 말에 이르면 화학.금속 등 중화학공업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 가운데 50% 가까이 되었다. 또 자본이 집중됨에 따라 이미 100명 넘게 고용하는 공장의 노동자 수는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었다.

 

이때 노동자들은 독점자본의 '합리화 정책' 속에서 말할 수 없이 열악한 노동조건을 참아 가면서 하루 12시간 넘게 일하고 저임금에 시달려야 했다. 조선노동자는 일본노동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을 받았으며, 여성노동자는 남성노동자가 받는 임금의 1/2정도밖에 받지 못하고 일해야 했다. 공장노동은 많은 규율과 폭력이 뒤따랐으며, 되풀이되는 규율로 노동자를 순종하는 도구로 길들였다. 조선노동자는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잦은 산업재해를 당해도, 일제와 자본가는 "조선노동자들이 주의력과 책임감이 없기 때문에 다치는 일이 잦다'고 몰아붙였다.

 

공장의 기계는 우리 피로 물들고

수리조합 봇돌은 내 눈물로 찬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이북명 <질소비료공장>

 

 

조선 인구 가운데 70~80%를 차지한 농민들도 일제의 농업정책과 공황탓으로 빠르게 몰락해 갔다. 농민들은 50%가 넘는 높은 소작료와 갖가지 조세, 엄청나게 오르는 비료값.농기구 가격을 참아내야만 했다. 대륙을 침략하려면 조선을 반드시 안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일제는 농촌의 넘쳐나는 인구를 만주로 이주시키거나 중화학공장이 많이 들어서 있는 북부 방으로 보내 노동력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대륙 침략에 필요한 식량 확보와 황국신민화를 목적으로 한 정책은 큰 효과를 거두기는 어려웠다. 자작농과 자소작농은 소작농으로, 소작농은 농업노동자로 몰락하는 일이 흔했다. 거꾸로 몇몇 지주들은 농민의 몰락을 이용해 토지를 늘려갔다.

 

가난한 농민들은 정월부터 몸이 올 때까지는 식량이 다 떨어지는 '춘궁기'를 겪으면서 더욱 배를 곯았다. 뽕나무 밭에 비료로 뿌린 콩깻묵을 몰래 파서 배를 채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산의 백토를 긁어먹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풀뿌리를 캐다가 굶주림에 지쳐 쓰러지기도 했다.

 

농촌을 떠난 농민들은 새로운 노동시장을 찿아 도시로 몰려들었지만 공장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으며 값싼 일자리마저 찿기 어려웠다. 대부분 화전민이 되거나 도시 외곽에 머물면서 실업자나 날품팔이꾼 등 도시빈민이 되었다. 날품팔이나 지게품팔이, 공사장 인부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토막민들이 사는 집은 거적으로 벽을 만들어 두르고 지붕에는 양철 조각을 덮어 돌로 눌렀으며 방바닥은 맨 흙에 거적으로 까는 것이 고작이었다. 일제는 토막민이 도시 미관과 위생을 해친단 이유를 내세워 그들을 도시 밖으로 일정한 장소로 옮기는 대책을 세웠을 뿐이었다.

 

서울을 비롯한 도시는 한쪽에서는 자동차가 다니고 전화교환수, 미용사 등 새로운 직업들과 백화점 등 근대적 건축물이 들어섰지만 다른 쪽에서는 그날 벌어 그날 먹기도 어려운 빈민이 공존하는 모숨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라 밖으로 이주하는 조선인도 크게 늘어났다. 1930년대 만주에서 1백만 명, 연해주에 50만 명의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해마다 10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일본으로 건너갔다.